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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10회 [2부] 31화. 에니그마 (4)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4.02 | 회차평점 0 0

 

 

 

*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며 유유이 성층권과 대류권 위를 거니는 선박.

 

 

최근 내부 개량과 외장 보조 패널과의 결합으로 더욱 강력한 힘으로 거듭난 아이언로드 알파는 관성력의 속박에 묶이지 않기라도 한 듯 자유로이 하늘을 누비며 힘의 궤적을 그렸다.

 

 

 

 

 

위대한 선체는 황태자의 뜻에 복종하여 어디로든 행하였다.

 

 

때로는 대륙 위로, 때로는 바다 한 가운데로,

 

 

때로는 낮은 고도에서, 때로는 높은 고도를 노닐었다.

 

 

위성처럼 신속히 지구를 공전하다가도 필요에 따라서는 한 위도와 한 경도에 고정되어 하늘 위의 섬처럼 고정되기도 했다.

 

 

 

 

 

어느 시대건 제공권(制空權)을 쥐는 것은 중요하다.

 

 

지구 전체의 권세를 다룰 열쇠가 바로 그 속에 있다.

 

 

 

 

 

인간들이 하늘을 나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도 제공권은 중요했다.

 

 

그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능들이 그곳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 이후에는 기술력을 얻은 강대국들이 하늘을 통해 지면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그 권한의 대부분을 제국이 취하였다.

 

 

위성을 통한 정보 통신 시스템, 전함들과 전투기들을 통한 패권, 그리고 국경을 초월하여 다져진 교통망에 이르기까지.

 

 

 

 

 

아이언로드 시리즈는 바로 그 상공의 패권을 상징하는 체제들의 절정이었다.

 

 

현 인류가 보유한 소재 공학, 에너지 공학, 현대물리학, 생체 공학, 데이터 과학, 통신 기술, 전자 기술, 유체 역학의 모든 것이 집대성되어 만들어진 배.

 

 

오로지 그것들만이 역학적 제약을 뛰어넘어 하늘을 제 집처럼 유영(遊泳)할 수 있었고, 무한에 가까운 동력을 생산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 배들은 각종 첨단 기술들의 요람이 되는 연구소이자 집무실이었고 위성 통신 시스템의 중추였다.

 

 

그리고 인간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중추적 조직들과 인재들을 담아둘 수 있는, 움직이는 도시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황태자는 상공의 패권을 좌지우지하며 땅의 일들을 현명하게 다스렸다.

 

 

황제도 가져보지 못한, 오로지 그만이 다룰 수 있는 권리였다.

 

 

그곳은 움직이는 그의 옥좌였다.

 

 

 

 

 

이곳에서 황태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수천 대의 슈퍼컴퓨터들, 모든 위성들의 정보망, 최첨단 인공지능들.

 

 

그리고 그것들을 통솔하는 아홉 기의 직속 유닛들이 그를 보좌했다.

 

 

그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그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사회 조직망, 교육 등의 인류의 중요 핵심 사안들을 면밀히 연산하고 고찰하였다.

 

 

 

 

 

모든 중대한 문제들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생각은 없었다.

 

 

독선적으로 사람들의 자율적인 길을 조정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다만 적절한 조언과 바른 길을 제시해주거나 지혜를 베풀어줄 수는 있었다.

 

 

실제로 그는 객관적으로 그럴 만한 능력과 자격을 보유한 자로 평가받았다.

 

 

세상은 아직 그의 역할을 필요로 했고 그도 그 역을 기꺼이 맡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여전히 잠잠한가?’

 

 

 

 

 

바쁘게 업무를 주관하는 동안에도 그는 큰 흐름을 향한 주목을 놓치 않았다.

 

 

움직이는 천공성은 그 모든 이치를 올바르게 관찰하기에 적합한 처소였다.

 

 

위성 연동을 통한 실시간 세계 감시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함선이 활보하는 이 ‘대기권’이라는 영역은 본래 브리튼 이전에는 이 세상의 영적 폭군이 활동하던 영역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이곳을 노닐다보면 유독 잘 보였다.

