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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28회 [2부] 49화. 가짜 유대인 (1)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5.19 | 회차평점 0 0

 

 

 

흑색에 가까운 남색 머리카락을 지닌 진갈색 눈동자의 청년은 목적지에 막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려던 중 주춤하였다. 익숙한 실루엣 둘이 같이 거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여길 장면은 아니긴 하나 눈살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그는 잠잠히 방해하지 않고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개입할 타이밍을 계산했다.

 

 

“올해 들어 은근히 자주 얽히는군.”

 

 

적당한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은 그 청년은 뚱한 무표정의 얼굴로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의 이름은 산달폰. 서른을 막 바라보는 이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 편할 텐데 말야.”

 

 

사내의 레이더에 포착된 인물 중 하나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요주인물이었다. 위험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예측 불허의 변수이기에 면밀히 바라보아야 할 거물. 현재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떨치는 위인이라 더욱 많이 신경이 쓰였다.

 

 

그 사람은 대략 작년쯤부터 산달폰 오누이와 다시 만나 소소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산달폰 본인도 그날 이후로 일주일에 한번꼴로 그와 통화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사소한 잡담부터 심각한 철학적 고민에 이르기까지 간간이 생각을 공유하던 참이었다.

 

 

문제는 저 남자가 산달폰 자신과만 얽히는 것이 아닌, 유일한 여동생과도 은연 중 많은 얽힘을 갖는다는 점이었다. 아마 자신과 만났던 그날에도 접촉했던 모양이고, 그 이후로도 두어 번 정도는 접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동생도 그를 만난 날이면 미묘하게 고양된 듯한 정서 상태를 내비쳤었지. 아마 한달에 한 번꼴로 휴일에 시간이 나면 잠시 찾아오는 식인 듯하다.

 

 

어머니는 같으나 생물학적 부친은 다른 여동생 라하토브, 그녀는 늘 산달폰에게 주의하여 돌봐야 할 연약한 그릇과 같았다. 마음이나 몸이 약해서라기보다는 그녀가 지닌 한계 때문이었는데, 사람의 정체성을 얼굴에서 인식해내지 못하는 장애가 그 원인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잘 적응하여 일생 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아무래도 사회 생활에는 불편함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위험한 만남이나 인간 관계에 대한 염려는 오빠로서 잘 놓이지 않는 걱정이었다.

 

 

알렉시스라는 저 남자는 몇 번 대화해본 바로 보건대 어느 정도는 신뢰해도 좋을 인품의 인물인 듯하다. 다만 문제는 저 사람의 본 신분이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제국의 준 최고 통치자라는 것인데, 맥락을 보아 그는 그 사실을 라하토브에게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산달폰으로서는 감이 잡히지는 않았으나 일단은 주시하며 그가 행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설마, 양심이 있다면 엉뚱한 생각은 하지 않겠지?”

 

 

사실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여동생은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기에 누군가의 이목구비에서 미추(美醜)의 개념을 찾지 않는다. 그러니 저 남자가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얼굴을 지녔다고 한들 설레거나 하지는 않으리라. 또한 얼굴에서 인상을 감지하내지 못한다는 뜻은 상대가 안심해도 될 사람인지 아닌지도 쉬이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 그런 조건 하에서는 상대의 커다랗고 건장한 체격도 듬직함이나 호감으로 인식된다기보다는 미지의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알렉시스도 쉽사리 거리를 좁히지는 못하는 것일테지.

 

 

그래. 저 사내와의 거리는 딱 그 정도가 좋다. 적당히 자신도 그를 이용하고 그도 자신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 각자 미지의 베일을 둘러 비밀을 감춘 채 자신이 인지하는 선 안에서 상대의 유용성을 활용하는 관계. 약 13년 전에도 산달폰은 황태자와 그런 식으로 만났고 지금도 이는 동일하다.

 

 

“잘 지냈어?”

 

 

“오빠?”

 

 

정원에서 산들바람을 맞으며 녹양을 구경하던 라하토브는 익숙한 발걸음 패턴과 목소리에 곧장 반응하였다. 소리와 향기, 몸동작과 체형 패턴만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그녀에게 있어서 감각에 가장 익은 대상은 가족은 산달폰이었다.

 

 

“일주일 만에 돌아왔네. 일은 잘 되어가고 있고?”

