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38회 아벨의 후예 Ch 54. 승리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8.10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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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또한 실패감에 무뎌졌구나. 삼손 그 아이처럼.]
의식을 잃은 재현에게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최면에 걸린 것마냥 벌떡 정신을 차렸는데 사방은 온통 백색의 영역이었다. 삼차원이 아닌 어떤 영역. 심지어 자신의 육신마저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 공간에는 오로지 자의식, 그리고 누군가의 음성만 감지되었다.
[너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구나.]
“…….”
[설령 네가 적을 꺾었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결말은 후회뿐이라.]
재현은 자신을 향해 겨냥되는 실망감에 고개를 숙였다.
“저 혹시……, 죽은 것인가요?”
[아니, 아직은 그럴 아니다.]
“어쨌건 저는 실패한 모양이네요.”
칼로 대응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보란 듯 어기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런 주제에 자기 힘을 과신하여 초인과의 싸움에서 철저히 대패하고 말았다. 그는 약했다. 뼈저릴 정도로. 마음도 연약했고 그나마 믿었던 알량한 힘도 별 볼 일 없었으며 신앙심은 더더욱 형편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들을 전혀 구해내지도 못했다.
[안심해라. 그 아이는 지금 내 품에서 내 영광을 함께 나누고 있다.]
“찬영이 말씀이신가요?”
[그래, 마지막까지 곧바른 길을 잊지 않았지. 그는 자기 피에 대한 신원이 반드시 이뤄질 것을 믿었다. 나아가 증오심이나 복수심도 포기하였다. 오로지 형제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기꺼이 목숨을 버렸다.]
재현은 숙연해지는 무거움을 느꼈다.
“……저는 끝내 목사님을 구해내지도 못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 악한 자가 목사님을 욕보일 겁니다. 그분의 정신을 조작해서 주님의 나라를 공격할 꼭두각시로 만들 작정입니다. 목사님이 그 장면을 맨정신으로 지켜보며,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생각하면……, 끔찍해서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어째서 그런 의로운 사람이 그러한 불의한 일을 감내해야 합니까?”
재현은 하박국의 심정으로 주께 탄원하였다. 자신 같은 나약한 실패자라면 모를까, 어째서 리온 같은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이 원치 않는 참람한 잔을 마셔야 하는가. 의아해하는 그 순간, 주께서 진실을 알려주셨다. 앞으로 다가올 비참한 처지를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리온의 결의를.
[너는 그의 고통받음이 내 선한 뜻을 어그러뜨리리라고 생각하느냐.]
재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꿀 능력이 있음을 믿지 않느냐?(롬 8:28)]
그때야 재현은 깨달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도록 요구하셨다. 하지만 실상 그분은 인신 공양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단지 그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 굳건하게 세우기 위한 하나의 시험이었다. 리온은 비록 결말은 어떻게 될지 구체적으로 몰라도 하나님의 신실함만은 믿었기에 절망적으로 보이는 미래를 겸손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삭을 대신해서 준비된 ‘양’은 바로.
‘주님을 표징하는 상징이었지.’
[또한 나를 대신해서 이 땅에 살아가는 너희가 그 양의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
번뜩 별안 간 머릿속에 한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저를 그 자리에 준비해 두신 겁니까?”
침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였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나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또 넘어지고야 말았습니다.”
[삼손은 회개하였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겼을 때 나는 실수를 내 옷으로 덮어주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한 번 더 힘을 주었느니라(사사기 16:28). 너는 이번에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느냐?]
무거운 질문이었다. 단순한 도움 요청이 아닌, 희생을 각오하는 기도. 가능할까?
‘내 모든 것을 다 태워서라도……, 목사님을 구해낼 수 있다면…….’
어쩌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따르겠습니다. 제 실수를 바로잡고 싶습니다.”
마지막 대답과 동시에 재현은 현실 세계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사경을 버텼다? 최후의 발버둥인가?”
비틀거리며 회생한 재현을 내려다보며 갈트론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네 저항은 무의미해, 천재현.”
“이제야 알겠어.”
난데없이 흘러나온 재현의 말을 듣고 갈트론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상대는 쓰러지기 전과는 느껴지는 기운이 달랐다. 물리적인 힘이나 지능이 증폭된 것은 아니었다. 부상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전만 해도 격렬했던 증오심이나 울분의 감정이 재현에게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 것도 아니었다. 맑고 분명한 정신력을 유지하는, 그러나 모든 것을 용서하는, 흡사 초월적 경지에 이른 것만 같았다. 온전하게 음료 헌물로서 드려진 헌신된 영혼만 체험할 수 있는 해방감과 평온감이었다.
