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93회 섬멸물질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1.19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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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산창과 리피드는 공명을 통해 최대 출력의 정보 붕괴 작용을 일으켰다. 헬게이트의 수명은 곧 강제로 종료되었다. 검은 장막으로 둘러싸인 권역 전체가 균열을 일으키며 붕괴 상태로 돌입했다. 별 문제 없이 A급 헬게이트의 공략이 마쳐진 것이다. S급 헌터 한 명만으로 이렇게 빠른 성과를 낸 건 상당한 선방이다.
“수고했다, 서 길드장.”
라이텔바흐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오자, 재석은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어떻게 된 겁니까? 교대로 돌입하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붕괴까지 아직 10분은 남았으니까. 일단 내가 개입해서 네크로시스(necrosis) 모드를 아폽토시스(apoptosis) 모드로 바꿔놓아야 민간인들에게 안전할 것 같아서.”
네크로시스와 아폽토시스란 원래 생물학적 용어로 세포가 죽는 두 가지 기전을 말하는 것이다. 괴사를 의미하는 네크로시스란 세포가 외부 자극 때문에 파열되어 급작스럽게 죽는 것이며 염증을 비롯해 많은 주변 조직 피해를 남긴다. 반면, 유전자에 내재된 프로그램으로 계획적으로 쪼개져 죽는 세포 사멸인 아폽토시스는 주변에 피해를 거의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헬게이트가 죽을 때에도 종종 관찰된다. 헬게이트 붕괴 후 던전의 소멸 역시 네크로시스 기전을 따르기도 하며 아폽토시스 기전을 따르기도 한다. 던전의 종류, 공략 방법, 파괴 과정에 따라서 그 방향성은 달라진다. 보통 헌터들은 최대한 아폽토시스 프로세스가 일어나는 방향으로 공략을 시행하기를 추구한다. 그래야 민간 피해가 최소화되니까.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조절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부족한 전력으로 단기간에 최대의 효율을 내야 할 때는 더욱 어려워진다. 조금 전의 공격의 여파는 확실했으나 헬게이트 붕괴 과정은 이미 네크로시스 쪽으로 기운 상태였다.
이미 방향성이 결정된 붕괴 과정을 교정하여 전환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어느 헌터도 그런 걸 해낸 적은 없었다. 심지어 라이텔바흐조차도 지금까지는 보인 바 없었다. 항상 처음부터 완벽하게 모든 붕괴를 아폽토시스로 유도하긴 했지만.
“대체 뭔 능력을 얻으신 겁니까?”
“쉿.”
라이텔바흐는 장난스레 윙크하며 재석에게 입단속을 요구했다.
“넌 나 믿지?”
“물론입니다.”
가끔 지나치게 상식을 벗어나는 기행들과 재주들을 선보이는 게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라이텔바흐란 그런 인간이니 재석도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아무래도 비밀 단속이 필요한 것 같은데 잠잠히 눈을 감아줘야겠다. 다른 헌터들이나 세계 정부 측이 모르도록 해야겠지.
“그 플레먼이라는 분이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군요.”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야.”
라이텔바흐는 손바닥 위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발동하여 무너지는 헬게이트 전체에 어떤 변경 명령어를 주입하였다. 이내 네크로시스 방식을 취하려던 헬게이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아폽토시스 방식을 취했다. 그것도 매우 극단적인 형태의 아폽토시스를. 자연적인 공략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헬게이트 자신이 자의적으로 뜻해야만 가능한 현상이다.
“그리고 너랑 훈련도 좀 할 겸 말이지.”
재석은 흠칫하였다. 올 게 왔구나.
“자주 오는 기회는 아니잖아.”
“좋습니다. 마침 잘 됐습니다.”
잠시 후, 헬게이트 권역은 수십 조각의 작은 던전들로 나뉘었다. 각 던전은 매우 천천히 붕괴 과정을 거치면서 안정적으로 축소되었는데, 10분 정도는 헬게이트 중심부 없이도 흑파와 어비쓰론의 농도가 일정량으로 유지될 듯했다. 밖으로 새어 나갈 일도 없으리라.
“섬멸물질을 생성하는 훈련, 연습해 보지.”
재석의 웨폰박스에서 커다란 건틀릿이 하나 사출되었다. 재석의 오른팔 위에 그것이 결합되었다. 그 내부에는 조금 전 공격용 창과 마찬가지로 미리 만들어진 섬멸물질이 저장되어 있었는데, 그 양은 아까와 달리 꽤 많았다.
“아직 네 수준에서 자력으로 생성하는 건 무리겠지. 이미 존재하는 섬멸물질을 응결핵으로 삼아서 소량의 추가 분량을 생성해 봐라.”
라이텔바흐는 정점에 이른 극한의 무공 고수가 젊은 제자를 양육하듯 재석의 훈련을 지켜봐 주었다. 지금 같은 연습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섬멸물질의 생성 원리는 간단하다.