 

 

“응, 근래 들어서는 수월하게 되는 중이야. 너도 생활하는 데 문제는 없고?”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나도 성인이라서 기본은 할 줄 알아.”

 

 

연갈색 머리에 수수한 차림을 한 농촌 여인은 상대의 정겨운 잔소리에 여유로이 대꾸하였다. 오빠는 그녀에게 있어서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지지대였다. 열한 살에 부모님을 잃은 이후로 두 사람은 악착 같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서로를 버팀목으로 삼았다. 지금이야 형편이 나아져서 어느 정도 독립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현재도 라하토브가 생존 근심 없이 유유자적 자기 삶을 영위하는 데는 산달폰의 경제적, 정신적 지원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손님이 와 계시는 줄은 몰랐네.”

 

 

산달폰은 시치미를 딱 떼며 능청스레 알렉시스 쪽으로 시선을 흘렸다.

 

 

“오빠 친구랑 벌써 개인적으로 만남의 시간을 갖을 줄이야.”

 

 

“좋은 분이셔.”

 

 

라하토브의 대꾸에 알렉시스는 잠시 쭈뼛거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침묵하였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산달폰의 시선에 할 말이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 산달폰 몰래 그녀의 집을 찾아와 그녀를 만난 사실은 알리지 않았었지.

 

 

“이상하네요.”

 

 

“무엇이 말이죠?”

 

 

알렉시스는 누가 알아볼까 염려되어 모자의 캡을 깊게 눌러쓰며 말했다. 허름한 사복에 후드티, 마스크까지 쓰고 오긴 했으나 워낙에 존재감이 강한 데다 덩치부터 눈에 띄는 타입이라 조심해야 했다. 이곳이 한적한 촌이라 망정이지 주변에 이웃들이 많았더라면 당장에 들켰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매우 바쁜 사람 아니던가요? 알렉?”

 

 

“인생에서 항상 바쁜 순간만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죠. 황금 같은 휴일의 시간을 쪼개어 이곳에서 평화로운 순간을 만끽하려 했을 뿐입니다.”

 

 

“저 같았으면 그 시간에 다른 친구들과 친분을 돈독히 했을 것 같군요.”

 

 

“평소에도 그 일은 신물날 정도로 실컷 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은밀하게 변장까지 하고서 이런 외딴 촌에까지 친히 발걸음을 하셨다?”

 

 

산달폰의 장난기 섞인 쏘는 말들에 알렉시스는 혹 라하토브가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그녀의 한계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 신분과 정체를 은폐하던 참이었다. 애초에 양심에 찔릴 일인데다가 그 사실을 그녀의 오빠가 알고 있으니 그야말로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오빠, 먼 길을 오신 분한테 무안하게 대우해드리면 안 되지.”

 

 

라하토브가 나무라자 산달폰도 못 이기는 척 일을 덮었다. 그의 눈치를 읽고 그가 대강 장단에 맞춰주기로 결정했음을 깨달은 알렉시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쨌건 두 사람 모두와 껄끄럽지 않은 친분을 잘 유지하고는 싶었다.

 

 

“그래요, 먼 길 오셨는데 마침 잘 됐습니다.”

 

 

산달폰은 눈짓으로 알렉시스에게 신호를 주었다.

 

 

“오랜만에 나랑 오프라인 대화 좀 합시다.”

 

 

 

 

 

 

 

 

*

 

 

 

 

 

최근 알렉시스는 워쳐 네트워크의 완전한 활성화를 통해 방대한 관측력을 획득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세계 사회의 미시적, 거시적 정세들을 면밀히 관찰하여 내일을 예측하기 위한 정보들을 모으는 중이었다. 한 인간에게 허락된 집중력은 유한한지라 그는 이 정보들 가운데 반드시 주목할 것들만을 골라 ‘선택과 집중’ 전략을 취해야 했고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큰 흐름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만 체크하고 넘어갔다.

