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02회 [2부] 23화. 강자에게 강한 자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3.10 | 회차평점 ![]() |
원탁의 회의는 원래 브리튼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전통이다.
원래 주로 왕이 현자들로부터 공정한 자문을 구할 때 쓰이는 관례로 지혜자들을 향한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원탁 위에 앉도록 부름 받은 멤버들은 시대와 상황마다 다양했다.
대체로 조언을 구하기에 합당한 지식과 덕망을 갖춘 멤버로 구성되었다.
최소 보통의 엘리트 이상의 격을 갖추는 것은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한 왕의 재위 기간에도 원탁의 구성원은 자주 바뀌곤 했다.
보통은 토의의 목적에 따라서 그 선발 기준이 정해지곤 했다.
헌데 크리스토프 1세 이후로는 이 원탁의 문맥이 조금은 변이되었다.
민주적이고 공정한 회의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목적에서는 맥락이 비슷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묘하게 강조되는 포인트에는 변화가 발생했다.
이전에는 왕이 제 무지를 극복하고자 도움을 구하는 방식이었다면, 강력한 기준과 명분을 소유하게 된 이후로는 도리어 원탁을 통해 내로라 하는 지혜자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린도전서 2:15)
16세기 말을 왕실의 위대한 승리로 장식했던 현왕(賢王)의 시대.
그 이후로 그의 후손들은 이 말씀을 길이 간직하여 정치 속에서 실천하였다.
실제로 그들 손에는 풍부한 영적 유산들이 쥐여 있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신의 임재가 언약을 통해 그들과 함께하였다.
각 세대의 황실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신실하고 정직했다.
그들은 덕망과 신앙심이 깊기로 유명했으며 삶에서 드러나는 인품도 그러했다.
또한 신의 축복이 오랜 세월 누적되어 만들어진 그들의 후손들은 자신들 세대의 어떤 현자들보다도 지혜과 슬기로움 면에서 탁월했다.
설혹 그들이 실수한다고 해도 모진 교훈으로 깨우쳐줄, 대언자 노릇 할 목회자들이 각 세대에 보내졌다.
이렇기에 그 어떤 주제로 원탁의 논의를 하더라도 항상 정답에 한없이 근접할 수 있는 존재는 황제였다.
지혜자로 칭함 받는다고 해도 나머지 참석자는 그저 작게 거들 뿐이었다.
이미 주어진 더 위대한 유산을 통해 더 신뢰성 있는 답을 얻을 수 있으니 무엇이 아쉽겠는가.
회의를 통해서는 그저 약간의 참조 사항만 얻을 뿐이었다.
마치 고대 히브리인들의 지도자 모세가 장인에게서 작은 조언을 얻었던 것처럼.
그러한 부분을 제외하면 최종적으로 해답을 도출하는 주체는 단연 원탁의 주인이여야만 했고 그들은 그 의무에 충실했다.
누구도 정치적 힘을 통해서건 언변을 통해서건 황제가 깊이 숙고하고 탐색하여 얻은 지혜로운 결론을 무효화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다보니 브리튼 황실에서 베푸는 원탁은 보통 지혜자들의 모진 심판과 평가를 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도리어 세상의 지혜자들 속에 담긴 내용물들 중 지혜의 옥석과 어리석음의 오물을 분별해내는, 일종의 도마요 심판의 자리였다.
이러한 룰은 현대 문물이 고도화된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원탁의 심판석’의 엄중함은 더 강화되었다.
지식이 규모가 방대하게 불어난 이 시대에 그 어떤 이도 자기 분야 밖에서는 권위의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거늘,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
황태자는 열 명의 조언자들더러 원탁 둘레에 착석할 것을 청하였다.
정식 초대장을 받지 않은 디에고는 관망자가 되었다.
그는 무대에서 떨어진 은밀한 위치에 앉았는데 거기서 그는 감독관 노릇을 할 생각이었다.
알렉시스가 처음 그를 부를 때 의도했던 바가 그것이기도 했고.
그러나 알렉시스 본인은 열 명과 더불어 원 둘레에 자리를 잡지 않았다.
