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33회 아벨의 후예 Ch 53. 카이젤과 스테판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7.23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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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은 낙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포기해야 해요. 안타깝게도.”
우승을 포기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분하지만……, 우린 모든 걸 다 버리지 못했어요.”
“데이빗.”
“제자가 되려면 소유와 밭과 가족과 자기 자신까지 버려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마음마저도 버려야 해요. 내 자아가 소원을 빼앗길 원한다면 소원마저도 버려야 합니다. 어렵사리 왔는데 결말은 이렇게 허무하게 되고야 말았네요.”
스테판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런 결말일 줄 몰랐소.”
“……하지만 당신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상태죠.”
데이빗의 말에 스테판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저로서는 솔직히 지금 내 소원을 버리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짊어져 버렸어요. 설령 그것이 주님의 뜻을 위하려는 소망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그는 회한으로 얼룩진 과거를 회상하였다.
데이빗은 ‘그녀’에게 버려진 이후 하늘도시 속에서 표식의 고통스러운 속박을 감당하며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왔다. 완전히 굴레에 묶인 것도, 완전히 풀린 것도 아닌 상태였기에 고뇌는 가중되었다. 그렇게 늙어가며 일생을 한 번 살아온 하늘도시의 지하인 하데스챔버로 내려가 고이 잠들었다.
그리고 칼리드에게서 시작된 그 사건이 발원하였고 그때 그의 혼에 새로운 영적 울림이 전해졌다. 복음의 파동이었다. 시뮬레이션 우주를 매개물로 전달되는 진리의 지식에 대한 파동. 영적 감각이 예민했던 그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이내 마음을 그 진리 앞에 열어놓았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괴로움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전부터 그 속박의 아픔을 누구보다 절실히 알았기에 늘 그는 우주 인류 모두를 향해 깊은 연민을 품어왔다.
이윽고 우주 인류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그는 여러 잠든 이들과 함께 하데스챔버에서 풀려났다. 이후, 그는 어느 외계행성에 설치된 콜로니에서 다시 수백 년의 세월을 보냈다. 피코머신 프로젝트 때문에 늙지는 않았지만, 마음만은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았다. 그는 점점 현숙해졌고 무거워졌다. 자아는 서서히 닳아 없어져 갔으나 그럼에도 영적 고뇌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아직 싸워내야 할 영적 싸움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는 심지어 자녀를 보았고 그 자녀들이 다시 자녀를 낳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콜로니 속의 세계는 애당초 설정되기를 전통적인 가족관이 많이 희석된 형태로 되어 있었기에 후손들은 그에게 애착을 갖지 않았다. 자녀들 중 누구도 복음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씁쓸한 심정으로 데이빗은 여러 후손을 떠나보냈다.
이후 그가 이레귤러임이 검증되자 인류연합 측에서는 그를 빼내어 지구로 송환했다. 거기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던 자들을 만나 처음으로 깊은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수용소에서 그는 성경을 날마다 묵상하며 깊은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거기서 그는 꿈을 갖게 되었다. 속박 가운데 짓눌린 우주 인류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자. 그들이 마음껏 창조주를 찬양하도록 방해물을 제거하고 싶다. 비록 불가능한 일일지언정 그는 그러한 자유의 꿈을 품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여겼죠.”
“내 생각도 일치하오.”
“하지만……, 난 내 뜻대로 주님을 위하려고 했어요. 내 능력을 통해서요. 하나님께서 오로지 나를 통해서 그분의 뜻을 이루셔야 한다, 라고 은연중에 여겼는지도 몰라요. 사실 그분의 계획이 어떠한지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데도 말이죠.”
데이빗은 처절한 내적 투쟁 끝에 한 결론을 내렸다. 지금껏 달려온 길을 포기해야 한다. 내려놓아야 한다. 소원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마저 포기해야 한다. 그분의 영광은 그분 자신이 직접 자기 방식대로 이루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바른 결론이었다.
“저를 소모해서 통과하세요, 스테판.”
“그게 무슨 말이오?”
스테판은 농담하지 말라며 책망했다. 하지만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다.
“무조건 한 사람의 본체를 열쇠로 소모해야 해요. 둘이 각자 자신을 열쇠로 쓰려고 경쟁하는 건 무의미해요. 저 공허 넘어 존재의 흉계에 넘어가는 꼴이죠. 전혀 다른 타개책이 필요해요. 그러자면 누구 하나가 열쇠가 되어 나머지 하나가 나가야 해요. 그래야 우리의 자아가 소원을 침식하는 일을 막을 수 있어요.”
스테판은 점점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러면 왜 내가 가야 하오? 당신이 더 지혜롭지 않소? 당신은 분별력도 뛰어나고 생각의 깊이도 더 깊소. 분명 일곱 명 모두의 소원을 취합하여 가장 올바른 방향으로 해답을 찾아내 실현해 낼 거요. 난 그렇게 믿소. 그런데 왜…….”
