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06회 [2부] 27화. 사랑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3.21 | 회차평점 ![]() |
마침 시간은 한낮, 날이 막 더워지려던 차였다.
알렉시스는 눈치 빠르게 자발적으로 일손을 자처했다.
“제가 같이 도와드릴게요.”
“어머, 그래주시면 고맙죠.”
라하토브는 귀농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은 밭 가꾸기에 미숙했다.
그렇기에 한 명이라도 거들 손이 있다는 점은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알렉시스도 궂은 일을 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미숙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도 하나보다는 둘이 나은 법이다.
“주일에는 절대 일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새 위반하고 말았네요.”
알렉시스는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 안식의 날을 일요일로 삼는 건 알렉시스의 경우이고, 라하토브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기는 했다.
아마도 그녀가 자란 배경에서는 원래대로 토요일이 안식의 날일 테니까.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오늘은 그저 보통의 주중과 다를 바 없었다.
“일이라고 의식하지 말고 하나의 취미 겸 소일거리라고 생각하시면 되죠.”
라하토브는 별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제법 손은 많이 쓰이긴 하지만, 이렇게 소소한 일에 맘 편히 힘을 쏟아붓다보면 오히려 복잡한 생각이 편안하게 정리되거든요.”
“그렇군요. 하긴 몸을 가만히 둔다고 해서 사고 활동까지 중지되는 건 아니네요. 어떤 의미에서는 고뇌에 찬 사고 활동이야말로 안식과 거리가 먼 행동이고요.”
알렉시스는 라하토브에게서 들은 인생 팁을 되새기며 자조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쉴 때도 늘 생각은 내일 일에 대한 걱정에 집중되어 있었다.
다음 날 있을 회의, 프로젝트, 공부해야 할 자료, 써야 할 글 등등.
예배 시간에는 의지적으로 그런 생각을 억제한다고는 하지만, 막상 주일의 나머지 시간에는 다시금 생각의 연쇄 속으로 들어가다보니 생각을 통제하는 것마저도 쉼이라기보다는 수행의 연장선이 되고 말았다.
그런 바쁘고 고된 황태자로서의 삶에 작은 평안을 선물하려면 농장 일로 생각을 잠시 빼놓는 편이 더 효율적이지도 모르지.
“지난 주에 이사 오셨다면, 이 포도원은 원래 다른 분이 가꾸던 것이겠군요.”
“맞아요. 알고 지내는 가까운 이웃의 가족에게서 샀어요.”
“아하.”
“오빠가 그간 저축해둔 자금이 어느 정도는 있었거든요. 저희 남매 각각 이전에 프리랜서로 하던 일들이 있긴 했는데 이번 기회에 정리해두고 내려왔어요.”
라하토브는 최근 몇 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간략히 들려주었다.
아주 특별하다고 말할 것은 없는, 보통의 굴곡을 가진 인생 여정이었다.
지극히 소시민스러운 삶, 알렉시스와 같은 극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괜찮은 선택이네요.”
“귀농 말인가요? 아니면 이 밭을 말씀하시는지?”
“둘 다요.”
“저도 만족스럽게 생각해요.”
알렉시스는 산달폰이 나름 현명하면서도 사려 깊은 선택을 했노라고 생각했다.
얼굴을 통해 사람을 구분하는 기능에 장애가 있는 누이.
아무래도 많은 이들과 얽혀서 살아가는 삶에는 상당한 불편이 따르겠지.
곁에서 항상 도와줄 이가 많지도 않고 사용인들을 부릴만한 여건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족이라고는 산달폰 하나뿐이고 그도 몸은 하나뿐이다.
그러니 피곤하게 섞여 사는 것보다는 조용하고 맑은 곳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조용히 머리를 식히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자주 찾아뵈도 될까요?”
알렉시스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자신이 문득 귀찮게 다가가는 것처럼 받아들여진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다행히도 그것은 기우였다.
“좋아요. 알렉 당신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언제든 제 이름을 불러주시면 멀리서도 알아들을 수 있을 거예요.”
“기억에 새겨주시다니 참 영광이네요.”
“워낙 부드럽고 좋은 목소리라서요.”
알렉시스는 다시금 살짝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은 한참의 가지치기 작업을 잠시 정리한 뒤 휴식을 취했다.
그늘에 나란히 앉은 둘은 물을 마시며 땀을 닦아내었다.
“벌써 초여름이네요.”
라하토브의 더위 한탄에 알렉시스는 공감하듯 끄덕였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지내다 보니 날씨 변화에 둔감한 편이었다.
머무르는 좌표 또한 북반구부터 남반구까지, 동쪽 끝에서부터 서쪽 끝까지 시시각각 옮겨졌기에 특정 지역의 기후 패턴에 지배를 받지 않았다.
