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86회 아벨의 후예 Ch 15. 의사, 유모, 붉은악마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6.13 | 회차평점 ![]() |
Chapter 15. Intergalactic: 의사, 유모, 붉은 악마
우주선 인터갤럭틱 호는 지구 기준으로 12월 후순에 출항하였다.
장 반경 300k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 인류의 온갖 최첨단 기술이 모두 집적된 최신 시설, 여기에 더해 인간과 이종족과 기계를 아우르는 다양한 구성원로 이루어진 대원들까지, 인터갤럭틱 호의 위용은 상당했다. 비록 전투용은 아니어도 인류연합 측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한 회심의 카드였다.
수억의 은하 속에 포함된 테라포밍 행성들 안에서 치열한 생존 투쟁을 벌일 우주 인류, 그들의 생사를 좌우할 강력한 히든카드가 인터갤럭틱 호 안에 있었다. 그렇기에 우주선은 천하무적의 방어력을 갖도록 설계되어야만 했다.
우주선 내에는 별의별 호화 시설들도 있었다. 평생 그 안에서만 지내도 생활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최첨단 연구 시설이 즐비했으며 다수의 준-영구 동력원이 탑재되었고 차원과 공간 너머를 누빌 항법 장치와 초광역 통신 시스템도 있었다.
외적으로는 특수 장갑 덕에 열과 압력을 무제한으로 견디는 것은 물론이고 물리법칙이 불안정한 특수 아공간이나 상위 차원도 거뜬히 버티며 누빌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자동 재생 시스템도 탑재되어있어 무제한 복원이 가능했고 자체적으로 행성급의 물체를 생성해내는 유사 창조기능도 담겼다.
탑승 인원의 대부분은 인공지능과 인공생명체였다. 사람의 경우 모두 지구 시민 출신이었다. 굳이 왜 그렇게 정해졌을까? 인구수가 압도적인 Upol이라면 훌륭한 인재들도 훨씬 많을 텐데. 굳이 지구 인류 출신만을 채용한 이유가 있었다. 인터갤럭틱 호에 탑승한 최고 중요 인물인 강윤혁이 그 원인이었다.
카이젤은 동생이 몇 년 간 유발하였던 그 충격적인 역사를 생생히 기억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고차원 인지 능력을 통해 감지한, 동생 안에 담긴 존재의 거대한 위압감도 잊지 않았다. 이런 경각심 때문에 표식을 지닌 우주 인류와 동생의 접촉은 썩 탐탁지 않게 느껴졌다. 주민을 마주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더라도 상시 항해 인원 중에는 변수를 두지 않으려 했다.
윤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중얼거렸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 걸릴까?”
인터갤럭틱 호에는 자체적인 타임필드 생성 기능이 있었다. 즉 필요에 따라 우주선 내부에서의 시간이 바깥보다 훨씬 느리거나 빠르게 흐르게끔 조정이 가능했다. 아마 시간의 양을 늘려야 할 일이 더 많겠지.
‘지루하겠구나.’
하필이면 이제는 불사신이 되어버려서 마음대로 늙지도 못하게 되었다. 하기야 아마 다른 탑승자들도 승선 때 피코머신을 주입받을 테니 자신과 똑같이 안 늙겠지. 적어도 이 안에서 선원 노릇을 하는 동안에는. 즉 하염없이 긴 나날을 이곳에서 보내게 될 가능성도 있다.
‘얼마나 긴 시간을 이 안에서 보내야 할까?’
진의 말대로라면 한 인간이 타임필드 안에서 한 번에 연속적으로 견딜 수 있는 시간의 최대치는 길어야 200년 남짓하다던데. 그 이상 지내다보면 권태감에 매몰된다던가. 그렇다면 200년 이하의 세월이라고 봐도 되려나?
‘아니지, 간헐적으로 발동하면 되잖아.’
그렇게 되면 200년보다 훨씬 더 길게 여행할 수도 있겠군. 왠지 속아서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루디아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함을 잠재우고자 윤혁은 몸 단련 겸 맨손 운동에 정진하였다.