 

 

불가시의 실체들의 활동과 그것들이 자아내는 어둠의 그림자 말이다.

 

 

 

 

 

물론 어떤 가시적인 환영으로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보인다’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말이다.

 

 

형이상학적인 그림자를 좀 더 생생하게 통찰하게 되었다 해야 더 정확하겠지.

 

 

 

 

 

알렉시스의 통찰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은 두 권세의 충돌 가운데 있었다.

 

 

그 두 권세 모두 인간도, 인간의 눈에 보이는 물리적 요소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인간의 사상, 생각, 이념, 신념을 어떠한 특정 궤적으로 끌고 가는, 일종의 중력과 흡사한 왜곡력이었다.

 

 

여러 날을 천공성 위에서 근무하면서 알렉시스는 그 권세들의 실체를 더욱 뚜렷하게 알아갈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탐구해온 가설의 해답에 점점 접근했다.

 

 

 

 

 

한 권세는 과거부터 이미 존재해오던 기성 권력이었다.

 

 

시대마다 카멜레온처럼 색을 바꾸며 다른 가면을 써오긴 했으나 본질은 같았다.

 

 

그 본질은 거대한 크라켄이요 여러 머리를 가진 흉측한 뱀과 같았다.

 

 

공포 설화에나 나올 법한 우주적인 규모의 기어오르는 악몽.

 

 

악마들에 의해 빚어진, 인간 세계를 착취하는 중간 착취자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권세는 종교 개혁 이후에 탄생한 새로운 힘이었다.

 

 

브리튼 제국을 지탱하는 계약의 힘이 그것이었다.

 

 

그 힘의 근원은 예로부터 이어져 온 ‘창조주를 경외하는 마음’.

 

 

근원 자체는 이전부터 있었으나 구체적인 정치적 힘으로 현현된 건 브리튼 언약의 체결로 인함이었다.

 

 

그 힘은 여러 갈래의 속박하는 빛의 사슬과 창이 되어 크라켄의 다리와 히드라의 머리들을 옥죄었다.

 

 

 

 

 

근현대사에서 인간 세계에서 일어났던 각종 일들은 그 두 정치 권력의 싸움에서 비롯된 파생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패권 다툼 끝에 현재는 잠시 소강 상태가 임했다.

 

 

겉보기에는 후자가 모든 패권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상태.

 

 

하지만 크라켄은 죽지 않았다.

 

 

수면 위의 파동들만 잠잠해졌을뿐이다.

 

 

파동들을 일으킨 근원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생존해 있었다.

 

 

 

 

 

알렉시스는 곰곰이 손익을 계산해보았다.

 

 

 

 

 

‘나로서는 촉수 하나를 꺾는 데만 해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오래 전에 그는 괴물의 아홉 촉수가 연결된 위치를 이미 예측해냈다.

 

 

하지만 행동으로써 결실과 열매를 맺기란 또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과제가 아니었다.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자가 섣불리 의협심에 불 타 일을 벌이면,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힌 인과의 고리가 영향을 받아 예상치 못한 나비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어찌어찌 운이 좋아 가장 크기가 큰 촉수 하나는 멸하였다.

 

 

그러나 나머지도 만만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상태.

 

 

더욱이 황태자가 대대적인 공격 태세를 보이는 바람에 그 촉수들은 음지로 깊숙이 숨어들었고 덕분에 잡아내는 과정은 되려 더 어려워졌다.

 

 

 

 

 

만약 지난 번처럼 촉수들을 영구적으로 적출해 없애고자 공격을 가한다면?

 

 

큰 피해와 더불어 아군 측의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

 

 

그때 벌어질 전면전은 결코 작은 규모의 국지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촉수를 멸하려면 촉수가 침식하고 있는 숙주까지도 한꺼번에 와해해야 하니까.

 

 

즉 한 촉수를 벨 때마다 세상을 주름 잡았던 오랜 종교나 사상 하나를 삭제하는 기행을 벌여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최근 그는 산달폰과의 통화에서 자신의 깊은 의중을 공유하였다.

