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04회 [2부] 25화. 키메라 살육자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3.17 | 회차평점 ![]() |
그날 저녁도 평소처럼 알렉시스는 비서들과 겸상하며 하루간의 일들을 나눴다.
그는 너스레를 떨며 피곤했던 일들을 털어놓으며 엄살을 부렸다.
작은 형체로 돌아온 인공비서들은 파트너의 부탁대로 황태자에게 봉사했다.
그것들은 황태자의 어깨를 안마하면서 화기애애한 대화를 위해 봉사하였다.
주인들 앞인지라 별 대꾸는 하지 않았으나 황태자의 내숭에 개탄이 나왔다.
{이래서 뻔뻔스러운 인간들은 구제불능이다.}
회의 내내 즐겁게 상대들을 말로 두들겨 팬 주제에 피해자 행세라니.
반면 황태자와 겸상 중인 카를, 베카, 다이엔, 자넷, 찰스, 치온은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들에 혼이 빠져 정신 없이 눈을 빛내는 중이었다.
근대사 역사책에나 나올 기인(奇人)이 한 자리에 열한 명 씩이나 모인다니.
게다가 각기 사상적 방향성과 특색이 현저히 다른 그들이 같은 목적으로 화합한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뉴스에서나 보던 영웅들과 혁명가들…….”
“직접 이름으로 들으니 잘 실감이 나지 않네요.”
“왠지 위인전이나 역사책에나 나와야 할 것 같은 거리감 드는 존재감들인데, 우리랑 같은 시대를 거닌다는 것이 어색하네요.”
카를, 치온, 다이엔의 감탄에 알렉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본 가디언엔젤들은 생각했다.
우리 생각에는 당신이 더한 이레귤러인데?
“정확한 지적이에요. 매번 마주할 때마다 기 빨리는 상대들이죠.”
이에 갈색머리의 앳된 얼굴의 청년, 다이엔이 호기심에 질문했다.
“전하께서는 그분들과 원래도 친분이 깊으셨던 건가요?”
“아뇨, 정식으로 마스터들을 총독으로 채용한 건 작년부터였으니 같이 일한 지는 오래 되지 않았어요. 몇몇 사람은 다른 일로 인연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도리어 견제자 쪽에 가깝죠.”
대표적으로 디에고라던가, 디에고라던가, 디에고라던가.
개인적으로 악평하자면 그 사람은 정말 징글징글 하다.
갖가지 핑계로, 토론하자면서, 혹은 인류의 미래를 논의하자면서,
아니면 브리튼 정치 체계의 병폐를 극복할 방안을 찾자며, 산업혁명에 의해 발생할 변곡점에 대비하자면서, 혹은 체스하자면서,
별의별 이유로 황태자를 귀찮게 소환해대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
“난 그 사람이랑은 좀 거리를 뒀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쪽은 저를 일방적으로 친구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저는 피곤하거든요. 저보다 열셋은 많은 아저씨가 말이죠.”
북부 신대륙 출신인지라 익숙한 찰스가 여기에 반응하였다.
“안드레스 대표에 대해서는 통일 이전부터 미디어에서 수없이 봤어요. 저희 부모님 대에서도 몹시 유명한 사람이었거든요.”
“맞아요. 대전쟁 이전부터, 고작 이십대 초반에 지나지 않던 인간이 정계를 실상 장악하다시피 했었죠.”
당시 혜성처럼 나타난 남부 출신 거장은 폭풍을 연상시키듯 휘몰아쳤다.
그는 비정부 조직들도, 시민 단체들도, 정당들도, 싱크탱크들도, 모조리 자신의 세력들로 채우다시피 했었다.
자신과 뜻을 같이 하던 이들을 그곳에 진출시킨 것인지, 아니면 빼어난 매력과 설득으로 원래 거기에 있던 이들을 포섭한 것인지는 잘 모른다.
아마 두 가지 다 병행했겠지.
그가 가져온 정치적 혁신은 파급력이 막대하였다.
대전쟁 직전이라는 국제 정서적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보통 그런 배경에서는 국가 지도자가 불안감을 이용해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국내 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용이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대의 황제, 즉 지금의 선황은 되려 디에고에게 밀려나는 듯한 모양새를 보였다.
