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85회 원정대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1.26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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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먼은 악몽을 꾸었다.
일반적인 형태의 몽중 현상이 아닌, 매우 생생하고 섬뜩한 꿈이었다. 과연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으나 예지몽에 가까운 무언가라는 감상이 들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탈출한 그는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된 그 내용들을 다시 회상하며 정리하였다. 내용은 세상의 멸망에 관한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지구 문명의 완전한 종결과 인류의 종말. 그는 꿈에서 그것을 어렴풋이 보았다.
이것은 오늘날 같은 때에는 아주 연상하기 힘든 상상은 아니긴 하다. 인류는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멸망 혹은 그에 준하는 트라우마를 목격했다. 세계 2차 대전이 그러하였고 그때만 해도 버섯구름과 함께 수많은 문명 세계가 먼지가 되었다. 이어서 인류는 대학살의 시대를 겪었고 역병과 자연재해들을 겪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헬게이트들이 출현했고 그때까지 살아남은 인류의 3분의 1이 홀연히 증발하였다.
1세대 헌터가 정식 데뷔하여 출정하기까지 7년의 지옥 같은 시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죽었으며 세상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1세대 헌터의 등장 후 약 1년쯤 지나서 2세대 헌터들이 합류했다. 이어서 2년이 더 지난 뒤로는 3세대 헌터들이 데뷔했다. 이로써 전세가 조금 역전되었고 헬게이트와의 전쟁 역시 저울추가 인류 측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기뻐하긴 일렀으니, 헌터들이 데뷔한 지 3년 차에 이르던 해에 그전까지는 유례없던 SSS 랭크 던전이 메인주에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인류는 큰 소모를 겪었다.
3년 간의 혈전과 많은 소실 끝에 메인주 헬게이트는 봉인되었다. 헌터 측 전력이 일부 상실되긴 했으나 다시금 더 많은 3세대 헌터들이 충원되었고 아직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채 대기 중이던 1세대 및 2세대 헌터들도 연막 뒤에서 나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후 6년 동안 인류는 여러 차례 헬게이트 웨이브를 겪으며 고비를 넘겼고 헌터들은 불같은 시련을 통해 서서히 강해졌다. 개인 차원에서도, 공동체 차원에서도. 시련이 인류에게 유익을 가져다준 면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명 소실의 고통을 결코 축소해서 해석할 수는 없다.
1세대 헌터의 데뷔 이후 12년째가 되었을 때 마침내 가장 잠재력이 높으며 숫자도 많은 4세대 헌터들이 전장이 투입되었다. 이 시기에 눈부신 발전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헌터들의 기술, 전술, 무기, 약제가 경이롭게 상향되었고 헌터 집단의 전투력도 변곡점을 넘어 급격히 수직 상승하였다.
인류는 자신하였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재앙에서 벗어났노라고.
그러나 그로부터 다시 6년 만에 두 번째 SSS 급 헬게이트가 세상에 출현했다. 그것과 그것이 낳은 ‘괴물’은 그야말로 절망 자체였다. 처음으로 헌터들마저도 해결할 수 없다고 여기며 두 손 두 발을 들었던 난적. 심지어 헌터들 전부가 덤벼도 승산이 전혀 없다는 계산이 섰다.
당시는 정말로 확고하게 정해진 멸망이 임하는 줄로 알았으나 기적적으로 인류와 헌터 사회는 1년 만에 그 헬게이트를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단 한 명의 헌터의 힘에서 나온 업적이었다.
그러나 플레먼이 목격한 가상의 미래는 그런 류의 지난 시련들과는 내용이 달랐다. 헬게이트에 의한 멸망이라기보다는, 다른 무언가의 간섭이 보였다. 자세한 내용까지는 인지되지 않았으나 분명 더 깊은 차원의 존재들의 침략이 개입된 것으로 보였다. 플레먼은 이것이 정말 장래의 일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상상이 꿈이 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매우 근심하였다.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보통 때 꾸는 꿈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정신 현상이거늘.
‘이건 무슨 뜻일까.’
성경을 어느 정도 아는 플레먼이기에 이 괴이한 악몽이 주는 메시지가 더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성경에도 ‘마지막 때’에 대한 기록, 곧 인류의 멸망에 대한 예언들이 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떨어지며 인류가 학살당하는 어마어마하고 공포스러운 날. 지금이 혹시 그날일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십 년간 겪은 일들의 모습이 너무도 성경 예언의 청사진과 닮아있음을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다. 성경 공부를 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시대인지라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많은 신학적 지식들이 파묻히고 잊혔다지만, 그나마 남들보다는 좀 더 성경을 읽었던 플레먼은 예언 속의 중요한 이정표들을 기억했다. 그것들이 정확하게 어떻게 맞춰지는지는 가르침을 깊이 받지 못한 탓에 플레먼도 알지 못한다. 다만 모양은 비슷했다. 폭군의 정복 전쟁, 전쟁들, 기근, 자연재해, 신자들을 향한 핍박, 그리고 이어지는 심연의 열림과 고통스러운 재난까지도.
