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02회 인간이 받는 영광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4.05 | 회차평점 0
|
세계 정부 소속 방위대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들이 시베리아의 게토들을 감시하며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한 것은 합당한 명분이 있었다. 역병 전염을 막기 위한 방역 차원의 조치. 실제로 역병형 헬게이트는 시베리아 내에서 인간을 매개물 삼아 이동한 전적이 수없이 확인되었다. 그러니 그들이 굶어죽든 곤경에 처하든, 정부군이 그들을 옥죄고 통제하는 것은 정당화되었다.
그런데 라이텔바흐가 나타나더니 기이한 방향으로 상황을 바꾸었다. 저 멀리 있던 그가 어떤 일을 벌이자 헬게이트의 본체가 붕괴하더니 그도 모자라 주민들에게 붙은 헬게이트의 유착제마저 일제히 소멸하지 뭔가.
그것도 모자라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부서진 헬게이트의 잔해가 버섯 구름의 형태를 그리며 공중으로 튀더니 난데 없이 사람들이 아닌 드론들에 달라붙었다. 이것이 라이텔바흐가 유도한 작용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무작위 확률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나 생명체나 일반 자연물은 건드리지 않고서 세계 정부 측의 기계들에만 접착하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하는 수 없이 군 부대 측에서는 오염된 무인기들을 자폭으로 폐기해야 했다. 자칫 역병형 헬게이트가 군 내부로 전염을 일으킨다면 곤란하다. 자연의 규칙을 벗어난 저 기괴한 존재는 특정 개체에 붙으면 그것의 존재 목적이 폐기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소독되지 않는다.
그렇게 군 측에서는 적잖은 손실을 감수했다. 인력난이 심한 지금 시기에 무인기 없이 인간만으로 넓은 영토를 제어하기란 불가능하다. 해당 지역에 배치된 군인의 숫자는 매우 적었다. 그들만으로는 게토 주민을 일일이 감시할 수 없었고 헌터 일행과 충돌하기에도 리스크가 컸다.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눈치를 보다가 기세에서 밀린 해당 부대는 꾸물거리며 느릿느릿 퇴각하였다. 사실상 작전을 수행할 명분도 상실된 마당에 전력을 낭비해서 좋을 일은 없으리라.
결과적으로 라이텔바흐는 그 지역 게토 주민들의 해방자가 된 격이었다.
헌터 일행과 플레먼과 아퀼라는 해당 지역 근방에 착륙한 뒤 상황을 살필 겸 주민들의 거주지를 방문하였다. 라이텔바흐는 상황을 설명하였다. 더불어 헬게이트를 부순 주체가 자신이라는 사실도 선언했다.
그렇게 그들은 큰 환대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헌터들을 크게 칭송하며 높였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일꾼으로서 일행을 따라가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라이텔바흐는 정중하게 동행을 거절했다. 그럴 형편이 되는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하지만 칭송이나 환대는 조금도 막지 않았다.
*
이후로도 비슷한 과정이 여러번 반복되었다.
시베리아 내에는 무려 400개가 넘는 역병형 헬게이트가 활동 중이었다.
물론 아무리 역병형 헬게이트라도 다수의 헌터 전력이 투입되면 대개는 어떻게든 처리될 수 있기에 수년 이상을 방치되는 경우는 드물다. 무작정 가둬 덮고는 방치하는 무책임한 세계 정부 측이라도 극한의 역병 확산을 원치는 않기에 일정 이상 침식도가 심해지면 헌터들의 손을 빌리곤 했다. 그래서 현재 활동 중인 것은 대부분 최근 몇 주 내지는 몇 달 내에 생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드물게 몇 개는 헌터들 측에서도 손을 쓰지 못했거나, 정부 측의 실책으로 인해 골든 타임을 놓쳐 오랜 지박령처럼 곪은 것이었다. 이런 것이 장악한 지역은 구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폐기와 봉인의 대상이다. 이미 주민의 70%는 죽었으며 살아 있다고 해도 극도의 빈곤함과 절박함에 처한 상태였다.