 

 

그가 중요치 않다고 판단하고 넘긴 흐름들 가운데는 근래 나타난 유대인 사회의 동향이 있었다. 그 변화에 참여하는 이들은 소시민들로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사람도 거의 없으며 주의해야 할 예비 범죄자나 반 사회적 인물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도 없었다. 그렇다고 열렬한 유대교 신자들인 것도 아니었다. 알렉시스도 인류의 장래에 유대 민족이 중요 변수가 되리라는 사실은 예견하고 있었으나 지금 나타난 이 흐름이 그 미래와 연결되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깊게 파지도 않았고 그 중추를 탐색하지도 않았다. 딱히 브리튼에 위해(危害)가 되지도, 유익이 되지도 않을 중립적인 현상이라 생각했으니까. 만일 그가 각을 잡고 호기심을 풀었더라면 워쳐 전력의 1% 만으로도, 아니 관측자들을 동원할 것도 없이 그의 정보망과 권력만으로도 순식간에 유대인들의 동향을 손바닥 안에서 쥐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유대인들은 무엇을 위해 최근 들어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가? 시점도 참 절묘했는데, 하필 이슬람의 소멸이 완료된 직후부터 개시된 것이 아닌가.

 

 

혹시 친우인 아미르가 이 일과 관련성이 있는가 하고 추측했으나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미 알렉시스의 정식 부관으로 편입된 시점에서 아미르는 브리튼 측에서 수상하게 생각할 법한 일들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람직한 태도이기도 하고. 그 말은즉 민간 차원에서 일어난, 자발적인 운동이라는 뜻인데, 과연 누가 주동자이겠는가.

 

 

알렉시스의 촉은 그 배후를 산달폰으로 지목하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작년의 그 재회 이후로 그와의 연락을 계속 유지하는 중이었다. 중요한 안건이 아닌 듯하여 내버려두어도 되기에 산달폰을 추궁하거나 수색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어쨌건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요새 무슨 일을 기획하시는 겁니까?”

 

 

오늘은 마침 기회가 온 듯하여 알렉시스는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산달폰을 향해서는 나름 인간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었기에 그를 향해 불필요한 꺼림직함을 품고 싶진 않았고 그러려면 상호 투명한 대화가 필요했다.

 

 

“익명으로 유대인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관리하는 주축, 당신입니까?”

 

 

산달폰은 노골적인 질문을 받고도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뭘 그런 걸 묻냐는 눈치로 알렉시스의 자색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였다.

 

 

“당신의 정보력으로 그 정도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저에게 물어보시는지?”

 

 

“오래 만난 사이는 아니지만 친애하는 사람이라고 여겼기에 구태여 권력으로 파헤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신뢰를 위해 선을 지키고 싶었거든요.”

 

 

“그것참 감사한 일이네요.”

 

 

시큰둥한 대답으로 응수하는 산달폰.

 

 

“뭐, 대단한 일도 아니고, 저 역시 신임에 대해 마땅한 의리를 표할 책무는 있겠군요.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 사회 내부에서 연락망을 형성 중인 익명의 존재. 저 맞습니다.”

 

 

“허어?”

 

 

너무 순순히 인정해주니 괜히 김이 빠졌다. 산달폰은 왜 대체 그것이 궁금하냐는 투로 알렉시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췌 무슨 연유로 거대 제국의 황태자께서 일개 소수 민족의 사사로운 활동에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알렉시스는 산달폰에게 질문했다.

 

 

“당신 혹시 무슨 사회 운동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지구 평화, 환경 보존, 인종차별 방지, 뭐 이런 운동은 아닐테고요.”

 

 

“뭐 다 유익한 주제들이네요.”

 

 

“농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야말로 궁금하네요. 언제부터 저희 일족의 일에 그리 오지랖이 많으셨는지?”

 

 

황태자에게 말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불손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알렉시스의 자존심을 긁은 부분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이 수호해온 가치의 고귀함을 부정당하는 것 같아 묘하게 심기가 거슬렸다. 산달폰이 거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유대 민족과 상관없는 외부인으로 취급하는 태도가 서운했다. 아주 틀린 말은 또 아닌지라 더욱 기분이 뒤숭숭했다.

 

 

“서운하군요.”

 

 

알렉시스는 답지 않게 생색을 내며 감정을 표현했다.

 

 

“브리튼 제국은 초대 건국 왕이신 현왕 시절로부터 늘 모든 고아들의 보호자요, 과부들의 수호자였습니다.”

