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21회 아벨의 후예 Ch 26. 지구 해체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9.17 | 회차평점 ![]() |
Chapter 26. Survival Contest : 지구 해체
다음날 아침, 일을 준비하려고 식당 1층에 내려온 성한은 테이블에 놓인 낯선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별안간 석연찮은 기분이 스쳤다. 다소 고풍스런 느낌이 담긴 그 낡은 쪽지는 마치 세상 물질로 만들어지지 않은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쪽지는 아무런 글씨도 없이 비어있었다.
성한이 잠시 그것을 들어 올리자 번개가 지나가듯 일련의 글씨가 새겨졌다.
오늘부터 지구 전역이 요동칠 것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놀라지 마십시오. 적어도 당신에게는 해가 닿을 일이 없으니까.
문맥 상 누가 쓴 것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잠깐 한눈판 사이에 종이는 불에 타듯이 사그라들어 재도 없이 사라졌다. 열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작은 일을 신호탄으로 기묘한 일들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유진이 즉각 자기 방에서 뛰쳐나왔다.
“여보, 뉴스 봤어요?”
“무슨 일이라도 터졌어?”
“엄청난 빅뉴스에요. 대대적인 격변이라고요.”
부부는 황급히 실시간 뉴스를 켜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순식간에 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충격에 휘말린 것은 비단 성한의 가정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각 전 세계, 아니 전 지구 위의 주민들이 일제히 충격적인 보고를 듣고 깜짝 놀랐다.
현 시각부로 지구 위에 남아있는 기존 ‘국가 단위 정부’는 전원 해산한다.
공용어가 아니었다. 성한은 이 유려한 귀족적 언어의 정체를 알았다. ‘그녀’가 만든 언어, 바로 라일라의 퀜타빌레였다. 우주 인류가 사용하는 공용어 외의 제1외국어로 지구에서만 살던 이들은 대부분 모르는 언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최면에라도 걸린 듯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서 그 낯선 언어가 저절로 이해되었다. 그들도 이게 무슨 정황인지 몰랐다. 참고로 이런 강제 해독을 가능케 해준 것은 통일시스템의 강제적 집단 정신 간섭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구 강제 해산 선언.
짧고 굵고 간단한 메시지. 구태여 미사여구를 붙이지도 않았다. 명령의 출처조차도 밝히지 않은 지극히 불친절한 메시지.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압력의 권위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타협이나 권고 사항이 아닌 절대적 명령이었다.
그 명령이 내려지기 무섭게 몇몇 국가들이 자진해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전격 해체를 선언했다. 명령의 요지는 간단했다. 대체 역할의 기관이나 자치 성격을 지닌 기관조차 단 하나 남겨두지 말고 다 해체해라.
즉각적으로 순복하지 않는 국가에는 곧바로 피드백이 날아왔다.
권고가 아닌 강제력의 형태로.
어리석게도 자치 행정력이나 정부 기관 형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나라 몇 군데서 명령 개시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징벌이 시작되었다. 공무원 전원이 어딘가로 워프 되었다. 관련 부처 건물들은 부품 단위로 해체되었다. 이 장면은 지구 전역에 동시 생중계되었다. 이는 매우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렇게 명령 개시 1시간 만에 해체가 완료되었다.
*
동시에 이레귤러들은 각자 자신의 보조인원들과 분리되었다. 스테판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아직 그에게 내려진 지시사항은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온통 시끌벅적했다. 도시 곳곳에 비치된 화면에서는 온통 정부 해체에 관한 뉴스만 방송되었다. 분명 이번 경합의 내용이 지금 벌어지는 사건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점은 스테판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시민들은 정체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전혀 새로운 미래가 펼쳐졌음을 직감했다.
사실 이전에도 이미 인류연합이라는 세계 단일정부의 존재는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민족 또는 영토 단위로 구성된 기존 지구의 국가들이 허수아비라는 사실도 그다지 비밀은 아니었다. 22세기 초반에 등장한 신(新) 인류연합은 십수 년 전부터 모든 국가의 군사력과 경제권을 노골적으로 박탈했다.
그래서 ‘허울뿐인 국가 체계는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겠구나’ 라는 예측은 이미 만연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 해체는 이상하리만큼 낯설고 갑작스러웠다. 단순히 국가 체계를 해체하는 것만이 목적의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모두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국가 해체는 그저 더 큰 프로젝트의 시작일뿐이었다. 인류연합은 비단 국수주의만을 제거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지난 수천 년간 명맥을 이어왔던 민족주의라는 정신까지 소멸할 작정이었다. 아니, 민족주의를 넘어서 민족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없앨 생각이었다.
{지구 해체 1단계 : 공공 기관 해산 명령, 시행 완료.}
통일시스템은 카이젤에게 명령받은 대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지구 해체 2단계를 가동하겠습니다.}
{부동산 권리 공공화.}
인류연합은 그간 다른 영역에 있어서는 그런대로 사유재산을 인정해주었지만, 몇몇 부문에 있어서는 철저히 사유권을 배제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군대라는 시스템과 공간이라는 자원이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현 인류의 자산 나머지도 위버멘쉬 수중에 있었다. 다만 그런 그도 표면적으로나마 자산을 자유로이 운용할 권리는 시민들에게 허락해주었다. 마치 신이 자신의 소유물인 만물을 피조물들에게 임시로 빌려준 것처럼. 초인이냐 일반인이냐, 1등 시민이냐 2등 시민이냐 비시민이냐에 따라 차별이 있긴 해도 그런대로 카이젤은 자비롭게 처우한 편이었다.
