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87회 [2부] 외전 3화. 제리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0.07 | 회차평점 0
|
휴식을 만끽하는 중 세일린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같은 날 태어난 아이들인데 저토록 다를까? 자기 배 아파서 낳은 아이들이지만 여러모로 미스터리였다. 오늘 명절을 맞아 두 쌍둥이 아들이 자신의 별장에 봉양 차 찾아왔는데 두 아들의 모습을 보니 전부터 늘 간직하던 궁금증이 더 증폭되었다.
외관으로는 둘 다 일품 중의 일품이었다.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고 사람들뿐 아니라 AI들도 여러 현존 남성의 얼굴로 미남 선발을 하면 이 아이들은 항상 열 손가락 안에 들곤 했다. 나머지 손가락들도 다른 황자들로 채워진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지만.
다만 매력의 방향성, 성정, 장단점은 그야말로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한없이 순수하고 맑고 햇살 같은 자유분방한 쾌남이 제로스라면, 그 쌍둥이인 펠렌드로크는 한없이 냉철하고 이지적이며 얼음 수정처럼 고고하고 잘 재단된 규격의 반듯한 남자였다. 마치 비유하자면 애교가 많고 꼬리를 살랑이는 골든레트리버와 야성의 늑대 우두머리를 비교해 보는 느낌과도 같았다.
아무래도 세일린이나 남편 알폰스의 입장에서는 제로스 쪽에 더 애정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일단 신앙심에 있어서도 더 열정적이고 순수하며 올곧은 아이니까.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의 유익함을 볼 때, 특별히 황제로서 판단하기에 나라에 크게 유익이 되는 쪽은 펠렌드로크였다. 그는 일에 있어서 유능했고 공적 기관들과 민간 기관들의 공통된 발전에 수없이 많은 유익한 업적을 남겼다.
두 아이의 공통점을 그나마 찾으라면 자기들의 우두머리인 이복형에 대한 애착이었는데 이마저도 방향성은 크게 달랐다. 제로스가 말 그대로 강아지가 주인을 반기듯 알렉시스에게 귀여움을 받는다면, 펠렌드로크는 사냥개가 주인의 충복이 되어 신임받는 것과 같았다.
그날은 유독 제로스가 기분이 들뜬 날이었다. 어머니를 맞이한 그는 최근 자신과 큰형 사이에서 있었던 여러 긍정적인 진전을 자랑스레 떠들어댔다. 단순한 근황에 대한 사담을 마치 커다란 업적을 이뤄낸 것마냥 그는 기뻐했다.
세일린에게도 이것은 좋은 징조였다. 자신의 아들들과 양아들 사이의 남은 장벽이 모두 허물어진 것 같아 감사함이 들었다. 이와 같이 다른 양아들들도 그녀의 친자식들과 하나가 되어 어우러질 수 있겠지. 아직 숙제가 더 남긴 했으나 그녀는 거기까지 기꺼이 기대하였다.
“알렉 형이 저한테 이번에 새로 가르쳐준 게 뭔 줄 아세요, 엄마?”
“알려주려무나.”
“그게 말이죠.”
쉴 새 없이 촐랑거리며 떠들어대는 쌍둥이 형제의 열 띤 모습을 펠렌드로크는 한 치의 기쁨도 없이 냉랭하게 주시하였다. 거슬리는군. 왜 거슬리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자신도 파악되지 않는다. 형제 간의 우애가 깊어지는 것이 결코 실리 면에서 나쁜 것은 아닐 텐데. 이게 설마 시기심이라는 건가? 늘 합리적인 펠렌드로크는 자신에게 이런 치졸한 부분이 존재함을 별로 용인하고픈 생각이 없었다.
제로스는 이런 형제의 미묘한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눈치챘기에 더욱 약 올리려는 의도인지, 이렇게 도발했다.
“부러운 모양이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시치미 떼긴.”
제로스는 형제에게 권면했다. 큰형과 더 가까워지고 싶거든 정직함을 바탕으로 좋은 유대의 기초를 건설해 보라며. 이것이야말로 펠렌드로크에게는 치명적인 역린이 되었다. 알렉시스를 숭상하는 그의 방식에 결여된 요소를 단 하나 들라면 그것은 바로 정직성과 투명성이었다. 언제나 그는 은밀한 악역을 자처했고 알렉시스를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손을 더럽혔다.
제로스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과 형이 공유하게 된 여러 즐거운 일상들을 자랑했다. 식사도 같이 나누고 휴일에 같이 약속도 잡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체험들이 있었다. 철벽처럼 흔들림이 없던 펠렌드로크도 이런 유치하면서도 효과적인 도발이 거듭되자 조금씩 심기가 거슬렸다.
“네가 즐겁다니 다행이군. 축하한다, 제로스.”
더 맞대응해 주기 피곤하다고 생각한 펠렌드로크.
“하지만 형님께도 그런 식으로 너무 피곤하게 굴진 말아라.”
“내가 뭘.”
“네 촐랑거림에 어울려주시느라 형님께서 귀한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소진하실까 염려된다는 뜻이었다. 자유로운 너와 달리 이 나라와 인류를 위해 위대한 일들을 수없이 맡으신 분이다. 부디 네가 민폐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군.”
