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39회 아벨의 후예 Ch 29. 이드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1.03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파파는 그날 부상을 입은 이후에야 2차 각성을 개시했다. 사경을 헤매면서 정신적, 영적 충격을 받은 것이 일차적인 계기였지. 하지만 다른 요소도 있었어. 고문으로 리비도의 신체 쪽 부분을 거세당한 반동으로 리비도의 정신 부분이 엄청난 반작용으로 폭주했다. 그게 그분의 각성을 촉발했지.
그리고 내가 그분께 자녀로 받아들여졌던 그날, 나는 내 고유의 카리스마타를 통하여 그분의 억압된 강력한 이드를 공유하게 되었어. 덕분에 나는 그의 뒤틀리고 억압당한 리비도가 얼마나 짙고 강한 어둠을 생산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지.”
이것은 윤혁이 단순히 지레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의미가 얽힌 사건이었다. 카이젤의 흑화가 급속도로 가속되기 시작한 변곡점이 그 충격의 사건이었으리라. 그 배경에 이러한 복잡한 원리들이 있었다. 형의 눈에서 느껴지는 그 섬뜩한 심연이 생성된 과정이 부분적으로나마 이해가 되었다. 아마 그것만으로 전부를 설명치는 못해도 분명 적잖은 일조를 했으리라.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이드는 본론으로 돌입했다.
“난 정말로 궁금해. 초인의 리비도의 두 부분, 육체 파트와 정신 파트, 그 두 요소는 과연 서로 다른 인간 개체에 나뉘어져 있더라도 상호 공명이 가능할까? 물리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어도 본질은 여전히 온전하게 연결되어 있을까? 그렇다면 나로서는 그걸 검증해볼 필요가 있지.”
“무, 무슨 짓을 하려고?”
겁을 먹은 윤혁은 부르르 경련했다.
“너 이래뵈도 제법 도덕심과 영성이 탁월해 보여. 그게 그 엄청난 ‘초인의 리비도’를 짓누르는데 성공한 비결이겠지. 하지만 억누른다고 해서 사라지지는 않아. 난 지금부터 네가 열심히 억눌러온 초인의 리비도, 그 무한 증폭의 에너지를 봉인 해제하여 폭주를 유도할 거다. 그러면 과연 연결된 파파 쪽에도 모종의 변화가 생길까? 부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으면 하는군.”
당장 그만두라고 버럭 소리즈려 했으나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윤혁이 저항하기도 전에 이미 이드는 모든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방아쇠는 당겨졌다. 곧 삼십 년 가까이 눌러온 무시무시한 무형의 괴물이 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일반인의 정신과 육체로는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힘이었다.
“사, 살려줘.”
굴욕감이 그의 영혼을 헤집었다. 엄청난 죄를 짓는 것만 같은 자괴감이 들었다. 정욕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건만 이토록 연약한 자신의 실체를 보니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자력으로는 극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괴로움에 눈물이 주룩 흘렀다. 그 와중에도 말초신경이 쾌락을 갈구하며 울부짖는 반응이 선명히 느껴져서 더욱 괴로움이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는 순간 음욕의 죄를 품게 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는 그 한탄이 저절로 이해되었다.
<<그토록 기세등등하더니 그게 전부? 역시 아무리 경건을 자랑한다 해도 사내는 어쩔 수 없군. 망가뜨리기에 이보다 편리한 길이 없구나.>>
맹렬히 정죄하는 참소자(계 12:10)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시야가 어두컴컴해졌다. 소망을 잃고 포기하고픈 욕구와 쾌락에 맡기라는 어두운 유혹의 음성이 들렸다.
‘이대로 망가지는 건가.’
다른 누군가를 건져주기는커녕 자기 자신이 집어삼켜지고 만 것인가.
그렇게 무너지려던 찰나에.
“그만둬! 이 사악한 괴물!”
공간을 찢는 듯한 루디아의 외침이 낭랑히 울려 퍼졌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부드러움이 전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사자후처럼 숲 전체로 쩌렁쩌렁 메아리가 퍼져나갔다. 삽시간에 결박하던 젤리 덩어리가 녹아내렸다. 루디아의 몸에서 잠깐 빛 섞인 아우라 같은 것이 뿜어졌다. 윤혁은 설마 자신이 환각을 보았는가 싶어서 눈을 비벼보았다. 그러나 루디아에게서 나온 빛은 실제 물리적인 빛이었다.