재현은 아직 캡슐에 결박된 리온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목사님, 조금 전까지는 원망스러웠어요. 왜 위험을 알면서도 굳이 저를 떼어내셨는지. 하지만……, 사실 당신은 주님께서 가셨던 험한 길을 뒤 따라가기를 원하셨던 것이겠죠. 가장 낮아진 자리까지. 심지어 인격과 존엄마저 모조리 포기한 그 자리까지 내려가도 그 뒤에 승리가 있을 줄을 믿고 계셨던 거였어요. 저는 여전히 발걸음이 늦네요. 그래도 늦게나마……,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요.”
그의 미소에는 확신과 평온이 담겨 있었다.
‘찬영아, 고맙다. 목사님 곁을 지켜줘서. 넌 패배하지 않았어. 이젠 그곳에서 생명의 왕관을 쓴 채 나를 지켜봐 줘. 부족하고 어리석은 나지만, 그래도.’
한편 상대편은 여유롭지 못했다. 공공의 계약, 그 불편하기 그지없는 족쇄가 조여오는 감각이 엄습하자 갈트론은 이마를 찡그렸다.
“시간이 얼마 없군.”
싸움이 곧바로 재개되었다.
“재미는 이미 충분히 봤다. 그러니 그만 쓰러져라.”
그는 재현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초능력은 봉인 당했지만, 그래도 다른 과학 기술을 적절히 응용하면 재현의 이능력을 복제하여 되돌려주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갈트론은 재현이 이번 일격으로 쓰러지리라 여겼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갈트론의 공격이 정확히 상쇄시키는 역방향 간섭력에 의해 차단되었다. 재현의 몸에 깃들어있던 초능력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마치 제단에 바친 제물들이 타서 없어지듯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남은 힘은 오로지 원래 갖고 있던 특수 속성과 최초로 얻은 이능력뿐이었다. 그런데 힘의 운용 방식은 기이한 방식으로 바뀌었다. 흡사 보이지 않는 어떤 지혜가 재현을 대신하여 그를 이끌어 이능력을 운용하는 것만 같았다. 재현 본인보다도 훨씬 더 정교하고 지혜로운 섭리 안에서.
“아, 그랬지, 그러고 보니 네가 바로 그 ‘최강의 크로스솔져’였군.”
“아니, 물리적인 싸움에 의존하는 건 오늘로 마지막이다. 더는 내게 크로스솔져라는 칭호를 취할 자격이란 없어.”
재현은 갈트론에게 대꾸했다. 증오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홀가분한 어투였다.
“넌 내가 혐오스럽지 않은가?”
갈트론은 도발해 보려고 시도했다.
“네겐 아무 감정도 없어. 네 속에서 너를 움직이는 죄의 권능은 밉지만.”
“날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나?”
“없어.”
“네 친구를 죽였으며 네 스승을 비참하게 농락하고 있는데도?”
이어지는 도발에도 재현은 표정에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진지한 어투로 되받아쳤다. 전과 달리 뿌리 깊은 권위가 담긴 목소리였다.
“왜 죽이지? 너 같은 가련한 존재를…….”
생각지 못한 대답이 돌아오자, 갈트론의 증오심이 꿈틀거렸다.
“찬영이는 영원한 평온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하겠지. 목사님도 너로부터 구원을 받을 거야. 굳이 나를 통하지 않더라도. 네가 그분을 모욕할 수는 있어도 그의 영혼을 빼앗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서 너의 목숨을 앗으면 너는 거룩한 심판대 앞에서 정죄를 받고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형벌(마 25:41)’로 향할 텐데?”
목숨을 빼앗지 않겠다는 자비의 선언. 나아가 얼마든지 처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선포. 그리고 자신들은 보호 가운데 있으며 되려 적은 영원한 심판 가운데 있다는 승리의 선언. 재현의 목소리에는 패기와 권위의 생기가 넘쳐났다.
“하하, 죽일 자신은 있고? 네놈이 이길 확률이 있다고 생각해?”
“……그건 해봐야 알겠지.”
다음 순간, 예고도 없이 갈트론의 재공격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재현은 반대 상성의 힘을 발현하여 막아내었다. 단순히 힘을 다루는 자질만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예지라도 하듯 상대가 다음번에 어떤 류의 공격을 해낼 것인지를 알아맞히고 있었다. 재현의 실력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깨달은 갈트론은 공격의 강세를 높였다.
‘늦기 전에 제압해야 해. 지체하다간 확률왕에게 덜미 잡힌다.’
