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08회 [2부] 29화. 에니그마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3.28 | 회차평점 ![]() |
*
알렉시스와 라하토브는 저녁 시간을 함께하는 중이었다.
노동으로 노곤해진 둘은 같이 별장 발코니에서 쉬며 일몰을 감상하였다.
“저 하늘 위에서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네요.”
“하늘요?”
“네, 그곳에서 관측되는 일몰은 다른 인상을 주죠.”
“직접 체험해보신 것처럼 말하네요.”
“상공에서 거닐며 해의 움직임을 따라 마음껏 움직이는 배가 있거든요.”
알렉시스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 배의 모습을 언어로 묘사하였다.
위성 궤도 상에서는 지구 자전 속도에 맞먹는 움직임을 내는 위대한 천공섬.
동화 속에나 나오는, 조금만 뒤로 끌어 당겨도 하루에도 일몰을 몇 번씩이나 다시 볼 수 있는, 소행성 위에 놓인 작은 의자와도 비슷했다.
“배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섬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죠.”
최근에 더욱 개량되어 보조 선체와의 융합까지 마친 아이언로드의 관할 권역은 실시간 지구권 전체로 확대되었다.
해가 저물지 않는 제국의 손에 쥐인 ‘철권’으로 칭함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배 위에서 지내는 삶이 길어지다보니 땅 위의 시민들의 일상사를 너무 많이 잊게 되었다.
일례로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모습 같은, 평범한 삶의 단편들은 점점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해를 끝없이 추격할 수 있게 되다보니 어느 순간 자신이 고대 신화의 태양을 실은 마차에 올라탄 승객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는 때도 있었다.
고지가 주는 신비감에 취한다는 것은 그리 건강한 조짐은 아니었다.
이런 위험성을 알기에 알렉시스는 주기적으로 자신을 끌어내렸다.
왕의 모습이 아닌 보통의 시민의 모습으로, 일반의 삶 속에 착륙하였다.
때로는 아이들의 곁에 숨어들었으며 때로는 친구들의 틈에 섞여 들었다.
비록 아직 깊은 인연은 아니지만, 라하토브의 곁도 그런 편안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공적인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기에 부담감 없이 자유로운 모습으로 다가가도 되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참 신기하네요.”
알렉시스에게서 천공성 이야기를 전해 들은 라하토브는 감탄하였다.
아이처럼 호기심을 드러내는 그녀의 리엑션에 알렉시스는 뿌듯해했다.
“당신도 그 배를 탄 적이 있나요?”
“말하자면 저는 그 배의 선원 중 한 명이죠. 항상 배를 타는 건 아니고 이따금 지금처럼 땅을 거닐기도 하지만요.”
“하긴 그토록 강력한 위용을 뽐내는 하늘섬이라면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도 매우 많겠네요.”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일하고 있죠.”
그는 자신이 그 섬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식탁을 함께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손수 솜씨를 발휘하여 음식을 요리하였다.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의 시장함을 달래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열정이 샘솟았다.
그녀는 농장일 뿐 아니라 살림살이에 있어서도 의외로 재능이 풍성했다.
호박 파이, 생선 샐러드, 팬 위에서 구운 떡, 잘게 다져져 양념된 고기 등.
노동으로 허기진 이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각적 자극이었다.
실제 풍미나 향취도 그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일을 거들어주신 보답이니 마음껏 드시고 더 드세요.”
“감사합니다. 기대되네요.”
처음에는 알렉도 집주인을 생각해 예의상 맛만 조금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입에 맞닿는 포근한 향미의 이끌림이 그를 무장해제시켰다.
저도 모르게 반복적으로 손이 테이블 위로 이끌렸다.
황궁의 요리사들이나 개인 직속 셰프들의 화려한 솜씨에는 미치지 못했다.
대신 시골에서나 느껴지는 특유의 자연스러운 싱그러움이 전달되었다.
“마음에 드신다면 자주 방문해주세요.”
