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75회 친구들이 거하는 세상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0.07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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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세 개의 바벨탑이 동시에 소멸하였다. 봉인을 위한 포위진을 지키던 헌터들은 더 수고할 필요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바벨탑의 터가 놓였던 잔해를 향하여 모여들었다.
신경 쓸 것들이 몹시 많았다. 우선 연구 샘플의 확보가 필요했다. 헬게이트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많은 데이터와 정보가 담긴 바벨탑이니 추후의 헬게이트 사태 대응을 위해 철저한 조사는 필수였다. 아울러 헌터웨폰을 강화하는 데에 필요한 자원들의 확보는 덤이었다. 박제된 헬게이트 부산물들은 블랙스미스 계열의 헌터들의 손을 거쳐 더 고차원적인 웨폰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하기 마련이다.
‘특히나 이것은 안전하게 잘 챙겨야겠군.’
탑에서 내려온 공략대는 곧바로 라이텔바흐의 물건에 대한 처리부터 시작했다. 그는 100층의 주인을 잡으러 가기 전에 구르상을 다시 동료들에게 맡겼었다. 이는 담무스와 세미라미스를 직접 찌르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을 송두리째 갈아 흡수하는 바람에 구르상의 오염도가 높아진 탓이었다. 충분한 정화를 거치면 더 강한 검으로 강화될 밑바탕이 되겠지만 당장은 쓰기 어려웠다.
공략대를 축하하기 위해 외곽에서 봉인진 포위에 참여하던 헌터들과 기타 지원군 헌터들이 맞아주었다. 그들은 지치고 다친 150명의 대원이 곧바로 정결례를 치를 수 있도록 엘릭서를 준비해 주었다. 임시 막사에 마련된 목욕물에 몸을 맡긴 그들은 몸이 치유되고 정화될 때까지 기다렸다.
아울러 라이텔바흐의 히든카드인 구르상은 다시 파츠 형태로 분리되었고 각각 고농도의 엘릭서가 담긴 캡슐 안에 담겼다. 정제 과정을 거치면 모든 헬게이트 오염물이 제거될 것이고, 그것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무기의 안티-게이팅 파워 탑재 용량은 더욱 증폭되리라.
다행히 지난번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과 같은 사태의 조짐은 없었다. 헌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겹겹이 감시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바벨탑의 위용 때문에 그것이 무너진 뒤에도 무서워서 움츠러든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했다. 세계 정부와 그 하수인들은 사특하고 간교하지만 그만큼 비겁하고, 겁쟁이였다. 헌터들과는 달리 소인배들이 잔뜩 모인 집단이다. 그런 가찮은 이들의 눈치를 여전히 보아야 하는 지금의 현실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라이텔바흐 협회장님께서는?”
흑재규어의 부관 노릇을 하는 서재석 길드장이 귀환자들에게 질문했다.
“단신으로 100층에 돌입했다. 탑이 붕괴한 것으로 보아 공략은 무사히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군.”
“생환 여부에 관해 묻고 있습니다.”
서재석은 라파엘 협회장의 무성의한 대답에 냉담하게 받아쳤다. 탑이 무너지는 것과 공략 대원이 생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니까.
“나 참, 설마 그 인간에 대해서 못 믿는 건가? 저 탑보다 몇천 배는 위험한 곳에 던져도 멀쩡히 살아 돌아올 인간이다.”
라파엘은 과장을 섞어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사실 탑 공략에 실제로 참여했기에 저곳의 난이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깥에서만 관측했던 다른 헌터들로서는 그 난이도의 상대성을 제대로 가늠하긴 어려웠겠지. 일단 이 탑들은 하나하나가 이전에 등장했던 SSS 급 헬게이트 던전들 이상의 위험도로 책정된 곳들이었다. 실제로도 그 정도는 되겠지만 라이텔바흐가 최근에 성장한 점을 고려하면 피부로 느껴지는 위험도는 오히려 SSS 급 헬게이트들보다 낮았다.
‘물론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그 인간이 결국 다 한 일이었지.’
다만, 무리 없이 끝났던 서쪽과 남쪽의 탑과는 달리 동쪽의 탑은 확실히 예상외의 변수들이 많았다. 일단 세미라미스와 담무스가 반란을 일으켜 탑의 주인보다도 거대한 전력을 확보했다는 점도 그렇고,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라이텔바흐가 오의(奧義)를 써야 했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SSS 급 헬게이트를 잡을 때도 그 비기는 아껴두어도 되었었다.
