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20회 아벨의 후예 Ch 25. 전조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9.15 | 회차평점 ![]() |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뭐, 우리야 덕분에 여흥을 즐기겠군. 그나저나 그 이레귤러인가 하는 녀석들은 참 불쌍하게 되었어. 마스터도 참 뒤끝 있으시다니까. 때마침 이레귤러 놈들을 이런 적재적소의 용도에 활용하다니 말이야. 당최 그분 생각은 어디까지 이르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그들은 인류연합의 규정에서 어긋난 존재들,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크큭, 매정하긴. 아무튼 일주일 뒤가 D-day다. 그때 내가 직접 지구에 얼굴을 드러내놓고 강림할 거야. 악역을 맡으려면 나만 한 사람이 없으니까.”
태양을 삼킨 늑대는 즐거운 상상을 곱씹으며 키득거렸다. 하등한 지구인들의 적대심을 한 몸에 받을 것을 생각하니 말초신경이 자극되는 듯했다. 물론 진정한 욕받이는 따로 준비되어 있다. 이레귤러들과 ‘그 민족’이 지구인들의 도의적 비난과 미움을 뒤집어써줄 희생양이 될 것이다.
“난 달 궤도를 계속 수호하지. 무장 레벨을 다섯 단계 더 올리고 수비하겠다.”
“오케이, 수고하라고.”
특수 결전 병기와 전략 병기의 배치가 완료되었다. 이제 어느 인간도 쿠에시 허락 없이는 지구 안팎 경계를 통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순간에도 징검다리 권역들의 최고 단계, 즉 지구 바로 직전의 권역에 진입한 이주자들은 호시탐탐 쿠에시가 지키는 방벽 너머를 엿보고 있었다. 힘으로는 통과할 수 없으니, 인류연합에 최대한 잘 보여서 점수를 따는 수밖에 없었다. 방벽 너머에서 대기 중인 이들 ‘선택받은 우주 인류’는 한시라도 빨리 지구 시민권에 공석이 생기기만을 학수고대했다.
*
서바이벌 경합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긴장감으로 기다렸던 팀원 배치가 완료되었다. 스테판은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팀원들을 만나러 약속 장소로 찾아갔다.
오늘부터는 팀원들끼리 공개적인 회의가 허락된다. 그러니 이제 전략을 비밀로 감출 필요도 없어졌다. 서로 다른 팀원끼리의 토의는 경합 전까지는 금지되었다지만, 어차피 경합 내용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판에 토의는 큰 의미는 없었다. 그보다야 팀워크를 다지는 시간을 갖는 편이 경제적이리라.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스테판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팀원들의 모습을 확인하였다.
“반가워요.”
“잘해봅시다.”
하나하나 둘러보니 전부 다 아는 얼굴이었다.
‘다행이군.’
아나스타샤도 그때는 내심 불확실한 어투로 말했건만 다행히 그녀의 계획대로 배치되었다. 스물네 명 전부 다 강성한의 아이들, 크로스솔져들이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맞추셨는지 강경파와 온건파가 정확히 반반 섞여 있었다.
온건파 쪽은 반가이 웃으며 스테판을 환영해주었다. 강경파는 신의와 예의를 비추면서도 내심 조금 경계심을 품었다.
온건파는 다음과 같았다; 케리, 허버트, 웨슬리, 뮬러, 폴리캅, 어거스틴, 테일러, 아펜젤러, 리빙스턴, 페퍼, 크로스비, 언더우드, 이상 총 열두 명이었다.
강경파는 다음과 같았다; 무디, 기철, 프랑케, 모라비아, 에드워즈, 친첸도르프, 스펄젼, 휫필드, 선데이, 켈러, 파이퍼, 리즈, 이상 마찬가지로 열두 명이었다.
이들은 또한 다른 이레귤러에게 배치된 동료들의 소식도 알려주었다.
온건파 쪽에서는 아도니람이 넘버 37에게, 스토트가 넘버 5, 불링거가 넘버 4에게, 브레이너드가 넘버 103에게 배치되었다. 강경파 쪽에서는 크랜머가 넘버 13에게, 카이퍼가 넘버 83에게, 녹스에게 넘버 19가 배치되었다.
