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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01회 시베리아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3.29 | 회차평점 0 0

 

 

 

발레리안은 라이텔바흐 일행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라이텔바흐를 책문했다.

 

 

“뭘 꾸미는 중이지?”

 

 

탑 공략과 관련된 질문이 아니다. 최근에 라이텔바흐는 총회장급 이상의 헌터들에게 ‘어떤 작전’의 프로토콜을 공유하였다. 제안의 형태를 띠긴 했어도 사실상의 일방적 통보였다.

 

 

총회장들과 수장들 모두가 라이텔바흐를 곱게 보는 것은 아니나 어쨌건 능력면에서는 그를 확고하게 신뢰했기에 거의 다들 동의하는 눈초리였다. 전술 자체가 어렵거나 큰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장차 임할 큰 시련의 때를 극복하자는 것이니 명분도 분명하다.

 

 

하지만 발레리안의 눈에는 영 탐탁잖게 거슬렸다. 라이텔바흐가 이런 식으로 위기를 미리 계측하고 조정하고 자기 뜻에 맞게 이용하여 유익을 취하는 것이 그다지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시기가 났다.

 

 

“무슨 말씀인지.”

 

 

“시치미 떼지 말고. 어디까지 내다보았느냐는 말이다.”

 

 

“아아.”

 

 

라이텔바흐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여유로움에 더 약이 오른 발레리안은 속으로 화를 삭였다.

 

 

“만일 ‘그 일정’이 불가피한 미래라면, 최대한 우리 유익에 맞게 활용하는 편이 좋다는 건 상식 아닌지요.”

 

 

“누구의 유익인가? 인류의? 헌터들의? 아니면 너 자신의?”

 

 

“좋을 대로 생각하시지, 발레르. 난 굳이 구분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만.”

 

 

확실히 라이텔바흐가 제시한 전략을 충실히 따르면, ‘그 이벤트’가 벌어질 때 헌터들과 그 협력 집단들은 세력을 온존하거나 더 크게 외연 확장을 이룰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반대로 대비하지 못한 세계 정부 측은 위기의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라이텔바흐가 원하는 식대로 ‘질서의 축을 처음부터 재조정하는 일’이 더 이상 입에만 오르내리는 말장난 수준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발레리안은 그 질서 재편이 시작된 이후 얼마나 라이텔바흐가 더 과감하게 행동을 개진할지 염려되는 바였다. 저 인간이라면 어디까지 나갈지 모른다.

 

 

‘나도 세계 정부가 좋진 않아.’

 

 

하지만 질서의 급진적인 붕괴는 위험하다. 대체 라이텔바흐가 추구하는 목표 지점은 어디까지 뻗어있단 말인가. 이대로라면 방향성을 제어하기 어렵다. 저자라면 목적을 위해 기필코 헌터 집단 전체까지도 자신의 수중에 넣고 이용할 것이다.

 

 

“수고하시죠.”

 

 

흑발 청년은 금발 사내의 어깨를 두드리며 친근감을 표했다.

 

 

“당신도 이번 임무에서 무사히 귀환한 뒤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잘 해주시길.”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방향으로 떠났다.

 

 

 

 

 

 

 

 

*

 

 

 

 

 

혹한의 대지, 시베리아.

 

 

멸망 당하기 이전의 러시아가 다스리던 광대한 동토로 현재는 일종의 유배지처럼 취급받는 땅이다. 헬게이트 사태 이전에 무소불위의 권세를 자랑하던 세계 정부는 자기들에게 거슬리는 자라면 누구든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때문에 이 땅에는 각지에서 온 다양한 민족 출신의 거류민이 정착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가족이나 공동체도 없이 죄수처럼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는 중이었다.

 

 

여러 소수민족이 그 가운데로 강제 이주당하여 심겨졌다. 정치범들이나 잠정적인 정치범이나 불온한 무리의 생존자들이 기존의 터와 재산을 모두 잃은 채 이 척박한 땅에서 근근이 살아갔다. 그중 몇몇은 자기들끼리 뭉쳐 조잡한 형태로나마 공동체를 이루기도 했다. 불행의 어둠이 동토 일대 전체에 짙게 드리워졌다.

 

 

헬게이트의 발생 이후로는 또다른 형태의 재앙이 그들을 엄습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파리 떼처럼 모여드는 ‘자연 너머의’ 재앙, 헬게이트들. 그것들은 외진 지역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처럼 ‘상위급 헬게이트’가 출현하는 빈도는 매우 낮았으나 대신 다른 종류의 고통이 거류민들을 괴롭혔다.

 

 

역병형(plague-type) 헬게이트.

 

 

이 특수 유형의 헬게이트는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시베리아 일대에만 나타나곤 했다. 특정 권역에만 고정되는 다른 헬게이트 던전과 다르게, 권역 자체가 인간의 신체에 들러붙어 끈적거리는 껌처럼 유착되는 형태였다. 그렇게 역병형 헬게이트에 침식된 인간은 여러 신체적, 정신적 고난을 받았다. 곧바로 죽지는 않았으며 당장에 장애가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대신 그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헬게이트의 유착물이 따라다녔다. 말하자면 질병을 옮기는 매개물이 된 셈이다. 이것이 일종의 주홍 글씨가 되어 그들을 신체적 차원 이전에 사회적으로 죽이는 재앙이 되었다.