 

 

“구약 성서의 말을 인용한 듯 한데, 아무래도 문자 그대로의 고아와 과부 이상을 뜻하는 뉘양스로군요.”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과부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 그들의 후손들 또한 긴 세월 이방 땅을 떠돌며 나그네로서, 외톨이로서, 터부시하고 외인으로 여기는 싸늘한 눈초리의 과녁으로서 설움을 견뎌왔다. 알렉시스가 지칭한 고아와 과부란 바로 민족 단위의 히브리 족속, 그리고 그 안에 속한 개인들이었다. 물론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세상의 모든 빈약하고 가난한 자들도 포함이었다.

 

 

“크리스토프 대제야말로 최초의 ‘유대인들의 친구’ 아니었습니까? 당신들과 당신의 조상들이 유럽 본토에서 모든 모함과 정죄와 매도를 당하며 저줏거리와 속담거리가 되었을 때, 로마 카톨릭이 당신들을 ‘그리스도 살인자’로 여기며 억울한 누명을 씌웠을 때, 유일하게 당신들의 편이 되어준 건 그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제 집안은 바로 그분의 가문으로서 그분의 피와 의지와 명예를 계승하였습니다.”

 

 

알렉시스의 항변은 정당한 것이었다. 산달폰도 이를 인정했다.

 

 

“알아요. 모든 세력이 우리를 대적하고 사냥감과 먹잇감으로 여겼을 때, 오로지 당신들만은 달랐다는 거. 저희도 인정하고 시인해요. 교황청도, 이슬람도, 공산주의자들도 우리를 학살하고 멸종하지 못해 안달이 났었죠. 당신들이 보호의 터를 닦아주지 않았으면 우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겠죠.”

 

 

알렉시스는 그제야 정당한 자긍심에 대한 올바른 인정을 받은 기분에 안도하였다. 이것은 비단 그 자신의 명예만 걸린 문제가 아니었다. 브라이틀란트 가문과 그들이 이끄는 세계가 올바른 길을 걸어왔노라는 자부심. 그것을 부정당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제가 직접 움직이려 했던 이유, 아주 간단해요.”

 

 

산달폰이 덤덤하게 속마음을 터놓자 알렉시스는 잠잠히 귀를 기울였다.

 

 

“무서웠거든요.”

 

 

“무서움요?”

 

 

“우리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종족 단위의 방어기제죠. 우리는 수천 년을 두려움 속에서 떨어왔어요. 아침에 잠에서 일어날 때도 두려워했고 밤에 잠들 때도 두려워했죠 (신 28:67). 뼛속까지, 골수에까지 ‘나의 존재가 유지될지 모르는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새겨졌어요.”

 

 

이것은 한탄이나 과장이 아닌, 본질 그대로에 대한 고백이었다. 산달폰의 입으로 표현된 말들이지만 사실 이는 종족 전체의 감정에 대한 대표 발언이었다. 한(恨). 고통스러운 애통의 정서. 이 고통의 얼은 일시적인 평화기가 찾아온 지금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치유되지 않고 흔적으로 남았다.

 

 

“이건 저의 개인적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종족 그 자체의 공포감이죠. 우리는 여기서 도망치기 위해, 과거의 올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쳐왔어요.”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

 

 

“친절하고 자애로운 당신이라면 이해하지 못하겠죠.”

 

 

무조건적으로 미움을 당하는 처지에 놓인 두려움. 그 미움이 왜 오는지, 이유조차 알지 못한다. 비이성적으로 작동하는 증오심. 집단이나 민족을 막론하고, 이데올로기의 종류를 막론하고 그 증오심은 항상 그들만을 집요하게 겨냥한다. 어떤 공포 영화도 이보다 더 섬뜩하게 다가오지는 못하리라.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니 더 정확히는 불확실성과 미지의 공포에 맞서기 위해, 가만히 멈춰 있을 수 없었다. 산달폰의 시도는 그간 시도되어 온 여러 히브리 지도자들의 운동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제는 기회가 왔죠. 마침 우리를 잡아삼키려던 가장 큰 원수가 소멸되었어요. 앞으로 더 악독한 세력이 만들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지금 주어진 이 골든타임이 소중하죠. 잠시 안정이 허락된 이 시기에 저와 우리는 지혜롭게 흉년을 대비하기로 했어요.”

