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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31회 [2부] 52화. 믿는 유대인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5.26 | 회차평점 0 0

 

 

 

산달폰과의 대화는 석연치 않은 불편감과 부담을 가슴 속에 새겨주었다. 상대가 내준 껄끄러운 숙제를 잠시 뒤로 한 채 알렉시스는 정원에서 휴식 중인 라하토브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다 끝나셨나요, 알렉?”

 

 

“네, 기다리느라 지루하지는 않으셨는지요.”

 

 

“괜찮았어요. 오빠랑 중요한 대화를 나누신 모양이네요.”

 

 

알렉시스의 표정이 조금 무거운 것을 눈치 빠르게 감지한 라하토브.

 

 

“아, 네, 뭐, 그렇고 그런 일들이 있었죠.”

 

 

그는 태연히 능청스럽게 화제의 중점을 옮겼다.

 

 

“오늘도 반가웠어요, 알렉.”

 

 

“저도요.”

 

 

올해 들어 기껏해야 두세 번 정도의 만남뿐이었지만, 그녀와의 약속은 이상하게도 부담이 전혀 없었다. 항상 가족들, 시민들, 친구들 부하들 앞에서 요구를 받듯 브라이틀란트의 황태자로서 완전무결한 모습을 보여야 할 의무도 없다. 대단한 존재로서 능력을 인정받아야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알아보지도 못하니 정체를 들킬 염려도 적다. 그러니 그녀 앞에서는 본연의 약한 면모도 걱정 없이 드러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내면을 속 편하게 드러나겠다는 속셈으로 자신의 정체를 속이는 격이기도 하니 은근한 양심의 찔림도 있었다. 산달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렉시스와 장단을 맞춰줄 생각인 듯하나 이것도 그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것 같아 썩 유쾌치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의 인연을 흘러가는 물처럼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은 유대인인가요?”

 

 

“어머, 그런 뻔한 질문을 물으시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알렉시스가 다소 진지한 어조로 묻자 라하토브는 산뜻한 표정으로 받아주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닌 거 알잖아요.”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셔야 알죠.”

 

 

알렉시스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직설적으로 다가갔다.

 

 

“당신과 산달폰의 어머니가 유대인이기에 당신에게 유전적으로 히브리 정체성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죠. 그걸 물으려는 건 아니예요. 당신 스스로 조상들의 정체성과 그 기초가 되는 언약을 붙잡고 있는지, 그것을 묻고 싶었어요.”

 

 

“아아.”

 

 

유대인을 정의함에 있어서는 유전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자기 스스로 의식하는 언약적 정체성의 요소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사실 유대인 후손들은 후자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냐에 따라 크게 세 가지 갈림길을 걸어간다. 세속에 물들어 완전히 유대인된 정체성을 버리고 일반 이교도 민족 속에 흡수된 자, 조상인 아브라함과 신과의 언약을 굳게 의식하고 그것에 자신의 정체성을 거는 자, 그리고 교회의 일원이 되어 더 우월한 언약인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옮겨타는 자. 쉽게 말해서 유대인으로 남든지, 그리스도인이 되어 유대인의 카테고리를 초월하든지, 아니면 완전히 이교도가 되든지, 셋 중 하나인 셈이다.

 

 

산달폰은 분명 변질되는 길도, 초월하는 길도 택하지 않았고 히브리 정체성에 집착하여 머무는 길을 선택했다. 구원 받기 이전의 다소 사람 사울처럼. 그렇다면 라하토브는 어떠한가.

 

 

“당신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주님으로 모시는 예슈아가 당신네 민족이 그토록 기다려온, 바로 그 메시아라고 생각하십니까?”

 

 

알렉시스의 질문에 라하토브는 잠깐의 침묵으로 생각을 정리한 뒤 답했다.

