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74회 태양신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0.06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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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먼 에이비슨은 새 거처의 한구석에 마련된 빈 작업실에 앉아 조용히 기타를 매만지며 묵상과 묵념의 시간을 누렸다. 그의 앞에는 작은 정육면체 모양의 상자가 있었다. 보통의 나무 조각 같이 생겼지만, 그 내용물은 월드커넥터 디바이스로 라이텔바흐에게서 직접 우정의 증표로서 받은 선물이었다. 헌터 친구는 일반인 친구에게서 사진 필름을 받았고 일반인 친구는 헌터 친구에게 보답으로 이것을 받았다.
지금도 이 도구는 바깥 세계의 소식을 이념적, 중앙통제적 렌즈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 전해주는 유용한 보물이었다. 언제나 세계 정부의 통제로 인해 이념 편향적이고 선전적인 ‘뒤틀린 정보’만을 뉴스에서 주입 받아야 했던 플레먼에게는 달콤한 해방감이었다.
{속보입니다. 동쪽의 탑, 서쪽의 탑, 남쪽의 탑이 동시에 붕괴를 개시했습니다.}
들려오는 메시지는 마침 호재의 소식이었다. 몇 개월 전에 탑들이라는 또다른 위협들이 세상에 출현했다. 플레먼이 현재 거주 중인 북미 대륙이나 그 인근 남미 대륙에는 다행히 탑이 없었다. 탑이 발생지는 모두 구대륙 쪽으로, 북쪽 탑은 시베리아 북단에, 남쪽 탑은 남아프리카에, 서쪽 탑은 이베리아반도, 동쪽 탑은 중국의 동부에 있었다.
월드커넥터를 통해 전해 받은 정보에 의하면 이 탑들은 F급부터 높게는 S급에 이르기까지 헬게이트들이 합성되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SS급 이상의 위협 레벨 최고위의 헬게이트는 극히 드물게 포함되었지만, 대신 전체 수량이 지나치게 많아 합성 시 강력한 특이점을 이룬다고 하였다.
내버려두면 탑은 헬게이트보다 훨씬 더 강력한 침식력으로 지구 전체를 집어삼킬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런 식의 재난 경고가 하루아침의 일도 아니었던 지라 플레먼이 이 소식들을 들었을 때 그의 생각 속에 젖어 든 감정은 ‘공포심’보다는 ‘매너리즘’에 가까웠다. 또다시 비슷한 일의 시작이구나. 인류는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멸망한다, 멸망한다, 소리를 들으며 여러 지저분한 고비들을 거쳐 왔다. 그때마다 그들을 살아남았고 그럴수록 점점 더 구질구질한 모습이 되었다.
차라리 예수님께서 빨리 다시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환란도 아니면서 대환란을 방불한 고난이 수십 년씩이나 지지부진하게 질질 끌어지니 환멸감이 들 지경이었다. 포위된 예루살렘의 고난을 바라보며 차라리 소돔과 고모라처럼 단번에 불에 탔더라면 좋았겠노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이 떠올랐다 (예레미야애가 4:6)
하지만 그렇게 주님 앞에 기도할 염치도 없었는데 이는 주님 오실 길을 제대로 준비하고 있지 못한 자신들의 현실 때문이었다. 주님은 그분이 다시 오시기 전에 큰 고난을 허락하실 것이라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땅끝까지 복음이 선포되도록 하시겠다고 하셨다. 어찌 된 연유인가. 왜 지금 세상에는 고난은 가득한 데 복음은 전파되고 있지 못한가. 그나마 복음을 알던 경건한 세대는 하나둘씩 끊어지고 있었고 전도의 문은 이미 막힌 지 오래였다. 벼룩은 너무도 오랜 세월을 플라스크 속에서 보낸 나머지 플라스크에서 풀린 뒤에조차도 자신의 원래 점프력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가 그 모양 그 꼴이었다. 플레먼은 자조감에 한숨을 쉬었다.
‘라이텔바흐 씨는 괜찮으실까?’
최근 플레먼의 가장 친한 친구인 어니스트 마이런이 라이텔바흐의 자택에 파견되었다. 플레먼의 부탁으로 이뤄진 일로 라이텔바흐는 플레먼이 내건 이 제안에 흔쾌히 응수하였다. 그가 나름의 다른 동상이몽을 품고서 이것을 허락했는지, 그것은 확실치 않다. 어쨌건 결과론적으로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난 라이텔바흐 씨를 친구라고 받아주었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 없었네.’
어니스트라면 잘해줄 것이다. 생활력 부족한 자신을 언제든 신실하게 돌봐주던 친구이고 무엇보다 사람을 향한 다정함과 사랑이 풍부하니 까칠한 표범 같은 라이텔바흐도 결국 마음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그 사람도 설마 탑 공략에 참여했으려나.’