물론 소문에 의하면 메인주 쪽이 아닌 다른 곳의 SSS 급 헬게이트를 진압할 때는 그 오의의 원시형에 해당하는 기술을 연습 삼아 썼더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헬게이트 자체가 위협이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헬게이트의 경우에는 다른 모든 면에서는 메인주의 헬게이트보다 뒤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위험도가 오히려 더 높게 상정된 이유는 단 하나, 그 헬게이트가 만들어낸 유일무이의 걸작 때문이었다. ‘그 어비씨언’, 아니 어비씨언이라는 카테고리를 끝내 탈피하고 진화해 버린 괴이체. 라이텔바흐조차도 그 끝없이 자체 진화하는 괴물을 상대로는 쉽지 않았는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했었다.
‘탑의 주인들도 그만큼 강했으려나?’
아직 북쪽에는 바벨탑이 하나 남아 있다. 남은 세 탑이 없어진 탓에 부활의 기능은 잃었겠지만 그래도 침식력은 여전하다. 인류로서 크게 한숨 돌린 것은 맞지만 여전히 라이텔바흐의 전투력은 필요하다. 나머지 헌터들로서는 탑을 잠시 포위하는 것까지는 가능하겠지만 탑을 공략하는 건 라이텔바흐 없이는 불가능하다.
“돌아왔다.”
걱정이 무색하게 몇 시간 되지 않아 라이텔바흐는 지상에 착륙했다. 반파되기는 했어도 하의 쪽 슈트에 비상 부유(浮游) 기능이 있었다. 덕분에 그는 바벨탑과 그 부속 헬게이트들이 소멸하여 자연법칙이 복구된 와중에도 추락하지 않고 낙하산을 탄 채 안전히 내려왔다. 세계 정부의 무인 군대도 이번에는 코빼기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혹여 그들이 또 그를 사냥하려 하진 않을지 우려했던 헌터들은 마침내 안도하였다.
“엘릭서 준비를 부탁하네, 서 길드장.”
“네, 협회장님. 다른 대원들은 이미 정결례를 마무리하신 상태입니다. 탑 공략에 사용되었던 물건들도 정화 중입니다.”
“다행이군, 로라 선생님이랑 같이 개발한 최신형 엘릭서 시리즈들이 효력이 좋은 모양이야. 잘만 하면 보편화해서 민간 시장도 점유할 수 있겠어.”
“네, 헬게이트 오염을 즉각 해결하는 장치는 수요가 상당하니까요.”
라이텔바흐는 오염된 의복을 모두 관리팀에 건넨 뒤에 엘릭서가 농축된 목욕물에 몸을 맡겼다. 아마 자신은 99층과 100층의 주인의 파생물을 직접 몸으로 받아냈으니, 남들보다 정화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상처야 나노봇의 도움으로 빠르게 재생될 테니 문제가 없겠지만 오염의 여파는 며칠 이상 남을 듯하다. 특히 다크포스의 경우는 향취가 지워지는 데 여러 주는 걸리겠지.
몸을 안락이 녹이는 와중에 그는 잠잠이 여러 가지 사색에 잠겼다.
‘확실히 플레먼의 말이 옳게 증명되었다.’
지난번에 레기온에게서 플레먼이 들은 말에 의하면, 플레먼은 다른 면역자들과 구분되는 특성을 지녔다. 그리고 그 특성은 그와의 친밀한 유대를 통해서 다른 면역자에게도 전이될 수 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무렵, 이미 어니스트 마이런, 쥬오디아, 신티까지 총 세 명은 그 특성에 전염되었다. 이 특성에 전염된 사람의 총 명수를 가리켜 ‘자유도(Degree of Freedom)’라고 정의하는 데 유사-심연들은 바로 이 자유도에 따라 모종의 변칙 현상을 낳을 수 있다.
라이텔바흐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플레먼을 더 많은 면역자의 집단에 던져넣기로 작정했다. 그는 세계 곳곳에 흩어진 채 헌터들에 의해 감시되던 면역자들을 일부러 불러 모았다. 그들의 총수는 약 1만 명가량인데, 그는 이들을 약 백 명씩 나눠서 백 개의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그는 플레먼 역시 백여 명으로 된 면역자 그룹에 넣었다. 그들은 현재 헌터들이 마련한 하나의 건물 안에서 생활하는 중인데 그 안에는 그들을 위한 개인 숙소도, 모임 장소도, 심지어는 직장과 작업실도 마련되어 있었다.
면역자들은 이렇게 구성된 공동체 생활에 상당히 만족하는 것으로 보였다. 역시 라이텔바흐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공통 분모가 존재함이 분명했다.
플레먼은 어떨까? 그에게도 새로운 삶이 만족스러울까?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을 이웃으로 맞이하면 오랫동안 외로워하던 그에게도 나름의 기쁨이 되겠지.
