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53회 [2부] 74화. 그레이트 리셋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01 | 회차평점 ![]() |
리키에게는 수 개월 전 무렵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한 좋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반려로서 함께할 것을 전제로 교제한 연인인 셈인데 그녀는 여러 면에서 그에게 적합한 짝이었다. 상냥하고 세심한 됨됨이부터 바른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참한 외양에 어울리게 열매가 풍성한 내면의 모습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이름은 클로이 린델, 일단은 젊고 평범한 자영업자이지만 탁월한 손맛과 참신한 발상력을 바탕으로 도시락집을 운영하여 손님들에게 호평을 받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가게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형 병원인 브리튼 국립 종합병원 안에 자리하였는데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물론 의료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제법 있었다.
클로이네 가게에서 요리된 도시락이 바쁘고 정신 없이 사는 의사들의 입맛을 제법 훔쳤는데 그 미끼에 낚인 사람 중에는 리키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병원 식당 대신에 그곳을 애용하게 되었다. 자연히 운영자와 안면이 트게 되었고 나중에는 말도 붙이게 되었다. 성격이 민감한 젊은 의사는 살갑고 생기가 넘치는 긍정적인 여인에게 연유도 모르게 경계심을 놓게 되었고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일상을 공유할만큼 거리감이 없어졌다.
그렇게 식사를 빌미로 둘은 매끼마다 접촉하였고 틈만 나면 말동무가 되어 힘든 일들은 넋두리로, 즐거운 일들은 수다를 떨며 공유하였다. 공적인 일이 아니면 사적인 관계를 잘 만들지 않는 편인 리키였으나 클로이와 함께하는 시간들은 즐거웠다고 한다. 의외로 둘은 성향도 잘 맞았고 가치관도 일치했으며 심지어는 같은 신앙관을 갖고 있었다.
올해 여름 쯤에 둘은 정식으로 연인 사이가 되었다. 고된 병원 생활 중 그녀와의 비밀 연애는 오아시스처럼 활기를 충전해주는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뛰어난 실력과 천재적인 학문적 소양 때문에 세계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파견되는 스케쥴을 지닌 리키는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녀가 자리한 병원을 떠나야 했고 원거리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풋풋함과 즐거움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둘은 어김없이 만나 교제하였고 그 밖의 날들에도 밤이면 통화와 메시지를 통해 목소리를 주고 받았다.
현재 리키는 공식적으로는 호주의 어느 공립 기관에 파견되어 연수 받는 중이었다. 이 시설은 대중에게 공식적으로 그 목적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저택형 시설로 그 내부에는 여러 기능이 담겼고 그 가운데는 사립 대형 의료원으로서의 기능도 있었다. 다만, 주민들이 볼 때 그곳은 잔잔하고 전원적인 풍경 가운데 세워진 어떤 전망 좋은 저택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파견은 어디까지나 눈가리기용 명분일 뿐이었다. 이곳의 정체는 사실 황립 전용 사설 시설로 대중의 이목을 피하기 위한 은밀한 사택이었다. 현재 황태자가 사람들의 추적과 감시를 피해 이곳에서 휴양 중이었다. 황태자가 치료 받는 중이라고 알려진 장소가 여럿 있었으나 전부 거짓 소문 또는 역정보였고 정작 진짜는 모두의 이목에서 벗어난 곳에 잠든 채 안치되어 있었다.
워쳐들의 관측 정보에 의하면 이곳에는 잠정적인 적 또는 첩자로 추정되는 자들이나 그 영향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감시당할 위험이 적은, 거의 유일한 청정 지대인 셈이다. 비블로스가 이곳을 택한 것은 실로 정확한 판단이었고 덕분에 세계의 물 밑에서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난리들이 꿈틀거리는 동안에도 이곳은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다.