하지만 공간에 있어서만큼은 그도 철저하게 1인 단독 소유 체계를 고수했다. 실제로 인류연합이 정복한 수억 개의 은하계와 그 위의 상위 차원, 시뮬레이션 우주, 그 모든 영역의 공간들은 오로지 위버멘쉬와 인류연합의 소유였다. 초인들이 때때로 천체급 구조물들을 빌리긴 한다지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대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와 Upol처럼 시민들이 거하는 거주지에서는 미시적으로나마 ‘부동산 사유재산권’이라는 개념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허상뿐인 개념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실질적으로 땅을 자기 것처럼 거래했다.
인류연합도 이를 어느 정도는 용인해줬다. 어차피 광활한 우주 안의 지극히 작은 부분, 지표면 위의 공간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니까. 또 어차피 시민들이란 그저 제로원이나 하늘도시 같은 인류연합 소속 소유물 위에 세 들어 사는 가련한 난민들에 지나지 않으니까. 고래라면 하찮은 플랑크톤들이 자기 몸뚱이 위에 기생하는 것을 너그럽게 허락해주어야 자비로운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제 지구라는 공간에서만큼은 더는 그런 관용을 베풀 수가 없게 되었다. 지구는 수도이자 본성(本星), 곧 성지가 되었다. 또한 지구 위의 공간은 이제 희소한 자원이 되었다. 현존하는 유일한 희소 자원. 그러니 철저히 부동산 사유재산권 개념을 삭제하는 것은 필연적 수순.
갑작스레 바꿔버리면 반발이 심할 것을 고려해 변화는 서서히 개시되었다.
어차피 누가 반발하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정부 해체가 완료된 당일 저녁, 지표 위의 모든 공간에 대해서 ‘다중 소유권’ 개념이 선포되었다. 복잡한 개념이긴 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흡사 21세기 초반 관행되던 주주(株主) 시스템과 비슷한 원리였다.
보통의 사유 부동산은 한번 소유주가 칩거하면 거래를 거치지 않고서는 타인에게로 소유권이 공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서 특정 공간에 대한 소유권을 외부에서 강제로 공유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예컨대 작은 토지 한 자락 한 자락이 일종의 주식회사처럼 바뀐 것이다. 더는, 부동(不動)이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토지 소유권의 지분을 쟁취하고자 도전해온 공격적 투자자들은 인류연합이 아니었다. 이미 다 가진 존재가 뭐하러 탐을 내겠는가. 투자자들의 정체는 외부인들이었다. 지구 시민들이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한 외계인들, 즉 우주 인류 출신의 선택받은 자들이 투자 작업에 나섰다.
그들은 이미 그간 숱하게 징검다리 권역들을 통과하여 올라오면서 막대한 재산과 권능을 축적한 상태였다. 그 재산 가운데 일부가 특수 형질의 포인트로 되어있었는데 그 포인트는 오로지 성지(聖地), 즉 지구의 공간 일부를 점유하는 투자 용도로 쓰이는 자본이었다.
이 정책이 발동되자 지구 시민들은 속수무책으로 패닉에 빠졌다. 지표 위의 모든 땅은 제로원의 영토를 제외하면 모조리 매물이 되어버렸다. 즉각 투자자들의 공격적 침략으로 기존 부동산 소유주들은 패망하고 말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소유권은 극히 일부분의 지분에 지나지 않았고 그마저 서서히 비중이 줄어들고 있었다.
조만간 지구 주민들이 축출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직은 우주 인류가 제멋대로 지구에 당도하지 못하도록 물리적 방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 때가 조금은 미뤄지겠지만, 오히려 이러한 희망 고문이 지구 시민들을 더욱 절망적인 심정으로 만들었다.
일부 시민들은 기존에 자신들을 다스렸던 강력한 지도자들에게 희망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헛된 것이었다. 그 지도자들 대부분이 초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륙을 통치하는 로스트엠페러들은 애초에 인류연합과 한패인 초인들인데 하찮은 시민들의 사정을 봐줄 턱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이번 해체 프로젝트의 개최자요 주범이었다.
*
성한 부부는 이 흉흉한 뉴스를 듣고 마음이 착잡했다. 왜냐하면 주변은 온통 난리가 난 마당에 본인들이 머무르는 주택에는 문제의 그 부동산 공유 룰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오류가 벌어졌나 싶어 의아해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전 지구가 초상집 분위기가 된 와중에도 부부의 식당과 집은 멀쩡했다. 그제야 그들은 이 일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확신하게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을 할 작정이니, 재혁아.’
하지만 상대로부터 대답을 들을 방도는 없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지구 전역은 패닉에 빠졌다.
그렇다 해서 딱히 무자비한 권리 박탈이 이뤄진 것만은 아니었다. 시민들의 손해라고는 부동산, 그리고 장차 서서히 빼앗길 지구 시민권에 불과했다. 나머지 자산은 생명에 유착된 자본 상태로 존재했기에 멀쩡했다. 아니 멀쩡하다 못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마디로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 않게 보상해줄 테니 지구라는 이름의 건물에서 조용히 제 발로 방을 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지배자의 의도를 알아차린 눈치 빠른 지구인들은 미리부터 Upol이라는 세계들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는 행성 밖 낯선 세계로 나가기를 두려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구 해체 3단계 발동.}
통일시스템은 미리 계획해둔 바를 착착 실천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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