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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39회 아벨의 후예 Ch 54. 승리 (5)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8.12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무의식 가운데서 고통을 겪던 리온은 혼미함 속에서 옅은 희망의 향기를 느끼고는 희미한 의식을 되찾았다. 여전히 갈트론의 뇌세포들이, 악으로 절여질 대로 절여진 악취 가득한 의식, 사상, 이념이 리온을 침식하면서 혼과 정신을 고문하고 있었다. 받아들이려야 받아들일 수 없는 저주, 리온의 의식은 절여지기 직전 강한 반발과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발악하였다.

 

 

‘누구지?’

 

 

이미 마음이 부서진 상태라 외부 상황을 의식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영으로 느낄 뿐이었다. 미미한 희망만이 담긴, 그러나 뚜렷하기 그지없는 의지를. 그것은 흡사 생명의 씨앗 같았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건가?’

 

 

 

 

 

반면 갈트론은 감히 감당치 못할 거대한 권위가 재현 뒤에 머무름을 느끼고 공포감에 휘말렸다. 그에게는 더 이상 이 상황이 여흥 거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유성운의 디버프에 절여졌다고 해도 일반인 따위에게는 곤욕 치를 일이 없으리라 여겼건만, 무언가 강력한 운명에 의해 그 예측이 뒤틀리는 것이 감지되었다.

 

 

‘이, 이건 아버지, 아니 위버멘쉬 그분보다 더 거대한 존재감이잖아?’

 

 

힘과 기술에서는 여전히 갈트론이 앞지르고 있었지만, 권위의 깊이만큼은 감히 저쪽을 흉내 낼 수 없었다. 인간은 물론 영적 세계의 피조물들마저도 압도하는 무한한 권능과 위엄. 그 맛을 간접적으로 살짝 맛보는 것만으로도 일개 하찮은 피조물들은 버텨낼 도리가 없었다.

 

 

‘죽여야 해. 저런 건 살아있어선 안 돼.’

 

 

재현이 카이젤이 주시하는 귀한 실험체라는 사실마저 망각한 갈트론은 상대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하며 악을 썼다. 그는 뭔가에 씌운 듯 광기와 두려움에 휘말렸다. 영적 압도감에 짓눌려 건전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성운의 방해 공작으로 봉인되었던 초능력이 티끌만큼이나마 돌아왔다. 너무 적은 양이라 제대로 써먹지는 못하겠지만, 재현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즉시 지체하지 않고 힘을 쏟아부었다.

 

 

“그만 죽어버려.”

 

 

공간 전체가 훼파되며 폭발음이 번져나갔다. 갈트론의 현자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재현이 죽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공간의 파편을 감찰했다. 일개 인간이 최상위 초인의 초능력을 버텼을 리가 없다. 티끌만 한 작은 한 점의 힘만 사용하더라도 일반인의 최대 용량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하지만 갈트론의 기대는 이내 산산조각났다.

 

 

“벌써 반칙에 의존하는 건가? 잘나신 최상위 초인께서 꼴이 말이 아니군?”

 

 

재현이 여유롭게 잔해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제복이 반파되어서 상체의 맨살이 훤히 노출되었으나, 아까의 여유로운 기색은 여전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힘을 대신 운용해 주는 미지의 어떤 권위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재현의 힘 자체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걸 감지한 갈트론은 흠칫했다.

 

 

“그럼 나도 공평하게 인류연합 대표한테서 뜯어낼 건 뜯어내야겠네.”

 

 

재현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다 이해하지도 못한 채 능수능란하게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우연히 흘러들어온 어떤 변화의 기류에 반응하여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대응하는 듯했다.

 

 

“저건 설마……, RS-월드 후폭풍? 그게 왜 네놈에게로?”

 

 

갈트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재현은 다시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아, 너희는 이 현상의 작동 내막을 뭔가 아는 모양이구나. 난 그런 복잡한 건 잘 모르는데 말이지.”

 

 

“그런 귀한 것을 감히 네놈이!”

 

 

현재 다량의 RS-월드 후폭풍 효과가 농축적으로 재현에게 흡수되는 중이었다.

