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5회 지옥의 편린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5.07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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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간의 항해, 그리고 이어진 사흘 간의 내륙 여행.
렌트한 차량 하나에 의존하여 플레먼과 어니스트는 뉴질랜드 사방을 순회하였다.
어니스트는 이색적인 땅을 밟는 기분에 취했는지 아이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도련님 때문에 따라나섰으면서 이제는 자신이 더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이것이 어니스트라는 사람의 개성이자 장점 중 하나였다.
그는 오감을 통해 여행을 경험하는 재미에 푹 맛이 들린 듯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모든 종류의 경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바닷가를 거니는 동안에는 수영을 하기도 하고 산지에서는 등산도 하였다.
중간에 훌륭한 현지 음식점을 발견하면 빠트리지 않고 음미의 시간을 나눴다.
플레먼도 그런대로 호기심 많은 친구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다만, 플레먼의 관심은 오로지 ‘훌륭한 피사체’를 담아내는 데만 쏠려 있었다.
이번 여행은 말 그대로 그에게 있어서는 자연과 접촉하는 순례의 시간.
즐거움보다는 하나의 수련이요 경험 지평의 확장이자, 정서적 고양을 위한 필수적인 수업이었다.
그는 뉴질랜드의 잘 보존된 탁월한 자연경관의 이모저모를 최대한 다양한 각도와 시선에서 담아내고자 고분고투하며 노력하였다.
이 자원들은 훗날 그의 보물 창고들에 쌓여 훌륭한 지적 자원이 될 것이다.
공감각적 시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음악적 영감을 회복시킬 수도 있으리라.
혹은 상상력의 평야를 확장하여 순금과 같이 정제된 문학적 열매를 생산해낼 마중물이 될 수도 있겠지.
여행 와중에 두 사람은 현지인, 관광객, 외국인 등 여러 사람을 만났다.
주로 어니스트가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가 대화의 물꼬를 트는 역을 했다.
그리고 플레먼은 친밀도가 긴밀해진 뒤에야 사람들에게 제 역할을 해주었다.
지혜로운 고찰, 풍부한 지적 나눔, 그리고 고민의 해결 등.
다재다능하고 영리한 현자만이 베풀어줄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들 곁을 거쳐간 사람들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워했다.
‘제 삶을 돌이켜볼 기회가 되어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하며 보람찬 만남이 되었음을 고백했다.
“도련님이랑 있다보면 제가 어린애가 된 기분이네요.”
“순수한 것도 장점이야. 나처럼 일찍부터 애늙은이가 된 것도 썩 기쁜 일은 아니지.”
“그러고 보면 제가 아이였을 적에도 그랬었죠. 도련님은 십대 때부터도 남들보다 최소 스무 살은 더 먹은 어른 같았어요.”
어니스트는 이전의 추억들을 곱씹으며 회상했다.
“이런, 그렇게까지 늙어보일 줄이야. 상처인걸.”
“그럴 리가요. 얼굴말고 정신적인 깊이 말하는 거예요. 보통은 힘든 일을 무수히 겪은 사람들이 조숙하잖아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도련님은 아주 두드러지는 고생을 체험한 것이 아닌데도 어른스러웠어요.”
남의 삶을 모르면서 함부로 평가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어니스트와 플레먼은 친분 속에서 오랜 시간을 공유해온 친우.
그들에게 남겨진 추억의 시간들은 상당부분 공통분모를 지닌채 겹쳐져 있었다.
그러므로 플레먼의 인생 여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잘 이해해온 사람도 현존하는 인간 중에서는 단연 어니스트였다.
“마치 현자의 영혼이 아이의 그릇 속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참 흥미로운 비유네.”
플레먼은 가벼이 실소하면서 벤치에 걸터앉았다.
어니스트는 그에게 그에게 물병을 건넨 뒤 자신도 자신의 물로 목을 축였다.
“기분은 좀 풀리셨나요? 활기가 좀 회복되었으면 했는데.”
“그런대로 나쁘진 않지. 생각할 거리가 좀 더 풍성해졌달까.”
플레먼은 사진기보다도 그의 정신 속에 자연의 순간들을 면밀히 포착해두었다.
사진은 훗날 그 정서들을 더욱 선명히 새기기 위한 매개물일뿐이었다.
그의 생각 속에 담긴 그 공감각적인 순간들과 자연의 섭리들은 훗날 씨앗이 되어 자라나 새로운 사고력의 열매로 맺어지리라.
“바다 건너 타지로 여행하는 것도 괜찮지?”
“그거야 물론이죠. 묶여서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어니스트는 순간 플레먼의 정적을 감지하고는 눈치껏 입을 멈췄다.
“그래. 이런 기회들도 결코 당연한 순간은 아니었지.”
이런 평온한 일상들이 항상 권리처럼 주어지지는 않았다.