야외에서, 그리고 한 지역에서 머무르는 보통의 사람들은 다르겠지.
“더 가볍게 입고 올 걸 그랬네요.”
알렉시스는 반팔 티셔츠 위로 걸쳐 입은 겉옷을 벗어 허리에 걸쳤다.
일하느라 땀에 잔뜩 젖은 그의 옷은 탄탄한 상체 근육 위에 들러붙은 상태였다.
누가 보아도 전문적으로 단련한 전사나 운동 선수를 떠올릴 체격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벌레에 물리거나 잔가지에 생채기를 입었겠죠.”
“하긴 그러네요.”
그때 작은 강아지 다섯 마리가 달려와 라하토브의 품에 안겼다.
각기 다른 견종으로 그리 고풍스러운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녀는 강아지들을 하나 하나 쓰다듬어주었다.
알렉시스도 조심스럽게 그들의 복슬복슬한 털 위로 손을 뻗으려 했으나 그것들은 겁이 많은지 낯선 커다란 사내를 경계하며 몸을 움츠렸다.
멈칫한 뒤 손을 뒤로 거둔 알렉시스는 약하게 시무룩해진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라하토브는 웃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천천히 갈색 강아지 위로 얹어주었다.
“이전에 키웠던 아이들인가요?”
“그럴 리가요. 이곳에 와서 새로 친해진 친구들이랍니다.”
“친화력이 대단하시네요. 순식간에 길들이시다니.”
“동물이나 식물들하고는 합이 잘 맞는 편이라서요.”
“부럽네요.”
저는 딱딱한 기계들이랑만 합이 잘 맞는데.
알렉시스는 무심코 재미없는 농담을 내뱉으려다가 다시 주워담았다.
괜한 현실감과 자조감에 아주 조금은 슬픈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지내시면서 불편하시는 점은 없으시고요?”
알렉시스의 질문에 라하토브가 고개를 저었다.
“어려서부터 이곳 저곳 옮겨다니다 보니 적응하는 속도는 나쁘지 않아요. 당분간은 여기서 오래 눌러 앉을 생각이랍니다.”
“12년 전에는 중앙 컨티넌트 쪽에서 뵜었는데, 지난 번에는 북동부 쪽이었고, 그 사이에도 이주를 몇 번 하신 모양이군요.”
세계가 하나가 되면서 국경이라는 개념이 실상 행정 구역 경계 정도로 완화되었고 그로 인해 민족의 섞임과 대규모 이주가 활성화된지 제법 되었다.
사실 작년에 마무리지었던 이터널클렌징도 그러한 대이주의 시대 때 생길 큰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아울러 최근 시작한 프로젝트들도 이 시류를 지혜롭게 활용하여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여하튼 이러한 이주의 활성화로 인해 세계는 샐러드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민족들과 언어들과 문화들이 아직은 분획되어 혼합되어 있으나 그 모든 것이 지역 경계의 영향을 덜 받은 채 곳곳에 혼합물로 산재하는 상태.
그러다 보니 같은 지역 안에서도 온갖 출신지와 민족성의 무리들이 섞여 지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욱이 최근 태어난 10대 이하 세대들 가운데는 혼혈의 비중이 이전의 10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라하토브와 산달폰 오누이도 그런 시류 속에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방랑하는 이민자로서 발자취를 남겨 왔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속한 무리에는 어떤 정해진 보금자리나 터전이 없으니 남들과 섞이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아버지는 북부 컨티넌트, 어머니는 중앙 컨티넌트 출신이세요. 두 분 다 디아스포라 출신인지라 각자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소속감을 갖진 못하셨죠.”
“북부와 중앙이라면……, 전쟁 당시에는 커뮤니스트 연방령에 속했겠군요.”
“네, 제가 다섯 살 무렵이었던 시절의 일이라 기억은 잘 나지 않아요.”
라하토브의 부모님은 연방령 안에서 거하는 동안에 소수 민족으로서 차별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였다고 했다.
운이 좋게 전쟁 당시에는 화액에 휘말리지는 않았지만, 거할 곳이 없었기에 실상 난민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행히 전후 세계가 빠르게 수습되면서 그들도 일거리를 찾았고 최소한의 끼니 해결의 가능성은 열리긴 했다.
그러나 두 분은 산달폰이 열다섯 살, 라하토브가 열한 살이 되던 때 돌아가셨다.
그 이후로는 산달폰이 소년 가장이 되어 동생을 책임지게 되었다.
두 아이가 생존하기에는 버거운 세상이었지만, 영특하고 머리가 기민한 산달폰은 기어코 악착 같은 근성과 꾀로 나름의 살 길을 열어내었다.
덕분에 라하토브는 10대 시절, 나름 끼니 굶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하였다.