집주인은 손님에게 다음 번에는 더욱 새로운 맛으로 대접할 것을 약속했다.
알렉시스는 흡족한 만찬에서 체험한 만족감을 한껏 표현하고픈 충동을 가까스로 체통을 생각해 절제하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기대를 삼키며 감사를 표했다.
*
묵시록의 나팔 재앙이 소환한 괴물 마병, 혹은 키메라라 불리는 것.
그 구체적 실체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뇌하느라 제리는 애를 먹었다.
‘꼭 모든 일을 종교적인 언어로 해설하는 것만 능사는 아니지.’
하지만 모든 문제 뒤에는 초자연적인 배경이 엄연히 존재하는 법.
이런 깊은 원리를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합리적 언어로 묘사하려니 마땅한 단어들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존재하지. 그것들은 인간 문화의 진화적 산물이 아니야. 독창적이거나 기발하지도 않아.”
“그러면?”
“외부에서 만들어져 주입된 산물이지. 솔직히 신화들이나 설화들을 뜯어보면 레퍼토리가 거기서 거기잖아? 고대인들끼리는 딱히 문명권 간의 교류가 활발하지도 않았을 텐데.”
에쉬튼의 흑갈색 눈동자가 불편감으로 물들었다.
사실 그는 오컬트니 영적 세계니 하는 이야기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초자연적 세계의 활동이니 하는 주제도, 과한 음모론도 질색이었다.
비록 지금은 추격 대상들이 하나같이 기괴한 컬트 의식에 얽혀 있는 바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원래라면 이런 식의 접근법으로 도움을 얻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로스는 신앙심이 깊기도 했지만 동시에 상상력과 분석력이 모두 뛰어났다.
그는 사안들의 막후에 있는 기묘한 흐름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데 능통했다.
모든 사람이 그의 이해 방식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를 마냥 괴짜로 치부하고 말기에는 그의 삶에 나타난 명석함의 열매들이 너무도 바람직했다.
사고 방식이 다른 형제에게서 도움을 구하기란 썩 편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기본적으로 참된 신을 올바른 방법으로 믿는 종교 이외의 모든 종교들은 영적인 세계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창작물이야.”
“악마들의 농간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면. 인간의 유익을 위한 선물이 아닌, 인간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덫이라는 점은 분명하지.”
“한 마디로 모두 사기 행각이라 이거군.”
“우상숭배라는 용어가 좀 더 정확하겠네. 기본적으로 그 기원 안에 악마적인 요소, 기만적인 요소, 인간 본연의 자기파괴적 요소가 함유된 점은 똑같아.”
제로스는 커다란 도면을 펼쳤다.
그 위에는 인간사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들의 시공간적 배치가 그려져 있었다.
세부적인 분파들까지 기술되어 있었고 이동하는 흐름도 적혀 있었다.
심지어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사교(邪敎)들과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파벌들까지.
체계적으로 제로스가 연구해둔, 가치가 꽤 높은 자료였다.
제리는 붉은 펜을 꺼내들어 그 위에 표시를 몇 개 해두었다.
“하지만 모든 거짓된 종교들 속에 치명적인 해악이 담겼다고 해서 그것들 모두가 일일이 ‘바벨 시티의 에니그마’에 속한 것은 아니야.”
제로스의 설명에 의붓동생은 깊은 의구심에 빠졌다.
‘그러니까 대체 그 정체 불명의 존재의 실체가 뭐길래 말이지?’
용의자들을 대거 파헤칠 때마다 끝없이 확장되는 미스테리.
현재 거듭 쏟아지는 오컬트 연루 증거들은 에쉬튼에게 있어서 고민거리였다.
도대체 왜 저 악의 무리들은 하나같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얽혀 미신적인 행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형제의 설명이 과연 실마리를 줄 것인가.
“바벨 시티란 게 뭔데?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수수께끼가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돌아가는 편이 맞지. 에쉬 네가 뭘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맞을 거야.”
