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16회 [2부] 37화. 동맹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4.18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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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악하고 지혜로운 두 기업가, 적색빛 흑발의 청년 유타과 청색빛 흑발의 다른 청년 세르빈이 모의를 갖는 동안, 브리튼 제국의 다른 영역에서도 일단의 워쳐 무리가 한 젊은이를 방문하였다. 브리튼의 물질적 번영을 담당하는 축이 기업이라면, 가치와 법률과 정치를 수호하는 계는 의회들이 아니겠는가. 관측자들은 여기에도 이미 마수를 뻗쳤고 이내 그 내부를 소독해야 할 때가 왔노라는 판단을 내렸다.
여기서 잠깐 현 시점의 제국 의회 구성을 간략히 정리하도록 하자.
브리튼 제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상위의 의회식 기관은 대의회(大議會), 그 아래에는 중의회와 소의회가 제국 전체의 민중을 대표하는 집단이었다. 그리고 컨티넌트 단위로 영향력을 미치는 의회는 각 컨티넌트의 중앙 의회와 이를 돕는 세 개 씩의 보조 의회였다. 그리고 행정 단위에 예속된 지방 의회로서는 스테이트 단위의 지방 의회와 프로빈스의 단위의 지방 의회, 그리고 이런 지방 의회들의 구성원들이 지역 경계선을 넘어 연합하여 만든 연합 의회였다.
최근 황족 출신인 엘리어트 대니스 브라이틀란트는 여러 활약과 인망, 인기, 위업에 힘입어 정치적으로 커리어의 절정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금발 자안의 이 삼십대 청년은 이미 나이 지긋한 노인들과 중년들보다도 더 강력한 실세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였다. 황족이라는 메리트와 이름값도 상당량 영향을 주었지만, 본인의 영특함과 계산 능력과 정치력과 소통력이 이 성취에 기여한 바는 80%를 가뿐히 넘겼다.
올해에도 재선에 성공하여 대의회에 재입성한 그는 이전보다 더 거대한 인맥 네트워크를 제어하게 되었고 한 거대 정당의 사실상의 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무려 7대 정당 중 하나라 불리는 집단의.
모든 경우에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으나, 보통 이른 나이에 제 능력으로 빠르게 성공한 자들은 범부들과 미묘하게 차별화되는 독특한 성정이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세르빈이 승부욕이 강렬하며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는 일에 도가 튼, 자신과 남 모두에게 엄격한 실력주의자이다. 유타가 맨 땅에 뛰어들어 성과를 창출해냄으로써 타인의 인정을 기어코 얻어내는, 뛰어난 걸출한 기린아다. 영리하고 치밀한 엘리어트에게는 적을 자신의 손 안에서 제어하는 재능을 지녔다.
그는 모두에게 비위를 맞추는 타입은 아니었고 자기 입장이 뚜렷하였다. 이러한 점에서는 알렉시스와 비슷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형인 알렉시스와는 달리 엘리어트는 적들로부터 그리 극심한 대적을 받지 않았다. 황태자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재능을 지녔으나 너무도 출중한 존재감과 위엄 때문에 모든 대적에게서 가장 높은 단계의 경계심을 필연적으로 받는다면, 엘리어트 황자는 뛰어나긴 하되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러면서도 나름의 융통성과 소통력도 뒷받침해주는, 적절하면서도 애매하게 강한 유형이었다.
이런 특성은 의회 내부를 면밀히 감찰하되 견제의 시선을 적절히 피하는 데 매우 유리했다. 워쳐들도 그렇게 평가했는지 세르빈과 유타에게 내밀었던 조약과 똑같은 내용의 협의안을 이 금발 머리 황자에게 제시하였다.
{그간의 상황에 대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관측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제국의 모든 의회들 내부에 파견되었는지 경위를 보고하였다. 다른 기관들과 달리 오로지 선출되거나 임명된 인간들만 멤버가 될 수 있는 의회 기관들에 어찌 비인간 종족이 침투할 수 있었는가. 그 해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경호원이라. 그래, 확실히 효율적인 전략이긴 했지.”
복잡한 시스템으로 경영되며 다양한 유형의 인간 및 비인간 일꾼들이 근무하는 커버넌트 그룹과 달리, 의회에 인공지능이 활용될 여지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생각이나 사상을 전개하여 정치에 반영하는 일은 법적으로 인간 외 존재에게 금지되어 있으니 몸 쓰는 일 말고는 역할이 더 있겠는가. 그리고 정치의 장에서 가장 중요한 몸 쓰는 일이란 바로 중요 인물을 보호하는 일이다.