{강윤혁님, 치료시설 방문 시간입니다.}
그때 인공지능 하나가 다가왔다.
“아, 네.”
인터갤럭틱 호에 머무르는 동안에 주어진 하루 일정 패턴은 비교적 획일적이고 반복적이며 단순했다. 열두 시간 동안은 의료진과 같이 지내고 나머지 열두 시간은 숙소와 편의시설에서 자유시간을 보낸다. 루디아는 언제든지 필요할 때면 그와 접촉할 수 있도록 허가되었다.
‘치료시설이라. 오늘이 첫날이네.’
엄밀히 말하면 치료시설이 아니라 연구 시설이라고 말해야 옳다. 애초에 저 의료진은 인류연합 측에서 파견된 자들, 강윤혁의 신체, 특별히 알트루즘과 피코머신의 작동 기전을 연구하도록 파견된 사람들이니까.
‘불편하네. 그래도 이왕 오랫동안 같이 지낼 사람이니 친해져야겠지?’
의료진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아주 조금은 걱정되었다. 설마 하니 비인도적인 처우를 하지는 않겠지. 아무리 실험체 신세라지만 귀중한 신분이니 막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임상시험은 조금 부담되었다.
연구 시설에 입장한 윤혁은 사복 대신 얇은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실내 기온과 습도는 딱 적절했기에 한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로봇들이 다가와 각종 진단 검사를 수행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굳이 몸을 찌를 필요도 없었다. 신체 일부분을 ‘정보 변환 텔레포트 기법’으로 복제해내는 기술이 있는 덕택에 피든 골수든 조직이든 몸에 기스 하나 내지 않고도 뽑는 일이 허락되었다.
‘그야말로 최첨단 의료네. 하긴 형이 빵빵하게 지원했겠지.’
어쩐 일인지 인간 의료인은 한참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메디컬로이드 로봇이 탁월하다지만 그래도 인간 대 인간의 접촉을 통한 유대감도 중요하건만. 미래식 의료가 너무도 삭막하다는 감상이 들던 차였다. 그때.
{닥터께서 진료 차 오실 예정입니다. 오늘은 간단한 인사만 나눌 겁니다.}
메디컬로이드가 의사와의 만남을 예고해주었다.
‘과연 괜찮은 사람이려나? 신뢰할만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네.’
윤혁이 고민하던 차에 다시 문이 열렸다. 가운을 입고 있던 그 박사는 나노 조립형 헬멧을 해체하고는 맨 얼굴을 드러냈다. 그 얼굴을 본 윤혁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와우!”
윤혁에게는 학창 시절부터 눈에 밴 익숙한 얼굴이었다. 부드럽고 지적인 인상의 갈색머리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윤혁아, 반갑다. 오랜만이지.”
벌어진 턱을 겨우 다문 윤혁은 눈을 비비며 다시 상대를 확인했다.
“태헌 선배?”
“안녕.”
“우와 정말 선배 맞아요? 아, 의사 선생님이라고 해야 하나?”
기태헌.
수년 만에 보는 지인.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너무 오랜만인지라 윤혁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버벅였다. 수년간 엘리트 코스를 마치고 탁월한 성과를 인정받아 첨단 시설의 연구소장이 된 태헌은 이전보다 지성미와 노련함이 예리해졌다. 이제 확연히 전문가 티가 났다.
‘그나저나 인터갤럭틱 호에 탑승할 정도면 최소 국제적인 실력자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실제로 태헌은 졸업 후 한국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의학 연구소에서 일하며 탁월한 천재성을 인정받았고 작년부터는 연구소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래도 불과 4년만에 이 자리까지, 역시 대단하네.’
