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88회 아벨의 후예 Ch 15. 의사, 유모, 붉은 악마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02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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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마친 윤혁과 루디아는 숙소로 돌아갔다. 둘은 수면 시 잠 드는 장소를 제외하면 되도록 거실에서 같이 머무르기로 했다. 아무래도 윤혁의 빠른 신체적, 정서적 회복을 위해서는 그 편이 유리할 듯했다. 둘은 거실에서 두런두런 수다를 나누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화들짝 놀란 둘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목소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천장에서 아름답게 생긴 인형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어 형상이었는데 전신에서 해파리처럼 야광을 발하고 있어서인지 몹시 황홀하고 매혹적인 분위기였다. 모양에서 딱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동화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누구시죠?”
낯선 이를 향한 경계심에 윤혁은 루디아를 뒤로 물리며 상대를 응시했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저는 여러분을 돌봐드리러 온 거예요.”
“돌본다고요?”
루디아는 그 몽환적인 느낌에 내심 호기심을 느꼈다.
“네, 이래 봬도 저는 인공지능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랍니다.”
“네? 인간이라고요?”
루디아와 윤혁은 믿지 못해 동시에 외쳤다.
“아, 그러면……, 인형이나 아바타나 분신 같은 겁니까?”
“아니에요. 이 몸이 제 본체랍니다.”
“설마!”
“사정이 좀 복잡하답니다. 저는 오래전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뇌를 제외한 육신을 잃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런 몸으로 연명하게 되었답니다. 지금이야 많이 안정화되어서 별다른 고통이나 불편감은 없지만요.”
인형의 몸을 입고 있다는 그 여인은 다소곳이 땅에 착륙하더니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였다. 동작 하나하나마다 예의범절과 품위가 깃들어있었다. 인공 육체를 빌리고 있음에도 확실히 인간미와 영혼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했다.
“인사드려요. 제 이름은 겔러트 다이앤, 줄여서 겔다라고 불러주세요. 카이 도련님이 저더러 윤혁 도련님과 루디아 아가씨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아,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겔다님.”
잠깐 당황했으나 금세 평정을 되찾은 윤혁과 루디아가 대답하였다.
‘형이 파견한 사람이라고?’
윤혁은 의구심에 겔다에게 곧장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겔다 씨는 형과 무슨 관계이시죠?”
“편하게 하대해도 좋아요. 저는 도련님을 아기 적부터 보살펴온 유모였답니다. 원래의 저는 신국 출신의 전쟁고아 소녀였는데 2세대 초인이었던 눈의 여왕 라일라 라흐블뤼크, 그분께서 저를 거두어 여주인이 되어주셨어요. 여주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줄곧 카이 도련님을 맡아 키웠었죠. 이브님의 아드님이셨던 에녹 도련님과 함께요.”
세상에.
‘형에게도 아기 시절이 있었다니.’
좀처럼 윤혁으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사람은 태초부터 성인 상태로 태어났을 것만 같은 느낌인데 말이지. 눈앞의 저 여인이 그 인간을 돌보며 우유도 물리고 기저귀도 갈았을 것을 상상하니 생생한 문화 충격이 다가왔다.
‘그나저나 카가미 씨가 형의 소꿉친구였다더니, 실상 형제나 마찬가지였구나.’
인간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해버린 두 괴물을 아이 다루듯 아무렇지도 않게 양육해낸 겔다에게 새삼 존경심이 느껴졌다. 게다가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아 카이젤도 겔다에게만큼은 나름 정서적 유대감을 지닌 모양이었다. 자길 보육해준 사람이니 당연하겠지만.
‘아니지 유모라기보단 사실상 엄마 역할이나 마찬가지였을 테지.’
라일라라고 불리는 여인은 아마 초인이니 아이 돌보기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을 터다. 아마도 그녀에게 자기의 친아들은 3세대 초인들의 세계를 이끌 위대한 차기 지도자, 혹은 인류의 영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겔다, 당신은 저희를 어떻게 대하실 생각인가요?”