 

 

그때에 알렉시스는 산달폰에게서 이런 냉정한 조언을 들었다.

 

 

 

 

 

“당신의 힘은 양날의 검과 같죠. 무엇이든 베어버릴 수 있지만 그 힘은 자기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줍니다. 만일 당신이 모든 적을 없애기 위해 움직인다면 그 일은 당신에게조차 큰 부담이 될 겁니다.”

 

 

 

 

 

그는 알렉시스가 그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영혼 속에 쌓일 피로가 상당할 것을 경고했을 뿐이었다.

 

 

 

 

 

알렉시스도 이 의견에는 상당 부분 동감했다.

 

 

이터널클렌징 한 번만으로도 영혼 속에 상처와 자책이 상댱량 축적된 상태였다.

 

 

전쟁 때의 트라우마는 해결되기는커녕 흉터로 변하여 심장 한 구석에 남았다.

 

 

더는 무리해서는 안 된다.

 

 

 

 

 

‘내 손을 쓰지 않고도 해결이 가능할까?’

 

 

 

 

 

이것은 알렉시스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어려운 시험이었다.

 

 

무언가를 내려놓는 법, 그는 그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평생을 살며 항상 책임지고 견뎌왔다.

 

 

그랬기에 무엇이든지 자기 능력으로 책임지는 식에 익숙해진 그였다.

 

 

 

 

 

키메라를 살해하는 일 같이 중대한 일생일대의 과제라면 더욱 그러하다.

 

 

시간을 걸리더라도 결국 자신의 손으로 끝내야 할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두르고 조바심을 내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그는 잠시 멈춰서서 일의 시작과 끝을 면밀히 검토해보았다.

 

 

 

 

 

 

 

 

 

 

 

*

 

 

 

 

 

알렉시스의 친구들은 대체로 비범한 사람들이나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다.

 

 

드물게 ‘전혀 특별한 구석이 하나 없는 친구’도 종종 그의 곁을 스쳐갔었다.

 

 

군대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랄프가 그러한 예시에 속했다.

 

 

 

 

 

지금은 거의 교류가 없어 근황을 잘 모르나 랄프는 군에 있을 시절,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알렉시스에게 참된 우정을 가르쳐주었다.

 

 

 

 

 

두 사람은 훈련병 동기였다.

 

 

아무리 뛰어난 알렉시스라도 군에 처음 입대한 처음 한 달만큼은 남들과 동일한 기초 훈련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는 특별 대우 같은 것이 없었다.

 

 

왕자님 역시 평범한 이들 틈에 섞여 똑같은 경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식사, 합숙 생활, 좁은 막사에서의 취침, 세신, 혹독한 극기 훈련, 심지어 여가와 휴식까지도, 모든 일정을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누렸다.

 

 

 

 

 

당시 알렉시스가 소속되었던 분대의 훈련병은 총 열 명.

 

 

민족도, 문화도, 배경도 각기 다른, 이질적인 사람들의 집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합은 그런대로 잘 맞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 다툼이나 분쟁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훈련을 잘 마쳤었지.

 

 

 

 

 

그들은 종교적 배경 또한 각기 다양했는데 그 가운데 신앙심이 독실하고 열정적인 크리스쳔은 랄프와 알렉시스 둘 뿐이었다.

 

 

그런 이유 덕분인지 두 사람은 제한된 합숙의 시간 동안 거리감 없이 막역해질 수 있었다.

 

 

 

 

 

알렉시스는 ‘더 크라이스토브’의 칭호를 소유한 황태손이라는 장점을 제외하고도 모든 이 앞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이었다.

 

 

이에 반해 랄프는 아무런 잘난 구석도 없는, 평범함 미만의 소년이었다.

 

 

체구와 신장은 보통 이하였다.

 

 

얼굴도 아주 못난 편까지는 아니어도 보통보다는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

 

 

특출한 재능이나 지식도 없었고 명석하다고 할 수도 없었고 체력도 보통이었다.

