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50회 아벨의 후예 Ch 32. 안내자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2.01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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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고된 실험을 마치고 옷을 차려입으려던 차에 윤혁 앞에 합금형 기갑을 둘러싼 인간 형태의 물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대로 갖춰입지 못한 허술한 상태에서 화들짝 놀란 윤혁은 허겁지겁 하의를 챙겨입고 몸을 뒤로 내빼며 움츠렸다. 그러자 그 존재가 기계질의 음을 내뱉었다.
“놀라지 마시죠. 접니다, 비서관 데미안입니다.”
“아, 인형이신가 보네요. 아니면 아바타?”
“단말기의 카테고리가 요새 워낙 다양해서 뭐라고 설명드리기 어렵겠군요.”
윤혁은 놀란 가슴을 진징시켰다.
‘하긴 초인들마다 분신을 이용하는 방식이 제각기 다 다르긴 했었지.’
데미안의 단말기가 안부를 물었다.
“별 탈 없이 지내셨습니까?”
“아, 네. 이드와 접촉했던 것만 제외하면은요.”
“그때 그분을 막지 못한 건 죄송합니다. 대표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윤혁은 속으로 형의 의중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자신을 어떤 식으로 시험하고 싶은 건 분명해보이는데 말이지.
“괜찮아요. 이미 다 잊었습니다.”
“다행이군요. 다름 아니라 이번 정류지에 도착하면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으로 추정되는 바 미리 공지를 드리고자 왔습니다. 대표님께서 이제 여정도 꽤 진행되었으니 직접 인사를 좀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인사요? 제가요? 누구에게요?”
“만나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 사람은 강윤혁님에게 호기심이 꽤 많으십니다.”
직감이 좋지 않았다. 대충 어떤 만남일지 예감이 들었다. 이미 에고, 슈퍼에고, 이드를 만나보았던 윤혁은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또 이상한 존재일까.
“다만, 워낙 위험한 장소이니만큼 동행자를 붙여두라고 명하셨습니다. 제가 직접 간다면 좋겠지만, 그 사람은 역할 상 베일에 싸여있기에 인류 정보 체계나 초인과는 접촉이 일절 없이 별도로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제 아바타는 동행 금지일 듯합니다.”
“그럼 루디아는 같이 가도 괜찮나요?”
“네, 커버넌트 오브젝트는 당신을 보호하는 용도이니 항상 붙여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오브젝트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참 인간미가 없네. 윤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 그리고 가실 때 선물이 하나 필요할 겁니다.”
“선물요?”
“굳이 표현하자면 조공 개념이죠. 강윤혁님이 마주할 그 손님을 달래줄 조공입니다. 더불어 가는 길이 워낙 복잡하고 위험하니 길잡이 노릇을 할 종으로 보셔도 될 듯합니다.”
대체 뭘 말하는 건지 몰라 윤혁이 멀뚱멀뚱 눈을 끔뻑이는 사이에 데미안의 아바타가 공간의 틈새에 작은 구멍을 내었다. 곧 그 속에서 소용돌이가 일으켜졌다. 데미안은 그 문을 통해 아공간에 있는 어떤 것을 꺼냈다. 곧 사람이 하나 떨어졌다.
골반에 천 한 장만 두른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 머리카락이 진한 핑크색이었다. 몸은 건강하고 튼튼해 보였으나 무언가에 질린 듯이 소스라치게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본 윤혁은 전기에 감전된 듯 화들짝 놀랐다.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
“저, 저 사람은!”
“전에 강윤혁님을 납치해서 환상계를 뒤흔드는 사고를 친 자라고 들었습니다.”
