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15회 의외의 위로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6.29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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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검은 덮개로 가리어졌던 하늘이 결박에서 풀려났다. 흑색 파동에 의한 빛의 강제 흡수 작용이 줄어들자, 먹물처럼 새카맣게 물들었던 성공에 한 줌의 햇빛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가장 치열한 전쟁이 치러졌던 상공에는 아직 옅은 다크포스의 잔흔이 남았다. 헌터들로서는 오히려 이편이 낫다. 하늘에서 무방비하게 추락하는 것보다야 훨씬 더 안전하겠지. 라이텔바흐는 자신과 동료들의 몸을 사건의 지평선으로 두른 다음에 다크포스를 역이용하여 중력에 저항하여 떠받치는 반중력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 덕분에 일행은 중력가속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채 땅에 내려올 때까지 일정한 속도로 매우 천천히 하강하였다.
지면에 가까워져 다크포스의 농도가 거의 0에 이르자 그들은 휴대용 낙하산을 펼치고 유유히 착륙하였다.
“일단 임시숙소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더 하도록 하지, 가웨인, 빌리, 볼트.”
라이텔바흐가 냉정한 눈으로 세 사람에게 눈길을 주었다.
“자네들은 무슨 목적으로 내게 따라붙은 건가?”
그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그들에게 지시한 발레리안의 저의를 알고자 했다.
“내 행보에 영 탐탁지 않은 부분이 많았나 보군. 정치적인 의도인가. 하지만 그는 그런 치졸한 위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만.”
그러자 가웨인이라는 이름의 헌터가 대답했다.
“최근 몇 주간 당신 주변에 설명되기 어려운 이변이 빈번하게 일어났죠.”
“그래서? 일이 생기면 도와주기라도 할 의도였나?”
“편할 대로 생각하시길.”
라이텔바흐로서는 감시당하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만,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은 건 아니니 책망하기도 애매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일단 이쪽 일행과 동행하는 것으로 하지.”
그는 때마침 부족한 인력을 이렇게 보충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신에게는 저희에 대한 명령권이 없습니다만.”
“그렇지. 하지만 따르는 편이 너희에게도 유익할 거다. 방금 출현한 적은 언제든 재출현할 수 있다. 심지어 헬게이트와 달리 고정된 권역에 묶여있지도 않아. 따로 떨어진 헌터 일행을 살해하는 것은 일도 아닐 거다.”
이에 빌리라는 이름의 길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하기 어려운 논리군요. 당신과 같이 다니면 보호라도 해줄 겁니까?”
“그래야 할 의무는 없지.”
라이텔바흐는 조금 전의 말대답에 소소히 복수하려는 듯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너희 태도를 보고 생각해 보지.”
어찌 되었든 가장 강한 전력 곁에 머무는 것이 안전한 것은 상식이니 세 명의 헌터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들 셋도 길드장급 헌터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전력이며 SSS 랭크에 달하는 최상위 전력이기는 하나, 라이텔바흐마저 고전하는 괴한 앞에서 제대로 버틸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렇지 않아도 신호를 보냈다. 곧 추가 전력이 소집될 거다.”
라이텔바흐는 비상 연락 장치인 손목시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서 더 모은다고 도움이 될지?”
“나름 탑 공략의 베테랑 주력들이야. 너무 무시하진 말라고.”
처음에는 북쪽 바벨탑이 발각되는 즉시 헬게이트 해킹 능력과 새로이 강화한 이능을 이용하여 속전속결로 단독 공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탑보다 더 골치 아픈 상대가 나타나면서 일이 틀어졌다. 이제는 여유로운 태도를 버리고 전심전력으로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강구해야 한다.
*
라울은 전투가 상공에서 벌어지는 동안, 흩어진 일행 셋을 찾아내었다. 플레먼과 아퀼라와 게오르그 모두 무사했다. 이후 세 사람이 에어크래프트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헌터들은 오염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 작업을 마쳤다. 일행은 한자리에서 재회하였다.
“무사하셨군요.”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방에 들어온 라이텔바흐는 안도감에 밝게 웃었다. 게오르그와 아퀼라는 어딘가 모르게 더 진지하고 숙연해진 느낌이었다. 매번 자기 생각을 내세우며 다투던 두 사람, 아마 이번에 실존적인 인류의 위협과 만나면서 위기감을 피부로 느낀 모양이다. 하기야 아무리 사상과 의견이 달라 충돌하는 사람이라도 당장 외계인이 침공해서 살상 위협을 가하면 즉각 뭉치기 마련이지.