 

 

 

 

 

이런 이유로 두 훈련생이 나란히 걷다 보면 상당한 대조가 되곤 했다.

 

 

왕자와 거지? 혹자는 그렇게 조소하기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군가에게는 모욕적인 표현일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상당히 그럴 듯한 비유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실제적인 표현이기도 했고.

 

 

 

 

 

하지만 훗날 회고하건대, 알렉시스는 이 시절 자신이 랄프에게 배운 것들이 자신이 그에게 가르친 것보다 훨씬 더 많다고 고백하였다.

 

 

 

 

 

랄프는 자유로웠다.

 

 

행실이나 행태가 자유분방하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부담에서 자유하였다.

 

 

그는 성실하고 정직했으나 그 어떤 헛된 야망에도 묶이지 않았다.

 

 

실로 그의 영혼은 자기 자신의 자아에 노예가 되지 않았다.

 

 

 

 

 

무념무상의 태도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나름대로 열정과 열심히 있었다.

 

 

그럼에도 랄프는 자기 자신을 족쇄 안에 묶지는 않았다.

 

 

욕심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타인보다 큰 명예를 짊어지려는 야욕에 눌리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숱한 실패에도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다.

 

 

 

 

 

똑같이 창조주를 향한 열정적인 헌신적 태도를 지녔음에도 이런 면에서는 랄프는 알렉시스와는 너무도 달랐다.

 

 

 

 

 

알렉시스의 삶은 한마디로 고귀한 사슬에 결박된 무거운 인생이었다.

 

 

거룩하고 선한 가치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도 강했으나 바로 그 책임감이 그를 항상 속박된 종으로 만들곤 했다.

 

 

잘해야 한다, 뛰어나야 한다, 그리고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언제든지 모두의 시선은 그에게 그런 메시지를 던지고 했다.

 

 

더욱이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도덕관까지 그 위에 씌워지니 무게는 더욱 증량될 수밖에 없었다.

 

 

선함과 덕성과 인품과 의로움,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요구되었다.

 

 

 

 

 

황태손은 자기객관화에 능한 사람이었다.

 

 

겸손한 성품이기는 했으나 동시에 자기 자신보다 뛰어난 인간이 현재 지구 상에 존재치 않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잘 인지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이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없었다.

 

 

자신이 길을 뚫어내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은 더더욱 해낼 수 없음을 알기에 항상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떠맡기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실패는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몰락으로 이어진다.

 

 

항상 이런 자신의 위치와 책무를 배우며 자라왔기에 그는 늘 부담에 짓눌렸다.

 

 

 

 

 

그래서 알렉시스는 훈련병 동기 랄프를 은연 중에 부러워했다.

 

 

반면에 랄프는 알렉시스를 동경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를 친우로서 선대하기는 했지만, 질투하거나 우러러보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는 세상의 기준에 따른 화려함들에 미련이 없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점이 알렉시스를 더욱 씁쓸하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훈련병 일정을 졸업하기 전, 랄프는 알렉시스에게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책임지려 하지 마셔요.”

 

 

 

 

 

모종의 일탈을 권하는 말은 아니었다.

 

 

랄프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잘 알았다.

 

 

그는 알렉시스의 숭고한 열정과 올곧은 책임감을 항상 높게 평가해왔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그는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늘 인식했다.

 

 

그리고 동등한 한 인간으로서 그 가르침을 알렉시스에게 상기시켜주기를 꺼리지 않았다.

 

 

 

 

 

랄프가 곁에서 보기에도 알렉시스의 개인적 책무감은 과대했던 모양이다.

 

 

아마 늘 대화 나누는 가운데에 그런 태도가 암묵적으로 드러났으리라.

 

 

알렉시스는 항상 어떻게 해야 세계와 브리튼의 안정적 번영을 이룰 수 있을지 언제나 치열히 고민했고 그 고민을 주변인들에게도 전염시키는 사람이었다.

 

 

경제적 회복, 정치적 공의, 민생의 평화, 정직한 학문의 발전, 그리고 기독교적인 가치의 전파와 충만까지.