어찌 잊겠는가. 납치되어 한 달간 결박되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그때 윤혁은 비참히 포로가 되어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못한 수치스러운 몰골로 폭행과 고문을 당하였다. 수십 번도 넘게 거세 협박을 당했고 언제 당할까 조마조마해 하며 몸을 움츠렸었다. 그때의 통증이 얼마나 실제처럼 극렬했는지 수없이 눈물을 터뜨렸었지. 혐오스러운 기억이 살아나자 윤혁은 무의식적인 공포에 다리를 움츠리며 반사적으로 급소를 방어하는 동작을 취했다. 그 나약한 모습을 본 데미안이 한숨 쉬었다.
“상당히 큰 충격이었나 봅니다.”
“당연히 그렇죠!”
“이자를 시뮬레이션 우주 속에서 분리한 뒤 목줄을 씌워뒀습니다. 뇌에는 천 종류의 디지털 퍼스날리티를 강제 이식했습니다. 정신조종과 최면도 걸었고요. 그러니 혹시라도 저자가 반항해도 강윤혁님이 명령 한 번으로 옥죌 수 있습니다.”
“손오공의 긴고아처럼요?”
“적절한 비유군요. 더 강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포로가 된 헬리웃은 고개를 들어 윤혁을 올려다보더니 갑작스레 벌벌 떨며 납작 엎드렸다. 제가 잘못한 걸 알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윤혁의 얼굴을 보더니 그와 닮게 생긴 카이젤이 떠올라서 공포에 질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 살려주십시오.”
여하튼 지난번과는 상황이 정반대가 되었다. 고소한 마음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에 원한을 계속 품고 있지도 않았던 참. 딱히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는 계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헬리웃이란 존재가 너무도 하찮고 하찮아서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옛 추억과 그로 인해 얻은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가 되살아나자 원수를 용납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치 않음을 직면하게 되었다.
“하아.”
데미안은 윤혁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간략히 알려주었다.
“저 사람을 앞잡이로 내세우십시오. 그가 당신과 당신 일행을 ‘둥지’까지 데려갈 겁니다.”
“저기, ‘둥지’라면?”
“저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따라가면 됩니다.”
“아, 네.”
“아마 가는 길에 위협적인 이종족이 도사리고 있을 겁니다. 그들은 인간이 자기 권역에 침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죠. 하지만 그 종족을 통솔하는 자는 ‘그 사람’, 즉 당신이 만날 그분이므로 문제는 없습니다. 그분이 여기 이 녀석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녀석을 미끼로 써서 따라가면 이종족의 감시를 비교적 수월하게 통과할 겁니다.”
“비유하면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의 시선을 돌릴 고깃덩어리 같은 용도인가요?”
“그보다는 골룸이라고 부르면 좋겠군요.”
“아…….”
“참고로 대표님께서도 이자의 이름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참고로 케르베로스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삼두견이다. 저승 세계의 문지기이며 세 마리가 번갈아 가면서 잠들기에 결코 경계를 놓치는 법이 없다. 설화에서는 어떤 사람이 고깃덩어리를 이용해 개의 정신을 빼앗은 후 몰래 통과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골룸이란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추악한 괴물로 주인공 일행을 암흑의 땅까지 데려가는 길잡이다. 마지막 순간에 배신하기는 하지만, 그 전까지는 나름 쓸모가 있었다.
“뭐, 알겠습니다.”
윤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데미안의 청을 승낙했다.
“이 놈은 교활하지만, 배신을 걱정하실 필요는 전혀 없을 겁니다.”
데미안은 의미를 모를 말로 뒷마무리를 했다.
“완벽하게 종속된 노예이니까요.”
*
인터갤럭틱 호는 은하 Gal-Z-1,087,568,433에 도착했다. 명명법에도 잘 반영되어 있듯 이곳은 인류가 정복한 주요 은하들의 대부분이 밀집된 중앙 우주에서 꽤 떨어진, 가시우주 외곽에 존재하는 은하였다. 말하자면 시골인 셈이다.
사실 멜카드제윈의 추론은 매우 정확했다. 인터갤럭틱 호는 말 그대로 인과율이라는 실 위에서 줄타기를 하며 교묘하게 원거리 타임머신 방식의 이동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는 윤혁 속의 알트루즘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카이젤이 지정해둔 계획이었다.