자연계에서는 입자와 반입자가 충돌하면 양쪽 모두가 소멸하며 순수한 에너지가 방출된다.
그러나 헬게이트에서 만들어지는 삼 원소인 ‘다크포스’는 ‘흑파’와 ‘어비쓰론’은 상호작용 기전이 조금 다르다.
다크포스란 헬게이트가 현세의 요소 중 중력장이나 전자기장 같은 ‘역장(力場)’을 모방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현세의 물질을 침식하여 ‘심연독’으로 연성할 수 있으며 오염 정보체를 방출하여 헬게이트 밖을 더럽히기도 하며, 시공간 자체를 침식하기도 한다.
흑파는 헬게이트가 현세 요소 중 ‘파동’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정확히는 다크포스에 의해 시공간이 침식되면서 각 좌표에 새겨지는 ‘오염 스핀 값’이 진동하면서 그려내는 파동이 바로 흑파이다.
마지막으로 어비쓰론은 실제 물질인 입자를 모방해서 창조한 것으로 물질과 직접 상호작용할 수도 있다.
그 모두를 길항할 수 있는 안티-게이팅 에너지는 반면에 역장, 입자, 파동의 세 형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범용성 면에서는 탁월하지만, 효력의 특성화 정도는 낮은 편이다.
안티-게이팅 에너지가 흑파 및 어비쓰론과 맞상대할 때는 보통 그것들을 소멸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배열을 교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무기가 다른 표적을 상대할 때도 으레 그러하듯 말이다. 안티-게이팅 에너지에 침식된 흑파는 특유의 강력한 무리수(irrational number)적인 진동 패턴을 잃고 엔트로피를 상실한다. 안티-게이팅 에너지에 노출된 어비쓰론들과 그 결합물은 잘게 흩어져 강력한 질서를 잃어버린다.
보통의 헬게이트를 공략하는 전략으로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하지만 안티-게이팅 에너지가 썩어 넘치는 라이텔바흐는 전혀 다른 접근법을 시도했다. 흑파나 어비쓰론을 단순히 교란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질량 값’의 안티-게이팅 파워를 무식하게 때려 넣어 정확하게 정면충돌시킨 뒤 아예 입자와 반입자처럼 만날 때처럼 쌍 소멸시키는 방식. 일반적인 헌터의 안티-게이팅 파워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오로지 라이텔바흐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 쌍소멸 과정이 발생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순수한 에너지가 아니라 ‘섬멸물질’이라는 기괴한 실체가 생성된다. 헬게이트 오염물도, 안티-게이팅 에너지도 아닌, 제3의 무언가. 그것의 비상식적인 강력함은 헌터들과 헬게이트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크윽.”
제한된 10분 동안 재석은 수백 차례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현재의 그로서는 이미 만들어진 섬멸물질을 마중물 삼아 극미량의 섬멸물질을 생성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성공 확률은 1% 미만이었고 만들어진 섬멸물질의 질적 수준과 안정성이 너무도 낮았다. 새로 생성된 것은 0.00001초도 유지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꽤 성장하긴 했지만, 아직 멀었구나.”
곁에서 코치해 주던 라이텔바흐가 한숨을 쉬었다.
“으윽, 말도 안 돼. 이런 걸 숨 쉬듯이 뽑아낸다고요?”
탈진한 재석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한탄했다. 극소량의 미완성 섬멸물질 반죽만 손 위에 잠시 생성되었을 뿐인데 그 충격파에 팔 근육이 저릿저릿했다. 도저히 붙잡아둘 수가 없었다. 이미 가공해 놓은 ‘빌린 섬멸물질’을 운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난도였다.
“어차피 S급 헌터 중에서도 빌린 섬멸물질을 너만큼 다루는 녀석도 거의 없다.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진 않아도 돼.”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요.”
투덜거리는 재석. 동경의 대상인 라이텔바흐의 벽이 너무도 높게 느껴졌다. 다른 헌터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피부로 느끼니 더 절망적이었다.
“좀 도와주마.”
라이텔바흐는 제자의 팔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둘의 안티-게이팅 에너지가 하나로 교감하며 공명했다. 말초 신경계에 새겨진 이터널 셀도 잠시 접속되어 연합되어 작동하였다.
1분 정도의 치열한 연습 후 조금이나마 안정적인 섬멸물질이 재석의 손 위에서 만들어졌다. 그마저도 5초를 버티지 못하고 흩어지긴 했지만.
“서서히 성장할 거다. 안티-게이팅 파워를 다루는 감각도 많이 향상됐을 거다. 소득이 없진 않아.”
“헉.”
잔뜩 탈진한 길드장. 정작 전투할 때는 별로 힘을 소모하지 않았건만 연습 과정에서는 녹초가 되었다. 잠시 정결 탕에서 휴식하면서 엘릭서를 복용하면 회복되겠지만.