 

 

산달폰의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고백했다. 그가 세계 곳곳의 유대인 운동가들과 지식인들과 일종의 사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비밀 연락망을 만들어나가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외부의 도움 없이 그들의 힘으로 생명과 종족 존속을 지킬 수 있는 자생력을 갖추는 것. 지금 당장은 머나먼 미래의 일로 요원하겠지만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준비해나갈 생각이었다. 일단 손에 잡히는 작은 일에서부터 실천을 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기회를 열어준 당신에게는 고맙게 생각해요. 이건 진심입니다.”

 

 

이슬람을 제거해준 일에 대해 유대인들을 대표하여 감사를 표한 산달폰. 그 말을 듣는 알렉시스는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복잡한 심경에 잠겼다.

 

 

“결국, 신뢰 받기에 우리가 부족했던 모양이군요.”

 

 

산달폰과 그의 동료들을 막거나 방해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들이 브리튼 제국과 브라이틀란트 가를 백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었다.

 

 

“당신과 당신 나라에 손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요.”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무엇이 그리 서운하죠? 어차피 이 세상에서 자신 혹은 자기 무리 이외에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상대란 없습니다. 당신이 누구보다도 잘 아실텐데요?”

 

 

“나와 내 가문의 명예와 자긍심이란 바로 그런 ‘기댈 곳 없는 자들’을 위한 보호의 장벽이 되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속에서 그것을 실천해왔고 오늘날에도 그 일을 이어나가는 중입니다.”

 

 

“맞아요.”

 

 

산달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알렉시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당신의 지혜롭고 명예로운 조상들, 그리고 당신, 확실히 그들은 우리가 믿고 의지해도 좋은 훌륭한 사람들이죠. 하지만.”

 

 

그 웃음에 담긴 슬픔이 알렉시스에게도 흐릿하게나마 전달되었다.

 

 

“당신의 후손들도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

 

 

“아니, 애초에 당신의 가문과 제국 또한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죠.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하니까요.”

 

 

반박하지 못하는 아픈 사실들이 가슴을 쓰라리게 긁었다.

 

 

“그 날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안일함과 남에게만 의지하는 타성에 젖은 채로 남는다면, 우리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버팀목이 사라지고 확실했었던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가 다시 맨몸으로 사나운 들개들의 숲에 던져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할까요?”

 

 

산달폰에게는,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다. 아마 깨어있지 못한 다수의 유대 민족은 지금의 평온과 번영에 젖어 브리튼 제국 속에 동화되어 스며들려 할 것이다. 하지만 때가 될 때 그들은 문득 발견하게 될 것이다. 녹아들려고 해도 어떤 운명적인 견인력으로 인해 도저히 녹아들지 못하는 자신들의 상태를. 이것은 예로부터 늘 그들을 예속해왔던 숙명이었다.

 

 

그들이라고 왜 이방인의 틈 속에 동화되려고 노력을 안 해봤겠는가. 그 노력은 항상 실패로 귀결되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때가 이르렀을 때, 잠깐의 평화는 사라지고 모든 보호막은 거둬지리라. 산달폰은 이것을 예언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브리튼 제국과 크리스토프의 후손들이 지나치게 이례적인 반례들이지, 곧 원래의 관성대로 돌아갈 것이다. 다음 세대에 일어날 세상은 또다시 유대인들을 잡아먹을 것이다.

 

 

“알렉.”

 

 

“네.”

 

 

“당신에게는 많은 신세를 졌어요. 서운함도 들겠지만, 우리의 처지를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감사의 뜻으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가르쳐드릴게요.”

 

 

산달폰은 시무룩한 얼굴로 축 가라앉은 알렉시스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이건 당신에게는 큰 도움이 될 힌트일 겁니다.”

 

 

문득 알렉시스는 13년 전의 일에 대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때도 산달폰과의 만남이 있었고 자신의 속에서 기묘한 개혁이 발생하였다. 명확히 이성적으로 표현하기 힘든 변동이. 그것이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알렉시스의 궤적을 십년 동안 극적으로 변화시켰고 끝내는 예상치 못한 결실로 열매를 맺었다.

 

 

산달폰은 의도적으로 그 일을 일으켰던 것일까? 알렉시스의 직감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는 이번에도 그 같은 일을 의도하는 중인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분명 당신도 흥미가 동할 겁니다. 아니, 반드시 신경써야만 할 일이겠죠.”

 

 

“…….”

 

 

“혹시 알렉, ‘가짜 유대인’들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순간 알렉시스의 자색 눈동자가 반사적으로 팽창하더니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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