“스테판, 아직도 모르겠어요?”
데이빗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소원을 포기해야 해요.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이뤄주고 싶은 욕망마저도 버려야 해요. 전 못할 거예요. 적어도 지금은 그러지 못할 것 같네요. 하지만 당신은……, 처음부터 주님의 공의를 이루려는 소원을 갖고 오지 않았잖아요. 당신은 이 싸움의 본질이 그게 아니라는 걸 진작 깨달았던 거죠.”
속마음을 꿰뚫린 스테판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전 저 너머에 존재하는 끓어오르는 혼돈, 절대악에 가까운 어떤 창조자를 보았어요. 어쩌면 ‘그 대상’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지도 모르죠. 반면, 당신은 인간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본질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희미한 가능성을 본 거예요. 더구나 저는 기껏해야 내 속의 ‘새 본성’에 소원의 주도권을 내주었지만, 당신은 아예 소원 그 자체를 내려놓았잖습니까. 그러니 당신이라면 이길 수 있습니다. 제가 아니라요.”
한참이나 설득이 이어졌다. 스테판은 여전히 망설였다.
“그러면 당신과 뒤에 남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 거요? 내가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당신을 보겠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마저도 생각하지 마세요. 앞만 바라보세요.”
“하지만…….”
“남은 부분은 하나님께서 그분 뜻대로 해결하실 겁니다.”
“난……, 아직 소원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확신이 없소.”
“바로 그렇기에 당신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미리 답을 내려버리고 ‘이것이 주님의 뜻일 거야’라고 속단 내리는 것이 아닌, 겸손하게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자, 그런 이만이 저 너머의 해답을 볼 수 있습니다.”
데이빗은 이내 고전 소설 속 한 장면을 떠올렸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속에서 ‘크리스천’과 ‘소망’, 두 주인공은 죽음을 상징하는 요단강을 앞에 두고 최후의 고심을 하게 된다. 저 죽음을 넘어야만 천국 문에 다다를 수 있다. 용기 있게 뛰어들 것인가. 두 사람은 함께 죽음의 두려움을 주님 품 안에서 이겨내고 천성에 이른다.
하지만 지금 두 그리스도인이 마주한 장벽의 종류는 전혀 달랐다. 저 너머에는 천성이 아닌 다른 것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문 너머의 것을 마주하면 그걸 어찌 처리할지를 다시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판단하게 될 것이다. 저 자리에는 둘이 건너갈 수 없다. 오로지 한 사람, 그 자리에 적합한 자가 건너가야 한다.
“가십시오.”
“…….”
스테판이 주저하자 데이빗은 스스로의 본체를 소각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스테판, 그러나 그러건 말건 데이빗은 서둘러 자신의 본체를 쥐여주었다. 이것을 열쇠로 삼아서 빨리 최후의 문을 넘어가거라. 그것만이 해결책을 볼 방도이다. 주저할 겨를이 없었다.
“미안하오.”
“그런 말씀 마세요. 주님의 영광이 당신을 통해서 빛으로 드러나기를.”
“나도 당신께 같은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하오.”
근진계 속의 데이빗의 형체는 압축되어 작은 빛 덩어리가 되었다. 스테판은 심호흡한 뒤 최후의 시도를 던졌다. 그는 제3 필드의 문을 두드렸다. 곧 빛을 소모한 문은 스테판을 집어삼켰다. 이내 무한했던 공허의 거리가 단숨에 한 점처럼 짧게 압축되었다. 도무지 건널 수 없었던 간극이 일시에 좁혀졌다. 그리고 밝은 빛이 의식을 집어삼켰다. 근진계에서 겪었던 모든 경험과 기억들이 일시에 눈 녹듯 사라지면서 오직 단 몇 개의 핵심 기억만 남았다.
*
정신을 차려보니 RS-필드는 온데간데없었다. 스테판은 현실 세계 속의 물질계, 통상 공간에 놓여있었다. 지금껏 겪은 억겁의 세월은 하룻밤의 꿈처럼 기억이 희미해져 버렸다. 다만, 몇 가지 사항은 선명히 기억에 남았다. 예컨대 뒤에 남은 탈락자들의 몫은 자신에게 확실히 씌워져 있었다. 스테판은 최후까지 남았던 여섯 명의 소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억하였다. 이제 이것을 이룰지 말지, 이룬다면 어떤 식으로 이룰지는 오로지 그의 선택에 달렸다.
‘게다가 몸이 그대로 되돌아왔소.’