 

 

기이하게도 역병형 헬게이트에 전염된 사람이 일정 이상 모이면 원래 그 헬게이트가 지배하지 못하던 먼 다른 지역에 새로운 역병형 헬게이트가 생성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이것이 그것들이 ‘역병형’이라는 카테고리로 정의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당연한 이치겠지만, 바로 이 이유로 인해 시베리아로 강제로 이주당한 거류민들은 극심한 중앙 통제식 핍박에 그대로 직면하였다. 세계 정부는 그들의 거주를 통제했으며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특정한 권역에 가둬두고 달아나지 못하도록 무인형 살상 병기들로 이뤄진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명분 면에서도 중앙 측은 우위에 있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역병형 헬게이트의 확산을 두려워한 탓에 시베리아의 주민들을 외면한 탓이었다.

 

 

라이텔바흐 일행은 바로 이런 류의 ‘게토’들이 다수 형성되어 산재한 드넓은 평야를 횡단하였다.

 

 

 

 

 

 

 

 

*

 

 

 

 

 

플레먼의 부모님은 그에게 언제나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차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가르치시곤 했다. 비록 플레먼은 겁이 많고 연약하고 너무도 작은 소시민이었으나, 바로 이런 면에서는 신중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라이텔바흐의 제안을 수락하였고 그의 곁에서 그의 여정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으나 언제나 마음 한 켠에는 불안감이 있었다. 라이텔바흐는 호쾌하고 호의적인 친구였으나 그의 방식을 지켜볼 때마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플레먼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 언제나 조심스럽게 굴었다. 주님께 징계받는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는 반강제적으로 겸허함을 내면에 함양하였다. 그는 자신의 공로를 도저히 내세울 수 없었다. 잘난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으며 영적으로도 누구 앞에서 떳떳함을 내세우지 못할 신분이었다.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는 세리의 자리에 있었다.

 

 

라이텔바흐는 너무도 달랐다. 그는 독기 가득했으며 무엇이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를 추구했으며 자신이 거둬야 할 승리에 대한 집념과 목표 의식이 뚜렷했다. 세상의 보편적인 질서대로라면 플레먼이 아니라 바로 이런 사람이 세상을 바꿔나가는 주역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플레먼은 라이텔바흐라는 친구의 본성적인 ‘중력’을 두려워했다. 인간 자체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다. 단지 라이텔바흐의 천성이 ‘인간의 의(義)’를 형상화한 것 같은 모습인 것이 가슴에 걸렸다. 라이텔바흐는 본인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흡수하는 ‘중력 렌즈’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에게나, 그는 조연이 아닌 주연이었다. 원수들은 라이텔바흐를 잡기를 원하여 안달이 났고, 지지자들은 그를 마치 메시아처럼 여기는 듯했다.

 

 

바로 그러한 존재감이 다름 아닌 ‘영광의 찬탈’임을 알기에 플레먼은 불편감을 지우지 못했다.

 

 

시베리아에 상륙한 이후로 원정대는 잠시 특정 방향으로의 진격을 멈춘 채 정보 수색전에 돌입했다. 어차피 ‘북쪽 탑’이라는 것 어디에 위치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하게 짚어낼 도리가 없었다. 그로 인해 명확한 목표지와 방향성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잠시 보류된 시간이 생겼고 라이텔바흐는 그 시간을 낭비 없이 활용하고자 했다.

 

 

그가 당장 이목을 둔 대상은 바로 시베리아에 산재한 게토 지역들이었다. 그는 혹 이들에게 영향을 미쳐 장기적인 계획에 도움을 받을 기반을 확충할 수 있을지 저울질하였다. 무엇이든 목표를 위해 이용하는 그의 성정다웠다.

 

 

무력을 써서 세계 정부 측의 통제 세력과 충돌한다는 옵션은 비상식적이므로 고려 밖이다. 물론 헬게이트 사태 이후로 생긴 인력 부족으로 인해 대부분은 드론 같은 무인 군단으로 운영되는 포위망이나, 그것들의 자체적인 살상력과 파괴력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므로 맞서기에는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괜히 정치적으로 빌미를 줄 위험도 있고.

 

 

그렇다고 역병형 헬게이트를 직접 토벌하기 위해 몸을 이끌고 공략에 나서기에도 손해가 크다. 헌터들만 있다면 그런 수고도 고려해 볼 법하지만, 아퀼라와 플레먼 같은 일반인을 동행자로 삼고 있으니 이 또한 배제되는 선택지이다.

 

 

 

 

 

그래서 라이텔바흐는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하고 또 시도하지 못할 제3의 방책을 시범적으로 개시했다. 바로 이런 ‘반칙급의 발상력’이 그가 발레리안을 비롯한 다른 실력자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듬뿍 받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한 번 연습 삼아 해보지.”

