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20회 아벨의 후예 Ch 1. 섬에서 일어난 참극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1.13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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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우벤에게도 격렬한 고통은 느껴졌다. 물리적인 작용 같지 않았다. 그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의 생기를 강탈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주변 사람들과는 달리, 그의 몸은 비교적 온전했다. 그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부부를 찾았다. 고통을 겨우 참아내면서 부부가 꽃 구경을 하러 떠난 방향을 뒤졌다. 그러나 겨우 부부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바짝 말라 죽은 미라 두 기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끄으으윽.”
한편 고통은 계속해서 격렬해져 갔다. 레우벤은 혹시나 아이의 상태는 괜찮을까 확인해보았다. 놀랍게도 아이는 평온했다. 그는 혹시나 갓난아이에게는 생기 흡수가 닿지 않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추후 확인해본 바에 의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아기는 단순히 생기 흡수를 막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섬 근처에서 인간들의 생명력을 갈취하던 의문의 괴물에 저항하여 도리어 역으로 생명력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증거로 레우벤 자신은 아기와 접촉함으로써 빼앗겼던 기력이 빠르게 원상 복구되고 있었다.
흡수는 반나절 가까이나 지속되었다. 레우벤은 죽기 살기로 아기 곁에 꼭 붙어서 버텼다. 얼마나 오래 웅크리고 있었을까. 섬 전체를 덮던 소름 돋는 비명이 멎었다. 생기를 빨아들이는 섬뜩한 감각도 사라졌다. 지독한 한기와 공포감도 연기처럼 흩어졌다. 여느 때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날씨가 느껴졌다. 레우벤은 잠시 털썩 주저앉았다. 무언가가 자신의 몸과 영을 휘저은 기분이었다.
‘잘 기억이 안 나는군.’
생기를 흡수당하던 중 그의 의식은 반쯤 흐려져 있었다. 몸뿐 아니라 뇌의 에너지까지 영향을 받으면서 10시간 이상을 버텼으니 상당한 무리가 갈 만했다. 그 여파로 과거 경험과 정체성에 관련된 기억 상당량을 잃었다. 조금 전에 벌어졌던 사건은 기억났으나 섬에 오기 전까지의 기억은 베일에 싸인 양 흐릿했다.
그는 차를 타고 도심으로 나가보았다. 거리마다 시체가 즐비해 있었고 날짐승들은 그 고기를 뜯어 먹고 있었다. 나중에는 심지어 새들마저 고기로부터 손을 뗐다. 시체에 아무런 생기가 남지 않아서 그런지 입맛을 버린 모양이었다. 도시 전역에 펼쳐진 황량한 죽음의 광경은 도저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섬뜩했다. 몇 구역을 더 돌아보고 나서야 레우벤은 깨달았다. 섬 전체에서 생존자는 자신과 아기뿐임을. 지독한 고독감, 공허감,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가 살아남은 건 역시 이 아기 덕분이겠지.’
만약 재난의 순간에 부모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면 그 부모는 살고 자신은 꼼짝없이 죽었으리라.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어쩌면 자신이 아기의 부모님을 죽인 셈이나 다름없는지도 모른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지만 마음이 괴로웠다.
‘나는 내 기억을 잃고 너는 네 부모를 잃었구나.’
아기는 여전히 새근새근 평온히 잠들어 있었다. 부모를 앗아갔다는 죄책감에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든 레우벤은 아기를 끝까지 보호하고 책임지기로 하였다.
*
“그 이후로 몇 년간 섬에 갇혀 지냈죠.”
사건이 있던 그 날 이후로 레우벤은 외부 세계와 단절되고 말았다. 섬 전체가 어떤 기술력에 의해 봉쇄당했기 때문이었다. 특수 필드에 의해 고성능 전자 장비들이 기능을 상실했다. 결계로 인해 물리적인 왕래도 차단되었다. 외부에서는 섬의 생존자를 따로 색출하지도 않은 채 무소식으로 내버려 두었다.
