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62회 면역자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9.03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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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텔바흐는 그에게만 허락된 지혜자의 권좌에 앉아 잠잠히 안식을 취했다.
그는 이 세상의 이변들의 이치를 감찰하는 자답게 침착하게 사념에 몰두했다.
강력한 육신 이상으로 발달한 그의 뇌 기관은 면밀히 이치들의 흐름을 추적하고 탐색하였다.
현재 그가 고민하는 문제는 헬게이트들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그것들도 보다 확실하게 해결해놓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구태여 그것이 지금의 시급한 과제로 선정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다가올 결정적인 임계점, 곧 티핑 포인트(tipping-point)가 관건이었다.
‘힘의 균형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어. 흐름을 이쪽으로 돌릴 기회다.’
과거 최초의 세계 정복자가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한 후 전체주의의 질서는 항상 건재함을 자랑하였다.
그 왕좌에 앉은 도당(徒黨)이나 권력자의 출신은 바뀔지언정, 정부의 이름과 칭호는 교체될지언정, 그 뿌리깊은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검은 영적 권세가 또아리를 뜬 채 겉으로 드러나는 가면만 주기적으로 바꿔 입는 듯 했다.
그때 이후로 사람들은 그저 집단 전체를 위한 부속품으로서만 존재해왔다.
개인이라는 개념은 지구상에서 지워졌으며 인간은 더 위대한 실체의 작은 부품으로 전락하였다.
그랬기에 민간 세계, 곧 시민들의 세상과 그들을 위에서 지배하는 거대한 리바이어던의 관계는 항상 철저히 비대칭적이었다.
단 한 번도 민간 세계는 자신들의 폭압자 위로 올라서지 못했다.
그랬던 질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멸적인 정쟁과 탐욕스러운 이기심으로 인해 생긴 분열은 세계 정부의 자생적인 유지력을 약화시켰다.
이제 그들은 더는 전처럼 온전히 하나된 힘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명목 상으로는 한 지붕 아래 연합된 한 조직이지만, 이제 실상 세계는 열 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졌으며 열 명의 수장 아래 운영되는 질서로 확립되었다.
열 명의 수장, 혹은 장로라 불리는 이들은 일종의 과두제를 운영하며 하나의 협의체를 이루기는 했으나 그들 사이에서도 온전한 마음의 연합은 요원했다.
네 개의 거대 정당들 사이의 균열 역시 가속화되는 중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물려 국가 체계의 시민 지배력은 예전에 비해 약화되었다.
전보다는 공략할 수 있는 틈새도 늘어났다.
아울러 헌터들의 빠른 성장이 새로운 변수가 되었다.
세계 정부는 손쉽게 헌터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 수 있으리라 믿었으나 그것은 그들의 오만이요 오판이었다.
도리어 헌터들은 영약하게 자신들의 권역과 영향력과 목소리를 키워 사회 곳곳에 자신들만의 카르텔과 권세 구도를 구축하였다.
라이텔바흐는 장차 헌터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동맹을 맺은 모든 이들을 인계받을 계획이었다.
이 부분은 그의 정치적 양아버지인 델타 수장과 이미 합의가 된 내용이었다.
나머지 세 수장이 어떤 입장을 표명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라고 이 큰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또한 라이텔바흐는 이미 지난 몇 년간 신속하고 민첩하게 자신만의 권력과 힘을 음지와 양지 모두에서 키워왔다.
지금도 산업, 학계, 교육계, 정치계, 재계 곳곳에 심겨진 그의 영향력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러나 은밀하고 신중하게 자라나 세계 정부의 균열 내부를 파고 드는 중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리라.
이런 식으로 힘의 역학 구도가 변곡점을 맞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운명적 충돌이 벌어지게 된다.
거기에서 밀리거나 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였다.
‘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자생적인 면역력과 회복력이 필수적이다.’
지금의 세계의 상태는 종양 덩어리와 병균 덩어리에 함몰된 상태.
안과 밖은 모두 부패하였다.
존엄성과 가치는 바닥으로 내던져졌으며 병적인 질서가 고착화되었다.
아울러 언제 끝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헬게이트 사태의 어두운 터널.
이럴 때일수록 안과 밖의 균형을 지탱하는 자생적 면역력의 중요성은 강조된다.
그 핵심 매체는 현재로서는 총 세 종류이다.