한편, 아나스타샤는 12의 배수, 10의 배수, 소수 이 세 부류의 이레귤러 넘버들을 분석한 결과, 세 부류마다 팀원 구성의 특징이 상이함을 깨달았다.
일례로 유독 12의 배수와 10의 배수에 해당하는 넘버에는 ‘또 다른 부류의 보조인원’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크로스솔져도 아니고 일반 히어로도 아닌 인원들. 대체 그 자리가 누구로 채워질지는 정보가 없었다. 레리엔마저도 그 사안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못했다.
한편 온건파이면서도 강경파와 친하게 지내면서 두 무리를 이어주던 신해, 최초의 크로스솔져 멤버인 그는 다행히 원초 계획대로 중요 인물에게 배치되었다. 이레귤러 넘버 1 말이다.
레리엔과 아나스타샤의 분석에 따르면 넘버 1은 111명 중 인품, 인물, 자질, 역량, 신앙 등 모든 면에서 가장 탁월했다. 스테판이 예상 밖의 변수를 일으킬 루키라면 넘버 1은 주인공 역할에 가까운 주목 받는 자였다.
스테판은 그 넘버 1이라는 자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지구의 구금 시설에 있을 적에 그 사람, 넘버 1을 본 기억이 있소. 딱 한 번.”
“어떤 분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케리의 질문에 스테판은 잠시 머뭇거렸다.
“인물도 훤칠하고 건실해 보이던 사람이었소. 예의바르고 기품이 넘쳐흘렀지. 아마 하늘도시에 있던 시절에는 주님을 모르다가 철인왕이 일으킨 사건을 계기로 처음으로 동면 중 복음을 들었던 것 같소.”
스테판 기억대로라면 넘버 1은 단연코 111명 중에서 돋보이던 인물이었다. 성경 속의 다윗 왕이나 다니엘 같은 주연 역할에 어울리는 자였다. 사실 만남이라고 해도 대단히 짧은 순간이기도 했다. 넘버 1이 제로원에 들어오자마자 스테판은 지금 거하는 별도의 거주 구역으로 옮겨졌으니까. 그래도 강렬한 인상만은 확실했다.
‘다 함께 협력하여 좋은 결말을 이끌어내었으면 좋으련만.’
어쨌건 온건파와 강경파는 일전의 의견 대립은 잠시 보류하고 스테판을 도와 뜻을 연합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양쪽 모두 카이젤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변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모두 스테판이 신뢰할 만하다는 데는 의견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나스타샤의 혜안도 믿었다.
“잘해보자고.”
“동감이다.”
온건파의 리더 격인 케리와 강경파의 리더 격인 무디가 가볍게 악수를 했다. 그들 앞에 어떤 시련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미 쟁기를 들어버렸으니 뒤를 돌아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
경합 하루 전날.
이레귤러들에게는 거주의 자유가 제공되었다. 아직 이레귤러들끼리 서로 만나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이 정도 자유만으로도 전보다는 확연히 숨통이 트였다.
이틀 동안 스테판은 스물네 명의 보조인원과 친목을 다지는 데만 집중했다. 어차피 어떤 경합 항목이 제시될지는 이레귤러들도, 보조인원들도 누구도 모른다. 그러니 미리 전략을 짜려고 애써봐야 부질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말이 어떻게 될지 감조차 안 잡히니 원.’
길을 걷다가도 자꾸만 고민거리들이 머리를 괴롭혔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일의 염려는 내일이라는 녀석에게 떠넘기자. 염려해서 나아지지 못할 거라면 아예 염려를 내려놓는 편이 낫다. 그는 반복적으로 고뇌하는 자신을 다독이며 고심을 떨쳐내었다. 고민을 주님의 계획 아래 내놓자 영이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인적이 드문 길을 거닐던 무렵, 후드를 둘러쓴 두 남자가 그의 곁을 지나쳐갔다. 하나는 2m도 넘는 장신의 근육질 몸이었고 다른 하나도 190cm에 족히 도달할 법한 탄탄한 체격이었다. 둘은 스테판을 스쳐 지나가더니 잠시 멈춰서서 고개를 돌렸다. 위화감을 감지한 스테판은 조용히 그들을 피해가려고 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법의 벽 같은 것이 그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네가 111번째로군.”