한편으로는 그를 원래 그가 살던 호주보다 더 위험한 곳으로 인도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헌터들의 비호가 있다고는 해도 북미는 호주보다는 세계 정부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더욱이 면역자들이 여럿 모였으니, 그들을 어떤 연유에선가 감시하는 세계 정부 측에서는 더욱 선명하게 낌새를 맡을 것이다. 이기적인 것은 알지만, 사실 라이텔바흐가 면역자들을 더 노골적으로 공동체 안에 모아둔 이유에는 세계 정부 측을 격동하고 유인하여 그들의 정보를 더 캐내기 위함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라이텔바흐가 플레먼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불편함은 더욱 증폭되었다.
‘게다가 사실상 나는 이로써 그를 내 뜻대로 이용했다.’
라이텔바흐가 면역자들을 미끼 삼아 조종하고자 한 대상에는 세계 정부만 포함된 것은 아니다. 헬게이트들과 그들을 낳는 차원 너머의 어미들도 해당한다. 그는 레기온을 비롯한 네 개의 이변이 동시에 탄생하던 날 어렴풋이 깨달았다. 무언가 헬게이트들의 준동을 유발할 수 있는 변수가 인간 측에 존재함을. 플레먼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변수의 정체가 면역자들이며, 더 정확히는 플레먼과 인연을 맺어 특성을 전이 받은 면역자들임을 알게 되었다.
만일 그런 특성을 얻은 면역자가 4명이 아니라 100명이 된다면? 자유도가 4에서 100으로 증가한다면 어떤 혼란이 빚어질까?
라이텔바흐가 바란 바가 ‘혼란’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더 많은 사태를 일으켜 인류를 위험에 빠트리고 이로써 자신의 입지를 키워 세계 정부를 뒤엎을 밑바탕을 얻으려는 목적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헬게이트를 영구적으로 소멸할 해법을 찾아내기를 원했다. 아무리 자신과 헌터들의 활약으로 그 위세가 위축되었고 힘을 많이 잃었다지만, 간헐적으로 헬게이트 생성이 거듭된다면 인류는 천 년 만 년 이런 찝찝한 짐 덩어리를 짊어진 채 질척거리는 고통 속에서 신음할 것이다. 이것을 새로운 정상치(New normal)로 정의하여 고착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그때 헬게이트만 해결하는 것은 미봉책이다. 어떻게 해야 헬게이트의 발생을 근원에서부터 끊어 영구적인 해결을 얻을 수 있을꼬. 이 질문이 현재 라이텔바흐의 1번 연구 주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위해서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도박을 생각해야 했다. 라이텔바흐의 머릿속의 이터널셀들은 치밀하게 헬게이트들의 내일을 예견한 끝에 한 가지 도박을 제안해 냈다. 이는 비유컨대 일종의 임상 시험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플레먼이라는 자의 특성을 최대한 유용하게 활용해 보자. 그를 꼭꼭 감춰두는 것이 아니라 되려 여러 면역자와 상호작용을 하도록 하자.
이렇게 할 경우 양날의 검과 같이 두 가지 효과가 발생한다. 하나는 특성 전이로 인해 자유도가 증가하고 유사-심연들이 예측 밖의 준동을 일으킬 확률이 증가한다. 당장은 리스크가 되겠으나 장기적으로는 근치적 치료를 위해서는 꼭 확인해야 할 실험이다.
다른 하나는 면역자들의 자체적인 효력의 중첩이다. 그들에게는 다크포스의 효력이 닿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헬게이트 발생이 이뤄지지 않는다. 만일 이런 효력이 중첩된다면? 그리고 공동체 내부에서의 유대감 생성이 이런 효력의 증폭에 시너지를 더한다면?
라이텔바흐의 가설이 옳다면 이 역시도 실험해 볼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대의명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플레먼이라는 친구가 마음이 걸려 찝찝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탑까지는 어찌어찌 잘 해결했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는?’
앞으로 어떤 시험들이 또 인류에게 허락될지 알지 못한다. 그 모든 책임을 어찌 되었든 당장은 라이텔바흐가 짊어져야 한다. 전에는 인류를 구해낸다는 사명에 별도의 열정이 없었다. 헬게이트를 죽이는 건 그저 심연파괴자로서 자신의 본능이었기에 습관적으로 행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인류 구출에 대한 책임감이 조금이나마 생겼다. 전에는 세계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도 반쯤 복수심에 따라 준비했다면 이제는 정말 보고 싶다. 고통으로 점철되지 않은, 억압의 사슬에서 벗어난 세상이. 그 세상이라고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치우는 게 가능한 저주들이 있다면 그것들부터라도 해제하고 싶다.
‘친구인가?’
이렇게 망가진 세상이라도 이제 그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친구들이 머물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로이 개벽할 세상에 기대감을 느끼는 것도 그 안에 친구들이 거할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세상을 물려줄 수만 있다면 조금 더 고생하며 노력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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