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91회 이웃 사랑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1.10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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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텔바흐의 분석안과 연동된 계측 장비는 총 열여덟 개의 좌표를 특정하였다. 해당 자료는 라울, 테무친, 재석이 탑승 중인 칸에도 공유되었다. 라이텔바흐는 날카로운 눈으로 매섭게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이채를 발하던 붉은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욱 선명하게 안광을 발산하였다.
‘랭크는 모두 A랭크 이상, 다행히도 S랭크는 없군. 하지만 일부는 A+나 AA랭크다. 심지어 AAA도 존재할 가능성이 관측되는군.’
곧 나타날 헬게이트들은 주로 구 미국 지역 북부, 캐나다의 서부, 알래스카 일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드문드문 배열된 것으로 보이나 큰 그림을 보면 희한하게도 라이텔바흐가 미리 정해놓았던 여행 경로를 에워두르는 패턴이었다. 어디선가 흘러든 고의성이 다분히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 아주 가깝게 붙어있지는 않아. 개수도 20개 이하. 그렇다면 경로를 방해할 정도는 되지 못해.”
현재 그들이 탑승한 에어크래프트는 기류의 흐름과 로켓 유사 작용을 이용한 공중 비행 장비이다. A급 헬게이트의 여파에 휘말리면 그 기동성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있다. 만약 중심점으로부터 10km 이내의 거리라면 말이다. 만일 헬게이트들이 밀집되어 연합된 전선을 이룬다면 그것들의 영향권이 겹침으로써 하나의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으리라. 천만다행으로 지금 나타난 것들은 그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진전에 조금 방해받을 수는 있겠죠.”
서재석 길드장이 무전을 통해 말했다.
“하지만 돌아서 가는 방식으로 경로를 재설정한다면 우회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동의한다.”
라이텔바흐는 구태여 여기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헬게이트를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헬게이트 쪽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헌터들의 이능은 어디까지나 헬게이트 안에서만 효력을 나타내니까. 그 과정에서 무기도 정비해야 하며 오염의 영향도 신경 써야 하며 뒷정리할 일도 많아진다. 세계 정부 측과의 충돌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라이텔바흐. 명령권은 네게 있다.”
무전으로 테무친이 질문했다.
“아마도 피해서 가는 편이 낫겠지?”
그는 말끝을 흐리며 모호함으로 답변을 덮어씌웠다. 명쾌한 명령조가 아닌, 역으로 질문하는 듯한 어투였다. 우유부단함 때문은 아니었다.
“현재 북미 권역에 S급 헌터들은 주둔하고 있나?”
“현재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일대에 A급 이상의 헬게이트들이 많이 발생한지라 수장님들이 그곳으로 배치를 옮기셨습니다.”
라이텔바흐의 질문에 재석이 답했다.
“흠, 도심 지역 한복판은 아니군.”
라울이 자료를 면밀하게 검토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인 지대는 아니군. 외곽이야.”
피해가 폭발적인 규모로 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지금처럼 예보라는 특혜로 완충하지 못한 돌발 재난이라면 더더욱 치명적일 것이다.
“그래도 빠르게 수장님들께 보고하면 3시간 이내에는 도착하겠지.”
라울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일단 저 지역들 가운데 헌터 세력 측에서 유심히 보고 지켜야 할 장소는 없다. 동맹들이 주둔하는 곳도 아니고, 독립운동가들의 거점도 없으며, 주요 자산이나 기업이 위치한 것도 아니다. 물론 세계 정부 측의 중요 시설도 없다. 피해가 발생한다면 양측과 무관한 순수 민간인들의 피해일 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3시간을 절약하겠다고 고생을 자처하는 것은 수지타산이 많이 맞지는 않는다. 게다가 열여덟 개를 일일이 찾아다니려면 이동 경로도 길어지며 에어크래프트도 손상을 입을 위험이 커진다. 그렇게 소모하는 와중에 결국은 3시간을 넘길 테니 결과론적으로는 극적으로 더 나은 도움을 주지도 못하는 셈이다.
라울뿐만 아니라 재석과 테무친도 같은 의견으로 수렴했다. 일단은 괜한 불길에 휘말리지 않고 여력을 남기는 편이 유익이다. 이 세 기의 운송기에는 꽤 중요한 전략 자산들과 자원들이 많이 탑재되어 있다. 그걸 소모하면 정말 결정적으로 중대한 싸움이 벌어질 때 힘이 많이 빠질 것이다.
“저기, 지금 헬게이트들이 발생한 게 맞는지요?”
머뭇거리던 플레먼이 용기를 내어 곁에 있던 라이텔바흐에게 물었다.
“네, 하지만 치명적인 수준은 아닙니다.”
“S급 헌터들이 필요한 건가요?”
