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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80회 참회록 (1)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1.02 | 회차평점 0 0

 

 

 

욕조에 누운 라이텔바흐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느슨하게 몸의 긴장을 해제하였다. 최근의 여러 사무로 인해 그의 생각은 분주함으로 분산되었다. 정식으로 승진이 허가되었고 이에 따라 여러 인계 사항을 전달받았다. 헌터 세계의 정치에 깊숙이 관여할수록 피곤해질 일은 많다.

 

 

그간 라이텔바흐는 무력과 능력상의 으뜸으로서 중대한 위상을 차지하긴 했으나 정치에 관여할 권한이 제한되었다. 이 때문에 윗분들만의 영역인 여러 기밀은 많은 부분 허락받지 못했다. 세계 정부와의 의사소통 과정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제한적이었다.

 

 

이제는 당회장 직위를 얻었으며 머지않아 발생할 일련의 변수들까지 고려한다면 그 윗줄도 능히 노려볼 수 있다. 유례없이 빠른 고공행진이다. 이에 비례해 책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단순히 능력상의 일인자인 것만으로 자만한다면 맡을 책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리라.

 

 

“슬슬 본격적인 싸움의 시작이다.”

 

 

그가 계획하는 바는 정부의 권세가 더 잘게 쪼개어지는 것, 그리고 반대로 정부를 견제하는 민간 및 헌터 세력은 고도화되고 결속하는 것이다. 점진적으로 세력의 균형을 뒤집어 재정립하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계획이다.

 

 

이를 위한 준비가 이미 상당 부분 진척되었다.

 

 

우선은 세계 전역에서 우후죽순 일어난 민간 기업, 무역 조직, 싱크탱크, 독립형 비공식 군산복합체, 반정부 언론계 등의 촘촘한 카르텔. 이들은 세계 정부의 영향력을 극복하고 자유를 쟁취하려는 의지 하에 헌터들과 연맹하였다. 또한 헌터 중 상당수가 저런 조직 속에 직접 침투하거나 자기 손으로 민간 조직을 창건하였다. 뛰어난 지력 덕분에 헌터들은 순식간에 수뇌부를 장악하였고 자신의 사업을 급속도로 번창케 하였다.

 

 

라이텔바흐도 뛰어난 투자 감각과 사업적, 정치적 역량을 바탕으로 저 헌터-민간 거대 복합체 속에 자신의 지분을 심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지렛대로 삼아 기회들을 포착했고 이후 공격적으로 카르텔 내부에 자신의 힘을 증대시켰다. 이렇게 일을 시작한 지 거의 3년 만에 그는 카르텔의 뼈와 살 중 핵심부 대부분을 자기 것으로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두 번째로는 반정부 조직들이 있다. 앞선 민간 기업-조직 복합체가 양지의 힘이라면 이쪽은 음지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세계 정부의 입장에서 말이다. 라이텔바흐는 이미 이들도 상당수 자신의 편으로 포섭했다. 그의 지혜로운 조언에서 덕을 본 독립운동가 조직들은 이미 빠르게 세를 불려 부흥하였다. 라이텔바흐가 개입하기 전에는 작은 잔챙이에 불과했던 조직들이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세계 정부가 경계해야 할 정도로 팽창했고 그 내실 역시 매우 탄탄하게 체계화되었다.

 

 

세 번째 준비는 자본이었다. 헌터들과 민간인들의 합작품인 범지구적 연합 카르텔, 그리고 반란 분자들의 비밀 결사대들, 양지와 음지의 두 권세를 활용하여 라이텔바흐는 세계 경제 흐름의 무게중심을 쥐었다. 결정적일 때를 위해 그는 착실하게 재산을 불렸다. 사업, 투자, 권모술수, 상업과 무역, 특허, 비밀 거래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함으로써 말이다. 인류를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세계 정부를 향해 치명타를 입히기 충분할 정도로 그는 재력을 증대하였다.

 

 

이는 헌터 사회가 아닌, 오롯이 라이텔바흐 개인에 속한 힘이요 그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었다. 지난날 지독하게 불우하게 자랐던 그는 독종으로 되었고 악착같이 권세를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에게 재력은 복수를 위해 꼭 필요한 도구였다.

