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79회 내일의 태양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0.27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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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 섹터(북미) 40번 시티 스미르나 거리 42번지의 건물 크로스우드 빌딩, 이곳에는 108명의 성도(saint)들이 살고 있다. 민족과 출신지가 다른 이들이 운명처럼 한 자리에 이끌렸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연합이지만 이들은 이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함을 확신했다.
“내일이 밝아올까요?”
이 한 문장은 108명의 입주민 모두가 언제나 마음속에 품어오던 짙은 탄식의 질문이었다. 그들의 부모님들도, 양부모님들도, 선생들도, 양육자들도, 몇 대에 걸쳐 이 질문을 되놰왔다.
태양은 변함없이 떠오른다. 세상은 뒤집어졌으나 여전히 해는 동쪽에서 떠올라서 서쪽에 잠긴다. 한 위대한 현인이 고백하였듯 바람은 남쪽으로 가다가 북쪽으로 돌이키며 계속해서 빙빙 돌다가 자기의 순환 회로에 따라 되돌아가고 모든 강은 바다로 흐르되 여전히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들은 자기들이 나오는 곳으로 돌아간다 (전도서 1:5-7).
인간이란 이토록 의외로 작고 하찮은 존재이기에 인간의 악 또는 인간의 선은 너무도 그 작용이 미미하다. 거대한 우주의 질서를 흔들기에 그들의 몸부림은 너무도 하잘것없고 볼품없으며 하찮기에 그지없다.
변함없는 바람과 해의 순환은 한편으로는 인간을 향한 은총이기도 하며 신의 마지막 자비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순환은 지극히 고통스러운 덧없는 순환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은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한 이상 이렇게 덧없이 스쳐 지나간다. 한 세대는 지나가고 다른 세대는 오며 아무도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깨닫지 못한다. 인생은 풀과 같이 연약하며 짧고 아무도 영원에 대해 바르게 바라보는 이가 없다.
물론 헬게이트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내일도 해는 뜨리라’라는 격언도 도전받게 되었다. 헬게이트의 침식이 이뤄지는 권역 안에서는 해가 뜨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이제는 누구도 내일의 해를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저주에서는 자유로웠다. 플레먼 같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곳에 모인 모두가 하늘의 해가 사라지는 저주를 보지 못한 채 살아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엄습한 어둠의 밤은 다른 것이었다. 해는 늘 뜨건만, 세상은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꾸역꾸역 원래의 규칙대로 굴러가건만, 그들이 소원하는 영적인 태양은 언제 떠오를 것인가. 이미 그들 앞에 펼쳐진 영적인 하늘은 시커먼 흑암뿐이었고 이 같은 상태가 지속된 지 너무도 오래되어 그 시작이 언제인지도 잊게 되었다. 셋째 하늘의 찬란한 보좌는 그들로부터 얼굴을 돌이켰으며 둘째 하늘의 칠흑 같은 지독한 악취만이 그들의 모든 영적 시야를 덮는 중이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찬란한 빛을 잃었고 복음의 권능은 박탈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그들과 함께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약속하셨던 그분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정말로 우리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돌이키신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의 비통한 외침은 소리 없이 아우성과 단말마를 내질렀다. 우리는 정말 주님의 얼굴을 언제 뵐 수 있을꼬.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그분의 아름다운 영광을 보지 못하는가. 정녕 우리의 죄가 우리와 그분 사이를 짙은 구름처럼 가린 것인가.
먹고 사는 문제는 그런대로 해소되었다. 여전히 많은 성도가 궁핍함 가운데에 있었으나 헬게이트 사태가 시작된 이후로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상대적 빈곤이 많은 부분 해결되었다. 독재 체제의 약화, 자유 시장의 재활성화, 그리고 헬게이트 재난으로부터의 면제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들의 상대적 평온함 덕분이었다. 만일 이런 역설적 변화가 없었다면 여기 있던 이들 모두가 이미 절대적 빈곤에 질식되어 죽었거나 잡혀가 존엄성을 잃었으리라.
그러나 이는 결코 위안과 평안을 주지 못했다. 도리어 생존과 궁핍의 문제가 완화되자 죄책감과 마음의 무게감은 더 극심해졌다. 자신들의 현재 위치가 보였기에 더 괴로웠다. 너무도 오래 지속된 세상의 영적 어둠을 직시하는 괴로움, 복음의 전달자로서 패배했노라는 열패감, 그리스도에 대한 죄의식과 미안함, 세상이 헬게이트 사태로 고통받는 것에 대한 죄책감까지.
이렇듯 그리스도인들은 긴 시간을 슬픔 속에서 애통하며 살았다. 그들은 애통하는 자가 되었다. 주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위로가 함께하리라고 약속하셨거늘, 우리는 그 위로를 어찌 발견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기에 그들의 질문은 늘 이것이었다. 내일의 태양은 언제 밝아올까요. 그들이 찾는 태양은 지구를 지배하는 태양계의 항성이 아니었다. 하늘들의 하늘, 그 위에 좌정하신 분의 아름다운 얼굴빛. 그저 그 빛을 다시 찾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들의 잘못이 용서받을 수 있기를. 주께서 이 고통을 고치시기를. 언제나 소원하고 소원하며 하염없이 애타게 기다릴 뿐이었다.
플레먼은 스무 명의 동료가 모인 작은 방에서 조용히 기타를 뜯으며 선율을 만들어내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영감으로 창조된 멜로디를 어느 낡은 시 위에 결합했다. 시간상으로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신선한 시이지만, 잔혹한 흑암의 권세가 그것을 파묻었기에 이제는 적은 이들만이 이 시를 쥐고 있다.