오세아니아가 비록 직접적으로 전쟁에 휘말린 적도 없고 세계 정부의 영향권에서도 가장 먼 곳에 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공식적으로는 저들의 지배령.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그들은 자유다운 자유를 맛보지 못한 채 모든 일을 눈치를 봐가면서 해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에 범람한 헬게이트 사태가 호주 지역 입장에서는 호재가 되었다.
헬게이트의 피해는 가장 적게 보았으면서 그로 인한 반사이익은 두둑히 누렸다.
그 반사 이익이라 함은 바로 정부의 권익과 권위의 축소였다.
‘우리는 남들의 고통 위에서 지금의 안전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플레먼의 기분을 씁쓸하게 하는 부분은 이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헬게이트가 지상에 처음 출현하였다.
그로부터 7년 뒤에 헌터들이 데뷔하기까지, 지상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만약 이 사태가 전염병이나 전쟁이나 기근 같은 것이었다면?
그랬더라면 오히려 재난들은 정부로서는 통제를 강화할 기회였으리라.
위험을 제어한다는 명목 하에 개인의 자유를 얼마든 박탈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헬게이트 재난의 특수성은 인간의 힘으로 제어치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군대도, 재난 대피령도, 사람들의 움직임 통제도, 경찰력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기에 정부 기관들의 체면은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필연적 수순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동시에 그들을 얕잡아보기 시작했다.
그토록 떵떵대며 우리들 위에서 군림하며 모든 권익을 박탈하더니.
막상 저 기괴한 사태 앞에서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천치들이었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헬게이트는 역설적으로 고통과 동시에 해방감도 주었다.
아울러 특이하게도 헬게이트는 민간인보다는 중앙 기관에 가까운 곳을 더 선호하여 공격하는 특성이 있었다.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선택성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런 경향은 있었다.
보통의 재난은 가진 자, 힘 있는 자, 군림하는 자들은 벙커 같은 이런 저런 수단을 통해 면할 수 있고 없는 자들은 독박을 쓰며 감내해야 하기 마련이건만.
독특하게도 헬게이트는 부한 자와 가난한 자, 능력 있는 자와 없는 자들 모두에게 공평했다.
아니 가진 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큰 고통을 주었으니 불공평한 것일까.
여하튼 불행 중에서도 이런 특색은 오랜 세월 압제받던 이들에게 작게나마 고소함과 통쾌함을 주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면 왜 헬게이트 사태가 역설적인 번영과 회복의 계기가 되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해결책을 얻지 전까지는 인류의 공평한 공멸을 야기할 예정이었던 대재난.
그러나 막상 헌터들이 등장한 뒤로 헬게이트의 위험성이 꺾이게 되자 재난은 되려 감추어진 은총이었음이 밝혀졌다.
불과 맞불이 만나서 서로를 소멸시키면 생명체들에게는 생존의 기회가 되는 법.
수십 년 전, 세계를 통일시킨 독재자가 남긴 악의 유산이 초자연적인 악의 재난과 만나 서로를 상쇄시키자 사람들은 반사 유익을 누렸다.
“바깥 세상에 나가보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은 없어?”
플레먼이 질문했다.
“이미 저희 여행 중이잖아요.”
“이런 거 말고. 오세아니아 같은 동떨어진 오지가 아닌, 인간 세계 역사의 소용돌이의 중심지들 말야. 유럽이나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처럼.”
어니스트는 그 질문에 쉬이 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좀……, 버거운 질문이네요.”
“하긴.”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지만, 아직도 세상은 어지럽잖아요. 문제의 그 헬게이트들이 완전히 다 청산된 것도 아니고, 독재 시대의 잔재도 여전히 남아있고요. 정권들이 여러 번 바뀌었다지만 제가 듣기로는 본질 자체는 거기서 거기라 하더라고요.”
그러자 플레먼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그래. 인간이야 항상 변함이 없었지. 그나마 헬게이트들과 헌터들 때문에 개개인의 자유가 약간이나마 수복되었다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섭리야. 그들에게 빚진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하지만 플레먼은 낙관적이기만 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늘 어두운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깊이 성찰하곤 했다.
‘헌터들과 세계 정부의 아슬아슬한 공생 관계와 힘의 균형, 그게 언제까지고 유지될 수 있을까?’
헌터들의 무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두뇌들이 모인 집단.
사실상 오직 IQ만으로 따지면 세계 순위 1부터 100만까지 전부 그 안에 몰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영리한 무리였기에 그나마 지금껏 저 간악한 정권들을 상대로 자기 주장을 굳게 세우며 권익을 챙겨올 수 있었다.
하지만 헌터들의 특수 능력은 어디까지나 헬게이트 권역 안에서만 유효하다.
그들이 종종 선보이는 각종 이능력은 전부 안티-게이팅 능력에 기반을 둔 것.
헬게이트 영향권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물리법칙 왜곡 현상을 역이용함으로써 발현되는 능력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헬게이트 없이는 헌터들은 그저 똑똑하고 신체적으로 강한 인간 무리.
탐욕스러운 권세자들의 관점에서는 길들여야 하는 골치 아픈 존재들일뿐이다.