그와 대화할 기회가 최근 많지 않아서 탑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다. 다른 헌터들이 방문할 때 종종 묻기도 했는데, 그들도 확실하게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 헌터들도 당연히 라이텔바흐라면 이번 사태의 해결자로서 일 순위로 선발되었으리라고 추정하는 바였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인류와 헌터 전체를 위협하는 큰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최선봉에 선 사람은 단연 라이텔바흐였다고 한다.
‘안전하겠지?’
탑이 무너졌다는 뉴스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이것이었다. 만일 그 탑들을 무너뜨린 주역이 있다면 높은 확률로 그 사람이었으리라. 그가 무너져 내리는 탑 안에서 안전하게 나오기를 기도하는 바였다.
“하나님, 라이텔바흐 준장님이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이번 임무를 마무리하도록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어째서인지 최근 플레먼은 다른 이들을 향한 기도가 많아졌다. 전에는 항상 자기연민에 빠져서인지 핍박받는 자신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기도만으로 기도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라이텔바흐를 만난 이후로 그 폭이 조금은 넓어진 것도 같다.
전에는 그리스도 바깥은 다른 사람들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실제로 오랜 시간 세계 정부의 눈과 귀가 되어 형제들과 자매들을 팔아넘겼고 그 결과 많은 성도들이 순교했다. 그래서 플레먼도 그들에게는 마음을 열기가 어려웠다. 그랬거늘 라이텔바흐가 친구가 된 이후로는 조금씩 변화가 임했다. 세상 밖에도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안타까운 영혼들이 많음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한 번쯤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기도에 마음을 쏟아도 되겠지.
플레먼은 기타를 치며 마음속으로 선율을 만들며 즉석에서 작곡하였다. 작가로서의 재능만 아니라 음악적인 재능에서도 그는 탁월했다. 희대의 천재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분명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껏 그것들 세상 앞에서 당당히 주를 위해 쓰지 못했다. 두려움과 움츠러듦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 그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분명한 소망을 담아 자신 앞에서 정직해지고 싶었다. 그의 마음이 정말 오랫동안 소원해 온 바는 자신의 노래와 이야기를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었으니까.
청년은 조용히 기타와 목소리와 마음으로 멜로디를 자아내며 시편들과 신앙의 선배들의 고백 위에 음악을 입혔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조용히 노래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노래했다. 성령의 매만지시는 은혜를 노래했다. 차마 남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부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용맹했던 다니엘과 달리 그는 그 자신도 인정하듯 소인배였다. 그래도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니 마음이 한켠 시원해졌다.
십자가에 죽으심은 어인 일인가.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아를 죽였네.
시를 음미하던 중 이 대목에 이르자 플레먼은 잠시 기타 줄을 멈추고 마음의 묵상을 시작했다. 그에게 주께서 주신 거룩한 부담감이 옅게 임했다. 그는 생각 속의 선율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성경책에 증언된 바에 의하면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사형을 집행했던 이들은 로마의 군병들이었고 그 선고를 내렸던 당사자는 로마의 한 총독이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였고 그분을 은 삼십 세겔에 팔았으며 그분의 재판정에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메시아를 죽인 ‘저 무지한 사람’들이란 누구인가. 유대인들인가, 아니면 로마인들인가. 플레먼은 1세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들을 잠시 주마등처럼 곱씹으며 사색에 잠겼다.
지금의 끔찍한 세상은 ‘초대 총통’의 세계 정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독재자는 자신만의 세계인 ‘3rd Reich’을 선포하였다. 그가 잇고자 했던 정통성의 뿌리를 결국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유럽의 패권자였던 로마 제국이 있다. 예수님을 죽였던 동일한 로마가 다시금 부활하여 오늘날의 예수님의 몸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죽이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어쩌면 다니엘서 7장에서 말한 넷째 짐승의 성취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시기심에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의 후손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역사책에서 이 대목이 의도적으로, 강제로 잘려 나갔기에 플레먼은 알지 못했다. 부모님은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시대의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우리들이란다. 적어도 이전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인식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죽였던 그 육신적 유대인들은 이제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더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리에서 오늘도 예수님을 못 박는 일을 반복하고 있을까?
‘하나님, 오늘도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새로이 소중한 그리스도인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와 그들을, 그리고 어니스트를, 몸에서부터 마음에 이르기까지 지켜주소서.’
차마 죽지 않게 해달라고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오늘날은 헬게이트에 의해서, 세계 정부에 의해서 언제든 봉변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준 디스토피아다. 그런 가운데 정말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만 특혜를 주시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믿음이 너무 추락한 탓에 그런 불신앙의 생각이 가득 찬 것인지도 모르지.
‘그리고 라이텔바흐 씨와 헌터들도, 그들도 긍휼히 여겨주시길 구합니다.’
이렇게 플레먼은 기도를 맺었다.