날카로운 쏘아붙임에 토라진 제로스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괜히 심술이나 부리긴. 한편으로는 혹시 정말로 자신이 알렉시스에게 민폐가 된 것은 아닌지 걱정도 들어 불편했다. 기우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너도 곧 결혼하니 형님께는 적당히 달라붙고 네 가정에 더 집중하는 편이 좋을 거다.”
펠렌드로크는 형제에게 한 가지를 상기시켰다. 그 말대로 제로스에게는 몇 년을 교제한 좋은 애인이 있었다. 내란 종결 후 8개월째가 되는 때에 두 사람의 결혼식이 예약된 상태였다.
“알고 있어.”
약혼녀인 제시카는 제로스에게는 매우 귀중한 인연이었다. 성정도 비슷하고 믿음의 방향성도 비슷한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가장 적합한 짝이었다. 어머니 세일린도 이런 점을 눈여겨보았기에 제시카에게 든든한 배경이 없음에도 기꺼이 아들의 행복을 위해 그녀를 수용하였다.
‘하지만 그 충고는 네게도 적용했으면 좋겠네, 형제.’
제로스는 말없이 펠렌드로크의 가정을 생각하였다. 쇼윈도 부부인지 뭔지 언제나 펠렌드로크와 클라린스 부부 사이에는 미묘한 냉랭함이 감돌았다. 나름 부부의 의무에는 충실하다라고 본인들이 증언하긴 하는데 영 미덥지 못했다. 허우대만 보면 건장한 냉미남에 매혹적인 미녀로 최고의 근사한 조합이긴 하다만, 브라이틀란트 가문의 문화에 잘 어울리는 가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난 제시한테 더 잘 해줘야지.’
어쨌건 중요한 건 형과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도록 모두가 자기의 터를 잘 닦는 것이리라. 그렇게 해야 진정한 의미의 자립도 완성될 테고 형님도 동생들 염려 없이 이제는 정말 자기 행복에 집중하시겠지.
*
브라이틀란트 가(家)에는 여러 전통과 풍습이 존재하는데 그 가운데는 입양과 관련하여 중요한 요소인 세신식(洗身式)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을 때 그분께서 겸손과 사랑을 본보이고자 제자들을 섬기셨고 그 표현으로 그들의 발을 손수 씻기셨다. 이를 본받아 여러 기독교 기관들은 세족식을 통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기는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다. 많은 경우에는 낡은 형식뿐인 관습으로 고착화되긴 했지만.
브리튼 황가에도 이와 비슷한 의식이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아예 발만이 아니라 몸 전체에 대한 씻김이었다. 오로지 가족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전통이며 오로지 입양아, 그것도 황실 직계의 입양에 대해서만 적용된다. 내용 자체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황제 혹은 황태자, 즉 ‘더 크라이스토브 브라이틀란트’의 칭호를 소유한 자가 어떤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취하고자 할 때 그는 몇 가지 영적 법칙을 준수해야 한다.
입양하는 당사자는 영구적으로 그 아이를 자신의 몸에서 나온 일부로 받아들일 것을 하나님 앞에 서약해야 하며 마음속으로 이를 수용해야 한다. 이것은 아버지의 의지를 상징하는 모형이었다.
그리고 입양하는 자의 맏이, 곧 다음 세대의 ‘더 크라이스토브 브라이틀란트’는 자신이 이 아우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모종의 희생을 치를 것을 인지하고 자유의지로 감내해야 한다. 만일 그 희생이 싫다면 거절할 수도 있으며 이 경우에는 부모님의 의지가 있다고 해도 입양은 성립될 수 없다.
희생을 기꺼이 용인한다는 뜻으로 맏이는 행동 차원에서 서약을 표현해야 한다. 먼저 태도 측면에서는 아이를 자기 친동생처럼 맞이하고 대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희생 대가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친밀감을 훼방하는 벽을 허물고자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와 식탁을 같이하며 어린 시절에는 잠자리에 들 때 곁에서 지켜주기도 한다.
세신식도 그중 하나였다. 쉽게 말해서 큰 형제로서 연약한 유아인 아이의 목욕을 도와주는 것으로 황실 밖의 보통 서민 집안 형제 사이에서는 특별하게 우애가 나쁘지 않은 한 종종 일상처럼 이뤄지기도 하는 일이다. 다만 황실의 경우에는 이것이 일종의 ‘정결례’로서 적용되는 측면이 있었다. 단순히 아이를 목욕시켜 주는 것을 넘어 일종의 ‘세례’와 비슷한 것을 베푸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물론 기독교적인 진정한 ‘침례’와는 의미 면에서 무관했다. 단지 이를 모방한 가문의 풍습으로 신앙적 차원에까지 적용될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뜻깊은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사실 그리 부담스럽고 무거운 의식은 아니었다. 그저 형으로서 아이를 자신들의 가문에 직접 품어주겠다는 따스함의 표현일 뿐이다. 게다가 입양되는 나이가 보통은 열 살 미만이니, 어린아이로서 어른스러운 보살핌이나 유대의 정서가 필요한 때가 아니겠는가. 실제로 가문의 높은 벽을 무서워하던 입양아들도 세신식 후에는 정서적인 장벽이 많이 허물어지곤 했다.