‘설마 이건……, 커버넌트의 힘을 이런 식으로 발현한 건가?’
젤리 덩어리들은 난로 앞에서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힘없이 흐드러졌다. 이드의 수천 개의 눈도 일시에 경악에 질렸다. 그는 카이젤의 전용 테크놀로지인 커버넌트가 지닌 잠재력이 얼마나 큰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루디아의 몸 전체가 커버넌트 오브젝트인 것을 깨달은 이드는 화들짝 놀랐다.
“그 능력을 이런 식으로 발현했다고?”
사실 카이젤이 루디아에게 제공한 것은 힘을 생성해내는 기초 원료뿐이다. 이것을 고유한 형태로 빚어낸 주체는 루디아의 혼이었다. 이제까지는 치유에만 치중했었던 그녀가 돌연 간 각성하여 분노를 통해 힘의 형태를 바꾸었다. 이드 같은 강력한 존재마저 순간적으로 제압할 강력한 힘으로.
‘그렇구나. 저 여자의 힘, 사랑하는 남자가 모욕당함으로써 발동하였군.’
이드는 대강 상대의 능력 속성을 간파하고는 재빨리 몸을 내뺐다. 아마 더 해를 당하기 전에 도피한 것이리라. 얼떨결에 풀려난 멜카드제윈은 기절한 채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유동형 젤리는 도망친 이드를 따라서 스르르 퇴각했다. 아직 초인의 리비도의 후유증에 침식되어 괴로워하던 윤혁은 힘겹게 견디며 몸을 움크렸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사태를 파악하였다.
‘룻?’
평소 너무도 상냥했던 루디아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분노. 극렬한 분노. 소멸시키는 불처럼 맹렬히 타오르는 열심의 불꽃.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추악한 범죄자들의 손에 비참한 모습으로 성폭행당할 때 뿜어져 나오는 격렬한 의분(義憤)이 응집된 것 같았다. 윤혁은 루디아가 그렇게까지 무서워질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두 번 다시 내 사람을 건드린다면 가만히 좌시하지 않겠어.”
루디아는 달아나는 이드를 분노의 눈초리로 쏘아보며 경고를 선언했다.
‘저렇게까지 강력하다니.’
윤혁도 놀랐고 퇴각하던 이드도 노랐다. 초인인 멜카드제윈마저 간단하게 제압한 이드를 저토록 쉽게 쫓아내는 힘이라니. 윤혁은 왜 그간 칼리드, 스튜아, 진 같은 거물급들이 그토록 커버넌트 링에 집착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제 해결되었어, 윤혁아.”
다시금 위로하는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윤혁은 수치심에 도무지 그녀의 눈과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비참하게 발가벗겨진 상태여서 부끄럽기도 했으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비가역적으로 해방된 초인의 리비도가 그를 죽일 듯 괴롭히고 있었고 그 몰골을 친구 앞에서 보이는 게 죽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아마 그녀도 이런 자신을 보고 큰 충격이 남을 테지. 그는 얼굴을 가린 채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몸을 돌려 스스로를 가리려 애썼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윤혁아. 놈은 이미.”
“나, 나한테 다, 다가오지 마.”
더 괴로운 부분은 자기 마음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이런 상태로 혹여라도 마음으로라도 그녀에게 죄를 짓는다면 앞으로 평생 얼굴을 어찌 본단 말인가. 이렇게 자신이 나약하다는 사실이 처절한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너한테는 이런 모습 보여주기 싫어.”
“이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는 욕망에 자신을 내어던진 사람이 아니잖아. 난 알아. 난 네가 얼마나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왔는지 잘 알고 있어. 그러니 자책하지 마. 난 너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부당한 일도 가벼이 여기지 않아. 네가 스스로 힘들어하도록 내버려둘 생각도 없고.”
친절하게 루디아는 윤혁을 곤란함에서 건져주었다. 그녀는 한 치의 찰나도 기다리지 않고 그의 몸에 재빨리 커다란 천을 덮어 완전히 가려주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부르르 떠는 그의 등을 가벼이 두드려주어 진정시켜주었다.
상대와 신체가 맞닿으면 내적인 정욕이 더욱 괴로워질 줄로 알고 두려워했던 윤혁은 놀라우리만큼 그녀의 지혜로운 마음이 깊게 전해져오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온기에는 이기심이나 탐욕 따위가 전혀 없었다. 그 마음은 부드럽고 자기희생적이며 순수했다. 욕망을 정복하는 것은 사랑의 힘, 그녀의 심장 박동은 흡사 주님의 마음을 닮아 있었다.