다행히 곳곳에 식량과 자원과 가택이 널려있었기에 의식주를 마련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죽임 당한 것은 사람들뿐이라 자연 생태계도 보전되었다. 시신의 부패 또한 의외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데, 아마도 생명력을 빼앗길 때 시신 전체가 유기체로서의 속성을 잃은 탓으로 보였다. 처음에야 약간 을씨년스러움이 임했지만 의외로 자연계 스스로 자정 작용과 복구 작용을 빠르게 일으켰다. 또한 섬 전체에 위험 요소가 될 생물군도 없었다.
그러나 어쨌건 사람이 사라지고 외부의 발길이 끊기면서 섬의 문명 지대는 몇 년 만에 자연 상태의 모습으로 회귀하였다. 레우벤은 옛 기억이 회복되기를, 그리고 섬의 봉쇄가 풀리기를 기다리며 자연인이 된 마음가짐으로 살아갔다. 열심히 생존과 생활 환경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고 그런대로 그의 노력들은 결실을 거두었다.
“5년이 지나서야 섬의 봉인이 겨우 풀렸지요. 하지만 그날의 흉흉한 소문이 생생히 남아서 그런지 누구도 저주받은 섬에 발을 디디려 하지 않았죠. 그래서 나와 딸 아이는 오랫동안 사회와 분리된 채 생활했답니다.”
증언을 들은 아나스타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도 전에 하와이에서의 사건을 조사한 바 있었다. 역사책에는 공개적으로 명시되어있지 않지만, 초인 사회는 그날의 학살을 벌인 주범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쌍둥이 생체병기,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소위 아키라와 헥터라고 불리던 실험체. 그녀들을 제작한 실험실이 당시 하와이 근방 해저 요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벨리아의 후속작이었던 아키라와 헥터는 몇몇 2세대 초인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탐욕적이었던 그 초인 무리는 자신들 손으로 쉽게 조종할 수 있는 3대째 위버멘쉬를 만들려고 하였다. 통제 불능이었던 이브와는 다르게 꼭두각시처럼 부려 먹을 작정이었다. 더불어 그자들은 지능뿐 아니라 육체 또한 궁극적인 생체병기를 원했다.
‘스스로 신을 제작하려 한 인류의 탐욕 탓에 태어난 불행한 생명체들.’
레우벤이 증언은 그날은 마침 두 실험체가 시범 가동되던 날이었다. 안타깝게도 실험체는 예측을 벗어나 폭주를 일으켰다. 두 무시무시한 괴물은 인지의 한계를 뛰어넘어 근방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육체 에너지와 정신 에너지를 죄다 흡수해버렸다. 연구원들과 실험 책임자마저 목숨을 잃었다. 더 큰 문제는 섬에 살던 민간인들이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일거에 몰살당했다. 가까스로 외부 세력이 개입해 실험체들을 바닷속에 봉인하는 데 성공했지만, 봉쇄 과정에서 섬 전체가 무인도로 변한 채 내팽개쳐졌다.
‘그런데 당시 아기에 불과했던 레이디는 왜 멀쩡했을까?’
아나스타샤는 추론해보았다. 어쩌면 레이디도 카테고리 분류 불가의 초인인 만큼 압도적으로 우수한 생명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니 두 생체병기의 생명 흡수를 견디는 것을 넘어 역으로 탈취까지 가능했겠지. 아나스타샤는 레우벤의 증언을 통해 다시금 증명된 다섯 초인의 강대함에 소스라치게 떨었다.
‘과연 내가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나마 다섯 중에서 대화가 통할 상대는 그녀밖에 없었다.
‘나머지 넷은 답이 없어.’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평화의 사도, 극단적 이슬람 종말론을 표방하면서 세계 분열을 유도하려는 지하드의 선두주자, 광기와 사탄숭배에 찌든 세력의 최후의 후예, 그리고 우주 규모의 인류 제국을 지배하는 세계 단일정부 수장까지, 하나같이 에드레이가 지정한 종말론적 블랙리스트 가운데 으뜸들이었다.