 

 

만일 그가 헌터 수장의 자리에까지 오른다면, 이 세 자원을 더욱 확실하게 운용할 준비가 갖춰지는 셈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러한 인간계 차원에서의 능력 이외의 것이 있다. 헬게이트가 아직 잔존한 이상, 그는 또 한 차원에서의 권력을 쥐어튼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헬게이트들과 그 어미들인 유사-심연들이 취할 계획을 예언할 수 있는 혜안 역시 강력한 무기이다.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아는 그이기에 미래를 마음대로 설계할 기회가 있고 이는 현실에서의 세를 강화하는 발판이 된다.

 

 

 

 

 

“새로 얻은 능력을 시험해 볼 기회가 온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군.”

 

 

천장을 향해 오른팔을 뻗쳐 손을 편 라이텔바흐. 본래부터 헬게이트를 예지하는 능력이 담긴 그의 두 눈에는 이제 새로운 정보들이 아른거리는 중이었다. 서쪽, 남쪽, 동쪽의 탑을 함락시킴으로써 획득된 새 능력이었다. 바알, 몰렉, 더 썬을 처단한 후 그는 각 탑의 본질을 관통하는 소스 코드를 탈취하였다. 그의 뇌 속에 담긴 이터널셀이 그 소스 코드들을 학습하였다. 오랜 되새김질 과정을 거쳐 그는 깊은 비밀의 정수를 터득해 자신 속에 새겨넣었다.

 

 

새로운 기술의 본질은 해킹 능력이다. 지금까지는 안티-게이팅 파워를 매개물로 삼아 헬게이트와 그 부산물을 물리적으로 파괴하기만 했다. 이제는 그 패러다임이 바뀌게 될 것이다. 헬게이트와 그 권역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간주하여 접근하고 내부에서부터 그 시스템에 간섭하는 해킹 작용. 앞으로는 이 또한 라이텔바흐의 전략 중 일부가 될 것이다.

 

 

시험은 아직이다. 활용법은 실전에서 익혀야 한다. 북쪽 바벨탑이 이를 위한 좋은 연습 상대가 될 것이다. 혹은 유사-심연들이 다른 큰 위협들을 현세에 강림시킨다면 그들 또한 제물이 되리라. 그리고 그 능력은 언젠가 인류와 헬게이트, 독립군과 세계 정부 사이의 역학을 반전시키는 열쇠 중 하나가 되리라.

 

 

 

 

 

 

 

 

 

 

*

 

 

 

 

 

 

 

 

목욕을 다 마친 라이텔바흐는 룸메이트와 더불어 점잖게 겸상하였다. 성질이 많이 누그러진 라이텔바흐는 나름의 친절을 발휘하여 어니스트를 인격적으로 대우하고자 노력했다. 두 사람은 편안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진중하게 대화를 나누며 자기들 삶의 경험을 공유하였다.

 

 

“플레먼 군과는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나?”

 

 

라이텔바흐가 질문을 던졌다.

 

 

“어린 시절부터요.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그때쯤 아저씨네 댁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어요.”

 

 

“네 가족은?”

 

 

종종 이런 면에서 라이텔바흐의 사려 깊지 못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비정한 이 세대에 걸맞게 남을 이용해 먹는 방식의 사회생활 방법에만 익숙해진 라이텔바흐였다. 그렇기에 가면을 던진 본래의 상태에서는 진정으로 따스하게 남을 배려하는 데에는 미숙했다.

 

 

“모두 돌아가셨어요.”

 

 

“이런, 실례했군.”

 

 

“괜찮아요.”

 

 

어니스트 마이런은 고아 출신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자세한 사항은 지금 눈앞의 상대에게는 말해줄 수 없다. 사정을 설명하려면 너무도 많은 비밀이 드러날 테니까.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가 아니면 아직 그런 비밀을 공유할 수 없다.

 

 

어니스트의 친척들은 적잖은 수가 그리스도인이었다. 아마도 그의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신앙의 유산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어니스트의 항렬까지 계승되었다. 그러나 세계 대전이라는 큰 비극을 계기로 몰락이 시작되었다.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피해 어니스트의 친척들은 육대주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어디든 독재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비상 계엄령을 핑계로 이뤄진 여러 차례의 대숙청 이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거리에 널브러진 시체가 되었고 어니스트의 친척들도 거의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지금 사용하는 이름과 성 역시 임시로 새로 만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혈육들은 사실상의 멸문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꼬마 어니스트는 이런 비극 속에서 혈혈단신의 고아로 남겨졌다.

 

 

“부모님은 저를 데리고 호주로 도피했어요. 거기까지는 감사하게도 성공했지만, 그 뒤가 문제였죠. 두 분 모두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요. 저는 홀로 밀실에 숨어 숨을 틀어막은 채 살아남았죠.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말이죠.”