빈말로도 결코 편안했노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항상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죠.”
라하토브의 부모님은 회한과 슬픔으로 점철된 기나긴 역사를 회고하곤 하셨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한(恨)의 정서요 쓴 뿌리였다.
라하토브 본인은 그 한탄을 직접 듣진 못했지만 산달폰은 달랐다.
그는 모든 아픔의 기억들을 부모님으로부터 전승받았고 자신도 그 이야기들을 동생에게 전해주었다.
비록 아픔일지라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음을 알기에.
그래서 그들은 되새기고 되새겼다.
다시는 그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노라고.
이러한 다짐은 비단 오누이만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력을 통해서 비극을 영원히 예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계시된 미래를 배운 알렉시스는 앞날에 드리워진 슬픈 그림의 일부를 알았다.
그러나 그는 차마 그것을 라하토브 앞에서 꺼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아픔이나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브리튼 밖에서는 당신의 골육들에게 어려운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는 사실은 저도 들었어요.”
알렉시스의 걱정 섞인 어투에 라하토브는 옅은 미소로 대답했다.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라 감사할 따름이죠. 국가가 공식적으로 힘을 휘둘러 우리들을 괴롭게 만들지는 않으니까요.”
“그 고통들은 당연한 처우가 아니었습니다.”
알렉시스의 위로 아닌 위로에 라하토브는 위안이 되었는지 표정이 편안해졌다.
“절대로 그런 불의한 고통을 당연한 운명으로 여기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생각해보면 이러한 차별과 악한 대우는 인류에게는 기본 값이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어느 국가나 시스템이나 민족이건 똑같았다.
그들은 떠돌이들을 증오했고 이유 없이 혐오했으며 차별했다.
특히나 육각형 별의 낙인이 찍힌 그들을 향해서는 더욱더 가혹했다.
오히려 크리스토프 대제 이후의 브리튼 제국은 지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대제의 후손들은 그 이변을 아예 세상의 새로운 질서로 새기기 위해 고분고투하였고 그 헌신은 지금의 알렉시스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빚어갈 세상에서는 다시는 그런 역사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할 거예요.’
알렉시스 본인도 그것이 무리한 장담임을 인지하였다.
그는 감히 자신 이후의 시대를 올바로 책임질 수 없다.
아니, 심지어 자신의 시대조차도 완벽하게는 장담치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힘과 의지가 닿는 선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들도 이 땅 위에서 마음을 붙이지 못한 채 유리하는 외톨이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브리튼은 그들을 품 안에 받아주려는 노력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그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민족들을 설득하는 것은 너무도 버거운 짐이었다.
그리고 그들 마음속에 뿌리 내린 이유 없는 증오심과 차별심을 적출하는 것은 한두 세대의 노력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큰 숙원 사업이었다.
설령 인류를 잠식한 ‘사상(思想)의 키메라’를 죽인다고 한들, 가여운 떠돌이들을 향한 본능적인 냉대가 사랑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알렉시스의 생각에 그것은 무리였다.
‘사랑……, 역시나 문제는 사랑인가?’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정치적, 학문적, 과학적, 경영적 재능.
막대한 노력과 성실성.
그리고 곁에서 지원해줄 무수한 인재들과 그들과 맺은 깊은 신뢰 관계.
이런 엄청난 자원들을 소유한 알렉시스조차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거짓된 사상들을 부순다고 해도, 악한 시스템들을 없앤다고 해도, 선하고 올바른 체계와 질서를 서서히 건설한다고 해도, 사랑만은 창조하지 못한다.
개인과 개인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민족의 사랑, 민족들간의 사랑, 세상을 아우르는 사랑, 이웃과 원수들을 포용하는 사랑.
그 무엇도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높은 가지 위의 사과와 같았다.
오로지 만물을 지으신 신께서만 공급하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힘, 사랑.
알렉시스는 자신이 얼마나 미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뭐, 난 그래도 당신들을 사랑하고자 최선을 다할 겁니다.’
곁에 있는 이들을 품고, 좀 더 멀리 떨어진 이들을 담아내고자 노력하고, 먼 곳의 이들도 돌아보다 보면, 언젠가는 세상의 모든 이들을 담을 수 있겠지.
힘겨운 순례길이 되겠지만,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왕으로서 그에게 맡겨진 가장 어려운 임무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동시에 가장 가치 있고 귀중한 일이 되리라.
어려움의 시간들을 헤쳐나오는 와중에도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여인.
땀을 흘리는 가운데에서도 자연의 향취와 같은 편안한 향기를 은은히 뿜는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알렉시스는 사색에 잠겼다.
일을 할 때와는 다른, 나긋나긋하고 편안한 사색.
늘 치열한 고민으로 지쳤던 그의 뇌가 처음으로 안식다운 안식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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