도제식 수련에 의존하던 과거와는 달리 가상 현실, 시뮬레이션 우주, 자동 학습, 타임필드, 사념파 공명 등의 기술마저 존재하는 시대이니, 자질만 있다면 단기간에 높은 경지에 올라도 이상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태헌은 학창 시절부터 항상 수석을 놓치지 않던 수재이기도 했고 특별히 창의력과 연구 역량에서 우수성을 보여왔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윤혁이었기에 새삼스레 생각지 않았다.
‘하기야 그동안은 비상식적인 인외(人外)급 괴물들만 보아와서 규격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지. 태헌 선배 정도면 나름 촉망받는 영재인데도 이젠 감흥이 없네.’
초인들과 얽힌 자기 인생에 대한 자괴감이 아주 잠시 스쳤다.
아무튼 친한 사람이 연구진 중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음이 든든하다고 해야 할까?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난 이래로 태헌은 늘 윤혁에게 친절하고 인심이 후했다. 밥도 자주 사 주었고 별것 아닌 일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오락이건 운동이건 잘 맞았다. 전에는 저런 잘난 사람이 왜 자신에게 잘해주나 궁금하기도 했었다. 나중에서야 태헌의 원래 성정이 저렇다는 것을 알게 됐었지만.
“선배……, 아, 선생님이라 불러야 하려나요.”
“그냥 형이라고 불러.”
태헌은 편안히 웃으며 상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알았어요, 태헌이형.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참여하시게 된 거예요?”
“나뿐이 아니야. 지구 출신 중 상위권 의학 연구원은 죄다 소집되었더라고. 아니지 의료진만이 아닐걸? 내가 알기로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전부 다 이 우주선의 대원으로 선발되었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윤혁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무슨 의도지? 지구의 인재들을 모조리 비워버린다고? 아무리 귀중한 연구용 우주선이라지만 그렇게까지 인적 자원 낭비를 의도적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굳이 이제 지구 인류는 필요 없다, 뭐 이런 뜻인가?’
어차피 빈 자리는 더 우수한 우주 인류로 가득 채워놓을 테니 소수 민족에게는 별 미련이 없다는 건가? 그나마 지구 출신 중 최상위 엘리트들은 아예 버리기는 계륵이라 아주 조금은 아까운 마음이 드니까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이겠지. 과연 지극히 합리주의적인 카이젤다운 처리 방식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너하고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 보니 위에서 대면하는 역할을 줬어.”
“그렇겠네요.”
“그나저나 처음에는 꽤 놀랐어. 전 인류 차원에서 가장 철저히 보호해야 할 핵심 인사 겸 중요 연구 자료라길래 도대체 누군가 했는데, 설마 그게 내가 아는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기 그게……, 말하자면 복잡한데요.”
그 질문을 받자마자 즉시 보이지 않는 힘이 뇌리로 스멀스멀 침투하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 경험한 진의 현자의 눈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마인드컨트롤 계열 이능력이었다. 통일시스템이었다. 윤혁은 본능적으로 외부자인 태헌 앞에서 말을 아껴야 함을 알아차렸다.
‘재혁이 형의 직접 조종이 아니다. 통일시스템 본체로부터 마인드컨트롤 작용이 자동으로 발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형과 커버넌트를 맺어 정신 면역이라는 특혜를 소유한 윤혁조차 이런 자동 발동 조종에는 면역이 없었다. 어느 정도는 통일시스템에도 자율권이 있는 듯했다.
“미안해요, 태헌이형.”
“음, 그래. 말 못 할 사연이 있겠지. 아무튼 잘 부탁한다. 앞으로 연구에 참여할 기회가 많을 텐데 네게 별 탈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할게. 내 권한이 그리 크진 않겠지만.”
태헌의 말대로 태헌 자신은 어떤 필수불가결의 대체 불가 인원이라기보다는 그저 소통용 얼굴 마담일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지금처럼 친근감을 내세워 환자인 윤혁을 심리적으로 안심시키는 역할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연구의 핵심 지휘는 초인들과 시스템이 담당할 테지. 윤혁은 태헌에게 현실적으로 그리 많은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친한 사람이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이 해소되었다.
“고마워요.”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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