알트루즘의 영향력은 통신 시스템을 매질 삼아 퍼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에고이즘과도 실시간으로 원거리 상호작용을 나눌 수 있었다. 마치 이는 양자 뒤얽힘과 같았고 거리와 무관하게 즉각 작용이 이뤄졌다.
이번 프로젝트의 효율을 극대화하려면 아래의 서술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에고이즘과 알트루즘의 상호 작용 횟수는 가능한 많을수록 좋다. 심지어 같은 시점에 여러 개의 알트루즘이 에고이즘 하나와 동시 교류를 나눈다면 더욱 금상첨화이다. 이러한 ‘양자 얽힘적 상호작용’은 동시다발적으로 병렬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한편, 윤혁이 행성을 밟을 때마다 그에게서는 알트루즘의 간섭력이 형체화된 파동이 발원한다. 여러 행성에서 발원한 이 파동들끼리 시간이 지나면 뒤섞일 수 있다. 이 뒤섞임은 프로젝트의 효과적인 성취에 부정적인 효과를 더한다. 그러므로 영향력의 파동끼리의 상호 간섭은 최소화하는 조건을 지켜야 한다. 이런 조건 하에 에고이즘이 최대한 많은 수의 동일개체(알트루즘)과 동시적인 상호작용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이 우주선이 굳이 정보 교류가 드문 외지 경로를 순회하며 원거리 타임머신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경로를 지나던 이유였다.
다만, 이 또한 쉽지는 않았다. 통일시스템이 너무 진화한 나머지 수억 개 은하의 통신 네트워크는 점점 촘촘해졌다. 자연히 시간 인과율의 규율을 위배하지 않으면서 원거리 타임머신 여행을 잘 수행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던 차였다. 왜냐하면, 이제는 수십억 광년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도 실시간 정보 교류가 가능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같은 시간대에 같은 우주에 존재하는 동일 개체간의 상호작용이 일어날 위험이 높아졌다.
그래서 인터갤럭틱 호는 일부러 최근 정복된 먼 외지 은하로 항로를 튼 것이다.
이번 정류지인 Gal-Z-1,087,568,433 전체는 일종의 양산 공장과도 같았다. 이곳에는 빅뱅 제너레이터에서 창조된 갤럭시 클래스 바이오스피어 세 종을 기반으로 만든 혼합 종족이 있었다. 거대 괴물 군집의 장점만을 추출해서 합쳐 만든 이 종족은 사실상 이 은하를 독점하다시피 한 주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무인 지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 역시 QUASAR-II의 영향력이 맞닿은 곳으로 이미 여러 개의 외계행성이 테라포밍되어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땅으로 바뀐 상태였다.
자연히 이곳 행성들은 이종족과의 끝없는 투쟁을 겪는 것이 특징이었다. 마륜, 카투라, 심발리아, 이 세 종(種)의 갤럭시 클래스 바이오스피어가 융합되어 탄생한 우툼(Utumm) 족은 이곳 은하계 전역의 행성과 위성과 항성을 장악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지표면과 대기권은 물론 우주의 공허와 핵 내부까지도 녀석들의 권역이었다. 인간들은 이 위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발버둥쳐야 했다.
더욱이 인간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우툼 족은 ‘지적설계종’의 속성을 지녔다. 우툼이 만들어낸 하위 종족들 또한 은하계에 번창했고 인간들은 영역권을 지키기 위해 그것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다만 인류연합이 파견한 무인 군단이 우툼 족을 제어했고 애초에 우툼에게도 인간을 공격하지 못하게끔 하는 명령 체계가 심겨져 있었기에 무력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쟁이 버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한 번 우툼 세력이 뿌리내린 지대는 인간이 거주하기 힘든 생태계로 바뀌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선진 문물을 학습하며 응용력을 습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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