 

 

“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브리튼 제국의 국가적 정체성은 성경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가치이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은 복음이다. 이미 국가적 차원에서 기독교적인 진리를 전달하는 교육 체계는 오래 전부터 확립된 상태였고, 덕분에 브리튼의 교육 기관의 혜택을 받으면서 양육된 시민이라면 십중팔구는 복음의 내용을 안다. 적어도 지식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라는 국가 헌법적 원리 때문에 그것을 믿도록 강요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와 알 기회는 받는 셈이다. 훗날 신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탓할 수 없도록.

 

 

라하토브는 어린 시절 전쟁을 겪기는 했으나 적어도 전후 시절에는 이런 든든한 영적 지지대를 지닌 브리튼의 사회에서 자라났다. 그러니 그녀도 예수라는 인물을 기독교인들이 메시아로 생각한다는 점은 배워서 알 것이다.

 

 

그녀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르침에 수긍하였다. 진정한 회심의 여부야 하나님께서 아시겠지만, 적어도 지식적으로는 예수의 메시아됨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는 히브리적 정체성을 벗어버리기로 작정한 것일까?

 

 

“라하토브.”

 

 

“네, 알렉.”

 

 

“그렇다면 당신은 유대인으로 머무르지 않기를 택하신 것입니까?”

 

 

“왜 그런 이분법적인 결론을 내리셨을까요?”

 

 

그녀는 편안한 미소로 응수하였다.

 

 

“사실 일반적으로는 그렇잖아요. 스스로의 히브리적 문화 정체성을 고수하는 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인정했던 자들은 나그네가 아닌 브리튼의 시민이 되기로 작정했죠.”

 

 

“꼭 두 길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 건 아니죠.”

 

 

라하토브는 이렇게 고백했다. 자신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아가 예슈아임을 믿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료들과 함께 나그네길을 걷기를 포기한 것도 아니다. 그녀는 비록 브리튼령에 살고는 있었지만 스스로를 히브리 거류민으로 여겼다.

 

 

“옛 언약보다 나은 새 언약에 합류했다면 어째서 옛 언약을 의식하시는거죠?”

 

 

“그렇다면 브리튼 제국의 황제 폐하와 그분의 일족은 어째서 예슈아의 새 언약보다 하위의 언약인 ‘브리튼 언약’을 중요시하시는 것일까요?”

 

 

순간적으로 알렉시스는 뜨끔하였다. 하마터면 동요하여 수상한 기색을 들킨 뻔한 그는 잠잠히 표정을 갈무리하였다.

 

 

“그거야.”

 

 

뭐라고 대답해야 수상하게 느끼지 않을까.

 

 

“언약은 언약이니까요. 분명 우열 관계야 있지만, 열등한 ‘하위 언약’이라고 해서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죠. 그분의 속성은 영원하니 하위 언약 또한 영원성을 가집니다.”

 

 

“맞아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이렇게 답하니 알렉시스도 문득 말문이 막혔다.

 

 

‘아브라함의 언약도 저들에게는 우리 가문의 유산만큼이나 귀한 것일까.’

 

 

지금껏 그는 아브라함 언약과 노아 언약이 그리스도의 새 언약 속으로 흡수되어서 온전히 성취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 해석에도 분명 일리는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아브라함과 노아의 언약이 그 특유의 개별성을 영원히 상실한채 일개 화합물의 한 성분으로 전락한다는 뜻일까. 그리스도인이 됨은 분명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하나의 연합체 속에 합류하는 과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개인의 개성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들이 들자 산달폰과의 대화로 복잡했던 마음이 한켠 가벼워졌다.

 

 

 

 

 

 

 

 

 

 

 

*

 

 

 

 

 

사흘 뒤, 알렉시스는 쌍둥이 황자를 찾아갔다.

 

 

그날도 두 남자는 분주한 일정 중 활동하고 있었다. 프리랜서인 제로스는 개인 저술 작업 및 자료 정리와 연구에 바빴으며, 관료직에 있는 펠렌드로크는 잔뜩 쌓인 서류더미 및 데이터 파일과 씨름하는 중이었다. 각기 다른 곳에서 근무 중이던 황자들에게 한 명의 인간이 동시에 접근했다.