의원들은 대부분 무력을 갖추지 못했다. 의회 건물 안은 그래도 테러나 범죄에 어느 정도 방비할 수 있는 치안 수준을 갖췄다지만, 의원들도 사람이니 행선이 물리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필연이며 언제든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의회 밖에서나 안에서나, 그들은 예상치 못한 폭력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세계 통일 이후 대대적인 개혁과 재선거를 거쳐 전반적으로 재편성되었고 지금의 거대한 규격으로 완성된 의회 시스템. 하지만 적국이 몰락했다고 해서 의원들의 신변을 위협하는 변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구 통일 이후 브리튼령 내부로 많은 범죄 조직 및 반국가 단체 잔당들이 스며들었다.
이러한 무리 가운데는 기꺼이 중요한 정치인을 죽임으로써 뜻을 관철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자신들의 사상에 반대되는 정당의 인물들을 죽임으로써 반대 정당의 힘을 증가시켜 협치 균형을 깨트린다던가, 혹은 자작극을 벌여 기묘한 여론의 흐름을 만든다던가. 이런 시도가 실제로 여러 차례 있었고, 안전 방비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를 드높였다.
최근에는 이슬람 세계의 모든 원리주의자들이 공개적으로 브리튼 제국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 엄청난 사건도 있었다. 황태자의 철저한 대비 덕에 실질적인 피해는 거의 없었으나 어쨌건 이 일은 많은 이들, 특히나 늘 암살 위험에 노출된 정치인들에게는 경종을 울리는 사변이었다.
결국, 이는 의회 의원들의 안전 보호를 위해 설계된 인공지능 로봇 경호원의 수요를 대폭 증폭시켰다. 때마침 커버넌트 그룹과 그 하청 기업들, 그리고 팀 아르다와 AI 연구원들은 경호 업무에 극도로 특화되었으면서 생산 비용은 상대적으로 적은, 맞춤형 모델을 완성하였던 참이었다. 내전 사태를 계기로 그 경호원들이 의원들과 의회의 내부에 대거 유입되었다. 부유한 정치인들은 개인적으로 AI 경호원들을 구매하거나 빌렸고,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정치인들을 위해서는 국가 또는 의회 차원에서 AI 경호원 이용 지원이 제공되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엘리어트는 이미 어느 정도는 사촌 형, 아니 큰형의 방식에 어느 정도는 익숙했기에 대강은 가늠하고 있었다. AI 경호원들의 설계 프로그램 내부에 다른 목적들도 심겨져 있음을. 그리고 그의 예측은 옳았고 오늘 공개적으로 그의 눈앞에서 드러났다.
“경호용 AI 로봇의 판매가 대거 급증한 시점에, 이미 다수의 기체(機體) 속에 너희 워쳐들의 소프트웨어 모듈을 이식해뒀다 이거군. 그것도 워쳐의 본체만이 연동용 분신 모듈까지도.”
고로 현재 의원들이 공적인 자리 혹은 중요한 이동 과정에서 흔히 대동해 다니는 인간형 안드로이드 로봇들과 의회 본당에서 불미스러운 사태를 막기 위해 배치된 안전 요원용 로봇들 가운데 적잖은 수는 본업에 더불어 의원들 자체를 감시하라는 알렉시스의 명령도 수행하고 있다는 셈이다.
엘리어트는 이 방식을 도덕적으로 평가하며 왈가왈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목적 지향적인 사람이었고 이를 위해서 수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관용을 베풀 수 있었다. 자신이 정한 윤리적 틀의 선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역시 우리 큰형님은 지혜로우시군. 미리 이 일을 위해 처음부터 빌드업을 해두었단 말이지. 유타 녀석이 항상 그분에게 인정받지 못해 안달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군.”
심지어 엘리어트는 워쳐들이 드러낸 진실, 곧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리 경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의회에 몸을 담으며 정치판을 면밀히 관찰해온 그이기에 그 세계 속에 얼마나 많은 ‘사상(思想) 괴물’들이 웅크리고 있는지 너무도 잘 이해했다.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그는 현재 의회의 의석 중 5분의 1 내지는 4분의 1 가량은 첩자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직접적으로 악의를 품은 첩자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사상에 의해 꼭두각시가 되어 자신도 모르는 새 부역자가 된 간접적 첩자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당신은 세르빈님이나 유타님과 달리 태연하군요.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엘리어트를 찾아온 관측자들의 대표 열두 기 중 하나가 발언했다.