“보통 헌터는 자기 랭크와 같은 알파벳의 헬게이트까지만 침투를 허락받습니다. 그 이상은 오염 자체만으로도 생명에 지장이 있거든요. 하물며 공략은 더 어려운 문제입니다. A랭크의 헬게이트 던전을 함락시키려면 최소한 S랭크 이상의 실력자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많은 지원과 동맹군의 협력이 더해진 상태에서 가능하죠.”
“현재는 북미 지역에 S급 헌터들이 안 계신 모양이네요.”
“공교롭게도요. S급 헌터의 숫자는 3백 명이 안 됩니다. 그중 다수가 협회장인지라 사무적 업무도 맡아야 하죠. 현장에 투입 가능한 전력은 평상시에 30명 미만인데 그마저도 청정 지대가 아닌 치열한 접전 지대에 대부분 투입됩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A급 던전들이 다수 나타나는 것 자체가 원래라면 있어서는 안 될 이변이라고 한다. 플레먼은 이 곤경의 심각성을 조금씩 깨달았다.
“당회장 권한으로 제가 당장 소환할 수 있는 숫자는 열 명 정도, 수장님들께 부탁하면 스무 명 정도는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S급 이상의 헌터라면 이 대륙 내에는 여기 있는 네 명밖에 없을 것이다. SS, SSS급에 더해 무려 EX급까지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숫자상으로는 네 명이다. 라이텔바흐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헬게이트 권역 밖에서는 인간에 불과하기에 그도 많아야 한 번에 한 명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여기저기 지점들이 흩어져있기에 순회하려면 더 긴 시간이 걸린다. 시간을 단축할 방도는 없다. 되려 에어크래프트의 엔진 기능이 저하되어 더 지체될 뿐이다.
‘만약 내가 이번에 얻은 특전 능력을 변수에서 제외한다면 말이지.’
라이텔바흐는 아무에게도 아직 알리지 않은 비밀을 잠잠이 감춰두었다. 아직 그 능력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는 뜻이군요.”
플레먼은 담담히 상황을 인정하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한두 지역 정도에는 도움을 베풀 수도 있겠습니다.”
그도 현실주의를 아예 외면하는 우매한 자는 아니었다. 인간의 여력은 제한되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우 이웃을 구제할 능력자는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바는 그런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그저 자신의 시야 안에 들어온 이웃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분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라고 계명을 말씀하시지 않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리라.
“안타깝지만 우리 수송기들은 저곳에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라이텔바흐는 냉정하게 말했다.
“오염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는 비기들이 많아서요. 게다가 엔진이나 선체가 훼손되면 장차 있을 작전을 해결하는 데 애로사항이 커집니다.”
지극히 차갑지만,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분석. 플레먼은 그 말에 슬픔도 느꼈지만, 지적으로는 동의했다.
“선체 말고 제가 가고 싶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의외의 답변에 라이텔바흐가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이겠죠?”
“헬게이트를 어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생하기 전에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더 달아나게 돕고 싶습니다. 자연재해를 막지는 못해도 도피하도록 사이렌을 울릴 수는 있겠죠. 헌터님들은 앞으로의 싸움을 위해 전력을 아껴야 하니 이곳에 머무르시길.”
묘한 불쾌감이 라이텔바흐의 생각 속에서 뇌를 간질였다.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이건 양심의 가책인가. 혹은 자존심인가. 왜 가장 강한 자신조차 냉정하게 선을 그었는데 저 연약한 일반인은 저런 어처구니없는 도전장을 던질까.
“그래봤자 몇 도시 다니지도 못할 겁니다. 발생 시간까지 40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한 도시면 충분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으로요.”
마침 현 위치에서 수십 km 이내에 헬게이트 발생 예상 지점이 있었다. 플레먼은 그곳으로 이동해 사람들에게 대피령을 전할 생각이었다. 나머지 도시들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힘을 보태야지.
“당신의 수고로 살아날 사람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저도 압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한 명에게만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저는 해보고 싶습니다.”
“당신을 기다려줄 수는 없습니다.”
“네, 만일 하차해야 한다면 아쉽지만, 여정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최대한 많이 사람들을 구한 뒤에 다른 지역에서 헌터님들이 오셔서 일을 해결하면 그 뒤에 그분들의 인도를 따라 숙소로 귀가하겠습니다.”
“하아.”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옹고집은 아니다. 굳은 신념. 그렇다고 플레먼이라는 사람의 성정이 딱딱하고 억센 것도 아니다. 연한 갈대처럼 부드러우며 온유하기 그지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양심에 의거한 신념을 굳히니 더욱 어찌 대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라이텔바흐, 솔직히 말해서 굳이 저 같은 짐짝이 당신의 여정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부탁에 라이텔바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필요가 없다고? 사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전력상으로는 플레먼이 전혀 보탬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곁에서 떼어놓자니 이유 모를 꺼림직함이 들었다.