“어처구니가 없군.”
“바벨탑.”
제리는 금기어를 내뱉는 듯한 투로 조심스레 대화를 잠시 끊었다.
“창세기의 기록은 실존했던 역사야. 인류의 민족 분화와 언어 분화는 자연 발생설을 믿는 커뮤니스트들과 유물론자들의 주장대로 진화로 생성된 게 아니야. 초자연적으로 이뤄졌지.”
바벨탑 이야기는 기독교 문화권인 브리튼 제국 내에서는 어린 아이라도 아는 익숙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을 ‘종교’와 연루시키는 것은 그리 흔한 해석법이 아니었다.
“바벨탑의 본질은 종교였어. 인간은 그곳에서 창조주를 대신할 새로운 신을 만들어내려고 했었지. 하늘에 닿느니, 홍수를 면해보겠느니 하는 명분은 이차적인 핑계였어.”
“뭐, 설마 바벨탑 위에서 제의(祭儀)라도 행했다 이건가?”
“비슷해.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이 아니라 사술의 제단이라는 점이 문제지만.”
“허어.”
에쉬튼은 잠시 속으로 의붓형이 너무 종교심에 심취하거나 미스테리 음모론 따위에 몰두된 건 아닌가 의심하였다.
하지만 제로스는 영민하고 창의적이긴 했으나 비이성적 자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바벨탑은 최초로 종교와 우상숭배라는 행위를 시스템화한 사건이었지. 그리고 그 탑이 자리한 인류 최대 도시인 ‘바벨 시티’, 아니 ‘바빌론’은 반역의 시발점이자 우상 시스템의 본향이었어.”
“뭐, 그런 내용들은 나도 주일 학교나 주말 설교 때 들어서 알고 있다만.”
“그래? 다행이네.”
제리는 대견하다는 투로 에쉬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아는 바는 너무 피상적이야. 저들은 우리들의 조상이신 현왕께서 등장한 이후로는 전황의 불리함을 깨닫고 숨어 버렸거든. 덕분인지 때문인지 우리쪽에서는 저들의 실체를 간파하는 데 되려 오래 걸리고 말았어.”
가정법에 불과하겠지만, 만일 브리튼 제국이 지금같은 언약의 나라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세속적인 힘들이 자연스레 지구 무대의 패권자들이 되었겠지.
그랬더라면 도리어 음지의 권세들은 거릴 것 없이 활개를 쳤을 테고.
만일 그런 상황이었다면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쉽게 막후의 위협들을 감지했을지도 모르겠다.
“바벨탑의 계획이 무너진 뒤…….”
제리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인류는 여러 민족으로 쪼개어져 확산되었고 여러 문화권이 세계로 뻗어나갔지. 그리고 그때 바벨 시티에서 시작된 종교라는 유산도 여러 버전으로 계승되어 확산되었어. 그것들이 세월을 거쳐 발전하고 변질되어 지금에 이르렀지.”
“애니미즘이나 샤머니즘 같은 토착 종교들도?”
“뭐, 본질은 비슷해. 다신교이든, 범신교이든, 무신론적 종교이든, 혹은 참 신이 아닌 유일신을 믿는 사상이나 이신론이든, 바벨 시티의 유산들 가운데 어떤 부분이 강화되고 어떤 부분이 퇴화되었느냐 따라 패턴이 나뉜 것에 불과하거든.”
“그런 해석은 처음 듣네.”
“믿거나 말거나 아우 맘이지 뭐.”
“그러면 왜 ‘모든 종교’가 바벨 시티의 에니그마에 속하지는 않았다는 거지?”
“예리한 지적이네, 수사관님.”
제로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오랜만에 동생이 자신의 전문 분야에 호기심을 가져주니 신이 난 모양이다.
“맞아. 바빌론에서 모든 종교가 시작된 건 맞지만, 그것들 전부가 ‘에니그마’에 속하지는 않아. 마치 음란한 호색한이 수많은 창부들과 관계하여 무수한 사생아들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사생아들 전부가 그의 ‘후계자’인 것은 아닌 것처럼.”