“흐음, 너희처럼 최근 시대에야 만들어진 인공물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금발의 미청년은 다리를 꼬아 책상 위에 편히 얹은 뒤 안락의자의 등받이를 뒤로 젖히며 편안한 자세로 손을 까딱거렸다. 그는 로봇들이 내뱉은 정보와 제안들을 필기해둔 손 노트를 만지작거리며 연필을 손에서 굴렸다.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의회의 의미와 존재감은 상당히 짙지. 아직 우리가 위대한 나라로 거듭나기 이전, 변방의 왜소한 미개국에 불과했던 시절에도, 조상들은 왕의 어리석음을 징벌하고 그로 인해 파생될 폐해를 제한하기 위해 폭동 대신 의회와 법률의 권능을 이용해 계약을 체결했었지.”
{마그나카르타 말씀이시군요.}
“뭐, 그 또한 하나의 예시였지. 이후 전개된 역사를 보면 실질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일은 그리 없었지만. 허나 그 역사적 의의는 가볍게 여길 수 없어. 법을 왕으로 세우고 인간을 그 밑에 신하로 만든다, ‘법을 이용한 통치(Rule by Law)’가 아닌 ‘법의 통치(Rule of Law)’, 지혜로운 착안이야.”
브리튼의 언약이 있기 이전에도, 제국의 전신(前身)이었던 잉글랜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법을 통치의 주체로 세운다는 아이디어를 온건하면서도 효율적으로 현실화하고자 노력해왔던 나라였다. 인간은 타락하여 불완전하므로 불변하는 질서와 율법과 도덕을 왕의 권좌 위에 올려두어야 한다.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탁월한 아이디어였고 실제로 브리튼 제국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 기치의 연장선이었다.
다만, 율리시아 여왕과 현왕 크리스토프 대제의 시대를 기점으로 이러한 잉글랜드의 정치적 기류에는 변화가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율리시아 여왕의 기원이 되었던 튜더 왕조는 절대적인 왕정이었고, 이미 그 이전 13세기 경부터 유럽 왕조들은 왕권신수설을 강압적 통치의 정당성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만약 잉글랜드의 왕조가 자신들의 강대한 권한을 남용하며 지혜롭지 못한 길을 걷기를 거듭했더라면, 왕정의 강함에 대한 반작용은 잉글랜드 특유의 ‘의회 시스템의 저력’을 자극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결말은 충돌로, 그리고 왕정의 폭력적인 몰락으로 이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율리시아는 어떤 면에서는 강압적이고 독선적인 군주로 비칠 수도 있었다. 당시 나라에 오랫동안 뿌리내린 카톨릭의 지독한 지배력을 잘라내고 반 개혁파의 반역을 막아내려면 필연적으로 그런 성정을 입어야만 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독재자이긴 했을 지언정 폭군은 아니었다. 그녀는 합리적이었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았으나 비본질적 문제에 대해서는 타인의 음성을 경청할 줄 알았다. 그런고로 의회는 그녀의 권위와 힘을 인정했다.
더욱이 그 맏아들인 크리스토프는 ‘법의 지배’라는 질서의 위대함을 의회 이상으로 깊이 이해한 왕이었다. 그는 그 ‘법’의 공급자가 성경을 기록한 신 한 분 뿐임을 알았고 신의 변치 않는 율례가 자신을 다스릴 유일한 힘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기꺼이 ‘신적 언약’이라는 형태로 자신과 자신의 후손, 그리고 브리튼이라는 국가 전체를 옭매었다. 그것도 최대한 안정적인 형태로. 그는 히브리 사람들과 달리 신과의 언약에서 더욱 유리하고 안전한 조건을 얻었고, 그의 현명한 혜안은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결과적으로 크리스토프의 세대 이후로 의회는 왕을 억압하고 억누를 정당한 명분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왕 스스로 ‘가장 위대한 법’과 그 법 자체를 공급한 이의 말씀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기로 자기 집 전체를 결박하였으니 그보다 하위의 존재들이 어찌 왕을 통제하겠는가.
“그리고 현왕의 맏아들인 란돌프 1세가 왕으로 즉위한 뒤, 그 인물이 세상에 등장했지.”