그리고 사실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여기에는 실제적인 효력도 존재했다. 일례로 황자 에쉬튼에 걸린 각종 헥스(Hex)가 소멸한 것도 바로 이때 벌어진 일이었다. 브리튼 직계 가주의 가정에서는 언약이 집안의 기틀을 이루니 세신식도 그 연장선의 일부로서 언약의 효력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알렉은 원래부터 동생들을 친밀하게 가까이 두던 성향이기에 이런 의식에 부담을 느끼지도 않았고 딱히 엄중한 의무감 아래에서 행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린 동생들을 잘 보살피려는 그의 소원에 모순되는 부분이 없어서 행할 뿐이었다.
입양된 동생들을 처음 맞을 때 그는 그들을 깨끗이 씻겨주었다. 황후의 아이들의 경우 황제의 친자식들이기는 했지만 황태자의 친동생은 아니기에 조금 애매한 위치였다. 소년 시절의 알렉시스는 이런 애매함을 허물고자 했다. 그는 나머지 남동생들에게도 동일한 일을 해주었다.
하지만 제리는 제외되었다. 그의 경우에는 황제의 친아들이니 굳이 세신식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에 옅게나마 서운함이 남긴 했다.
“그게 그렇게 서운했었구나.”
알렉시스는 소년 시절을 회상하며 미안해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주일을 마치고 업무에 복귀하기 전, 그는 황궁 내의 온천에서 동생 제리와 몸을 녹이는 중이었다. 이곳에 제리와 같이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남동생들과는 정결례를 거친 이유인지 종종 같이 목욕도 가곤 했었는데. 그간 여러모로 자신이 제리를 은근히 소외시켰음을 체감했다.
“넌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데 말이야.”
“집안 관습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나도 형이랑 더 빨리 친해지고 싶었거든.”
때를 놓친 것이 아쉽기는 했다. 지금은 이미 둘 다 커다란 성인이 되었다.
“차별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내가 널 대하기가 너무 어색해서…….”
지은 죄가 있던 알렉시스는 말꼬리를 흐렸다.
“너한테 질투심이나 품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고.”
“괜찮아, 형.”
제리는 호쾌히 형의 넓고 단단한 어깨 근육을 툭툭 손으로 두드렸다.
“지금이라도 날 형의 울타리 안에 넣어줬잖아.”
“넌 언제나 내 울타리 안에 있었어.”
“알아.”
제리는 늘 더 가까이 다가가길 소원했지만, 그것이 욕심이라고 여기며 늘 자신을 누르며 자성했다. 형이 평소에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누림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자신의 분수를 알고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전에 소원하고 기도하던 바가 자신에게 허락되었다. 그래서인지 요새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곧 사랑하는 애인과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도 그렇고, 존경하는 형이 손수 친구가 되어준 것도 그렇고. 더불어 황실의 오랜 원수들까지 뿌리 뽑혀 방해물이 사라졌으니, 꽃길을 걷는 일만 남았지.
“우와, 형, 그런데 나 비결 좀 알려줘.”
그는 감탄하는 눈으로 형의 눈을 바라보았다. 알렉시스는 난처해하면서도 동생의 순진무구한 귀여운 눈초리에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무, 무슨 비결?”
“형처럼 되려면 얼마나 열심히 운동해야 돼?”
“아, 아아.”
이해했다. 사내들은 다 사내라고 강한 육체를 동경하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알렉시스는 칭찬 아닌 칭찬에 고개를 돌리며 딴청으로 어색한 감정을 숨겼다.
“랜슨도 진짜 무지무지 굉장한데, 형도 만만치 않다. 아니, 랜슨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아. 젊음을 그대로 유지한 채 수십 년을 수련해도 이렇게는 안 되겠지.”
탈인간급의 단련된 육체. 그러면서도 완벽한 조형미를 유지하는 압축된 형태. 동생으로서 한없이 부럽고 동경할 만했다.
“너무 애써서 운동할 것 없어, 제리.”
알렉시스는 머쓱함을 꾹 참으며 동생의 머리에 툭 손을 얹었다.
“지금 네 수준이면 딱 보기 좋아.”
달래주기 위한 빈말은 아니었다. 제로스도 역시 건장하게 잘 단련된 남성이었다. 키도 골격도 크고 우수한 데다가 꾸준히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겉으로 보나 실제로나 매우 건강했다. 그래도 역시 동생들이란 형을 멋진 롤모델로 보고 선망하는 법이다.
“게다가 넌 랜슨처럼 군인도 아니니 몸 쓸 일도 별로 없잖아.”
“랜슨이 아니라 형이라서 더 멋있는걸. 걔는 그냥 근육 덩어리고 형은 정말 영웅다운 느낌이랄까.”
“자식, 쓸데없이 추켜세워주긴.”
알렉시스는 실소를 흘렸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
이전회
186회 [2부] 외전 2화. 제리 (2) |
다음회
188회 [2부] 외전 4화. 제리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