리키는 이곳에서 파견 근무 및 연수를 받는 와중에 겸사겸사 큰형님인 황태자의 몸 상태를 살피는 비밀 주치의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황실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기밀이었기에 그는 오로지 외부 네트워크와 연결되지 않은 소수의 간호용 로봇들의 도움만을 대동한 채 홀로 형을 살폈다.
그리고 어느 덧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평상 시 같았으면 신년에 있을 가족 행사를 준비했겠지만 이번은 여의치가 않았다. 아마도 올해는 쓸쓸하게 타지에서 연말과 신년을 보내야겠지. 하지만 리키 입장에서는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형님은 함께할 수 있으니까. 그분이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점만 제외한다면.
클로이와 손을 맞대지 못한 아쉬움을 풀기 위해 그는 점심 시간에 화상 통화를 통해 연인과 얼굴을 마주하였다.
“고생이 많나봐. 얼굴이 요새 헬쓱해보여.”
클로이가 염려해주자 리키는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수심을 숨겼다.
“근무가 많아서.”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은데.”
눈치가 빠른 그녀가 애인의 깊은 고민 속으로 신중하게, 그러나 예리하게 다가갔다. 결국은 리키도 한숨과 함께 부분적으로나마 이실직고를 하였다. 물론 중요한 정보들은 드러내지 않은 채 최대한 에둘러 표현하였다.
“사실 가족 중에 편찮은 분이 있어서.”
“부모님?”
“아니, 형제.”
아직 리키의 신분을 모르는 클로이였기에 그가 황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줄은 당연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친구의 말 못할 복잡한 심경에 호기심을 보태기보다는 공감으로 반응하였다.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해도 리키의 마음이 근심으로 복잡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많이 안 좋으셔?”
“심한 문제는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하지만 나도 잘 모르겠네.”
전문가답지 않게 어설프게 에둘러 표현하는 리키. 클로이는 자신에게마저도 완전히 공유하지 못할 애인의 마음 곤란한 사정에 가슴이 아렸다. 자신은 사정도 모르고 해결해줄 능력이 없으니 그저 이 시간 아픔을 같이 체감해주는 것말고는 덧댈 도움이 없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쾌차하시길 기도할게.”
“고마워.”
“무사히 일어나실거야. 용기를 잃지 마.”
누군가가 온전히 보지도 못한 사정을 두고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가족을 위해 기도해준다는 것. 생각보다 용기를 크게 북돋아주는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비밀을 공유할 수 없는 현실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복잡하게 뒤엉킨 미련 섞인 심정으로 리키는 통화를 마무리하였다.
*
오후 무렵이었다. 비상 상황을 알리는 경보음이 시설 전체에 울려퍼졌다. 난데없이 울려퍼지는 코드블랙(테러 위험을 경고함) 경보에 리키는 당황하였다. 민간인들은 이미 대피한 것으로 보였다. 시설을 관리하는 주요 근무자들과 관계자들만 남아 지하의 안전 시설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손목 시계 형태의 인공지능 컴퓨터가 상황을 브리핑해주었다. 시설 주변을 폭도들이 에워두르고 있었다. 숫자가 적어도 수천은 넘는 듯했다. 이곳이 아주 큰 건물이 아니기에 포위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의문이 들었다. 인적이 드문 외곽에 세워진 시설인데다 이곳의 목적을 아는 이도 극히 드물다. 헌데 어디에서 저 많은 인원이 몰려온 것일까? 무슨 목적으로? 저들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가?
사설 시큐리티 직원들과 황실에서 고용한 경호팀이 신속하게 대비 태세로 돌입하였다. 시설 직원복 또는 사복으로 위장한 채 잠복 근무 중이던 그들은 성한 폭도들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가벼운 무장을 갖춘 채 진입로 곳곳에 배치되었다. 폭도들은 다행히 대부분 중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경찰력이 개입되기까지 충분히 시간을 끌 수는 있을 듯했다.
“설마 형님에 대한 이야기가 누출된건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 게다가 무슨 이유로 저런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를?”