 

 

예고가 없던 노크 소리에 뭔가를 직감한 펠렌드로크는 재빨리 버튼을 눌러 자동문의 잠금을 해제하였다.

 

 

“잠시 시간 좀 낼 수 있을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의 기습 방문에 펠렌드로크는 평소의 차분하던 모습에서 이탈하여 놀란 기색을 얼굴에 띄웠다. 그는 군기가 바짝 든 군인처럼 반사적으로 움직여 손님에게 최대의 예를 표하였다.

 

 

“행차하신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아. 미리 언질을 못해줘서 미안한데, 그저 비공식으로 상의하고 싶은 일들이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가면을 두르고 있던 황태자는 인기척과 감시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얼굴을 드러내었다. 옷 차림은 제복 차림이었으나 군인이나 고위 관료들과 구분하기 어려운, 평범한 무채색에 두드러지는 장식 없는 옷이었다.

 

 

“말씀하시죠, 형님.”

 

 

붉은 빛이 옅게 도는 직모 흑발의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유능한 재상인 젊은이는 황제를 대할 때보다 더 각 잡힌 태도로 자신의 우상이자 왕인 상대를 맞아들였다. 알렉시스도 다른 동생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조금 엄중하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는 잡담 없이 곧장 본론으로 돌입하였다.

 

 

 

 

 

그리고 동일 시각, 또다른 알렉시스도 기습적으로 동생의 방문 앞에 나타났다.

 

 

“들어가도 될까?”

 

 

예고되지 않은 손님의 목소리에 제로스도 깜짝 놀라 작업실 문을 열었다.

 

 

“우와, 형, 무슨 일이야?”

 

 

“급하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어, 으음, 응. 그래, 어서 들어와.”

 

 

평소에 형에게 방문을 받은 적이 적었던지라 제로스도 얼떨떨해 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황급히 손님 대접을 위해 차를 마련하려 하였으나 알렉시스가 먼저 사양하였다.

 

 

“우리 멋쟁이 형님이 동생한테는 무슨 일이실까나.”

 

 

연갈색 머리의 유순한 청년은 어색하게 웃으며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어색함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곧장 자신이 원하는 화제로 돌입하였다.

 

 

“바벨 시티의 에니그마에 대해 또 누구한테 인계해주었지?”

 

 

“어, 음…….”

 

 

갑작스럽게 중대 업무와 관련된 방향으로 대화가 흐르자 제로스는 잠시 머리를 맞은 듯 갈피를 못 잡았으나 이내 집중력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랜슨과 에쉬튼에게는 전수된 모양이고, 또 다른 형제들에게는?”

 

 

“아, 응, 그래, 맞아.”

 

 

잠잠히 질문하는 형님의 어조를 보아 추궁하거나 꾸짖는 느낌은 아니었다. 제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실토하였다.

 

 

“에쉬튼에게는 내가 아는 지식의 대부분을, 그리고 랜슨에게도 몇 주 전에 귀띔을 주었어. 다른 형제들과는 아직 따로 이 주제로 이야기하지 않았어. 하지만 세르빈 형, 유타 형, 엘리어트 형은 아무래도 워쳐들과 접촉한 기색이야. 그러니 일정 부분은 진실의 단서를 접했겠지. 조만간 내게 질문하려 오지 않을까 싶어.”

 

 

“그렇군.”

 

 

“혹시 내가 어떤 내용을 함구하고, 어떤 내용을 인계해주면 될까, 형.”

 

 

최대한 명령에 존중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제로스는 공손하게 형의 눈치를 보았다. 알렉시스는 의외로 태연스럽게 반응하였다.

 

 

“잘해주고 있어. 내 지시가 따로 없이도 알아서 잘 하네. 역시 너다워.”

 

 

알렉시스, 아니 그의 정신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아바타형 인공지능 로봇 단말기는 안락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현재 그것은 뇌파 연동을 통해 본체의 조종을 받고 있었고 정신 연계율이 90% 이상이었다. 즉 제로스와 대화하는 주체는 알렉시스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하드웨어의 차이점은 있기 마련이건만 혈육인 제리조차도 전혀 이상한 기색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뇌파 연동 기술력과 로보틱스의 정점에 이르른 산물이었다.

