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03회 게오르그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4.13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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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대는 수십 개의 격리지역, 게토, 촌락, 그리고 소도시를 역병으로부터 해방했다. 라이텔바흐는 가는 곳마다 환호를 차지했고 그들을 향한 강한 영향력을 노획물로 취했다.
“다음에 벌어질 일이 무엇입니까?”
궁금증을 느낀 재석이 몰래 귀띔으로 라이텔바흐에게 물었다. 아직 다음번 헬게이트 웨이브에 관하여 정보를 공유한 상대는 총회장급 이상의 헌터들뿐이다. 최측근인 재석조차도 온전한 내용을 다 전달받지는 못했다.
“어떤 유형인지만이라도 가르쳐줄 수 없겠습니까?”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이지.”
라이텔바흐는 동료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
“관측자의 수를 최소화해야 해서.”
“양자역학적인 현상이라도 됩니까?”
“비슷하다고 봐. 헬게이트란 체계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는 자연계와 유사점이 있다. ‘참된 앎’으로부터 분리된 영역이지.”
인간은 자연계의 원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기술력을 높여 정밀한 기기를 갖춘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입자의 속도 벡터와 위치 좌표를 동시에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며 오로지 확률 구름의 상태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기본 전제이다.
헬게이트들의 경우에는 그와 상당히 비슷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특성이 존재한다. 그것들도 실체가 나타나기 전부터 확률 구름과 유사한 ‘정보 오염체’ 상태로 존재하며, 붕괴 과정에서 관측자의 영향을 받는다.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관측 행위와 확률 붕괴 조정을 행할 수 있는 라이텔바흐이지만, 그의 예측 행위가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관측자’의 노출을 줄일 필요가 있다. 하위 헌터의 헬게이트 관측 시도란 바로 그런 노이즈이자 오류 요인이 된다.
어느 정도 라이텔바흐와 급이 비슷한 실력자들이나 되어야 그의 관측에 보탬을 줄 있을 뿐이다. 물론 비슷하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어마어마한 차이이지만.
여하튼 일행은 거듭 앞으로 나아갔다. 라이텔바흐가 예측한 ‘앞으로의 웨이브’를 최대한 요긴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동맹자들과 그들을 제어할 정보망을 확보해야 한다. 더욱이 웨이브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을 것으로 예측되는 장소가 북쪽 탑과 가까운 이곳 시베리아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현지 주민, 혹은 이주된 자들 중에 손을 빌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최대한 이용하는 편이 좋으리.
라이텔바흐 일행이 지나간 자리에는 미묘한 사회적 반향이 일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들을 옥죄는 고통스러운 주홍 글씨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동시에 세계 정부의 감시망도 느슨해졌다. 드론들은 헬게이트 파편에 타격을 입어 훼파되거나 기능을 잃었고 해를 잃을까 무서워한 군인들은 제각기 보신을 위해 퇴각하였다. 오래간만에 풀려난 사람들은 환호하였다.
그리고 당연히 그 환호란 잔치를 벌이거나 안락을 즐기는 양상으로 나타난 것일 리는 만무했다. 시베리아는 지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반동분자’적인 성향이 강한 인간들이 많이 심겨진 땅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세계정부에 밉보인 자들이 죄다 이곳에 모였다. 당연히 그들이 바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정부의 권위에 손상을 입히거나 그들로 하여금 굴욕을 당하게 하는 것이다. 혹은 적극적인 형태로 곤경을 일으킨다거나.
테무친은 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라이텔바흐가 목표하는 바는 혹시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 자기 원수인 그들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인가.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해석하기에는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많았다. 무엇보다 라이텔바흐는 일하려면 확실하게 행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를 추구하는 타입이지, 이런 식으로 어설프게 하지는 않는다.
‘뭘 준비하는 거냐, 이 친구?’
*
원정대는 다시 내륙 깊숙이 이동하였다. 구 모스크바와 투발스크를 향하는 서쪽에 가까워졌다. 그곳에서도 라이텔바흐는 동일한 방법으로 역병 형 헬게이트 몇몇을 퇴치하였고 사람들에게 다가갈 길목을 열었다.
어느 작은 도시에 들어갔을 때, 일행은 거리에서 연설하는 큰 목소리를 발견하였다. 강렬한 분노가 서린 음성으로 언뜻 듣기에도 사회를 향한 강한 불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어설프거나 조잡한 말장난은 아니었다. 유려하다고 보기에는 투박한 어투였으나 강직함에 담긴 매력이 묘하게 듣는 이들의 혼을 잡아당겼다.