일부러 대응하지 않고 밀려나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디에고는 온건하게 선을 지킬 줄 아는 인간이었으니까.
어쨌건 그 기회에 힘입어 디에고는 자신의 뜻에 매우 근접히 다가갔다.
하마터면 제2의 대헌장(大憲章)을 새로이 작성해낼 수도 있었다.
그는 제왕적 힘을 제한하는 ‘내각제’와 ‘입헌군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사회 내부의 여러 조직들이 그 기획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디에고는 이러한 개편이 장기적으로는 커뮤니스트 연방과의 경쟁에서 더 큰 경쟁력을 허락해줄 것으로 믿었던 듯하다.
전쟁이 종결된 이후로도 그는 줄기차게 새로운 체제 개편을 제안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제안은 현명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세계가 한 행정 체계 내에 통일된다면 제왕적인 통치보다는 민주적인 통치가 장기적으로 폐해가 덜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후 시대에 들어서자 시간이 흐를수록 디에고의 제안은 조금씩 추진력을 잃어갔다.
이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브리튼의 제왕 위에 자신의 권한을 맡기기를 택한 탓이었다.
어차피 정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편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알렉시스를 기어코 권력의 자리에 올려놓을 것이다.
동일한 결과가 임할 것이라면 선택에 대한 책임 소지를 조금이라도 더는 편이 부담이 덜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귀찮은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리고 나라의 우두머리가 매우 현명하고 유능하다면 구태여 거기에 지나친 관심 두거나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를 꺼려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잊히긴 했지만, 분명 디에고가 당대에 가져온 혁명적 움직임의 파급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알렉시스 또한 비록 개인적으로는 귀찮더라도 대의에 있어서는 디에고를 포용하여 자신의 동지로 흡수하는 일이 상징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는 바였다.
“그나저나 전하께서 누군가를 상대하면서 힘겹다고 표현하신 건 놀랍네요.”
다이엔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정적들도 마음껏 주무르실 줄 알았는데. 작년 일만 봐도 그렇지만, 저희 같은 보통 시민들 눈에는 그야말로 무적으로 비쳤었거든요.”
“뭐, 저라고 능력의 용량이 무한한 건 아니니까요.”
소인배들이라면 만 명이든 백만 명이든 아무리 모아둬도 쉽게 상대한다.
또 한 분야에서 빼어난 천재들이라면 상대할 때 그리 피곤하지 않다.
적어도 그들은 자기 분야에만 진심이지 정치적 책략을 구상하지는 않으니까.
“그 열둘은 조금 다른 부류에요. 여러 천재성을 동시에 지녔는데 각각의 재능을 전문가 이상으로 개화할 잠재력을 지녔죠. 더 무서운 부분은 그 능력들을 화합시켜 더 큰 가능성을 끌어올린다는 점이죠. 그리고 그러한 능력의 조합을 바탕으로 정치적 역량을 뒷받침하고 더욱 극대화합니다.”
이에 자넷은 뭔가 데자뷔를 느낀 것인지 눈을 껌뻑거렸다.
“왠지, 태자 전하와 비슷한 유형이네요. 그 하위 호환?”
“흐음, 그게 그렇게 되려나요? 하긴 그 인간들, 본질 면에서 우리 ‘황족’과 비슷한 과(科)이니 틀린 표현은 아니겠군요.”
실제로 마스터들 중 한 명은 황족, 그것도 ‘더 크라이스토브’와 같은 류이다.
알렉시스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늘 자신을 귀여워 해주던 어른을 떠올렸다.
아버지와는 체격부터 이목구비, 머리털부터 눈썹 하나까지 판박이이신 그분.
‘여러 명의 인재를 두루두루 일깨워내는 재능을 지닌 쪽이 아버지라면, 극소수의 이질적인 괴인을 발견해 각성시키는 건 삼촌 쪽이 더 뛰어나긴 하지.’
왕으로서 다스리는 재능이라기보다는, ‘또다른 왕’의 그릇을 빚는 재능.
안정적으로 유지될 브리튼을 위해서는 굳이 불필요한 능력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랴.