 

 

“네 자율에 맡기마.”

 

 

“그렇다면?”

 

 

“네가 잘 판단해서 필요한 만큼만 정보를 공유해. 형제들의 성향은 네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누가 이번 사안에 도움이 되고, 누가 문제가 될지 분별은 할 줄 알겠지. 랜슨 쪽과 에쉬튼 쪽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현재 에쉬튼과 중앙정보국은 아랫것들부터 시작해 ‘그들’을 사냥하는 프로세스를 가동 중이다. 랜슨과 그의 군부 동료들은 만일의 경우 발생할 사태에 대비해 진압 작전을 예비 중이었다. 에쉬튼의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적의 심장부가 위기에 처할 경우, 저들은 어떤 방향으로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른다. 또한 그들이 전멸된 이후에도 어떤 급변 사태가 개시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현황이다. 그러니 강력한 군 지휘관이 사전에 준비해둘 필요가 있었다.

 

 

 

 

 

“질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의견을 물어도 좋을까?”

 

 

알렉시스의 제안에 제로스는 다시 한 번 당황했다. 그와 동시에 기대감에 벅차올랐다. 형이 자신에게 의견이나 조언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감동적이고 고무되는 일이었다.

 

 

“너 밖에는 달리 쓸만한 의견을 내줄 사람이 안 보여서 말이지.”

 

 

“무, 무슨 일이길래?”

 

 

긴장감과 기대감이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제로스는 표정을 억제하였다.

 

 

“수상한 자들에 대한 제보를 받아서 말이지.”

 

 

“수상한 자?”

 

 

알렉시스는 산달폰에게서 들었던 중요한 정보, 곧 위장된 가짜들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주었다. 물론 정보원이 누구인지, 어떤 경로로 정보를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은폐하였다. 제로스 입장에서는 서운해하거나 의심할 법도 했으나 형에게서 조언 요청을 받았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큰형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인지, 제로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모든 것을 귀담아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제로스는 대단히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무언가 중요한 시사점을 깨달은 자의 태도였다. 알렉시스는 그것을 관찰하고는 과연 옳은 상담 상대를 지목했다는 확신을 굳혔다. 다른 인간과 달리 제로스는 이런 문제를 논하기에 매우 적절했다. 무한한 상상력과 추리력, 그리고 시대의 본질을 꿰뚫는 자, 신적인 지혜를 갖춘 자. 동생은 분명 이런 면에서 자신과 동류였다.

 

 

“세상에!”

 

 

“진지하게 믿는 모양이네.”

 

 

솔직히 알렉시스는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 모두가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거나 반쯤 음모론으로 느낄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신도 핵심 단서를 소유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했겠지.

 

 

“형.”

 

 

“말해봐.”

 

 

“형 말을 듣고 나니 이제야 뭔가 꺼림직했던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아.”

 

 

“뭐라고?”

 

 

알렉시스의 단말기 인형이 실제 알렉시스의 얼굴 표정을 그대로 만들어내며 찌푸려진 인상을 이마 주름으로 나타내었다.

 

 

“뭔가 짚이던 게 있었던 거야?”

 

 

“그, 그게 말이지.”

 

 

제로스는 한참 망설이며 주위를 둘러보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에돔의 후손들이 유대인 가문 행세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형의 가설, 생각해보니까 소름끼칠 정도로 아귀가 맞아.”

 

 

“어떤 면에서?”

 

 

“구약 성경의 예언서 말이야.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 그리고 에스겔서까지, 어떤 책을 읽어보아도 에돔의 예언과 관련해서는 이해하기 힘든 기묘한 패턴이 있어. 나는 지금까지 성경을 여러 차례 읽으면서 미심쩍은 낌새를 느끼긴 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채 넘기기만 했었어. 그런데…….”

 

 

“자세히 설명해봐. 들어볼게.”

 

 

“응. 예를 들어서 이사야서나 에스겔서의 경우에는 말이지.”