{올리버 크롬벨 말씀이군요.}
크롬벨. 전설적인 의회의 지도자. 그는 자신이 활동하기에 가장 올바르고 적합한 시대를 타고난 인물이었다. 강력한 신념과 이를 집행할 정신력을 소유한 그는, 만일 다른 시대와 다른 세계에 났더라면 기꺼이 왕과도 목숨을 걸고 겨루기를 할 강단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대제의 아들인 란돌프 1세는 위대한 인물이었고 탁월한 지적 능력 이상으로 지혜 면에서 온전한 자였다. 그의 그릇은 단순히 크롬벨과 겨루어 이길 정도를 넘어 크롬벨이라는 내용물을 온전히 포용하여 흡수하고도 남을만큼 거대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크리스토프에게 언약하신 말씀의 실현이었고, 크롬벨은 그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였다. 그 역시도 신을 성실히 믿고 섬기는 청교도였기에 왕을 존중하였고 왕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대신에 크롬벨은 역사에 남길 위대한 유산 하나를 창조하였다. 그 유산은 영적으로 새로이 재조직될 ‘의회의 영혼과 심장’으로, 크리스토프가 남긴 유산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크롬벨만의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는 직접 신과 언약을 맺을 기회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왕이 맺은 언약의 효력과 영향력을 의회를 매개로 백성들과도 공유하도록 끌어내어 확장할 수는 있었다.
크롬벨은 란돌프 왕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를 폐하와 다음 세대 왕들의 언약에 공증인으로 동참할 공동 증인으로 삼아주시기를 청합니다.”
왕은 그 계약을 승인하였고 기도를 통해 신의 허락을 얻었다.
이후 실질적인 개혁이 발생했다. 의회 내부에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들어와 기도와 성경 말씀을 기초석 삼아 새로운 정신적 체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크리스토프와 절대자 사이에서 증인 노릇을 해주었던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제자들이 정치계에 진출하여 성경적인 신념으로 정치를 행하기 시작했다. 법률은 성경과 브리튼 왕조 언약에 합치하는 방향으로 재조정되었다. 이후 의회의 모든 규율은 철저히 언약과 동조되어 공명하게 되었다.
이로써 의회의 존재의의로서 새로운 의미가 재정의되었다. 단순히 왕을 견제하는 장치로서의 의의를 넘어서, 왕이 신과 맺은 언약을 지키도록 돕되 시민들을 섬기겠노라는 왕가의 맹세를 이행하도록 촉구하는 시스템이 되었다. 아울러 의회는 일종의 신성한 매개 장치가 되어 황가에 제한된 언약이 시민들과 시민 사회에까지 적용되도록 영향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신성한 유지와 자긍심은 정치 시스템 개편을 여러 차례 거치고도 그대로 유지되어 심지어는 오늘날에까지 유효하게 계승되었다. 여전히 의회들은 강력한 언약 매개 장치이며, 황가와 시민 사이의 중계자이다. 그들은 황가의 견제자인 동시에 협력자이며 집단으로서는 언약의 보조 수호자들이다.
경건하고 의로운 이들이 일정 분율 이상 포함되어 있을 때, 의회는 크롬벨 시대로부터 시작되어 부여된 본질적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다. 그때에 그들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으며, 황가를 묶는 신성한 사슬이 되어 균형추 노릇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황가의 구성원들이 항상 경건한 인물만 배출되는 것이 아니듯, 의회에도 얼마든 악한 자와 위선자들이 침투할 수 있다. 그렇게 악의 성분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의회들은 영적인 가치와 수행 능력을 서서히 상실한다. 금빛 사슬은 차차 문드러지고 부패한 동앗줄의 형태로 변질해간다.
이렇게 타락한 상태의 의회들은 언약의 중간 매개자 및 보조 제어자의 노릇을 결코 감당하지 못한다. 이때에는 크롬벨의 계약은 그 효력이 보류된다. 황가는 더는 의회들의 속박력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역으로 재판하고 다스릴 적법한 권능을 얻게 된다.
“실제로 역사속에서 숱하게 있었어. 황실에 의한 의회의 청소 말이야.”
크리스토프의 후손들은 언약의 속박력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폭정을 행하지 못한다. 고로 자신을 견제한다는 이유만으로 적법한 의회를 제멋대로 부수거나 무력화하지는 못한다. 정확히는 의지적으로 그렇게 행하지 않기를 추구한다. 하지만 의회의 성분들이 타락하여 썩은 줄이 되면, 그들은 오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의회들을 기꺼이 엄숙하게 심판해왔다.
결정적인 임계점에 이르면 황제 주도 하의 의회 개혁이 발생했다. 그 같은 사건이 역사책에 기록된 것만 최소 일곱 번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은 최근으로, 세계 3차 대전에 승리한 직후 일어났다.