 

 

의외로 어니스트는 무거운 이야기를 덤덤하게 털어놓았다. 마음을 모두 내려놓았기 때문일까. 그는 더는 그 과거에 묶이지 않은 듯했다. 라이텔바흐는 은근한 쓰라림을 느꼈다. 깊이 체휼 되는 공감일까. 동시에 경탄도 들었다. 의외로 강인한 마음의 소유자였군. 저런 괴로움의 기억을 뒤로 하고 힘겹지만,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는 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었죠.”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후로도 어니스트는 걸식, 노숙, 냉대, 놀림 등 온갖 수모를 겪었다. 혼자였더라면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그랬던 그를 향해 자비와 긍휼을 가르쳐준 것은 플레먼 도련님의 가정이었다.

 

 

“플레먼 도련님과 그분의 부모님은 저보다 몇 년 앞서 호주에 정착하셨어요.”

 

 

“그들도 너처럼 도망쳐 나왔던 건가?”

 

 

“그랬었죠.”

 

 

라이텔바흐는 무슨 이유로 도망쳐야 했는지는 더 깊이 묻지 않았다. 자신도 같은 고통을 겪었기에 나름 체감할 수 있었고 상대의 상처를 더 헤집고 싶지는 않았다.

 

 

“도련님네 가정에는 다행스럽게도 저희 가정보다는 천운이 더 따랐던 것 같아요. 비록 다른 친척과는 헤어지거나 사별했지만 어쨌건 이곳에 무사히 정착하는 데 성공하셨죠.”

 

 

플레먼네 식구들은 신분과 이름을 모두 바꾼 채 호주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게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 재앙이 그 당시쯤 터졌으니 바로 헬게이트의 등장이었다. 갑작스럽게 지구 전체를 휩쓴 헬게이트의 창궐로 인해 세계 정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 일을 계기로 피 흘림을 동반한 정권 교체가 일어났으며 정부의 권세는 권역별로 쪼개졌다. 각종 공공 기관이나 정부 기관의 영향력도 헬게이트 사태로 인해 마비되었다.

 

 

호주는 이런 일의 피해에서 가장 자유로웠고 플레먼과 그 부모님이 살던 지역은 더욱 청정 구역이었다. 그 덕분에 자유와 기회 모두를 얻은 부부는 재기할 수 있었다. 당시의 플레먼은 다섯 살이었다. 부부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 열심히 수고하였고 이내 터를 잡고 수고의 열매를 얻었다. 그 집안의 일은 축복을 받아 번창하였다. 덕분에 플레먼은 어린 시절의 어두운 기억을 잊고 잠시나마 평온함을 허락받았다.

 

 

“그때 그들이 너를 거둬주었군.”

 

 

“네.”

 

 

어니스트는 플레먼의 부모님께 고용되었고 식객으로 그 집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았다. 어린 어니스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극히 작은 소일거리밖에 없었으니 사실상 이는 갈 곳 없는 고아를 향한 동정이었다.

 

 

“플레먼 도련님은 저한테 있어서는 유일한 친구였어요.”

 

 

더부살이하는 머슴과 집주인의 유일한 아들. 객관적인 처지를 보면 둘의 관계는 이러하였다. 하지만 플레먼은 어니스트를 그렇게 대우하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의 형제처럼 여겼다.

 

 

당시의 소년 플레먼은 이미 회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참 신자였던 것 같다. 반면에 그때 어니스트는 아직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전의 부모님께 얼핏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부모님의 하나님이지 자신의 하나님은 아니었다. 그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플레먼과의 우정,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넌 그 친구에게 정말 충실하고 신실하군.”

 

 

“과찬이에요. 그렇게 되고자 노력할 뿐이죠.”

 

 

“무엇이 너를 그렇게까지 감동하게 하였지?”

 

 

라이텔바흐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주인집의 은혜에 대한 보은인가?”

 

 

“글쎄요. 저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어니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만일 인간적인 정이나 감사함이 원동력이었다면 그것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어니스트는 자신의 본성을 알았다. 자신은 비겁한 사람이다. 자신이 플레먼에게 빚진 것은 고작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더 들려드릴까요?”

 

 

어니스트가 되물었다.

 

 

“부탁하지.”

 

 

라이텔바흐가 대답했다.

 

 

“참고로 이건 대단히 부끄러운 참회의 고백이에요.”

 

 

궁금증을 유발하는 서두의 말과 함께 어니스트의 얼굴은 숙연함에 젖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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