그때 라이텔바흐는 수심에 잠긴 플레먼을 발견하였다.
“괜찮습니까?”
조금 당황한 그는 플레먼에게 말을 걸었다.
“네, 네? 아, 그게…….”
플레먼은 자기 생각에 빠져 멍때리고 있던 것인지 라이텔바흐의 말에 뒤늦게야 반응하고 머뭇거렸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마냥 매우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설마 어디 다친 건 아니죠?”
“아니에요. 괜찮아요.”
뭔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만. 라이텔바흐는 거듭 신경 쓰였다. 그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위험 요인이 있는 여정인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데려오지 말걸. 이것은 그의 계산 착오이다. 괜한 호기심과 이기심에 민간인의 안전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
“저는 정말로 괜찮…….”
바로 그 말을 마치기 전에 저도 모르게 플레먼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흘렀다. 흠칫 놀란 라이텔바흐는 다른 헌터들이 보지 못하도록 그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향했다. 아무리 오랜 시련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무뎌진 인간병기라지만 최소한의 공감 능력은 남아 있다. 둘만 남은 공간에서 플레먼은 감정을 억제하던 노력을 잠시 내려놓고 울음을 잠잠히 쏟아내었다.
“힘들면 언제든 말해주시죠.”
플레먼이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니 더욱더 죄책감에 답답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무리한 일인 줄 알았다면 데려오지 말 걸 그랬습니다.”
라이텔바흐가 후회하자 플레먼은 소매로 눈물을 훔친 뒤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스스로를 깎아내릴 것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처럼 혹독하게 단련된 인간병기가 아니잖습니까. 일반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겁이 나고 무서운 게 당연합니다.”
아무래도 라이텔바흐는 플레먼의 슬픔과 애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투박한 노력일지라도 그의 공감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태도는 작게나마 편안감을 주었다. 비록 이곳에는 플레먼 자신과 같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가진 형제도, 자신의 깊은 사정을 이해해 줄 이도 없지만, 그럼에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옅게나마 유대감과 위로가 오갈 수 있다.
“고마워요.”
먹먹함과 갑갑함이 아주 조금 해소된 플레먼은 진정하며 대화에 참여했다.
‘왜 슬퍼했는지 질문하면 무례하겠지.’
라이텔바흐는 홀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 위로하는 재능이 의외로 거의 없음을 발견하였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는 자기 자신의 고통에만 집중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신이었고 항상 그 이유로 인해 원통함을 쌓아두었다. 그의 목표와 가치관 속에서 늘 자신을 위한 정의로운 보복을 추구했다. 그렇기에 자신 외에 아파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대단히 낯선 경험이었다.
“정말로 저에게 화난 것은 아니죠?”
라이텔바흐는 마지막으로 확인차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코 그렇지 않아요.”
목멘 소리로 플레먼이 대답했다.
“화가 난 대상이라면, 오히려 저 자신이었어요.”
“네?”
플레먼이 눈물 얼룩진 눈가를 민망해하며 감정을 갈무리하는 사이에 라이텔바흐는 친구가 말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어렵게 머리를 굴렸다.
“기회가 되면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다만, 플레먼은 적어도 한 가지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항상 가까운 듯 먼 듯 종잡을 수 없던 라이텔바흐가 오늘은 왠지 한 명의 평범한 친구처럼 다가왔다. 헤롯이라는 자의 말을 듣고 괴로움과 자책으로 짓눌려있던 가운데 누군가의 온기와 공감은 좁게나마 숨 쉴 틈 같이 다가왔다.
“그래, 진정되면 둘이서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일단은 좀 쉽시다. 당신도 나도 재충전이 필요할 것 같군요.”
라이텔바흐는 친구의 어깨를 조심히 두드리며 위안의 의지를 표하고자 했다. 종종 많은 면에서는 자신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플레먼이지만, 그도 연약하고 부러지기 쉬운 인간임을 보았다. 서툴게라도 위로가 닿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
일행은 최종 목표지에 진격하기에 앞서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북쪽 탑의 위치는 이미 80% 이상의 정밀도로 좁혀졌다. 굳이 라이텔바흐 팀이 나서지 않더라도 다른 수색대가 알아서 잘 찾아줄 것이다. 발견된 뒤에 찾아가 전력을 보태도 늦지는 않으리라.