‘전혀 의미 없는 사람은 아니다. 당신은 특수하니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라이텔바흐의 복잡한 계산 속에는 플레먼이라는 의외의 카드가 생각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세계 정부가 그 곁에서 얼쩡거리기 전에 자신이 온전한 목적에 합당하게 그를 활용하고 싶다. 이런 계산적인 마음이 속 중심 한구석에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플레먼을 이용하려는 마음뿐일까.
양심, 우정, 그리고 부끄러움 같은 감정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맹한 전사들이 비겁하게 손익을 따지며 간교하게 구는 와중에, 가장 약하고 숱한 피해를 겪어온 피해자는 머리로 재지 않고 몸으로 행동하려 한다. 그의 몸에는 누군가를 도우려는 본성적 조건 반사가 깃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난 당신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마음이 불편하군.’
그런 그가 싫지 않다는 게 더 아이러니했다.
“말려도 어쩔 수 없겠죠.”
“죄송합니다.”
“당신의 자유의지이니 하차를 말릴 명분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구금해서 억지로 연행한 것도 아니고요.”
“그런 뜻이 아니라, 친구로서 곁에서 여행을 함께해주지 못해서, 실망시켜서 미안하다는 말이었어요.”
플레먼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소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선명하게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말에 라이텔바흐의 양가감정은 더욱 격한 혼란스러움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변덕스러움은 그와 거리가 먼 단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일어 그의 냉정한 판단력을 마비시켰다.
‘미치겠군.’
한숨을 내쉬며 라이텔바흐는 이마를 짚었다.
“제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생기는군요.”
그는 숨을 고른 뒤 마음을 굳혔다.
“라울 길드장, 테무친 길드장, 서재석 길드장.”
“네.”
“라져.”
“듣고 있다.”
라이텔바흐는 마음속에서 곧장 새로운 작전을 짰다. 충동에서 나온 방향 전환이기는 했으나 조잡한 구상은 아니었다. 새 작전 역시 명민한 두뇌에서 나온,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략이었다.
“작전을 확정한다. A급 던전들을 모두 부수겠다.”
이것은 강한 명령조였다. 그렇기에 의견이 다르다고 해도 세 길드장 모두 아무 반론도 내뱉지 않았다. 그만큼 라이텔바흐에 대한 신뢰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오염 최소화를 위해 한 명씩 나선다. 나, 재석, 라울, 이렇게 셋이서 번갈아가며 솔로 플레이로 침투한다.”
보통의 S급 헌터라면 홀로 A급 헬게이트를 빠르게 함락시키긴 무리이다. 그러나 여기 모인 멤버들은 ‘보통’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서재석마저도 S급 중에서는 가장 강한 축의 헌터이다. 여기에 라이텔바흐의 ‘특수 이능’을 빌린다면?
“충분하겠지?”
“물론입니다.”
“간만에 몸 좀 풀겠군. 이것도 나쁘지 않아.”
그러자 테무친은 조금 서운해하는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나는 대기인가?”
“넌 메인 전투지에서 필요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최대한 힘을 비축해 둬라.”
이렇게 말하면서 본인은 싸움에 나서겠다고 말하는 격이니 어떤 면에서는 모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라이텔바흐가 나서는 건 전투를 돕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다는 다른 이유였다. 오지랖 넓은 일반인 친구 덕분에 일정이 지연되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새 무기의 성능도 테스트해 보고, 새로운 경지의 기술도 연습해 보고 싶다. 무엇보다 ‘해킹’도 한번 시험 삼아 사용해 보기를 바라는 바였다.
“소장님.”
플레먼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말문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괜히 떼를 써서 이렇게 된 것일까?
“아, 이것도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니 신경 쓰시지 마시길.”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고 플레먼에게 눈짓했다.
“당신이 멋대로 굴었듯 나도 얼마든 변덕을 부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윽고 가장 가까운 지역을 향해 S급 헌터가 진격하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헬게이트가 지상에 강림하였다. 던전 권역이 전개되었다.
“뭐지?”
아퀼라는 계기판의 정보가 변경된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왜 발생 예정 시간이?”
일행과 가까운 위치의 ‘헬게이트 예정 좌표’는 강림 시간이 앞당겨졌다. 반대로 일행과 먼 위치의 좌표들은 예정 시간이 크게 늦춰졌다. 마치 일행이 순차적으로 정복하기 편리하게 다들 합의하여 스케쥴 조정이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헬게이트들이 그런 친절을 베풀 리는 없으니,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증거다.
그 시각, 이미 라이텔바흐가 탑을 정복한 뒤 얻은 새 능력이 발동되는 중이었다. 여기서는 최대한 들키지 않게 조금만 사용하리라. 그는 신중하게 감추었다.
“가라, 서재석 길드장.”
“라져.”
라이텔바흐의 명령을 받은 S급 헌터는 단신으로 던전 장벽을 부수고 내부에 침투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다수의 어비씨언들이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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