라이텔바흐는 정부군과 충돌하지 않도록 멀리서 헬게이트를 요격하였다. 정확히는 앞서 사용한 방법대로 원리 모를 능력으로 헬게이트 권역 일부를 자신 쪽으로 잡아당겨 늘렸다. 이후 그 늘어난 부위와 손가락을 접촉시키는 순간 자신의 안티-게이팅 파워가 효력을 나타낼 수 있는 권역 내부로 힘을 발사했다.
라울은 몇 번 이 작업이 반복되자 라이텔바흐가 요격에 사용한 힘의 정체를 조금 간파하였다.
‘진동수가 변환된 백파인가.’
저번에 희미하게 목격했던 능력과 결이 비슷하다. 양은 극소량이지만 매우 이질적이며 그 효력이 매우 기이하다. 헬게이트를 소멸하되 보통의 백파처럼 외력으로 부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소멸을 유발 내지는 명령하는 느낌이다.
‘내 감각으로는 실체를 볼 수가 없다.’
인간의 눈이 가시광선 너머의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관측하지 못하듯, 기본값으로 설정된 ‘방정식의 최적 해’로서의 진동수 값을 벗어난 변이 백파는 헌터들의 이터널셀로도 직접 인지는 불가능하다. 오로지 라이텔바흐만이 온전히 감지하고 만지고 제어할 수 있는 에너지이다.
‘생각 이상의 잠재력이군.’
라울은 상상했다. 만일 저 변이된 백파를 여러 파형으로 분리하고 정제하고 날카롭게 공명하여 전투용으로 사용한다면 어떤 장관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도 라이텔바흐가 강제로 역병형 헬게이트의 권역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긴 원리는 전혀 감 잡지 못했다. 그런 기현상은 헌터 인생 수십 년을 두고도 금시초문이다.
‘뭘 더 숨기고 있는거냐, 이 자식.’
아마 숨긴 건 능력만은 아닐테지. 라이텔바흐라는 인간이 감춰둔 계략들과 꿍꿍이란 원체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
시간이 남아도는 것인지 라이텔바흐는 수십 군데의 헬게이트 감염 지역을 순회하며 역병을 퇴치하였다. 가는 곳마다 그는 신봉에 가까운 환호를 끌어모았다. 약자와 소외된 자들과 쓴 뿌리를 가진 자들과 패배자들, 그 외에도 사회와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버림받은 자들이 해방자에게 열광하였다.
그는 자신이 해방시킨 곳마다 모종의 안배를 두었다. 플레먼에게도 선물했던 첨단 통신 장비를 비롯해 몇 가지 소통의 방책을 남겨두었고 그 외에도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무언가를 추가로 남겼다. 아울러 게토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일러두었다. 앞으로 있을 일들, 세계 정세에 생길 변화에 대한 정보들, 그리고 협력을 위해 해주었으면 하는 일들도 일러주었다.
보통의 안목으로 보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 오합지졸이었다. 충분한 전력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라이텔바흐는 일반인들이 보는 범위보다 더 멀리 내다보는 안목을 소유하였다. 그의 눈에는 그들 나름의 쓸모가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라이텔바흐는 가는 곳마다 열광과 충성으로 들쑤셔 놓았다.
‘저렇게 주목받는 사람이니 짧은 시간만에 큰 권세를 획득한 것일테지.’
플레먼은 궁금증이 조금 해소되었다.
확실히 라이텔바흐는 단순히 헌터로서 무력이 강한 게 전부가 아니다. 그는 창조성으로 가득한 시대적 선각자이며 발상의 전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역량, 그리고 용맹함 면에서 누구보다 빛을 발한다. 어떤 불리한 상황이나 위기도 자기 자신을 위해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안다.
그런 사람이니까 자신을 향해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유익과 영향력을 쟁취할 줄 알았던 게로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복음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분도 밑바닥과 같은 배경에서 빈 손으로 시작하셨다. 능력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으셨다. 몸을 기댈 곳이 없는 소외된 자들에게 충성과 관심을 받으셨다. 또한 그분을 향해 적대적인 사회 배경 속에서 존재감을 발하셨다.