 

 

제로스는 예언서의 전체적인 서술 구조와 맥락을 브리핑하였다.

 

 

이사야서에서는 고대 이스라엘 주변의 여러 이방 나라들, 예컨대 모압이나 암몬이나 시리아나 두로나 바빌론 등의 나라에 대한 심판을 서술한 대목이 있다. 13장부터 23장까지가 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돔에 대한 심판은 조금 다른 부분에 삽입되어 있다. 34장, 그리고 63장. 참고로 이사야서의 24장부터 27장까지는 인류 최후의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28장부터 35장까지도 동일한 테마가 반복적인 패턴을 그리고 제시된다. 즉, 에돔에 관한 34장은 전적으로 인류 종말과 관련된 맥락에 삽입된 부위이다.

 

 

이는 에스겔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에스겔서 25장부터 32장까지는 고대 이방 나라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34장부터 40장까지는 모두 인류 최후의 미래와 그 이후의 그리스도 왕국에 대한 내용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35장에는 에돔의 심판이 삽입되어 있다. 열방에 대한 심판들의 나열이 아닌, 인류 최후의 미래에 대한 대목에 에돔 이야기가 기록된 셈이다.

 

 

마지막으로 이상한 부분은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서 후반부에는 여러 열방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체로는 비슷비슷한 시적 패턴을 공유한다. 그런데 유독 바빌론과 에돔에 대한 예언만은 독특한 형태를 갖는다. 이 두 나라에 대한 예언만은 아무런 소망도 없이 묘사된다. 그리고 바빌론에 대한 대목과 에돔에 대한 대목에만 공유되는 몇 가지 독특한 시적 구절들이 등장한다.

 

 

“예레미야서의 바빌론에 대한 예언은 요한계시록에 거의 그대로 인용되어 재현되고 있어.”

 

 

“그래, 단순히 고대 바빌론에 대한 예언만은 아닐테지. 아마도 인류 마지막 때에 다시 등장할 바빌론에 대한…….”

 

 

바로 그 순간, 예레미야서의 구절들이 머릿속에서 스치듯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러므로 주가 친히 에돔/바빌론을 향하여 세운 계획과 친히 데만/갈데아 사람들의 땅을 향하여 작정한 의도들을 들으라. 양 떼의 가장 작은 자가 반드시 그들을 끌어낼 것이요, 그가 반드시 그들과 및 그들의 처소들을 황폐하게 하리라.

 

 

 

 

 

보라 그가 요르단의 범람한 곳으로부터 사자같이 올라와 강한 자의 처소에 이르리라. 그러나 내가 그들로 하여금 갑자기 그녀를 떠나 달아나게 하리라. 내가 그녀를 다스릴 자로 정하여 택한 자가 누구냐? 누가 나와 같으냐? 누가 내게 때를 정해주겠느냐? 내 앞에 설 그 목자가 누구냐?

 

 

 

 

 

깊은 통찰을 요하는 수수께끼. 그제야 제로스의 말이 이해가 된 알렉시스는 깊이 묵상하며 생각하였다. 동생의 말이 맞다. 과연 산달폰의 증언이 허언이나 음모른이 아니었다.

 

 

‘에돔, 바빌론, 그리고 인류 최후의 종말, 그리고 바벨 시티의 에니그마.’

 

 

신의 섭리가 완벽하게 다 이해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흐릿한 안개 너머로 실루엣이 보이듯 어렴풋하게는 진리의 파편들이 감지되었다. 복잡했던 퍼즐들의 아귀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그랬군.”

 

 

오바댜의 예언서에는 이스라엘과 에돔의 오랜 앙숙 관계와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예언이 담겨 있다. 만일 그 예언도 다른 대언서들과 같이 인류 최후의 미래와도 연관이 있다면? 그렇다면 맨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의 후손들과 에돔의 후손 사이에서 어떤 중대한 갈등이 일어나리라는 가설에 힘을 보탤 수 있지 않을까?