윤혁이 조심스레 확인차 의중을 캐물었다.
“무언가 목적이 있으신 건 아닌지?”
“너무 경계하지 말아요, 윤혁 도련님. 제가 할 일은 그저 여러분을 보살피는 일뿐이에요.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드리고 같이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심심하거나 지칠 때면 놀아드리고……, 그런 지극히 평범한 일들을 할 거예요.”
평범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겔다는 알았다. 카이젤에게는 오히려 그런 일들의 가치가 귀중하다는 것을. 그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평범한 삶을 박탈당했었다. 남들이 평범하게 양육을 받으며 발달할 때, 그는 인류 최강의 존재로 진화하였고 무궁한 재능과 힘을 축적했다.
‘어디 그뿐이랴.’
보통의 아이들이 부모님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릴 때, 그는 세계 각지의 수족들을 불러 모아 재구축된 인류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다. 아이들이 또래와 놀이를 하거나 애완동물과 장난칠 때, 카이젤은 우주의 핵심 본질을 탐구하며 초월적인 발명품들을 완성해냈었다.
그랬기에 그런 삭막한 삶 속에서 겔다는 그에게 특별하디 특별한 존재였다. 이복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안배해둔 여러 역할은 맡길 후보가 넘쳐났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동생을 보살펴줄 가족 같은 존재는 겔다 말고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실제로 겔다는 카이젤의 부탁을 곧장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윤혁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저는 내심 윤혁 도련님이 존경스러웠거든요.”
“네? 제가요? 저는 별 대단한 능력이 없는데…….”
“선교 여행에 용감히 나서셨다면서요. 카이 도련님께 들었어요.”
“그건 그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떠먹여준 결과에 불과했는데. 민망했다.
“윤혁 도련님과 루디아 아가씨, 두 분께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모습을 보고 저는 크게 기뻤어요. 이 세상에 아직도 그런 신실한 청년들이 남아있다니,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죠.”
그러자 루디아는 다소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겔다, 당신도 믿는 그리스도인이었나요?”
“네, 다치기 전부터요. 고아 시절에는 의지할 분이 주님밖에 없었으니까요.”
겔다가 아직 라일라에게 거둬지기 전, 그녀가 거닐던 신국 지역은 총체적 배교 상태에 놓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런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던 사람들은 몇몇 남아있었다. 고아 소녀 겔러트 다이앤도 그 중 하나였다.
“힘들 때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분을 찾게 되죠.”
혼돈의 시대라는 이름의 난국은 한 고아가 견뎌내기에는 너무도 혹독한 것이었다. 그녀가 붙들 희망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녀는 평생 천국을 소망하며 주님만 의지하였다.
그렇게 거지 나사로처럼 굶어 죽어가던 중, 어느 지나가던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평소답지 않게 소녀를 향한 연민을 품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푼 섭리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겔다는 훗날 매우 유명해질 초인의 가문에 휘말리고야 말았다.
“참 어려운 일이 있었군요. 유감이에요.”
루디아는 진심으로 공감하는 표정으로 위로를 표현했다.
“고마워요, 상냥한 아가씨.”
“혹시 사고는 언제 당하게 되었나요?”
“카이 도련님이 열두 살 되던 무렵에요. 일부 2세대 초인들의 음해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었죠. 그날 여주인께서 목숨을 잃으셨고 저도 큰 부상을 입었어요. 카이 도련님은 죽어가던 저를 황급히 이 몸으로 옮겨 소생시키셨죠. 당시에는 그가 지닌 인프라가 많지 않았기에 이게 한계였어요. 아마 오늘날이었으면 몸 전체를 완전하게 복구했겠죠.”
“안타까워요.”
“살아난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겔다는 오히려 루디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루디아 아가씨. 저는 아가씨가 카이 도련님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도 들었어요.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천만에요. 그건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그런 마땅한 일조차도 무심코 외면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답니다.”