이제 갈트론 쪽이 초조함에 시달렸다. 가뜩이나 상대의 영적 위엄에 압도당했다는 굴욕감 때문에 온전한 이성을 유지하기도 어려운데, 재현이 회심의 공격까지 정확히 막아내는 바람에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둘은 치열한 권능 대결을 펼쳤다. 몸에 축적된 초능력이 모두 제단 위의 제물처럼 불살라지자, 재현은 전에 없던 놀라운 수준의 역량을 폭발적으로 발휘하였다. 그의 몸속에 담긴 영이 그를 대신해서 싸워주고 있었다. 갈트론은 즉각 깨달았다. 저런 높은 수준의 운용, 저건 보통 일반인의 지성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아니, 초인과도 격이 달라. 뭔가 차원이 다른 지혜다.’
재현의 이능력은 빠르게 소멸하고 있었다. 갈트론에게 했던 말 그대로 이번 싸움은 전사로서의 재현의 기능의 막을 알리는 고별 무대가 될 것이다. 이번 싸움을 마치면 재현은 이능력과 초능력을 모두 잃는다. 그는 아까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홀가분한 감정을 즐겼다.
둘의 치열한 싸움의 여파로 라오디케이아 안에 전개되었던 전투 전용 공간은 빠르게 붕괴하였다. 갈트론이 확률 파동을 붕괴시키면 재현은 역파동으로 되받아쳤다. 갈트론이 검은 힘을 압축하여 분사하면 재현은 텔레포트의 충격파를 검날처럼 사용하여 검은 힘의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궤적을 틀어 흘려내었다.
갈트론이 사념파로 공간을 조종해서 압축한 뒤 찌르면 재현은 일순간 빛으로 화하여 속박의 법칙을 깨부수었다. 갈트론이 예지 능력을 발휘해 재현의 미래를 확정하려 하면, 재현은 몇 초 앞의 상황으로 반복 텔레포트 하여 인과율의 틈새를 흔들었다.
대결은 점입가경의 경지로 접어들었다. 라오디케이아 내의 공간과 시간과 자연법칙과 인공 우주가 뒤흔들리며 역변과 정변이 수없이 교차했다. 싸움의 광기를 즐기는 갈트론조차도 재현의 의연하고 올바른 자태에 당황했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지?.’
지금껏 전투광들과의 대련은 수없이 겪어왔다. 하지만 재현과 같은 상대는 처음이었다. 싸움 그 자체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고 힘이나 권능에 대한 미련도 없다. 물론 누군가를 구하려고 애쓰는 자들이야 숱하게 보아왔다. 하지만 동료의 운명이 걸렸으면서도 이토록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자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재현은 조금 전에는 동료 한 명을 떠나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태연하지?
‘아마도 갈트론은 날 이해하지 못할 테지.’
그건 오로지 죽음마저도 초월한 소망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만이 얻는 강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죽은 동료도, 모욕당하는 동료도 언젠가 일으켜 세우시리라는 굳건한 확신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 아울러 이 경지에 이르면 악에 침식된 적을 보고 증오심이 아닌 안타까움과 긍휼을 품게 된다. 제아무리 기세등등해도 언젠간 반드시 죄악에 대한 심판에 이를 것을 훤히 알기 때문이다.
‘고마워, 찬영아.’
깨어나기 전, 주님께서는 재현에게 찬영이 셋째 하늘에 당도한 바로 그 순간 먼저 드린 기도가 무엇이었는지를 귀띔해 주셨다. 그 내용을 듣자마자 재현은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제 부탁은 이것입니다. 이제 재현이 형이 목사님을 구하겠다고 싸움터에 뛰어들 거예요. 부디 그가 역경을 마주했을 때 주님의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해주세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서 이기도록 도와주세요(베드로전서 3:9). 무엇보다 목사님의 그 지혜와 고귀한 마음을 재현이 형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해 주세요. 목사님이 주님을 뒤따라서 좁은 길을 걸었듯, 재현이 형도 승리하도록 해주세요.”
리온 마흐무드의 순결한 정신, 그리고 천재현의 재능, 이 두 가지를 온전히 하나로 연합하여 전무후무한 위력의 크로스솔져를 탄생시켜 주시길. 찬영이 지상을 떠나면서 내뱉은 마지막 기도란 이런 부탁이었다. 그리고 그 기도의 결실은 마침내 완성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성령님께서는 재현이 소유한 모든 이능력, 곧 찌꺼기들을 불태우셨고 그 연소 반응의 제어권까지 모두 취하셨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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