‘레이디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나마 희망을 한줄기 찾자면, 그녀에게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손수 후히 대접하고 보살핀 전적이 있었다. 게다가 비록 지금의 레우벤이 그녀에게 미칠 영향력이 미미하다고는 하지만 둘의 유대감을 생각한다면 가망성이 있었다. 그를 경유한다면 변화를 유발할 틈새 정도는 노릴 수 있지 않을까?
“레우벤 씨 당신의 종교관은 어떠한가요?”
“이 몸 말입니까?”
“네, 현재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둘로 나뉘어있잖습니까. 본토에 남은 위버멘쉬의 숭배자들의 후손들과 축출된 메시아닉 유대인들로 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스라엘 본토의 위버멘쉬 숭배자들도 현재는 각기 분열되어 있었다. 3대째는 인류에게 거대한 풍요와 번영을 안겨주었지만, 이스라엘은 그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국제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면치 못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인류연합의 대표는 진정한 구세주가 아니므로 장차 올 새로운 초인들의 왕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도 생겨났다. 불행히도 고향에서 쫓겨난 메시아닉 유대인들의 의견이 옳았음을 인정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레우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중도에 가깝습니다. 나는 현세를 주름잡는 위대한 영웅을 메시아라고 단정 짓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래전의 그 예슈아가 예언 속의 메시아라고 생각하자니 그것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레우벤은 딱히 어느 한쪽을 격렬히 미워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유대교 신앙조차 아예 없는 무신론자도 아니었다. 그도 나름대로 메시아를 찾기를 원하였으나 뚜렷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해 늘 혼란스러워했다.
아나스타샤는 이 일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 조심스러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슈아께서 메시아이신 명확한 증거를 알려주어야 할까? 설득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역효과만 생길지도 모른다. 고민 끝에 아나스타샤는 한 번 더 신중히 접근해보았다. 그녀는 레우벤과 다음 만남의 약속을 잡았다.
“오늘 대화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나도 그러길 바랍니다, 아나스타샤 양.”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 아나스타샤는 레우벤에게 옛 아내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레우벤은 아련한 표정으로 그 시절의 일을 회상했다.
“딸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나는 마침내 섬을 탈출해 세상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이는 세계라는 무대에서 뛰놀고자 나를 떠나 친구들을 만났고 나는 옛 가족을 찾기 위해 이스라엘 땅을 다시 밟았죠.”
당시는 이미 7년 간의 공백기 사이에 온갖 재앙과 사건들이 이스라엘을 휩쓸고 지나간 이후인지라 아내의 자취를 찾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더욱이 그때는 메시아닉 유대인을 향한 핍박과 축출 요청이 최고조에 달했던 터라 온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가까스로 레우벤은 아내의 흔적을 찾긴 했으나 차라리 못 찾는 편이 나을뻔했다는 생각이 드는 결말을 맞이하였다.
“내가 발견하기 수개월 전에 이미 하늘나라로 갔더군요.”
“…….”
“아내는 내가 실종되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 이후 재혼했는데, 하필이면 새 남편이 메시아닉 유대인을 광신적으로 미워하던 자였죠. 레아는 예슈아 신앙을 받아들여 초신자가 되었는데 그녀의 개종에 분개한 새 남편이 분을 못 이기고 아내를 심하게 폭행하여 끝내 사망에 이르게 하고 말았답니다.”
레우벤이 소문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아내에게는 새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하나 있었다. 새 남편이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하자 레아는 황급히 달아나 갓난아기였던 딸을 이웃에게 맡겼다. 얼마 후 그녀는 폭행 치사로 사망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아이의 행방은 비밀리에 부쳐졌다.
“그러면 전 부인의 아이는 어디에 있죠?”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살아는 있어야 할 텐데 그마저도 확신이 안 드는군요.”
중년 신사의 얼굴이 회한으로 물들어갔다. 아나스타샤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에 가슴 한쪽이 쓰려옴을 느꼈다. 위로의 재주가 부족한 그녀는 말없이 신사의 손을 살며시 맞잡아줌으로써 애도의 감정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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