알렉시스는 숙부님 같은 반전 카드도 건강한 세상을 위해 유익하다고 믿었다.
한편 베카는 원탁 시스템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태자 전하는 이전에도 그 원탁을 사용하신 적이 있으셨나요?”
“아뇨, 공식적으로는 왕들만 사용하는 시스템이거든요. 공동 왕(Co-Rex)으로 지위를 인정받기 전에는 허가되지 않았죠.”
원탁은 국가의 중대한 이슈를 논의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왕의 자격을 검증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물론 원탁에 앉은 이들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그 자리에 마스터 같은 위험한 거물들을 앉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전 세대의 황제들로서는 감히 그런 위험을 감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실 저한테는 별로 달가운 전통은 아니에요.”
알렉시스는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는 습성을 함양하려면 하기 싫어도 응용할 줄 알아야죠.”
이미 지나치게 권력과 영향력이 거대해졌다.
시스템의 운영자로서 이전에, 한 명의 개인으로서도.
이런 상황에서는 작은 오판으로도 엇나가기 쉽다.
그러므로 견제와 균형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인간이 그 역할을 하기에 부족하다는 데 있다.
거의 모든 이들이 황태자의 말에 쉽게 설득되거나 자발적으로 굴복하니 제대로 견제해줄 수가 없다.
그러니 궁색하게나마 원탁의 힘과 마스터들의 힘이라도 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마저도 그리 오래 유효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원하는 뜻을 내 마음대로 집행할 무제한의 권한이 내 손 안에 있다는 건 참으로 두려운 일이야.’
어찌 보면 디에고가 제창한 사상과 판단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알렉시스 자신도 어린 시절에는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았는가.
자신에게 여유만 주어졌더라도 디에고의 비전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다.
허나 애석하게도 아직은 그가 이 강력한 힘으로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알렉시스가 치기 어린 꿈을 보류하고 브리튼의 존재적 사명을 위해서 칼을 빼든 건 그에게 있어서는 나름의 큰 정신적 성장이었다.
‘이미 괴물과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은 시작되었다. 칼집으로 다시 칼을 집어넣을 수는 없게 되었어.’
컬트와 종교란 히드라에게서 뻗어나간 수천 개의 머리와도 같다.
그것들은 베고 베어도 다시 자라나며 그 뿌리에서는 날아다니는 불뱀이 만들어지는 지독한 괴이(怪異)의 존재이다.
비록 시작점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최근 황태자는 그 머리 중 하나를 베었다.
독이 묻혀진 성검으로 그 괴수를 베었고 재생력의 뿌리를 잘라내었다.
가장 큰 머리는 베었으나 그보다 작은 머리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어느 세월에 이르기까지 계속 칼질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평생의 의무인가?
설령 온전히 다 완수한다고 해도 그 뒤에는?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의 괴물들을 하나씩 죽이다 보면?’
키메라를 살육하는 자로 태어난 자.
그 사명은 분명 자신의 본질의 한 축이다.
이미 알렉시스는 그 싸움에 뛰어들었다.
다음 번에는 다른 머리들을, 그 뒤에는 몸통과 꼬리들에도 창을 찌르리라.
그렇게 인류 역사 위에 또아리를 튼 고대의 강력한 괴물을 제거하고 나면?
그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언약 백성들과 기독교와 창조주의 외현적인 적들이 모두 사라지면?
인류의 역사는 과연 예언대로 흘러갈 수 있을까?
명백한 답이 드러나지 않는 안개 같은 고민이 괜히 깊어지는 날이었다.
자신의 고민은 숨긴 채 알렉시스는 여섯 명의 비서들을 각각 칭찬하고 북돋아주며 화목함의 분위기를 더욱 돈독히 다졌다.
황태자와 비서관들은 신분 지위의 격차를 잠시 잊은 채 즐겁게 대화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들, 평소의 관심사, 좋아하는 것들, 일상사, 취미와 문화적 교양들을 공유하며 복잡한 잡념들을 잊었다.
‘저 친구들처럼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삶도 나쁘지 않군.’
부질없는 부러움도 같이 늘어나는 만찬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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