하지만 그분께서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에 조금이라도 눈길을 주시거나 의식하셨던가. 물론 그분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에 늘 관심을 기울이셨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경배하는 자들의 참된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시고 인정하셨고 그분을 향한 참된 예배는 언제나 받아들이셨다.
하지만 그분은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받는 헛된 숭상과 열광과 인기에는 별로 목마르지 않으신 듯해 보였다. 아울러 대중의 반응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모략도 없으셨다. 자신을 드러내어 일하라는 유혹이나 제안에도 일언지하에 거절하실 뿐이었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다. 땅에 내려오실 그때처럼 사는 동안에도 영광을 ‘탈취하여 꽉 움켜쥐어야 할 것’으로 여기거나 애착을 보이지도 않으셨다.
플레먼의 친구는 달라보였다. 그는 자기 재능을 화려하게 활용하는 법을 알았고 그것을 실용적으로 이용하는 방도에 귀신처럼 도가 튼 사람이다.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쟁취할 줄 알며 악착 같이 능력을 통해 위로 올라서는 것에는 도사이다. 발레리안과 약간의 방식 차이는 있어도 본질적인 인생 사는 방식은 다르지 않다.
‘외롭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지.’
문득 친구를 향한 측은감이 들었다. 양심대로 용감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도 안타깝지만, 라이텔바흐의 삶은 어딘가 모르게 텅빈 듯한 공허가 느껴져 안타까웠다. 복수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그런 것인지, 혹은 회복되지 않은 과거로 인해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인지, 그의 방식은 항상 평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잃었을 많은 기쁨을 생각하면 응원해주고는 싶은데 그를 지금의 공허한 길 위에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
대륙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중간관리자는 그저 잠잠이 지켜보았다. 레비아탄을 소환하는 과정에서 인과율을 너무 많이 깨트렸고 그로부터 30일 정도는 지상에 개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직은 날수가 차지 않았다.
-뭘 구상하는 중인가.-
아직 라이텔바흐라는 인간은 북쪽 탑에 대해서는 아무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아니, 찾으려는 기색조차 아직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다른 쪽 수색대에 맡기려는 건가?-
이미 다수의 헌터 부대가 현재 시베리아 지대에서 수색 중인 상황이다. 어쩌면 라이텔바흐는 좌표 자체는 그들이 찾도록 내버려두고 본인은 공략에만 손을 얹으려는 심산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확실히 더 경제적이기는 하다만.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브멜레크.-
-무슨 일인가.-
세나케립이 원격 신호를 보내자 북쪽 탑 부근에서 기다리던 다른 중간관리자가 대답했다.
-네 결계로 탑의 좌표를 봉인할 수 있겠는가?-
세나케립이 질문했다.
-가능하다만, 무슨 문제가 생겼는가?-
-그건 아니다. 어차피 우리가 봉인하더라도 놈이 감찰의 눈을 최대 수준으로 증폭시키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인간들이 우리 무대에 방해를 놓는 것은 막아주었으면 하는군.-
이제 세나케립의 시선은 탑이 아니라 라이텔바흐가 있는 곳을 향했다. 표면적으로는 북쪽의 바벨탑을 없애기 위한 공방전이지만, 이미 저자는 다음 싸움의 대비까지 생각을 뻗치고 있다. 다음 무대, 곧 몇 주 뒤에 발생할 ‘웨이브’는 인류 전체를 두고 겨루는 진검승부일텐데, 라이텔바흐는 이미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해 볼 계산까지 선 듯했다. 최대한 많은 이들의 파멸을 바라는 세나케립으로서는 자신의 계획을 무마시키고 도리어 뜻하는대로 이용하려는 라이텔바흐의 속셈이 뻔히 보이는지라 가만히 있기 어려웠다.
-날 수가 차는대로 네놈을 시험대 위에 올려주마.-
그는 힘을 비축하며 라이텔바흐 일행을 위기에 빠트릴 단기 계획을 세웠다.
|
이전회
101회 시베리아 |
다음회
103회 게오르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