스테판의 육신은 멀쩡한 상태였다. 찰과상 하나 없이 말끔한 몸, 제1 필드에 진입하기 직전의 몸 상태 그대로였고 입자 배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3차 경합 직전에 보았던 풍경이 바다였다면 이번에는 장소가 완전히 바뀌었다. 스테판은 용기를 내어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근진계의 위용과는 또 다른 의미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맹세코 그는 우주 그 어디에서도 그런 찬란한 도시를 본 기억이 없었다. 심지어 시뮬레이션 우주까지 포함하더라도 말이다.
‘굉장하오.’
그 장엄한 위용 앞에 시선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역사상 하늘도시 속에 존재했던 강대한 문명들을 죄다 합쳐놓아도 저 찬란한 위엄과 영화에 비하면 발치에도 도달하지 못하리. 그곳은 수억 개 은하와 그 위의 상위 차원들마저 정복한 인류연합의 심장이요 인류 지성과 힘의 정수가 전부 담긴, 세계의 핵심부였다.
‘이곳이 설마?’
그렇다. 제로원(ZERO-ONE).
인간들의 황제에 의해 우주의 원점(ZERO point)이자 유일한 성지(ONE point)로 세워진 세계. 전면개방의 시대가 도래하고 기존의 지구 체계가 해체된 뒤, 새 주민이 될 우주 인류가 징검다리를 거쳐 지구에 당도하였고 이에 제로원도 대대적인 개편을 거쳤다. 인류의 수도에 걸맞은 위용을 갖추도록.
제로원이 현재 지구상의 지표면 나머지 모든 부분을 모조리 잠식하였기에 원래의 제로원이었던 아엘브론과 레뮬로스가 위치했던 지리학적 좌표는 이제 온전히 다른 개념으로 재조작되었다. 기존에 두 도시에 살던 시민은 죄다 바깥의 땅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두 위치에는 인류를 지배하는 ‘범우주적 시스템’들의 본체만 남게 되었고 사람이라고는 사실상 주인 한 명만 남았다.
그리고 RS-월드가 개최된 이후로 두 도시는 한 번 더 격변을 겪었다. 이제 그곳들은 ‘신격화 장벽’을 생성하여 우주 전역에 덮어주는 메인 제너레이터가 되었으며 나아가 모든 ‘인과율 택스’가 모이는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제1, 제2, 제3 RS-필드는 호리병과 비슷한 형태로 전개되어 ‘아엘브론-지구핵-레뮬로스’ 연속선을 감싸 쥐는 형태로 펼쳐졌다. 이로써 마침내 제로원은 궁극의 형태로 개화할 채비를 갖췄다.
현재 제로원은 원래의 아엘브론과 레뮬로스가 일종의 공간 반전 조작을 통해 서로를 마주 보는 형태로 재탄생하였다. 원래라면 지구상에서 반대편에 놓인 두 도시라 서로 마주 볼 수 없지만, 좌표 반전으로 ‘핵’을 중심으로 둔 채 상공 위에 도시 하나, 상공 아래에 도시 하나가 놓여 서로를 마주 보는 존재 양상이 되었다.
더 경이로운 점은 흡사 두 거울이 마주 볼 때 무수히 많은 상이 형성되는 것처럼, 아엘브론과 레뮬로스가 마치 서로를 반사하는 거울이 되었고 그로 인해 무수히 많은 새로운 도시가 연이어 형성되어 사방의 축으로 뻗어나가 연속체를 구성하였다. 더욱이 이러한 거울상 전개는 x축, y축, z축 각각에 대해 모두 이뤄졌고 그것들만이 아니라 넘어 벌크 차원의 상위 축으로도 뻗어나갔다. 그로 인해 연속체의 규모는 끝없이 웅대했다.
마치 미세한 세포 속에 무려 32억 비트의 DNA가 압축될 수 있는 것처럼 자그마한 행성인 지구 안에 무한의 공간이 담긴 셈이다. 기존의 기술과 차이가 있다면 이 도시의 공간은 전에 하늘도시 속에 건설된 준-무한 공간들과는 달리 한층 더 ‘실제적인 무한’에 가까웠다.
제로원을 이루는 무수한 거울상들의 좌표축이 수렴하는 중심부에는 지구의 핵, 정확히는 물리적 내핵이 아닌 ‘지구혼’의 본체가 봉인되어 있었다. 이 도시는 그 지구혼의 에너지를 무제한으로 복제하고 양산하여 ‘신세계 구축’을 위한 재료로 쓰고 있었다.
나아가 이 도시는 모든 테서렉트 아키텍쳐들이 연결된 중심점이자 그것들이 시작된 원점이었다. 수억 개 은하의 중심부 블랙홀들이 테서렉트 아키텍쳐 시스템의 ‘지방 지점’라면 이곳 제로원은 ‘중앙 정권’이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은 근진계가 뻗어나가는 곳, RS-월드가 생성되는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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