그러면 지금도 거듭 성경에 예언된 일들은 성취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라고 선뜻 단정짓기에는 뭔가 이상한 점도 보인다. 예컨대 성경에는 분명 복음이 땅끝까지 전달될 것이라는 예언이 적혀 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은 정확히 그 반대가 아니던가.
만일 어제 꾼 꿈이 아예 헛것이 아니라 모종의 경고가 담긴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궁금증은 더욱 증폭된다. 꿈에서 인류는 아무 희망 없이 멸망을 겪었다. 그것은 지옥과도 같은 흑암의 권세에 의한 일방적인 파멸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메시아께서 장엄하게 강림하여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라 하였다. 두 내용에 모순이 있다면 성경 쪽이 맞다고 봐야 한다.
‘혹 하나님께서 미리 이러한 가능성을 예방하라고 경고를 하신 걸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플레먼도 자신의 지식이 너무도 부족함을 알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부디 자신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시고 성경에 대해 닫힌 눈을 열어주시기를 갈구했다. 하지만 아직은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느낌, 흡사 ‘미싱링크’가 존재하는 듯한 예감이 든다. 이 미싱링크를 발견하지 못하면 성경의 복잡한 예언들이 두루뭉술한 수수께끼로 남으리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
꿈으로 인해 홀로 남몰래 괴로워하며 고뇌하던 중,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
장신의 훤칠한 흑발 청년, 라이텔바흐가 플레먼이 거하는 크로스우드 빌딩을 방문했다. 그는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것보다 더 건강하고 기운 넘쳐 보였다. 플레먼은 즉각 생각했다. 어니스트를 보낸 게 효과가 확실하구나. 역시 자신이 인정한 최고의 살림꾼이다.
“라이텔바흐 씨.”
“당신도 좋아 보이니 다행이군요.”
뭔가 고심하는 기색이 있는 듯해 보이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일 테니 조용히 넘어가자. 라이텔바흐는 이렇게 생각하며 플레먼을 살폈다. 어쨌건 몸뚱이는 건강해 보이니까.
“이제는 준장님이라 불러야 하려나요.”
“최근에 ‘당회장’의 직위로 승진했습니다.”
“아, 소장(少將)이군요.”
“우린 친분이 있으니 그냥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시죠.”
라이텔바흐는 웃으며 호쾌하게 친구에게 악수를 권했다.
플레먼은 그의 방문에 어떤 중요한 목적이 있음을 간파했다. 과연 그 예상대로 라이텔바흐는 모험에 참여해 줄 것을 플레먼에게 제안했다.
그는 지난번에 ‘레기온’과 충돌했던 네 명의 면역자, 곧 플레먼이 지닌 ‘기이한 특성’을 전이 받은 면역자 중 몇을 데려갈 계획이었다. 그들이 이번 탐험에는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선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인이니 넷 전부를 데려가는 것은 무리이리라.
“쥬오디아 양과 신티 양은 아직 훈련이 충분히 쌓이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참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두 여장부가 지금보다 더 강인해진다면 그때는 모험에 데려갈 수 있겠죠.”
“위험한 곳인가 보네요. 역시나 라이텔바흐 당신이 나설 일이라면 헬게이트에 관련된 일이겠죠?”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주할 미연의 가능성’이 있다 정도로 해두죠.”
“알겠습니다.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아, 당신 한 명 정도는 얼마든 지킬 수 있으니, 걱정은 안 해도 좋습니다. 제 곁에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됩니다.”
“아.”
바로 납득되었다. 라이텔바흐라면 그 어떤 헬게이트나 어비씨언도 쓰러트릴 수 있는 최강의 헌터이니까. 여러 명을 지키며 싸우는 일이라면 몰라도 한 명을 보호하는 정도라면 자신 있다는 말이겠지.
“어니스트는요?”
“음, 그 친구는 절대적으로 아껴야 할 필요가 있어서 말이죠.”
라이텔바흐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암, 안 될 말이지. 그런 보물단지를 위험한 곳에 노출해서는 안 된다. 그가 없으면 누가 밥상을 차려준단 말인가.