“가자.”
얼마 후 정교하게 쪼개진 헬게이트 권역들은 안개가 흐드러지듯 자연스럽게 소멸하였다.
*
다음 목표점으로 에어크래프트 함대가 이동하는 동안, 라이텔바흐와 재석은 정결례를 위해 목욕물에 맨몸을 담근 채 휴식하였다.
오염 전이 최소화를 위해 헌터들은 에어크래프트 2호에 탑승하여 대기하기로 했고, 두 명의 일반인은 격리된 채 3호선에 탑승하여 잠잠히 상황만 지켜보았다. 2호 선체는 휴식 구획과 지휘센터(조종실), 그리고 전투자를 위한 대기 구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테무친은 조종실에서 상황을 통제하기로 했다. 라울은 다음 전투지가 가까워지자 드론을 타고 출격했다.
“SSS급이 된다면 섬멸물질을 자력으로 생성할 수 있을까요?”
재석은 여전히 매우 아쉬워하는 기색으로 그을린 제 손을 바라보았다.
“나조차도 생성 보조 기구가 있어야 실전에서 제대로 뽑아서 쓸 수 있어. SSS급 헌터들도 내게 직접 전수받지 않으면 무리야.”
“당회장님은 맨몸으로도 대량 생성할 수 있잖습니까. 평소에는 전력을 다하시지 않아서 그렇지.”
“단순히 컨트롤 실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안티-게이팅 에너지 생성량이라는 한계 변수도 있다. 난 너희와 달리 ‘근원’이니까 몇십억 배를 뽑아서 쓸 수 있어.”
섬멸물질의 생성 작업은 어마어마한 비효율성을 요구한다. 흑파나 어비쓰론을 흐트러뜨리는 데 1의 안티-게이팅 에너지가 요구된다면, 쌍소멸시키는 데는 10억 이상의 분량이 요구된다. 이런 극한 비율 때문에 라이텔바흐 외에는 실전에 사용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시피 하다.
“네게는 네게 적합한 방식이 따로 있으니, 그것에 집중하는 편이 나아.”
라이텔바흐는 친한 동생을 위로하듯 재석의 등을 토닥여 격려했다.
“저번 탑 공략을 계기로 ‘랭크 상향’이 가능하다는 것도 확인했다. 너라면 그들보다도 더 빠르게 성장할 거다.”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라이텔바흐에게 섬멸물질 생성 및 운용을 배운 헌터들이 스무 명 안팎인데, 그들의 대부분이 SSS급이며 4명만이 SS급이다. 재석처럼 S급이면서 배움에 도전한 것이 이례적인 케이스다. 그가 제대로 성장해서 SS급이나 SSS급이 되었을 때 제법 볼 만하리라는 기대가 들었다.
“물론 그게 섬멸물질을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아무리 SSS급 헌터라도 실전에서 쓸 수 있는 양을 자력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재석은 도전 정신이 강하니 무리하게라도 그 산봉우리를 정복하려 애쓰겠지만, 그 과정에서 지치게 될 것이다.
“아, 그 인간이라면 좀 다르려나?”
라이텔바흐의 생각이 어떤 한 인물에게 정착했다.
“발레리안 총회장님 말씀입니까?”
“그래.”
재석은 부러움에 입술을 비죽였다. 수장들마저도 우습게 보는 저 라이텔바흐께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인간이라니. 자신은 과연 그 언저리에 다가갈 수 있을까.
“그나저나 당회장님.”
“왜?”
“방금 전의 그 힘 말입니다.”
희미하게 스쳐 간 몇십 분 전의 한 장면에 대해 기억이 닿은 재석. 둘이 붕괴하던 헬게이트 안에서 훈련하는 동안, 연습에 열중하던 사람은 재석만이 아니었다. 천외천의 경지에 이른 라이텔바흐는 평범한 천재인 제자의 훈련을 보조해 주는 와중에 반대쪽 손으로는 자기 자신의 훈련을 겸하고 있었다. 자기 과제에 몰두하며 괴로이 씨름하던 터라 재석도 자세히 주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분명 그때 라이텔바흐의 반대편 손 위에는 정체를 모를 어떤 실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 그거?”
라이텔바흐는 딴청을 부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섬멸물질입니까?”
“그렇긴 한데.”
“하지만 형태가 전혀 달랐는데…….”
모든 섬멸물질은 반(半) 고형의 검붉은 유동체 형태를 띤다. 하지만 라이텔바흐가 보인 그 미지의 물질은 전혀 달랐다. 크기가 매우 작았지만 분명 밝게 빛나는 물질이었다. 마치 작은 태양이 손바닥 안에 놓인 듯한 모습이었다.
“이것도 비밀 유지를 좀 부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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