윤혁은 혹시라도 자기 몸과 얼굴에 나타난 부끄러운 흔들림을 그녀가 눈으로 발견할 것이 몹시 무서워서 본능적으로 몸을 꼭 웅크렸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걱정이기도 했다. 친애하는 이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기란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
“사람에게는 누구나 본성적 욕구가 있어. 그것 자체가 악한 건 아니야. 다스려지지 못한 채 과녁에서 어긋날 때가 문제일 뿐이지. 억압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욕구 아래 우리 몸을 순종시키면 그만이야.”
그녀는 우는 아이를 위로하듯 그를 달랬다.
“더 위대한 욕구라고?”
“그래, 너와 내가 그날 나누었던 소망처럼.”
세계 만민이 구원받고 유대인들이 함께 구원받는 미래에 대한 소망.
어쩌면 두 사람이 한 비전을 품을 수 있던 이유는 사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리라. 신이신 그분도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십자가의 수난을 피하고 싶은 욕구를 강렬히 느끼셨다. 허나 그분은 장래에 천국에서 구원받은 인간들과 함께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누릴 것을 바라보았다. 그분은 더 크고 고귀한 욕구를 자발적으로 택하셨다.
루디아와 윤혁도, 주님과 공통된 생각이 적어도 하나는 있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이 천국에서 함께 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다. 통제되지 않는 정욕과는 다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만들어내는 소망이야말로 현재의 나약한 그들이 지닌 육신과 혼의 욕구를 죄악된 충동에서 끊어내어 선한 방향으로 재정립하는 원천이리라.
루디아의 도움으로 치료된 윤혁은 조심스레 자신에게 이식된 성(性) 에너지의 근원을 진정시켰다. 가까스로 고통이 멎어들기 시작했다.
‘형의 그림자를 짊어지기에는 난 여전히 약하다.’
심장에 심긴 그 사람의 알트루즘, 반지로 맺어진 그자와의 커버넌트, 그리고 그에게서 옮겨진 신체 부위까지. 그 사람의 자아, 초자아, 쾌락의 파편은 여전히 자신의 몸을 잠식하고자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확실히 미약한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큰 짐이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 앞에서도 한 가지 믿음은 굳건해졌다. 결국 그것들은 자신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윤혁의 내부에는 인간의 힘보다 훨씬 더 강력한 사랑의 권능이 운동력 있게 역사하고 있었다.
‘왜 저더러 사랑하는 마음을 원동력 삼아 당신의 길을 좇으라 명령하셨는지, 이제는 조금 이해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생각, 그리고 루디아의 정직하고 따스한 마음을 이해하게 되니 이제 억눌림과 죄책에서 자유로워졌다. 이제 그녀를 경솔히 바라보는 마음은 먼지만큼도 들지 않았다. 강렬한 은혜의 홍수가 내면에 흘러넘치자 육신의 울부짖음은 더 이상 즐거움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더 무한한 기쁨이 영 속에서 체험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드는 윤혁을 무시했고 한낱 일반인의 힘으로 초인의 리비도를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윤혁은 보기 좋게 그 불가능을 해내고야 말았다. 지금까지는 누르고 통제하기만 해왔다면 이제는 참된 사랑이 그것을 승화시켰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해방감에 감사의 기도가 내면에서 솟구쳤다.
“고마워, 룻. 너는 정말로…….”
그는 감동으로 격양되어 말을 멈췄다. 이로서 루디아는 친구로서, 아니 이미 더 깊고 소중한 의미의 사람으로 자신 속에 자리해버린 윤혁을 위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녀는 그의 수치심을 닦아준 셈이었다.
얼마 후 몸 전체가 진정된 윤혁은 온전한 옷 차림으로 자신을 단정하게 하였다. 윤혁과 루디아는 기절했다가 깨어난 멜카드제윈에게 휘말리게 한 것을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멜카드제윈은 흔쾌히 받아주었고 언제든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며 연락처를 전해주었다. 고초를 겪긴 했지만,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된 윤혁과 루디아는 이제 Planet-1,566,987을 뒤로 남겨둔 채 우주선으로 복귀했다.
|
이전회
538회 아벨의 후예 Ch 29. 이드 (4) |
다음회
다음회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