마치 인체 내부에도 다양한 종류의 혈액 면역 세포가 존재하듯, 이 세 부류의 무리는 현 인류 내부에 심긴 채 잠잠히 제 역할을 감당하는 중이다.
첫 번째 무리는 헌터들.
라이텔바흐 자신에게서 유래한 원리 불명의 재난성 축복인, 안티-게이팅 파워와 나노봇과 이터널셀을 이양받은 자들이다.
각종 생체 실험과 이터널셀의 인체 침식으로부터 살아남아 자연 선택된 우수 종자들이기에 두뇌가 유별나게 탁월하다.
또한 온갖 실험의 여파와 각종 혹독한 훈련의 고통을 나노봇의 도움으로 극복한 덕에 전반적인 신체 능력과 생명력 또한 보통 인간의 몇 배 이상이다.
더 중요하게는 유일하게 헬게이트들과 그 파생체들을 파괴할 수 있다.
이들은 지금으로서는 가장 선두에 선 공격 인자들로 안과 밖의 적들을 파쇄하거나 견제할 핵심 전력이다.
안의 적이라 함은 인류 내부의 병폐요, 밖의 적이라 함은 심연의 침략자들이다.
라이텔바흐는 장차 이 둘을 모두 제거할 계획이었다.
두 번째 무리는 아직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은 자들이다.
헌터들의 활약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적게 받은 이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더 중요한 역할을 맡을 핵심 투수들이었다.
이들의 정체는 바로 독립운동가들의 무리, 좋은 표현으로는 독립운동가요, 세계 정부의 입장에서는 나쁜 표현으로 반정부 집단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정말로 반정부적인 과격함에서 기인한 집단이리라.
그리고 다른 일부는 정말 민족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불의한 식민 정복자들로부터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는 의사(義士)들이겠지.
라이텔바흐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건 상관 없었다.
어차피 그는 이 무리를 자신의 감시와 동맹 체계 아래 두어 요긴한 장기말로서 활용한 생각이었다.
그 가운데 위험한 불확정성 요인들은 자연스럽게 잘라내면 되고 정말로 인류를 위해 올바른 뜻을 가진 자들은 남겨두어 같이 가면 그만이겠지.
이미 라이텔바흐와 그의 동료 헌터 길드장들은 다수의 독립 운동 세력과 물 밑에서 밀약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그들 대부분은 라이텔바흐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었고 실시간으로 헌터 세력에 의해 모니터링되는 중이었다.
세계 정부와 적당히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수장들과 달리 라이텔바흐는 이 위험한 동맹군들을 최대한도로 이용하여 그 이상의 고지를 정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주의를 기울이는 쪽은 따로 있었다.
그의 직감에 의하면 지금은 뚜렷이 부각되지 않는 세 번째 무리가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인류의 향방에 가장 큰 영향을 가져올 것으로 판단되었다.
라이텔바흐가 면역자들이라는 존재를 사고실험을 통해 이론적으로 추정해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이었다.
그때 그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헬게이트 패턴을 인류의 지정학적 균형과 대조해봄으로써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론적 지식을 도출해냈다.
헬게이트의 특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오리지널 이터널셀을 소유한 그이기에 가능한 계산이었다.
그때 그는 세계 곳곳에 어떤 특이한 좌표들이 존재함을 알아냈다.
그 좌표들 부근으로 헬게이트 발생 억제 작용이 일어남이 뚜렷하게 보였다.
아울러 좌표들마다 미묘한 진동 패턴이 보였는데 그것은 어떤 인간 개개인의 활동 패턴과 상당 부분 상응되었다.
라이텔바흐는 이터널셀과 직관력과 이론적 수학 연산을 동원하여 실제로 그 좌표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유발되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아가 그는 각 좌표에 대응되는 사람의 특성과 한 좌표에 대응되는 사람의 수가 몇인지를 알아낼 나름의 판단 공식을 자신의 머릿속에 정립하였다.
그는 그 이론을 빠르게 구체화해나갔고 실제로 헌터들의 도움을 받아 몰래 조사에 나선 결과 이론의 실제성을 증명해낼 수 있었다.
정말로 헬게이트와의 상호작용에 있어 독특한 특성을 보이는 인간들이 존재했다.
겉보기에는 다른 인간과 전혀 구분되지 않았으나 라이텔바흐와 그에게서 조언을 들은 헌터들은 얼추 그들을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이 특수한 인간들을 면역자라고 지칭하였다.