팀원들이 각자 정비하며 무기나 시설을 확인하는 동안, 라이텔바흐는 숨을 고르며 힘을 비축하였다. 어차피 그 괴생명체를 다시 상대한다면 무기의 위력으로는 승부수를 걸기 어렵다. 지금은 그저 머릿속에서 사고실험을 하며 스킬을 확실하게 다듬는 것이 최선이다.
한편, 아퀼라와 게오르그는 두 번에 걸쳐 기습당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인지 티격태격하면서도 그런대로 거리감이 많이 줄어들었다. 강력한 전투원들 사이에서 무력한 민간인의 위치에 선 것이 하나의 공감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앞으로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약자로서 생긴 동병상련의 마음. 이것이 오히려 기회가 되어 두 사람이 조금이나마 대화를 더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플레먼의 바람이었다.
플레먼은 휴식 중인 라이텔바흐에게 다가갔다.
“어제 초라한 몰골을 보여드려서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곁에서 위로해 줘서 고마웠어요.”
라이텔바흐는 손을 저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요. 우는 사람과 함께하는 법은 익숙지 않아서…….”
사내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쑥스러움을 감추었다. 하긴 그는 지금껏 어려워하는 동료들이나 역경을 마주한 자들에게 항상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조언만을 해주던 자였다.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직면해 주는 일이라면 모를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은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효율적이지는 않은 방법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라이텔바흐.”
“네.”
“당신도 마음에 담아둔 아픈 기억들이 있나요?”
그 말을 들은 라이텔바흐는 가슴 한구석에 무거운 돌덩이가 철렁 내려앉은 듯 짓눌리는 막막함을 느꼈다. 그는 어니스트에게서 들은 플레먼과 그 가족들의 이전 일들을 떠올렸다. 그 일들을 알고 있노라고 고백해봤자 도움은 되지 않고 되레 상처에 소금만 뿌리는 격이겠지.
플레먼도 그런 아픔을 감추고 사는 사람으로서, 자신에게서 공감의 기회를 구하고 있다. 라이텔바흐는 갈등하였다. 괴로움이라면 지독하리만큼 많이 겪어봤지만, 누군가에게 그것을 열어두기란 익숙하지 않다. 독하게 강해지는 법만 평생 연습했을 뿐, 아픔을 위로받기란 상대를 위로하는 일만큼이나 그에게 낯선 개념이었다.
“글쎄요.”
라이텔바흐는 일부러 딴청을 피우며 대답을 회피했다.
“뭐, 누구에게나 힘든 경험이 있기 마련이겠죠.”
“하긴 그렇죠.”
불성실하고 솔직하지 못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플레먼은 무안해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껏 라이텔바흐를 친구로 여기노라고 말하면서도 그의 삶을 향해 진지한 공감과 이해의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못했다. 그가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여러모로 뒤틀린 면이 있는 존재임은 자주 엿보았다. 그의 삶에서 드러나는 태도들이 그것을 증언하는 격이었으니까.
하지만 플레먼은 문득 되돌아보았다. 과연 나는 친구의 삶의 깊은 곳들을 진지하게 구석구석 살펴보았는가. 한 사람의 혼 위에 형성된 인격의 흔적은 무수한 굴곡, 아픔, 상실, 고뇌의 여정들을 반영한다. 나는 친구의 흔적에 서린 그 무게감과 질량을 이해하려 노력했던가. 그 노력이 얼마나 미흡했는지를 알게 되니 부끄러움이 조금씩 밀려왔다.
“우리 이거 한 가지만 노력해 볼래요? 당신만 괜찮다면…….”
용기를 내어 플레먼이 제안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아주 조금씩이라도 좋으니까,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 정직해지기. 당장 모든 부분을 열어두려고 서두를 필요 없어요. 그러니 아주 서서히, 과속하지 않고 조금씩만, 그렇게 노력해 보는 거 어때요.”
너무 경솔한 부탁이었을까. 자신이 주제도 모르고 선을 넘은 것은 아닌지 염려된 플레먼은 망설였다. 그러자 라이텔바흐 쪽에서 잠깐의 침묵 후 대답이 돌아왔다. 의외로 선뜻 받아주는 긍정의 태도였다.
“당신 말대로 ‘조심스럽게’라면, 구태여 도망칠 필요는 없겠군요.”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여 말로써만 친구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서 제대로 첫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증거가 이같이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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