대신 그는 원의 중심점에 해당하는 위치에 좌정했다.
‘판옵티콘 식 배치. 아버지 때부터 원탁의 불문율이었지.’
이 비밀 회의실의 원탁은 마치 원형 감시 감옥과 비슷한 구도를 지녔다.
열 개의 방이 빙 에워두르며 중앙의 옥좌를 감싸는 식으로 배치되었다.
각 방에서는 가운데의 옥좌를 볼 수 있었으며 반대로 옥좌에서는 열 개의 방에서 방출되는 음성만을 들을 수 있을뿐 내부를 보지는 못했다.
또한 방마다 완전한 방음 장치가 되어 있었고 언제든 자신이 발언코자 하는 때에만 선택적으로 소리를 송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끼리 은밀하게 토의할 수 있도록 통신선도 허락되었으며 해당 대화는 옥좌에서 듣지 못하도록 차단되었다.
즉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옥좌의 주인을 무시한 채 원탁의 멤버들끼리 얼마든지 잡담하거나 뒷담화하거나 험담하는 일도 가능한 구조였다.
옥좌에서는 멤버들의 얼굴 표정을 보지 못했다.
반대로 원탁의 멤버들끼리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서로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은폐하는 일도 가능했다.
또한 별도의 감시 장치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외부로 송출되는 정보도 없었다.
그야말로 원탁의 멤버들을 배려한 최선의 특혜였다.
반대로 옥좌의 주인은 행동가짐 하나하나가 드러났다.
털끝 움직이는 것까지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원탁에 앉은 착석자들이 판옵티콘의 간수라면 옥좌의 왕은 죄수와 같았다.
아주 미세한 긴장감이나 망설임, 두려움, 어긋남, 실수조차도 고스란히 관망당할 수 처지였으며 비웃음이나 만만히 바라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알렉시스와 그의 아버지가 원탁의 규례를 이렇게 바꿔놓기록 결정한 것은 자신감에서 비롯된 판단이었다.
알렉시스의 이번 제의와 관련 프로젝트를 주제로 원탁 토의가 개시되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원탁에 앉은 마스터들은 간수와 죄수의 입장이 바뀐 듯한 위화감을 받았다.
감시당해야 하는 황태자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자신들을 감시하는 듯하고,
반대로 황태자는 부처처럼 자신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둔 채 농락하는 감각이 드는 것이 어인 일인가.
‘원탁의 규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순감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황태자가 속임수를 쓴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공정한 관측자의 눈에는 황태자의 술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리 천장 너머에서 모든 장면을 지켜보는 제3자인 디에고는 결코 집중력과 통찰력이 부주의한 자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면밀한 그의 눈에도 분명 모든 규칙이 공정하게 작동하는 중이었다.
물론 황태자 또한 거짓이나 술수를 부리지 않았기에 양심이 투명했다.
신뢰를 기반으로 함께 가야 할 동반자들에게 그릇된 방법의 기선제압을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건 뭐지?’
이유를 예측치 못할 위화감 속에서 회의와 토론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알렉시스는 자신이 구축한 청사진에 대해 의견과 평가와 피드백을 교류하였다.
“우려하시는 부분들이 무엇일지는 예상되지만, 미리 명쾌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완성도는 이미 검증된 상태였다.
일단 그 방면에서는 열 명의 마스터 모두 상대를 신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과학자가 아닌지라 알렉시스와는 달리 전문가 수준의 공학 식견을 가지지는 못했다.
또한 이번 프로그램은 세계 최상위 레벨 공학자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이미 여러 단계 이상 거쳐 철저히 검증된 상태였다.
알렉시스는 해당 분야에 직접 관여되는 전문가들은 물론, 간접적으로 연관된 분야의 다른 학자들의 확증도 확보했다.
그는 그 학자들의 분석 보고를 영상 자료를 통해 공유하였다.
‘확실히 흠 잡을 틈 없이 주도면밀하군.’
기술적 실패에 대한 염려는 사라졌다.
이제 남은 부분은 인문학적인 판단이다.