만약 헬게이트가 사라진다면 그들은 그날 즉시 토사구팽을 당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스스로 유혈 혁명이라도 일으켜서 권력을 쟁취해야 하겠지.
그런데 과연 헌터들이 새로운 권력의 자리에 오른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지난 세월의 교훈들에 비춰볼 때 그런 기대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이리라.
설령 헬게이트가 사라지지 않아서 헌터의 유용성이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권세자들과의 불안정한 줄다리기는 여전히 폭탄 같은 위험성을 내포한다.
정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헌터들의 목줄을 쥐어틀려 노력할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지금껏 그럴 수단들을 여럿 확보하였다.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현재만 해도 어느 정도는 헌터들의 자유를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헌터들이 과연 이대로 ‘정부의 개’로 전락하기를 허용할 것인가.
그들은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가는 집단이니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미묘한 대치의 비이성적인 붕괴는 어떤 파국으로 이어질 것인가.
나름 세계 소식을 민첩하게 분석할 줄 아는 플레먼이었지만 미래에 대한 대답은 감히 내릴 수 없었다.
“헌터들을 만나보고 싶진 않고?”
그는 순진무구한 어니스트를 계속해서 장난스레 떠보았다.
“궁금하긴 해요. 도련님도 그들의 그 힘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학술적인 호기심이야 들지. 하지만 내 눈으로 마주하고 싶진 않아.”
“하기야 그들이 능력을 제대로 보려면 헬게이트의 침식 권역 안에 들어가야 하니 좋은 일이 아니네요. 평생 모르는 편이 낫겠어요.”
“그래, 네 말이 맞네. 앞으로도 헌터들과 만날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자구.”
그때만 해도 둘은 자신들이 무슨 무책임한 이야기를 떠들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나서 호주로 돌아갈 날이 되었다.
둘은 짐가방을 든 채 오클랜드를 떠나 항구 쪽으로 향할 채비를 했다.
그날따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했으며 태양은 따스하고 선명했다.
그리고 정오에 이르른 그 순간.
축복 같았던 자연계의 미소가 예고 없이 악독한 비웃음으로 돌변했다.
“도, 도련님?”
하늘에 떠오른 검은 색 구체.
그것이 태양을 가리며 형형한 흑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다.
어둠으로 만들어진 천체가 아닌, 검은 빛의 별이었다.
그 주변으로 태양의 빛이 왜곡되어 나선형으로 비틀어지더니 검은 별의 내부로 흐드러지듯 빨려들어가는 형상이 나타났다.
과학책에서 상상도로 그려진 블랙홀의 모습이 순간 연상되었다.
“별이 아니야.”
늘 느긋했던 플레먼은 얼어붙은 사람처럼 굳은 채 입술을 떨었다.
“대기권 안에 존재하고 있어.”
잠시 후 검은 별과 태양이 분리되었다.
개기일식 같은 현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것과는 물리적으로 완전히 달랐다.
이제 태양은 저 멀리서 작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의 광도와 크기 자체가 감소한 것만 같았다.
분명 태양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반대로 검은색 별은 마치 태양의 코로나를 빼앗아 자신이 취한 것마냥 이글이글 자신 주위로 빛의 화염 고리를 둘렀다.
그러면서도 정작 검은 별 자체는 변함없이 칠흑처럼 캄캄했다.
그 기괴한 별, 아니 구체는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플레먼의 말이 옳았다.
그것은 우주에 떠 있는 별이 아닌 것인지 땅으로 내려오는 동안에도 그 크기가 전혀 늘아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원근법의 원리를 무시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 대기권 속의 물체도 아닌건가?’
그 위압감에 얼어붙은 플레먼의 팔을 누군가가 힘껏 당겼다.
“도련님! 어서 벗어나야 해요!”
그제야 현실의 수면 위로 부상한 플레먼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어니스트!”
“도망칩시다. 어서요!”
그러나 그들은 타이밍을 놓쳤다.
늑장이나 민첩함의 부족 탓은 아니었다.
그저 마주한 그것이 불가항력적인 권세였을 뿐.
촤아아악!
사람들이 모인 도심 지대로 내려온 그 검은 구체.
그것은 흑색과 자색이 섞인 기묘한 필드를 고속으로 뻗어내었다.
이윽고 근방 1km 일대가 삽시간에 어떤 기묘한 역장(力場) 속에 파묻혔다.
아름다웠던 다색의 세계가 일순간 흑백 영화의 세계처럼 변해버렸다.
그리고 곧 피부를 찌르는 기괴한 기운과 그로 인한 통증.
실제 기온이 하강한 것이 아닌데도 불과하고 느껴지는 엄청난 냉기.
아울러 사람들과 물질들 모두를 검은 구체 쪽으로 끌어당기는 미약한 인력까지.
‘말도 안 돼!’
그들 눈앞에 인세에 강림한 지옥의 작은 편린(片鱗)이 현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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