무엇이 면역자들로 하여금 그런 특성을 갖게 했는지 알 도리는 없었다.
그자들에게서는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특색이 보이지 않았다.
굳이 차이점을 말하자면 전반적인 성정이 온건하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성격 면에서 다양성이 있었고 활동 배경이나 외적 조건에 있어서도 이렇다 할 공통된 분모가 없었다.
모든 스펙트럼의 인간 군상이 그 안에 모두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그들의 근본은 무엇이지?’
라이텔바흐는 지난 몇 년간 그 문제를 고민해왔다.
플레먼 에이비슨과 어니스트 마이런을 만난 뒤로는 그 궁금증이 더욱 깊어졌다.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희미하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수수께끼에 그의 학구열은 더욱 불타올랐다.
최근 그는 이러한 이유로 헌터 협회들로부터 면역자들의 관리 권한을 모두 회수하였다.
지금까지는 은밀하게 진행되던 면역자들과의 접촉 및 교류 관리 작업이 한 조직으로 집중되었으니 분명 외부에서도 이 미시적인 변화를 포착할 것이다.
더욱이 라이텔바흐 휘하의 협회가 전 세계에 골고루 흩어진 면역자들을 특정 지점들로 이주시키기 시작했으니 이쯤 되면 세계 정부 당국 측에서도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이것은 취약점이 아닌, 본래 라이텔바흐가 의도한 바였다.
‘모든 정황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들과 세계 정부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음이 분명해.’
라이텔바흐가 지금껏 연구하여 알아낸 면역자들의 ‘희미한 공통 특성’이 손에 꼽을 만큼 적게나마 몇 있었다.
첫째, 그들의 가계도에 나타난 기묘한 역사였다.
그들 중 다수는 직계 가족이 없거나 친척들로부터 절연을 당했다.
흥미롭게도 고인이 된 면역자들의 일가 친척이나 가까운 인연들은 대부분 원인을 분석하기 힘든 미심쩍은 사고사나 비명횡사를 겪었다.
2세대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직계 선조 가운데 세계 정부 측에 의해 숙청당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도 자주 발견되었다.
‘악취가 나는군.’
두 번째로 면역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지역에 온전히 섞이지 못했다.
이웃들 사이에서 명망이 좋으며 덕성이 풍부하다는 평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인지 모르게 늘 위축되어 있었고 쫓겨다니는 듯한 패턴을 보였다.
숨어 지내는 이들도 더러 있었고 여러 차례 이주를 반복한 이들도 있었다.
정황을 보건대 그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숨기고 있는 것이 있음이 분명했다.
‘범죄자들인가? 당국의 추적을 피하는?’
하지만 지금은 독립 운동가들도 노골적으로 헌터들의 조력을 받아 세계 전역에 암약하며 힘을 야금야금 키워나가는 형국이다.
면역자들은 그런 독립 운동가들과 달리 모든 면에서 소극적이었다.
그들 자신이 정부를 향해 어떤 잘못을 범했다기보다는 그저 이유가 없이 가해지는 위협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며 자발적으로 도망다니는 느낌이었다.
플레먼과 어니스트는 그런 그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은 형편이긴 했다.
아마도 그들이 거하는 지역이 세계 정부의 힘이 약한 호주이기 때문도 있겠지.
실제로 호주 지역에서 발견된 면역자들의 인생은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먼 또한 라이텔바흐 앞에서 분명 무언가를 숨기는 기색이었다.
친구로 인정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터놓지 못한 무언가.
그것이 무엇일까?
“흠.”
라이텔바흐는 세계 지도 위에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기호로 세 부류의 핵심 세력들의 지정학적 분포를 표기하였다.
정보의 누출을 예방하기 위해 디지털 데이터베이스에는 암호화된 정보 파편들만 남겨두었을 뿐, 온전한 데이터는 그의 머릿속에만 암기되어 있었다.
라이텔바흐는 최근 들어 발생한 동향 변화와 위치 변화들을 그 위에 반영했다.
‘헌터 세력, 독립 운동 세력, 그리고 변수가 될 면역자들까지.’
그는 체스판의 말들을 다음 단계에는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연구한 뒤 시행착오와 시뮬레이션을 거쳐 최적의 배치를 반영해 넣었다.
이후 추후의 계획을 보완한 그는 보안을 위해 지도를 불로 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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