*
더 썬, 니므롯과 라이텔바흐 벤 키르헤른스트는 수천 합을 나누며 치열한 대격전을 벌였다. 싸움은 어느 한쪽이 밀려나지 않는, 매우 팽팽한 구도로 전개되었다. 종합적인 잠재력과 능력은 라이텔바흐가 우월했으나 그는 많은 힘을 소모한 상태였고 반면에 더 썬은 만전의 상태였다. 이런 식의 페널티가 더해지니 얼추 힘의 균형은 맞았다.
백파와 흑파가 충돌하면서 괴이 이변이 수없이 발생하였다. 원거리 공격과 동시에 근거리 충돌이 연달아 벌어졌고 단 1초의 휴식도 없이 굉음이 연발되었다. 에너지 발생과 격동으로 인해 100층은 수천 번 무너져 내리고 붕괴하였다. 100층 자체의 재생력이 견디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수천 가지 준 오의 급 기술들이 남발되었고 치밀한 수싸움이 거듭되었다. 두 최강급 개체는 힘, 체력, 순발력, 화력, 민첩성과 속도, 경험 등 모든 면에서 동일하게 최정상이었고 지식과 간교함 면에서도 그러하였다.
하지만 결국 근본적인 기량에서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했고 결국 이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이것으로 마무리다.”
라이텔바흐가 마지막으로 기회를 잡고 수십 가지의 정교한 기술들을 조합해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더 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정확하게 가드를 해체하였고 급소에 치명상을 입힌 뒤 확인 사살의 공격을 연발하였다.
-크헉!-
한 끗 차이로 약점을 내준 자의 최후는 불을 보듯 자명했다. 이 같은 정상급 싸움에서는 아주 작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도 승부가 결정되는 법이다. 라이텔바흐의 무수한 검격들이 니므롯의 몸체를 수없이 양단하였다.
콰아아아아앙.
대폭발과 함께 니므롯의 힘줄은 모두 끊어졌다. 패배를 직감한 그는 자폭을 시도하였으나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쓰러진 적을 향해 처형의 일격을 날린 라이텔바흐. 이로써 니므롯 속에 존재하던 헬게이트들은 링길의 특수 기능에 의해 모두 영구적으로 파괴되었다.
-패배를 인정한다. 네 승리다, 인간이여.-
“확실히 너는 강해.”
라이텔바흐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역시 마스크가 부서지고 치열한 격전으로 상의가 찢기고 찢겨 너덜너덜해졌고 상반신은 벗겨진 상태가 되어 있었다. 단단한 근육질 육체 위로 칼에 깊게 베인 상처들이 꽤 많이 보였다. 이번 싸움에서 생긴 상처들이었다. 이미 담무스를 죽일 때 꽤 진행되었던 오염이 니므롯의 검들에 베이면서 더욱 많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녀석’만큼 위협적이지는 않아.”
그의 기억 속에 그 악몽 같은 사악한 존재가 스쳐 갔다. 아직 생사조차 불분명한 과거의 적. 그 존재를 분명하게 찾아내어 확인 사살하기 전에는 편한 마음으로 세계 정부와 대립할 수 없으리라. 그에 비하면 니므롯은 스펙이나 경험은 압도적이어도 악의의 악랄한 면에서는 많이 부족했다.
-크크, 난 이대로 떠나지만, 더욱 강력한 형제들이 창조되어 너희에게 거듭 시련과 환란의 때를 선사할 거다.-
“그렇게 하라지. 몇 번이고 되살아나건 없애줄 테니까.”
-네 힘이라면 확실히 그 어떤 시련도 막아내겠지. 하지만 정말 인간들이 너에게 감사해 줄 것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라진다 한들 그 뒤에는 평화가 오지 않아. 만일 헬게이트들이 소멸한다면 인간은 그다음으로 공동의 적으로 삼을 희생물을 찾을 거다. 그게 과연 누가 되겠는가.-
니므롯은 죽어가면서도 웃으며 말했다.
-바로 네놈이다. 우리가 없어지면 인간들의 공공의 적 노릇은 네가 맡겠지. 결국 네게는 평생 평화도, 기쁨도, 위로도 없을 거다.-
그는 자신을 쓰러트린 적을 향해 마지막 저주를 잠잠이 퍼부었다.
“다 떠들었나? 그만 무(無)로 돌아가라.”
이 말과 동시에 태양신을 자처하던 동쪽 바벨탑의 주인은 장렬히 폭사하였다. 오만함의 상징이었던 오벨리스크 구조물이 무너져 내렸다. 주인의 야망이 꺾임과 동시에 바벨탑의 아성은 해체되었고 지구의 동부는 다시 맑은 대기권을 되찾았다. 라이텔바흐는 다친 몸으로 숨을 고르고 휴식을 취하며 저 멀리 나타난 진짜 하늘 위의 태양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꽤 오래 정결례를 거쳐야겠군.”
이제는 같이 생활하는 룸메이트도 있으니 지저분한 상태로 민폐가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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