 

 

사실 첫 번째 RS-월드 개막 때 생성된 후폭풍의 전부 세상에 방출된 것이 아니었다. 그중 3할 정도는 미리 카이젤이 따로 압축해서 장래를 위해 봉인해 뒀었다. 카이젤은 그 3할을 오롯이 천재현, 천수현 형제의 특수 속성에 스며들도록 설계해 두었다. 물론 나중에 무르익으면 자신이 빼앗으려는 준비의 일환에서.

 

 

그런데 지금, 저장된 3할 중 일부가 예고도 없이 재현의 힘 속으로 스며들었다. 원래 그렇게 흘러가도록 설계되었다지만, 타이밍은 카이젤의 계산 밖이었다.

 

 

근진계와 현실계의 연접은 매우 치명적인 파급력을 갖는다. 누구든 RS-월드의 후폭풍에 살짝 스치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만으로도 존재적 격이 달라지며 잠재력의 한계도 달라진다. 실제로 그 덕분에 초인들도 전과는 비교도 불가능할 만큼 강해지는 혜택을 누렸다.

 

 

이럴진대, 만일 카이젤이 따로 농축해 놓은 RS-월드 후폭풍의 고농도 현현체를 짧은 시간 안에 흡수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실 이건 원치 않았는데.”

 

 

재현이 원하건 원치 않건 그 여부와는 상관없이 흡수가 비가역적으로 진행되었다. 이것도 계획된 섭리 안의 일부분이라면 잠시 빌려 쓰는 것으로 치자.

 

 

“어차피 인류연합 대표에게 반환될 힘이니 잠시나마 좋은 목적으로 쓰이도록 기회를 베풀지.”

 

 

이런 인공적인 힘 따위 오래 지닐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었다. 일단은 이 자리에서 목사님을 구조하자. 그리고서 나중에 인류연합 대표와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짓자. 동생이나 사역팀 동역자들을 두 번 다시 건드리지 못하도록 언약의 쐐기를 박고 모든 불필요한 짐을 그의 발치에 내버리자.

 

 

하지만 우선은 저 철인왕의 사악한 악의부터 막아야 한다.

 

 

“다음 텀은 더 각오해, 살인자.”

 

 

철인왕은 도발해오는 크로스솔져에게서 전해지는 경건한 위압감에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

 

 

 

 

 

카이젤은 상대를 기운으로 짓누르기를 그만두고 멈춰서 생각했다. 허망함. 죄책감. 아련함. 쓰라림. 그리고 따듯함을 향한 무의식적인 갈망. 그의 내면은 여러 상충하는 감정들로 혼재되어 뒤숭숭했다.

 

 

본래의 그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인간의 나약한 감정을 거부했겠지. 그런 약한 본성을 소유하기를 원치 않았다. 초인에게는 필요치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젠 비가역적으로 경계심을 허물고야 말았다. 그 틈을 타 자신의 본모습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카이젤 자신도 자기 정체성에 혼동이 일었다. 자신을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또한 불가피한 운명인가.

 

 

‘왜 그렇게 날 애틋하게 돌아보지? 난 너희의 억압자가 아니었던가?’

 

 

힘으로든 지력으로든 누구에게든 꺾여본 적이 없던 고고한 최강자. 그랬던 그가 연약함과 정직함을 무기로 내세운 한 도전자 앞에 동요하였다. 여전히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따뜻한 심장은 시시각각 머릿속의 빗장을 깨부수며 봄 같은 상냥한 향기를 불어넣었다. 저항하기가 어려운 것인가. 내가 이렇게 의지력이 약하다고? 아니다. 이미 저항하고 싶은 의지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상태였다. 카이젤은 이미 스테판에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아차 싶었다.

 

 

‘너는 자기가 하지 않은 행동에마저 깊은 속죄를 표했는데……, 나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망령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 타인을 압제했을까. 그런다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거늘.’