 

 

지금껏 통념적으로 에돔 민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실종되었노라고 생각되어져 왔다. 그것이 어쩌면 지나친 간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마지막 때에 이르러 매우 중요한 주연 악역 배우를 맡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가까워진 지금, 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으리라.

 

 

“크리스토프 대제와 그 아들이 남긴 일기에는 ‘바빌론과 에돔과 두로의 후손’이라는 어구가 나오지. 우리는 그간 ‘그들’을 지칭할 때 그 표현을 관용어처럼 사용하곤 했어. 그 의미를 정확하 알지도 못한채, 그저 영적인 상징이리라고 지레짐작하며 넘겨짚었지.”

 

 

알렉시스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우리가 틀렸군. 그분들은 대언자들의 조언과 성령으로부터 온 조명으로 장래의 일에 대해 뭔가 단서를 깨달으셨던 것이었군.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셨겠지만.”

 

 

그리고 세월이 흘러 마침내 그 예언적 암시의 진정한 뜻이 훤히 벌거벗겨져 드러났다. 단서를 모두 모은 지금, 알렉시스로서는 앉아서 얌전히 당해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최선을 다해 행동해야 한다. 설령 그의 계획이 너무 성공적으로 진행된 나머지 성경 예언에 계시된 악역 배우들이 모두 조기에 퇴장해 사라져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같은 시각, 펠렌드로크와 대화를 마친 알렉시스의 단말기는.

 

 

“그렇군. 너의 원래 계획은 그것이었던건가?”

 

 

동생이 마음속에 꾀하던 바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아내게 되었다. 펠렌드로크는 이미 이전부터 유대인 유력 가문들을 향해 감시의 끈을 팽팽히 조이고 있었다. 이미 암부 조직을 양산하여 여러 첩자를 그들 사이에 심어넣었고, 주기적으로 책략을 세워 그들을 내부에서 흔들고 있었으며, 이간질을 비롯해 여러 술수를 준비하여 여차하면 그들을 붕괴케 하거나 함정에 빠트릴 계획도 세우던 차였다.

 

 

황자가 이러한 안배들을 해둔 목적은 알렉시스의 목적과는 달랐다. 애초에 펠렌드로크는 황실이 유대인들을 감싸고 도는 것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겨왔다. 여차하면 유대인들의 지저분한 실상과 위선적인 실체를 폭로하여 그들이 보호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드러낼 마음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감시의 눈은 유대인 후예 가운데서도 가장 악랄하고 양심이 없는 유력 가문들을 향하고 있었다. 만일 황실의 이념적 유산이 없었더라면 그는 진작 권모술수를 통해 그들을 함정에 넣었으리라.

 

 

당연히 펠렌드로크는 그 유대인 가문들이 실상은 위장된 가짜라는 사실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알렉시스는 바로 이러한 동생의 오해를 그대로 내버려둘 생각이었다. 제로스처럼 신실하고 영특한 자와는 진리의 비밀을 공유할 수 있겠지만, 펠렌드로크처럼 속내를 알기 어려운 영악한 자와는 패를 숨기는 치밀한 눈치 싸움을 벌여야 한다. 동생들의 각기 다른 개성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응용할 줄 아는 알렉시스였다.

 

 

“네가 정 계략을 꾸미기 원한다면 내가 조언을 주도록 하지. 대신 내가 제안하는 방식대로 해줬으면 좋겠네.”

 

 

알렉시스는 동생을 만류하거나 책망하는 대신, 그의 사상에 어느 정도 동조해주는 듯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는 그를 안정적으로 제어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내가 조언해준대로 접근한다면 어렵지 않게 그들의 추악한 치부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을거야.”

 

 

황태자는 몇 가지 중요한 책략을 일러주고 주의할 사항을 당부한 뒤, 수고하라는 의미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펠렌드로크는 잠잠히 형님의 분부에 복종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기대할게.”

 

 

 

 

 

두 동생과의 접촉을 통해 에돔에 관한 중요 정보를 모두 확보한 알렉시스는 여유로운 자태로 본체를 잠에서 일으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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