업무실로 황급히 이동한 리키는 조마조마해하며 떨리는 심정으로 뉴스를 황급히 켰다. 어지러운 정보들의 홍수가 쏟아지며 그의 눈과 정신을 혼미하게 하였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새 발의 피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이건 도대체?”
하룻밤만에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인터넷 및 방송 뉴스와 각종 공용 및 사설 미디어가 온갖 난동 사태의 보도로 점철되었다. 최소 수십 개 이상의 스테이트들과 수백 개 이상의 프로빈스에서 대형 범죄 사건이 벌어졌다. 단순한 잡 범죄가 아니었다. 국가 전복을 꾀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매우 질 나쁜 테러였다. 이런 류의 내전을 체험한 지 그리 많은 햇수가 지난 것도 아니었기에 트라우마로 인해 온 몸의 솜털이 서늘하게 곤두섰다.
‘미쳐버리기라도 한 건가?’
여러 국가 시설들, 예컨대 법원이나 관공서나 세무관이나 공립 의료시설 등으로 난폭한 폭도들과 그에 가담한 자들이 침투하려 했다는 보도들이 쏟아졌다.
기관 내부에서 발원한 범죄들도 쇄도했다. 난리를 일으킨 범죄자는 놀랍게도 내부자들 가운데 있었다. 사실상 테러에 준하는 위험한 시도들의 소식도 각 시와 도와 주에서 들려왔는데 그 가운데는 현재까지 진행 중인 사건들도 있었다. 건물 전체를 붙잡고 유사 인질극을 벌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원시적인 난폭 행위들의 남발은 피상적인 증상에 지나지 않았다. 더 악질적이고 은밀한 광기가 다른 영역들에서 폭발하듯 빗발치고 있었다.
상당수의 지방 의회들이 저마다 반정부적 행동에 돌입하였다. 어떤 프로빈스들에서는 의회 주도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의회를 비롯해서 중앙 계열 의회의 의원들의 상당수도 반란에 가담한 지역에 출현하여 정치력을 보탰다. 총합 적어도 백 개 이상의 스테이트들에서 이런 공개적인 통치 거부 선포가 시도되었다.
“확실히 이건 민의에 따라 이뤄진 반란은 아니야.”
리키는 침착하게 상황을 진단하였다. 오늘 갑작스레 난립한 이 광기의 시도들은 공통적으로 이성의 결여에서 나온 결실들이었다. 사회 속에 잘 섞여 살던,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던 인물들이 느닷없이 본색을 드러낸 채 무대포로 자신의 권한을 소모적으로 태워 한 순간의 불 놀이를 일으킨다. 이건 조직적인 반란도, 이슬람 때와 같은 증오심에 북받친 집요한 성전(聖戰)도 뭣도 아니었다. 이해하기 힘든 주술적인 광기에 가깝달까.
“이런다고 시민들이 동요해줄 리가 없어. 하지만 그렇다면 왜?”
무서운 점은 의원이나 정치인들의 거의 4분의 1에서 3분의 1 가까이 되는 수효가 반란 사태에 공개적으로 몸을 투신했다는 것이었다.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불리던 이들 가운데 이런 자들이 섞여있었단 말인가?
더 두려운 부분은 엘리트 계열의 지능형 범죄자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폭주하였다는 점. 특별히 기업들과 전문가들의 조직 내에서 이상한 사태들이 발생하였다. 최소 수천에서 수만 명 가까이 되는 경제 사범들과 산업 스파이들이 자아낸 작품이었다. 국가 자본의 약탈, 대규모 횡령, 은행 시설의 사이버 침범, 전산망을 향한 테러 행위, 혼란을 틈탄 정보 탈취와 검은 돈 수송까지. 미치지 않고서는 감히 시도하지 못했을 범죄들이 빌런들의 손에서 과감히 시행되었다.