 

 

선지자에게 말로 꾸지람을 들었을 때 느낀 부끄러움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내면의 수치심이 들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은 더 큰 충격을 주는 법. 마음만 먹으면 카이젤은 얼마든 스테판을 원하는 대로 처분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소원’마저 미련 없이 내던지고 겸손하게 스스로를 무장해제 시킨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카이젤은 스테판에게 털끝 하나도 해할 수 없었다. 스테판은 저도 모르게 왕으로 하여금 자책과 회한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왜……, 너는 나와 달리 자유롭지?’

 

 

스테판의 감정 상태를 감지해 낸 카이젤은 또 하나의 경이로운 현상을 관찰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보통 사람에게서 감지되는 감정 패턴과는 다른 모습이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죄의식을 느낄 때 수치감과 깊은 자책으로 인해 괴로워한다. 그런데 스테판은 마음속 깊이 죄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정작 절망이나 고통의 지배는 받지 않았다. 무거운 죄과를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죄로부터 자유를 얻어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모순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건가? 네가 뭐길래?’

 

 

질투심 섞인 호기심이 일었다.

 

 

“이젠 괜찮으시오?”

 

 

스테판이 올려다보며 다시 질문하자 카이젤은 흠칫했다. 분명 조금 전 무언가가 머리를 질식할 듯 괴롭혔었다. 그런데 스테판의 온화한 마음에 함께 휩쓸리자마자 고통이 가셨다. 강함으로는 꺾지 못했던 고통이 연약해 보이는 손에 의해 손쉽게 꺾였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겸손해질 수 있지?”

 

 

“…….”

 

 

“부끄럽다만……, 난 너를 보고 염치를 느꼈다. 네가 내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내 버린 셈이니까. 그것도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일 스테판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냈더라면 카이젤은 우주 전체를 억압하는 독재자의 자리에 섰을 것이며 스테판은 그에 항거하여 정의의 편에 선 의인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스테판이 택한 방식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는 모두가 죄인임을 적나라하게 증명해 주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다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불쌍한 처지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는 겸손을 위장하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용서하거나 회개하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의로움을 뽐내지도 않았다. 그저 솔직한 속내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이해가 되지 않군. 네가 나를 해친 건 아니지 않나?”

 

 

“……당신의 동생이 나에게 가르쳐주었소.”

 

 

윤혁이 언급되자 카이젤은 정체 모를 숙연함에 입을 다물었다.

 

 

“그가 내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른 진리를 가르쳐주었소.”

 

 

특별히 스테판은 오래된 꾸짖음을 듣고 깊이 회개하였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자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 23:29-35)]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살았더라면 구약 시대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지는 않았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자신들은 의인이며 옛 선지자를 죽였던 조상들은 악인이라고 흉보며 비판했다. 그들은 자신들 또한 본질상 조상들과 똑같은 죄인이며 같은 상황을 마주했다면 얼마든 더 악한 짓을 벌일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옛 역사책의 흉악한 악인들을 돌이켜보며 그들을 정죄한다. ‘나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나라면 저보다는 나았을 텐데.’ 하지만 정작 그들은 인간 내면에 잠재된 악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깨닫지 못한다. 자신들의 속에 있는 악의 씨앗도 적절한 양분과 물만 제공된다면 얼마든 끔찍한 악인의 형질을 싹틔울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실제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직접 자기들 손으로 살인을 범한다. 선지자와는 비교조차 못할 만큼 더 위대하고 의로운 분을 정죄하여 무참히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 가르침 앞에 선 스테판은 자신에게 타인의 죄를 정죄할 자격이 없음을 깨달았다. 또한 과거에 조상들이 저지른 죄 또한 자신과 무관하다고 선언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도 동일한 자리에 있었다면 더욱 깊은 나락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찌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도 죄에 짓눌려본 체험이 분명한 자는 다른 죄인들을 더 깊이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수밖에 없다. 그 고통과 허무함을 알기에. 그리고 그 죄에서 해방을 가져다준 유일한 사랑의 필요성을 절실히 잘 알기에 그것을 어떻게든 전해주고파 안달이 날 수밖에 없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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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8회 아벨의 후예 Ch 54. 승리 (4)
등록일 2026-08-10 | 조회수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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