 

 

그는 그 모든 업무들이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이런 숭고하고 탁월한 열정을 흡족해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과연 위대한 성군의 재목이라며, 그리고 미래가 기대된다며 늘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찬사를 던졌다.

 

 

그나마 조금 더 친절한 이들은 그의 부담을 위로해주며 고통을 공감해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알렉시스의 부담을 통해 모두가 밝은 미래를 누릴 것을 은연 중에 기대하였다.

 

 

 

 

 

하지만 랄프가 그를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 달랐다.

 

 

 

 

 

“우리에게 책임이라는 가치가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안타깝게도 피조물들에게는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이룰 온전한 능력이 없어요. 우린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해요. 아이러니하게도 오로지 권리만을 지니신, 그리고 누구에게도 책임의 족쇄에 사로잡히시지 않는 주님만이 인간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계시죠.”

 

 

 

 

 

그의 가르침은 이것이었다.

 

 

브리튼 제국과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오로지 하나님뿐이다.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미래를 장담하거나 짊어질 수 없다.

 

 

설령 최고로 위대한 자질을 갖춘 황제라 할지라도.

 

 

이 단순한 진리를 랄프는 있는 그대로 직면해주었다.

 

 

 

 

 

이에 뭐라고 응답했는지 알렉시스 자신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대답할 말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 말들이 옳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던 셈이지.

 

 

 

 

 

이후 랄프의 조언은 그의 뇌리에 남아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묵상이 되곤 했다.

 

 

거대한 천공성 위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알렉시스는 그 조언을 회상하였다.

 

 

 

 

 

‘나는 결국 너처럼은 할 수 없으려나?’

 

 

 

 

 

결박되지 않는, 자유함이 충만한 마음.

 

 

숱한 노력에도 그는 아직 그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

 

 

아마도 왕좌에서 내려오기 전에는 평생 그 기쁨을 맛보지 못하겠지.

 

 

랄프의 조언에 순종하기에는 어깨 위에 올려진 짐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잠시 귀를 기울이는 일 정도라면 가능하겠지.’

 

 

 

 

 

그는 마음 속에 숨겨둔 각종 계획들의 방향을 재조정하였다.

 

 

크라켄의 여덟 촉수를, 키메라의 여덟 뱀 머리를 직접 죽이는 건 보류한다.

 

 

적어도 이슬람을 완전히 패망시켰던 그 과감한 방식을 취하지는 않으리라.

 

 

대신 그것들이 자기 스스로 폭주하여 인간들의 사냥감이 되도록 내버려둔다.

 

 

 

 

 

언제 그 일이 성취될지, 올바로 흘러갈 지는 장담할 수는 없다.

 

 

십 년이 될지, 백 년이 될지, 자신의 재위 중에 성취될 수는 있을지.

 

 

그래도 주님께서 그분의 계획대로 이끄시도록 뒤로 물러나 믿고 지켜보자.

 

 

 

 

 

이를 위해서는 신에 대한 믿음뿐 아니랑 동료들에 대한 신뢰도 필요했다.

 

 

 

 

 

‘과연 내 동생들은 역할을 올바로 잘 소화해줄 수 있으려나?’

 

 

 

 

 

지금 키메라의 몸통을 향해서는 보이지 않는 섬뜩한 칼날이 겨냥되어 있다.

 

 

괴물은 아직 자신이 큰 위기에 처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 창살이 몸통을 정면으로 관통하는 순간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꼬리들과 몸체의 유기적 연결 고리가 벌거벗겨져 훤히 드러날 것인가?

 

 

 

 

 

만일 그 일이 임한다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포착해야 하리라.

 

 

 

 

 

‘그 순간 변곡점이 발생한다.’

 

 

 

 

 

그날 역사의 후면에 감춰졌던 ‘에니그마’들이 수면 위로 튀어오를 것이다.

 

 

바로 그때 그들을 포획하고 진멸하여 효시(梟示)해주어야만 하리라.

 

 

두 번 다시 제멋대로 혹세무민하며 세상을 주무르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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