겔다의 어투에서 카이젤을 향한 진심어린 애틋함과 따뜻한 사랑이 느껴졌다. 윤혁은 조금 아쉬웠다. 겔다의 상냥한 마음이 조금만 더 형의 가슴에 깊이 와닿았으면 어땠을까. 아니, 만일 겔다가 그의 진짜 어머니가 되어 사랑과 하나님 말씀으로 그를 양육했다면?
‘물론 그랬다 해도 그가 달라졌으리라는 보장은 없겠지.’
불현듯 어느 고전 동화 이야기가 떠올랐다. 흥미롭게도 현실 속의 세 사람 모두 동화 속에 거론된 이름과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사탄이 만든 거울, 그 거울이 깨어져 생성된 유리 조각이 가슴에 박혀 얼음처럼 마음이 차가워진 소년, 그 소년을 냉혹한 인간으로 키운 눈의 여왕, 그리고 소년의 마음을 되찾으려 애쓰는 소녀. 동화는 놀라우리만큼 현실과 닮아있었다.
*
인터갤럭틱 호는 홀로 항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주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만 척의 함선들이 동행하고 있었다. 목적은 감시와 보호였다. 그것들은 특수 차원 항행 기술을 이용해 외부 물리계의 감지나 상호작용을 회피한 채 마치 수면 아래의 상어처럼 암약하였다. 그것들은 필요시에 적이나 위험분자를 요격하기 위해 통상 공간으로 뛰쳐나올 예정이었다.
아울러 함대를 지휘하는 지휘관도 갑주를 입은 채 유유히 웜홀을 횡단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별도의 탈 것도 없이. 그는, 정확히는 그의 단말기는 기계와 생체, 초능력, 실체화된 시뮬레이션 우주의 성분 등 여러 파트가 뒤섞여 만들어진 특수 유닛이었다.
지휘관은 단독으로 함대와 맞상대할 만큼 막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은닉한 채 잠잠히 움직였다. 그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아공간 뒤편에 몸을 숨긴 상태로 인터갤럭틱 호를 미행하였다.
“대표님, 인터갤럭틱 호의 항해는 순조롭습니다.”
“그 아이는?”
“강윤혁님의 신체도 처음치고 빠르게 적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보고드리겠습니다.”
“눈을 떼지 않도록 주의해라. 나도 제3의 눈으로 따로 감시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네가 게을리 굴어서는 안 된다. 너를 따로 붙여둔 건 아크삼형제가 개별 행동을 벌일 때 제지하라는 뜻이다. 그 아이들은 통일시스템과 별개로 움직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이 지휘관의 육체는 바로 데미안의 원격 조종용 아바타였다.
그는 상관에게 조심스레 질문했다. 가장 궁금했던 점을.
“알트루즘……, 어째서 아크삼형제는 그 물건을 주시하는 것입니까?”
“자신들이야말로 그 물건과 융합하기에 합당한 적격자라고 믿고 있으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해. 애초에 우주 인류 프로젝트란 것도 구상 초기부터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 그들이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도 아니지.”
“솔직히 제 생각에도 강윤혁님이 적격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군.”
카이젤이라고 해서 동생에게 그 아픈 짐을 씌우고 편했던 건 아니었다. 이식 수술 당시만 해도, 아니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후회하였다. 안쓰러운 마음에 어린 시절 자신의 정신적 위안이 되었던 겔다까지 빌려 부탁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런 흔들리는 감정과는 별개로 카이젤의 냉철하디 냉철한 이성은 강윤혁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수 년 전, 아크삼형제와 자신이 처음 논의했던 기획안과는 차기 계획의 방향이 달라지겠지만, 강윤혁이라는 의외성 만점의 변수가 낳을 결과물이 인류의 미래에는 장기적으로 더 유익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너를 믿으마.”
“맡겨두시죠.”
붉은 악마 데미안은 의구심을 접어두고 아브락사스의 명을 받들었다. 그에게 주인의 뜻에 잠시 의문을 품을 자격은 있을지 몰라도 그 의지에 감히 거역할 자격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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