“하하, 어니스트랑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
플레먼의 웃음에 라이텔바흐는 어색한 표정으로 쑥스러움을 감췄다.
“그 친구가 잘 챙겨주죠.”
“음식 솜씨는 쓸 만한 것 같습니다. 생활력도 야무진 것 같고요.”
“저희 집의 자랑거리 중 하나랍니다.”
라이텔바흐는 플레먼의 가식 한 점 없는 고백에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정말 플레먼은 어니스트에 대해 한 치의 원망도 없단 말인가. 마음에 담아둘 법도 할 텐데. 혹 원망할 진짜 대상이 세계 정부임을 알기에 참고 있는 것인가. 플레먼이라는 인간은 참 알다가도 모를 신기한 친구였다.
‘저 친구를 깊이 알수록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군.’
만일 자신도 그의 곁에서 동행하다 보면 새로운 것들을 배울 수 있을까? 목표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법이라던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영혼의 자유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이라던가. 자신이 결코 플레먼과 같은 방식으로 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궁금증이 들었다.
*
이후 라이텔바흐의 자가용을 타고 둘은 장소를 옮겼다. 곧 어느 비밀스러운 약속 장소에 이르렀다.
“참고로 내일쯤부터 공동체에 모인 면역자들을 열 명씩 모아 임시로 장소를 옮길 계획입니다.”
“설마 이사를 해야 한단 말인가요?”
깜짝 놀란 플레먼이 라이텔바흐에게 되물었다.
“아, 놀라셨겠군요. 그건 아닙니다. 얼마 후에 다시 원장소로 돌려보낼 생각입니다. 다만, 조만간 어떤 사태가 세계 전반에 벌어질 가능성이 관측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대응이 필요할 듯해서 말이죠.”
“아.”
플레먼은 여전히 궁금증이 남긴 했으나 대강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라이텔바흐가 말한 ‘사태’라는 것이 뭘까. 헌터들이 예견해 낸 무언가이니 아무래도 헬게이트 관련 현상일 가능성이 높겠지. 모르긴 해도 헌터들은 헬게이트를 공략할 이능을 지닌 만큼 ‘기상예보’를 하듯 헬게이트의 발생 패턴을 읽을 유사-예지력을 지녔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긴 지난번에도 정확하게 알고 우리를 구출해 주러 오셨지.’
열 명씩 모아 팀을 나누어 면역자들을 흩는다고? 그러면 혹시 이 역시도 안전을 위한 대피라고 보면 되려나?
하지만 저번에 언뜻 듣기로는 헬게이트들은 면역자들 곁에서는 잘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과 고인이 된 가족들도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살면서 헬게이트 사태의 압박감을 피부로 느끼지 못해왔지 않았던가.
라이텔바흐가 ‘사태’라고 표현했으니 그러한 기존 규칙에 어그러짐이 생기기라도 하는 것일까?
‘마치 나처럼?’
레기온은 플레먼 자신을 두고 변수라고 말했다. 자신과 오랜 시간 신앙적 교류를 나눴던 어니스트, 쥬오디아, 신티도 자신의 그 이상한 특성에 전염되었다. 그로 인해서 그들 넷은 면역자임에도 불구하고 헬게이트에 노출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당최 의미를 모를 그 ‘자유도’라는 것에도 기여하게 되었다.
그러면 혹시 자신과 최근 교류한 백여 명의 공동체 식구들에게도 어떤 변화가 발생할 것인가?
온갖 궁금증이 불안감에 섞인 채 쇄도하였다.
‘복잡하게 내일 일을 염려해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될 텐데.’
플레먼은 생각을 정리하고자 애썼다.
‘라이텔바흐 씨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친구라지만 워낙에 꿍꿍이를 모를 계략가이다보니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 시각, 라이텔바흐는 이미 다음 무대에 대한 완벽한 청사진을 머릿속에서 구축해 둔 상태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면역자들을 모두 모았다. 세계 정부를 견제할 ‘독립운동가’들의 세력도 충분히 진보시켜 두었고 사방에 체스 말로서 배치했다. 이제 세 개의 탑을 무너뜨리고 얻은 새 능력에도 적응했다. 북쪽 탑과 이후 나타날 웨이브가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할 것인지도 이미 예지해 뒀다. 그러니 모든 변수를 퍼즐 조각으로써 모아 하나의 교향곡으로 완성해 낼 수 있다.
‘당신과 동류인 자들을 이용하려니 양심에 조금 찔리는군.’
라이텔바흐는 불편감을 안은 채 자신보다 한참 키가 작은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용서해 주시게. 미래를 위한 결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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