기업들과 조직들 내부에 암약하던 첩자들이 고위 관료로서, 혹은 유력한 결정권자로서 가진 권한을 무기 삼아 모조리 장렬히 불태운 뒤 국가와 회사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중이었다. 브리튼의 모든 정부 기관들과 기업들이 사태 진압 및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언제 또 숨은 적들이 추가로 튀어나올지 몰라 곤경스러워하는 중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이미 내란을 넘어서 국가 전복의 시도가 되었다.
정작 이 일을 앞장서서 정리해야 할 군대도 내부에서 벌어지는 난리로 큰 곤경을 마주하였다. 군 내부에서 하위 군병부터 장교급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반역 부역자들이 돌발적으로 범죄의 흐름에 가담하였다. 그 가운데는 주요 전략 병기 시설과 관련하여 종사하는 중요 인사들도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대량 살상 병기에 준하는 위험한 무기들이 그들의 손에 오발될 위험에 노출된 것이다.
정규군과 정보 시설들은 이제 자기들 뱃속에서부터 첩보 작전을 펼치며 대응에 나서야만 했다. 배신자들과 범죄자들의 내부 체포가 속행되었다. 포진해있던 숨은 벌레들이 내부 전복을 위해 행동하였고 총격전과 제압전이 난무하였다. 범죄자들의 체포 소식이 쇄도하였다.
가장 많은 빌런들이 조직적으로, 맹목적으로, 무질서하게 광포를 일으킨 두 피해 지역이 있었는데 이 두 곳은 사실상 현재 최고 데프콘이 선포되어 모든 이동이 차단되었다. 이탈리아 주, 그리고 북부 신대륙의 요크 주였다. 이곳에서는 돌출한 악당들이 창궐하여 대형 테러를 넘어 수색 및 추격 행위까지 벌이며 큰 혼란을 야기하는 중이었다.
단순한 인간의 선전선동으로 이뤄낼 수 있는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형님을 노리는 건가?”
불안감이 엄습했다. 요크 주와 이탈리아 주에서 난립하는 조직 테러 행위의 목적물이 알렉시스 황태자이리라는 예감이 선명하게 들었다.
리키는 황급히 형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병실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소동들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스는 어제와 동일하게 잠들어 있었다. 혹시나 싶어 리키는 전자 시설들을 모두 차단하고 신체에 부착된 기기를 뗀 뒤 알렉시스를 자리에서 옮겨 다른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 광기는 절대로 하루 이상을 지속되지 못해. 오늘 내로 진압된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그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어디에서 이렇게까지 많은 적들이 돌출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자멸하는 길을 택했다. 브리튼 제국은 이미 이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위험한 전복 시도들도 거뜬히 이겨내었고 강한 내성을 얻었다. 그러니 황제는 이 일들도 능숙히 진압하고 모든 위험들을 적출해낼 것이다.
반면에 광기에 휘말린 당사자들은 기대하는 결말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작은 자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자에서 부유한 자에 이르기까지, 말단 하청업자에서 사회 최상층부에 또아리를 튼 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 목소리와 한 뜻으로 움직였다. 과거 바벨탑을 세울 때 신을 향하여 반역의 기치를 들어올렸던 것처럼, 이번에 그들은 신을 대리하여 인간계를 관리하는 한 집안을 향해 공개적인 혁명의 깃발을 들었다.
그레이트 리셋. 기존 질서를 뒤집어 엎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건설하자. 경제도, 문화도, 종교도, 정치도, 군사력도, 그리고 인간의 모든 생활 양식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송두리째 갈아 신질서를 세우자. 이것이 목표였다.
어째서 지금까지 능숙하게 잘 감당해오던 ‘진지전’의 전략을 내던지고 ‘기동전’을 넘어 ‘무작위 돌격전’으로 전략을 돌연 바꾼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반란의 당사자들까지도. 마치 어떤 우주적이고 초자연적인 광란이 귀신 씌워지듯 그들의 영을 사로잡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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