 

 

라이텔바흐는 에어크래프트의 가장 높은 갑판 위로 올라섰다. 그는 재석과 라울과 테무친에게 ‘만일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헬게이트 유출물이 선체에 닿지 않도록 보초를 서도록 명하였다.

 

 

“멀리서도 요격이 가능합니까?”

 

 

재석이 의심스러워하며 물었다. 지금껏 그도 헬게이트 권역 바깥의 헌터가 헬게이트를 원거리에서 처단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천하무적인 라이텔바흐라고 해도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가 최근에 보여준 불가사의한 경지를 생각해 보면 뭔가 해결책이 있을지도 모르려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쳤다.

 

 

“잔소리 말고 수비나 잘 하시지.”

 

 

라이텔바흐는 자신만만하게 저 너머 수십 km 거리에 존재하는 게토 지역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그는 차분히 뇌리에서 많은 연산자를 가동하였다. 역병형 헬게이트에서 발원하는 오염 정보체들이 그의 눈에 탐지되었다. 즉각 망막과 뇌에 설치된 이터널 셀 네트워크가 매우 맹렬한 양자 연산을 시작했다.

 

 

‘새로운 응용법을 테스트해 보기에 적합하군.’

 

 

그는 손가락을 뻗어 방아쇠 모양을 만들었다. 이윽고 눈을 뜬 그는 포위망 너머의 저곳으로 연산(演算) 행위를 확장하였다. 그는 손끝에 어떤 미지의 능력을 집중시켰다.

 

 

이윽고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헬게이트의 권역 범위 경계선은 구형의 형태를 이룬다. 그 최대 확장 범위는 일정 상한선의 테두리 안에 갇힌 상태를 유지하며 중심점은 늘 고정되어 있다.

 

 

그런데 라이텔바흐가 어떤 술수를 부리자, 이 보편 규칙에 이변이 벌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법칙이 깨어진 것은 아니나 변칙이 발동했다고 해야 하려나. 갑작스레 게토를 침식하던 헬게이트의 권역이 구형의 형태를 벗어나 어느 한쪽 방향으로 길게 고무줄처럼 잡아당겨졌다. 마치 아메바가 특정 먹이를 향해 자신의 몸체를 길게 늘여서 포식 작용을 하는 모습과 닮았다.

 

 

이것은 헌터의 권능으로 인함이 아닌, 헬게이트 자체가 자발적으로 일으킨 변화였다. 그것이 헬게이트 본인의 의지인지, 아니면 무언가에 홀려 벌어진 타의 유발인지는 명확지 않았다. 아무튼 게토의 주민들만을 속박하던 헬게이트는 별안 간 모든 힘을 다하여 자기 촉수를 라이텔바흐 쪽으로 뻗었다. 수십 km의 거리만큼 억지로 팔을 뻗는 대가로 그 ‘촉수 형태’의 늘어난 권역은 매우 가늘게 꼬아져 얇은 형태를 띠었다. 거의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굵기였다.

 

 

그 반작용으로 게토 거주민들을 옭아매던 어둠의 촉수는 얇아지고 탄성이 약화되었다. 원래는 끈질긴 타르 늪 같았다면 지금은 몸만 조금 움직여도 끊어질 썩은 동아줄처럼 되었다.

 

 

마침내 그 비정상적으로 잡아당겨진 가는 권역의 촉수가 라이텔바흐의 검지손가락 끝에 맞닿았다. 다른 쪽 에어크래프트의 갑판에서 대기 중인 재석은 그 기이한 광경에 놀라는 와중에도 언제든 문제가 생기면 헬게이트를 끊기 위해 창을 든 채로 대기하였다.

 

 

“빠앙.”

 

 

라이텔바흐는 여유롭게 손가락 끝에 닿은 그 촉수를 향해 어떤 정체불명의 힘을 사출하였다. 고도로 압축되어 광섬유보다도 얇게 꼬인 직물 형태로 응축된 힘이었다. 어찌나 예리하게 다듬어졌는지, 또 얼마나 빠르게 쏘아졌는지 동승한 세 명의 헌터도 전혀 그 존재감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 미세한 백색 진동은 빛보다도 빠르게 어둠의 촉수 내부를 질주하였다. 그리고 그대로 헬게이트 권역의 중앙으로 돌진하였고 역병을 만들어내는 중심핵을 관통하였다. 그 빛의 줄기는 중심점을 직격한 즉시 쪼개어져 헬게이트가 촉수를 뻗은 모든 ‘끈적거리는 타르 조각’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즉각 충격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헬게이트가 자발적으로 ‘아폽토시스’ 패턴의 소멸을 시작함과 동시에 역병에 걸린 사람들의 몸이 자유롭게 되었다. 마치 헬게이트가 소멸과 함께 자신이 뿌린 분신들을 반강제로 회수하여 같이 소멸시키는 듯한 패턴이었다. 역병형 헬게이트는 본체가 파괴되어도 뿌려놓은 감염체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믿기 힘든 이적이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플레먼은 다시금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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