3차 대전이 발발하기 몇 년 전까지, 브리튼 의회의 정당들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나는 신흥 세력인 디에고의 혁신을 중심으로 확립된 공화파였고 하나는 전통적인 황실파였다. 다만, 이 두 진영에 속한 정당들 모두 원래는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같은 지향점을 추구했다. 전통적인 브리튼 언약의 가치들을 추구하고 바란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대동소이했으며 단지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진영 모두에 모종의 기생충들과 벌레들이 몰래 침투한 것이 문제였다. 양쪽 모두에 파고든 이들은 사상범이요 첩자들이었다. 그 근원지는 당연히 역사의 왼쪽 날개의 본산지인 커뮤니스트 연방이었다. 수십 년에 걸쳐 브리튼 의회는 간첩들에게 천천히 오염되었고, 디에고의 등장으로 황실과 공화파 간에 선의의 경쟁 구도가 생기자 그 틈을 타 더욱 더 깊이 침식하여 기회를 엿보았다.
이러한 의회의 타락은 여러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고 그 가운데는 전쟁 발발과 그로 인한 피해의 확대도 있었다.
그랬기에 전대 황제와 당시의 황태자였던 알폰스는 전쟁과 동시에 사상범들과 전면전에 돌입하였다. 그들은 의회 내부의 독버섯과 암세포들을 과감하게 적출하였다. 이 작업은 물리적인 전쟁이 다 끝나고도 몇 개월 이상 더 진행되었고 그 작업을 마치고서야 비로소 알폰스에게로의 황위 승계가 이뤄질 수 있었다.
당장 엘리어트도 큰아버지인 알폰스의 이런 활동을 생생히 지켜본 산 증인이었다. 그분은 공산주의자들의 첩자들을 무참히, 과감히, 동시에 신중하고 교묘하게 제거하셨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적진을 점령한 뒤 첩자들에 대한 증거를 얻어내자 이 숙청 작업은 더욱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을 누구보다도 더 증오하는 엘리어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 시절 그는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큰형 알렉시스는 이제 여덟 번째로 의회 내부를 심판하고자 한다. 자신이 직접 손을 쓰지 않은 채, 워쳐들과 형제들의 힘을 빌려서. 엘리어트는 기꺼이 자신이 그 중간 집행자가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워쳐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뒤 그는 형제인 유타에게 연락하였다.
“그쪽에도 다녀갔지?”
“그래. 아무래도 의회 쪽을 맡은 네게도 접촉한 모양이군.”
“유타, 형제들 중에서 워쳐들이 접촉한 사람은 누구누구지?”
엘리어트의 질문에 유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아는 선에서 대답하자면, 황후 전하의 아이들 전부, 그리고 너와 나, 이렇게가 전부야.”
“그렇군. 예상대로네. 일부러 믿을만한 사람들만 선별한 건가. 관측자들이란 소름끼치는 녀석들이로군.”
알렉시스를 제외한 황실의 코어 멤버인 황후의 아이들, 그리고 황제가 가장 귀여워했던 형제인 레미온의 아들들. 혈계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은 아니지만, 황실의 문제라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언약의 종속력이 가장 강력히 미치는 이들을 고르리라는 전략은 확실히 인공지능 입장에서도 확실한 보증으로서 판단되었던 모양이다.
“아, 맞다. 조금 이상한데, 테서렉틴과 펠렌드로크에게는 따로 접촉이 없었던 모양이야. 여성인 아델에게도 접촉이 있었다던데. 여기에도 의미가 있는건가?”
유타의 말에 엘리어트는 별로 의외는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펠렌드로크 그 인간이야 관측자들의 도움 따위가 필요없는 인간이니까. 그는 이미 독자적인 노선으로 ‘그들’을 공략할 음모술수 체계를 구성했을 거다. 워쳐들도 그 사실을 아니까 굳이 힘을 낭비하지 않는 거야.”
“아, 하기야 저번에도 그랬으니, 이번이라고 다르진 않겠네. 워쳐들마저도 그 인간만은 경계하고 거리낀다 이건가. 웃프군. 그럼 테서렉틴은?”
엘리어트는 실소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큰형님이 제일 편애하는 동생이잖아. 아마도 이런 일로 손 더럽히지 않게 해주고 싶다, 뭐 이런 의미겠지. 충분히 특혜를 베풀만도 하잖아.”
실제로 엘리어트의 고찰은 상당히 정확했다.
“테디 너는 복구자의 역할이다. 키메라의 몸통과 촉수들이 궤멸한 이후의 세계를 재건하는 역할. 그러니 이런 지저분한 작업과는 어울리지 않아.”
상공 위에 고고히 좌정한 알렉시스는 한반도 쪽을 바라보며 작게 독백하였다.
“너는 잠잠히 기다리며 네 실력을 쌓아라. 네가 필요한 세상이 올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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