적나라하고 도발적인 비유에 에쉬튼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딱히 종교들을 향한 관용의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착하기 그지없던 제로스가 저렇게까지 과감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다.
“현재 지구 상의 종교들 가운데는 위험 인자가 숨어 있어. 내가 알기로는 총 아홉 개의 세력이야. 각 세력이, 아, 그보다는 ‘영향력’이라는 표현이 맞겠구나. 아무튼 그 영향력들이 각각 자신의 숙주 속에 기생하고 있어.”
“기생충의 숙주라면 설마.”
“종교지. 말하자면 그 종교 자체가 에니그마라기보다는 특정 아홉 개의 종교 속에 에니그마라는 내부 영향력이 기생하는 중이라고 봐. 그 기생충들은 침식을 통해 숙주 전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변질하는 일을 해왔어. 그것도 수천 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서.”
충격적인 진실의 공개에 에쉬튼은 당최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제로스는 바보도 아니고 거짓말을 정말로 싫어하는 정직한 사람이거늘.
“사이비 같은……, 뭐 그런 거라고 이해하면 되나?”
“틀려. 사이비란 건 어떤 정통 종교 내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한 이질체잖아. 아무래도 기독교가 진리에 맞닿아 있다 보니 기독교 안에서 가장 많이 이단이 발생하긴 하지만. 어쨌건 그런 사이비들이랑은 달리 에니그마는 외부에서부터 만들어져서 침투된 일종의 ‘트로이 목마’란 말이지.”
트로이 목마라는 표현이 동원되자 갑작스레 확 와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 트로이 목마는 심지어 그 숙주 종교들보다도 더 오래된 기원을 지닌 존재들이지. 무려 바벨 시티에서 만들어졌고 자신들이 바벨 시티의 유지를 잇는다는 자의식도 분명 있으니까.”
이건 신종 음모론의 확장판인 걸까?
에쉬튼은 의미를 명료화하기 위해 다시금 질문했다.
“그러니까 형 말은, 바벨 시티의 결사단 같은 조직이 종교권 내에 어떤 음모적 집단을 침투시켜서 막후에서 조종하고 변질시켜 왔다, 이건가?”
“결사단이라. 꼭 그렇게 제한 지을 필요가 있을까?”
“뭔 소리야?”
“반드시 인간들로 구성된 조직을 매개체로 쓸 필요는 없단 뜻이야.”
수수께끼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순간이었다.
“바벨 시티의 유지를 잇는 종교 침식 매개체, ‘에니그마’는 어쩌면 물리적 존재 양태를 가질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 영계 차원에 심어진 어떤 시스템, 혹은 장치인지도 모르지. 그래, 마법이라는 단어가 좋겠다. 어떤 종교를 마법에 홀린 듯 뒤흔드는 무형의 힘 말야.”
어안이 벙벙했다.
“큰형님이 상대해온 대상이 설마 그런 존재라고?”
“그래. 어쩌면 아홉 개 모두와 팽팽히 대치하는 중인지도 모르지. 아, 맞다. 이제는 여덟 개이려나.”
“그 말인즉.”
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람 내부에는 분명 에니그마의 침식력이 존재했었어. 그건 확실해. 형이 만일 외부 핍박을 통해서 이슬람을 무너뜨렸다면 이슬람에서 파생된 다른 아형체들이 증식했겠지. 에니그마는 살아남아서 그 아형체 속에서 다시 기생했을걸. 아니면 아예 다른 숙주를 찾았거나. 하지만.”
“그분이 없앤 건 단순히 이슬람만이 아니라 에니그마까지 함께였다 이건가.”
“정답.”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버린, 흡사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느낌이었다.
이전회
107회 [2부] 28화. 에니그마 (1) |
다음회
109회 [2부] 30화. 에니그마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