Von guten Mächten treu und still umgeben
선하신 능력에 고요하게 감싸여
Behütet und getröstet wunderbar
보호받고 위로받는 이 놀라움 속에
So will ich diese Tage mit euch leben
나 그대와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Und mit euch gehen in ein neues Jahr.
나 그대와 함께 새 날을 맞네
Von guten Mächten wunderbar geborgen,
선하신 능력으로 우리는 보호 받고
Erwarten wir getrost, was kommen mag.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해
Gott ist mit uns am Abend und am Morgen
주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니
Und ganz gewiss an jedem neuen Tag.
하루 하루 확신하며 사네
한 사람 한 사람씩 플레먼의 가르침에 따라 시와 음율을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그들은 한명씩 기타 소리에 맞춰 작은 음성으로 천천히 한 소절씩 노래하였다. 그들의 애원과 슬픔을 담아, 동시에 그나마 힘겹게 붙들고 있는 마지막 소망을 담아. 이 순간 그들은 시와 찬송가와 영적 노래로 그들 자신에게 말하는 동시에 마음 속에서부터 주께 노래하며 음률을 만들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겁니다.”
빵집을 운영하는 40대 남성, 안드로니쿠스와 그의 아내 유니아가 말했다.
“그분께서 이 땅에 영광스럽게 재림하셔서 모든 악을 끝내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실 겁니다.”
모두의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것만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소망이었다. 더는 사람들이 구원받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때가 이르렀고 사람들은 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두고 있으며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섰다.
이 세상이 그 저주받은 날 그와 같이 추락한 것은 바로 이에 대한 징벌이요, 이 어리석음에 대한 결말이었다.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교회마저도 건전한 진리에서 떠났고 세상적인 가르침과 타협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다윈의 진화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니체의 철학을 향해 환호하였고 성경의 절대성은 부인되기 시작했다. 성경 비평학이 시작되었고 말씀을 인간의 잣대로 함부로 고치는 일들이 자행되었다. 이런 배교를 허락했으니, 주님께서는 저주받은 두 번째 세계 대전을 통해 세상을 치신 것이리라.
그 결과 이제는 정말로 소망이 없게 되었다. 선교는 봉인되었다. 누구도 진리를 듣지 못하는 세상이 임했다. 주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부수고 다시 시작하셔야만 길이 열리리라.
“하지만 우리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 앞에 모두가 다시금 무거워졌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태복음 24:14).] 그런데 우리의 지금 현주소를 보라. 열심히 애를 써서 헌신해도 모자랄 판에 모두 무기력한 패배자가 되어 있다. 주께서 오실 길을 닦을 능력조차도 없는 겁쟁이로 전락했다. 이런 마당에 무슨 소망을 본단 말인가.
주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오시긴 오시겠지. 하지만 그것이 우리 세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일평생을 이런 패배감 속에서 낙담하며 살다가 무가치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전 세대의 믿음의 사람들을 무슨 낯으로 뵌단 말인가. 아니, 주님의 낯을 어찌 뵌단 말인가.
“우리가 정말 떨어지기 시작했던 그 시작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플레먼이 질문을 던졌다.
“추락의 시작인 세계 대전이 하나님의 징벌이었다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책망이었을까요? 배교인가요, 우상숭배인가요, 혹은 그분의 계명에 순종치 못함인가요?”
솔직히 너무 생각나는 것이 많아 감이 잡히지 않았다. 20세기의 교회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19세기의 선조들은 용맹스럽고 야성적인 복음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삶은 산 위의 도시와 같이 밝았고 소금과 같이 생동감 있었다. 작고 이름 없는 아낙네부터 위대한 설교자에 이르기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위대한 주의 일꾼이요 신실한 용사들이었다.
그에 비해 20세기는 어떠했는가. 타협, 비굴, 변개, 변절까지, 온통 주께서 실망하실 일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지독한 실수에 대해서는 미처 간과했는지도 모른다. 플레먼은 문득 궁금했다. 우리가 놓친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웃 사랑에서 실패했는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에서 실패했는가. 혹은 그 전부인가.
무작정 이전의 날들에 대한 향수에만 빠질 수는 없으리라. 위대한 현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이르기를, 이전의 날들이 이날들보다 더 나은 이유가 무엇이냐? 하지 말라. 네가 이것에 대하여 지혜롭게 묻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7:10).’ 그런즉 우리가 정작 숙고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해야 내일을 고칠 수 있느냐?’ 일 것이다.
“우리는 회한에 잠겨 탄식하며 불평하기 쉽습니다.”
분명 지금은 비참한 시대요, 처참한 세상이다. 죽은 성자들의 세계. 이전 세대의 성도들은 목숨을 잃었고 지금 세대의 성도들은 영적으로 기력을 잃었다. 하지만 솔로몬은 현재에 대한 불평과 과거에 대한 미화는 어리석은 자의 패배 의식에 불과하다고 경고하였다.
“하지만 분명 비극은 꽤 오래전부터 거듭되었을 겁니다.”
정말 몰락 이전의 시대는 괜찮은 때였는가. 어쩌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기독교계는 안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으리라. 중세는 그러한 시대였고, 종교개혁이 잠시 어스름하게 빛을 비추었다지만 그 내면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병폐로 뒤틀려 있었다. 무엇이 우리의 고질적인 죄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한 숙제라는 감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해답을 찾아야만 주님께서 다시 오실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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