“마스터께서 주시하라던 그놈인가?”
섬뜩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본능적으로 두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은 스테판은 떨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맹수 두 마리가 자신을 잡아 뜯기 위해 대기하는 것 같아 차마 쳐다보기가 무서웠다. 나름 용맹하다고 자부했건만 이런 무력한 기분은 참 오랜만이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그렇군. 그때 그 남자의 느낌과 흡사해.’
칼리드라는 이름의 남자, 그 소름끼치는 불타는 눈동자를 소유한 초인. 전에 칼리드가 스테판 자신을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쥐어틀고 농락했던 기억이 번쩍 되살아났다. 본능적으로 오금이 저려오면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저 두 남자는 언뜻 느껴지는 기운으로 추측건대 칼리드라는 인간과 동격인 듯했다.
스테판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회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미세한 동작을 미리 예측하고 둘 중 한 명이 달려들었다. 둘 중 좀 더 체구가 작은 쪽, 그러나 스테판보다는 월등히 커다란 남자였다. 감지조차 못할 만큼 빠른 속도에 스테판은 전혀 대응도 못 하고 목덜미를 붙잡혔다. 엄청난 악력이 느껴졌다. 놀랍게도 남자의 손은 이종족의 팔처럼 변형되어 있었다.
“이놈은 나머지 110명에 비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데?”
태양을 삼킨 늑대는 자신의 손아귀에 붙잡혀 거칠게 숨 쉬는 스테판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쿠에시가 대답했다.
“어쩌면 그게 엘 피어슨이 놈을 최종 완성본으로 택했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평범하다는 이유로?”
“모르지. 처음에는 그녀도 넘버 1처럼 우수해 보이는 종자부터 택했을 거다. 그러다가 그들을 이레귤러로 변형시키던 중, 실험에 바이어스(bias, 편견)가 개입된 것을 발견했겠지. 우수한 형질만 고르려던 ‘선택 편견(selective bias)’ 자체가 그녀의 실험 성과를 가로막았다고 생각했을지도?”
쿠에시는 스테판의 안대를 뜯어내었다. 왼쪽 눈구멍에는 아무 기능도 없는 의안 하나만 박혀있었다. 스테판은 신음하며 두 남자를 노려보았다.
“불완전함이라, 이레귤러를 완성하기 위한 요건 중 하나가 그것이었나?”
“참 신기하군.”
태양을 삼킨 늑대는 사냥감을 툭 땅에 내팽개쳤다.
스테판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 남자의 엄청난 위압감을 고스란히 몸으로 맞았다. 저것이 최상위 초인인가. 기운으로 보아 인형이나 아바타를 사용한 것 같은데도 기세가 상당했다. 본체가 아닌데도 저렇게까지 섬뜩한 아우라를 뿜어낸다고?
“내일 경합을 기대하지.”
쿠에시가 거만한 어투로 스테판을 내려다보았다.
“나도 잘 부탁해. 부디 좀 더 재밌게 만들어달라고.”
태양을 삼킨 늑대도 이죽이며 얄밉게 한 마디 던졌다.
“아 참, 미리 지구 주민들과는 인사라도 나눠두는 게 어때. 오늘 일부러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허락해준 것도 그러라고 해준 건데 말이야.”
“미리 인사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하하,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야.”
별안간 누군가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스테판은 다급히 외쳤다.
“설마 윤혁의 가족들이나 루디아를 건드리려는 건…….”
“그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이번에는 쿠에시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일단 U-society 일원들은 원한다면 자신의 직계 가족 한정으로 이번 프로젝트의 영향으로부터 영구적 보호권을 행사할 수 있지. 보스의 혈육 일가야 말할 것도 없다. 네놈이 걱정해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번 일로부터 면제권을 받았으니 염려할 필요 없어.”
유대인? 면제권?
의아해하는 스테판에게 쿠에시가 덧붙였다.
“뭐, 그게 그들에게 축복이 될지 저주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스테판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염려로 인해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얼마나 큰 난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 치 앞의 내일 일도 짐작할 도리가 없어 몹시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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