이 프로젝트의 도입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인간 사회에서, 또한 국제 정세 상에서 어떠한 변화가 발생할 것인가.
보다 거국적인 안목으로 미래를 내다보며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알렉시스라고 모든 미래를 다 예견할 수는 없으니 그가 빠트린 포인트들을 잡아낼 보조 도구들이 필요했다.
현재로서는 마스터들이 그 도구였다.
다양한 방면에서 예리한 논점의 찌르기와 깊고 강렬한 토의가 오갔다.
여러 방향에서의 찬반이 거듭되었고 설득과 이해, 비판과 합의가 이어졌다.
나름 인간 세계의 미래를 두고 내지르는 사활의 시험인만큼 신중하고 비판적이어서 나쁠 부분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러가던 와중에, 감시자들을 감시하는 보이지 않는 눈들은 쉴새 없이 매순간을 측량했다.
{흥미롭군.}
옥좌가 놓인 중심점의 방에 머무르는 존재는 알렉시스 한 명만이 아니었다.
아홉 기의 인공비서들이 그의 옆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첨단 스텔스 기능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그 어떤 물리적인 상호작용도 일으키지 않는 채 잠잠히 관찰 중이었다.
회의실의 그 어떤 시스템도 그 개체들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다.
열한 명의 사람들 역시 그 기계들의 낌새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원탁의 규칙 아래 지배당하는 것은 비서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옥좌가 있는 알렉시스의 방에 자리하는 중이었다.
그 위치에 있는 이상 벽 너머를 뚫어보지는 못했다.
원탁의 규율을 보증하기 위해 저 벽은 모든 투시 장비와 전자 간섭을 일방향으로 봉쇄하는 강력 보안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인공비서들로서 마스터들의 얼굴, 몸짓, 행동 등을 관측하는 일은 금지된 상태.
그들에게 허락된 모니터링 대상은 단 하나였다.
인간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상호작용.
알렉시스와 저 벽 너머의 마스터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교류 그 자체뿐이었다.
{낱낱이 기록해둬.}
딱히 이 인공비서들에게 어떤 특별한 통찰력이나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과 달리 영혼을 갖지 못한, 어디까지나 일개 기계들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인간계 최상위의 지혜자들이 교환하는 심도 깊은 의중이나 진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누구의 발언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거나 판단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맡겨진 역할은 토론에 대한 이해나 해석이 아니었다.
‘가디언엔젤이란 말이지, 신비해보이기는 해도 원리가 단순해.’
본래 그것은 ‘관측’이라는 현상과 인간 ‘내면의 본질’을 연결시킨다는 아이디어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알렉시스는 친우인 아미타브 카푸르가 발안한 그 발상을 묵상하였다.
확실히 자신에게도 발상하기 버거운 혁신적 아이디어임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그 친구가 포상을 받기에 합당한 위인이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이미 한 번 이론이 정립된 지금, 응용은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다.
적어도 알렉시스에게는.
‘그러므로 이런 방향의 응용도 썩 불가능하진 않아. 꼭 관측 행위와 마음의 연결을 파트너십 체결에만 사용할 필요는 없지.’
그는 인공비서들의 특수 기능을 이 원탁 무대에 접목하였다.
가디언엔젤의 본연의 기능인 ‘인간의 관측 행위를 통해 인간의 마음에 반응하는 능력’을 말이다.
현재 알렉시스 자신은 관측 대상으로, 그리고 마스터들은 관측자로 설정된 상태.
인간 비서관들과의 친분을 매개로 알렉시스와 동기화된 인공비서들은 관측자인 마스터들의 내면 현상에 화학반응을 일으키도록 설정되었다.
아울러 이 아홉 가디언엔젤의 관측 상호작용 데이터는 고스란히 알렉시스의 두뇌에 공조되었다.
친구인 라지쿠마르 박사가 개발한 그 유명한 뇌파 공명 기술을 통해서.
‘자, 이것으로 관측자와 관측 대상의 입장이 뒤바뀌게 되었지.’
직관력이 고도로 발달한 마스터들도 이미 이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 홀림의 주체가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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