그것이 플레먼 에이비슨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는 ‘선전·선동’의 장면이었다. 그가 살던 오세아니아 지역 사람들은 다 유약하고 깡이 없어서인지 그럴 엄두를 내지 않았다. 아니, 사람들을 향해 반감과 증오를 불러일으킨다는 행위는 상상도 하지 했다. 그럴 자유가 확보된 세상이 아니기도 했고, 플레먼 본인도 그걸 좋아하는 성향은 절대 아니다. 여하튼 이런 배경에서 자랐다 보니 시베리아의 억센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이런 새로운 풍경은 신선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 거점은 당국 측의 감시 끈이 가장 약한 듯했다. 아무리 자유를 말살한 세계 정부라고 해도 인프라의 완성도가 전능한 수준은 아니니 많은 허점들이 존재한다. 특히 헬게이트가 탄생한 이후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니 저런 반정부적 선동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
하지만 그 여러 선동자 중에서 어떤 한 명은 두드러졌다. 그는 다른 자들과 구분되는 특색이 있었다. 정확히는 ‘발산하는 느낌’이 다르다고 해야 맞겠다.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구분되는지는, 그 원인을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확실히 그가 눈에 띄었는지 라이텔바흐는 다른 이들을 다 제쳐두고 그에게 말을 직접 대화를 걸었다. 그 남자는 40대 중반 정도의 외모에 키가 작은 편이었으나 실전형 근육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다부진 모양새의 사내였다.
“반갑습니다.”
“당신들은 누구요?”
사내는 낯선 이들에게 경계심을 높이며 되물었다.
“그대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라이텔바흐가 늘 그랬듯 호쾌한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이에 사내는 조금 의심하면서도 상대의 그 유려한 태도에 혹했는지 귀를 기울였다.
“우리와 생각을 같이할 의향이 있다면 고려해 보겠소.”
라이텔바흐는 미끼를 던질 겸 그의 제안을 수락하는 척했다.
“대화해보지 못할 이유는 없겠죠.”
헌터들은 묵묵히 리더의 의견을 따랐다. 다만, 그 자리에 있던 아퀼라는 묘한 불편감을 눈빛 위로 비쳤다. 플레먼은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뒤 심상치 않은 기분을 받았다.
“혹시 아는 사람이야?”
라울이 라이텔바흐에게 소곤소곤 질문했다.
“전혀.”
“그럼 왜? 네가 일부러 접근하길래 뭔가 전략적으로 중요 인물인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발견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번은 순전히 흥미야.”
“그놈의 흥미, 흥미. 넌 종종 한 번씩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더라.”
힐난하면서도 라울은 라이텔바흐의 복잡한 사고방식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절대로 무질서하게 경솔한 선택지를 취할 사람은 아니다. 모든 행동이 계산적이며 이성적이다.
‘본능적으로 느껴진단 말이지.’
라이텔바흐는 아퀼라를 보았을 때처럼, 또 플레먼을 보았을 때처럼 이번에도 동물적인 촉각을 곤두세웠다. 고도의 이성적인 판단력도 좋지만, 가끔은 그보다는 그의 이러한 비이성적인 ‘감’이란 것이 희한하게 잘 들어맞곤 했다.
‘나머지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중요한 열쇠.’
그는 감각적으로 확신했다. 플레먼이 장차 면역자들에게, 아퀼라가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예정이듯, 이 친구도 이 지역의 불만 가득한 ‘추방자들’에게 반향을 미칠 것이다.
*
사내의 이름은 게오르그 옐친, 러시아 태생이었다. 그의 혈육은 본디 서쪽 지역에서 거주하였으나 거듭된 핍박과 차별 대우로 인하여 이주하였고 급기야는 이곳으로까지 밀려났다. 현재 게오르그 곁에는 남은 피붙이가 없었다. 뜻을 같이하는 몇몇 동료들만 있었을 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쉽게 붙고 떠나고 헤어졌다.
그에게는 민족에 대한 소속감이나 애착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 세대로부터 이어져 온 사상적인 영향을 계승한 부분은 없지 않았다. 불과 한 세기 이내의 과거, 이 땅에는 강대한 연방이 자리했고 어떤 이들은 그에 대한 긍지가 있었다.
지금은 공중분해가 되어 흔적도 없어졌다지만, 동일한 정신의 파편은 깃발이 되어 간헐적으로 재생산되었다. 그리하여 그 옛날의 강력한 힘과 영광을 부분적이나마 복원하려는, 혹은 적어도 외부의 정복자들에게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 하에, 여러 작은 무리가 일어섰다. 그렇게 우후죽순 일어난 자들의 대다수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찻잔 속의 태풍이 되어 지워졌다.
게오르그의 선배들도 그런 무의미한 시도를 반복하던 국소적 행렬 가운데 포함된 가담자들이었다. 그런 선배들의 영향으로 게오르그도 근본적으로 위대한 쟁취를 위해 끝없이 생각하고 노력하고 궁리하였다. 때로는 은밀한 모략으로, 때로는 잠입으로, 위장으로, 그리고 때로는 과감한 행동으로서 자기 가치관을 이루었다.
다만, 그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분명하게 이해한 자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저 눈앞의 거대한 정복자가 너무 위협적인 존재감을 자랑하기에 그 존재를 대적할 목표로 설정한 채 맞붙을 뿐이었다. 적의 존재는 영혼의 목표가 분명하게 세워지지 않은 이들에게 임시적인 버팀목이 되기 마련이다. 게오르그는 본질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 ‘범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비슷한 동류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과격하면서도 의외로 이성적이었다. 그의 사상은 약간은 중용의 덕목을 갖춘 편이었다. 또한 그의 내면에는 아직은 유연성이 잔재했기에 얼마든지 목표점과 수단의 방향성을 수정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만찬을 같이 나누며 라이텔바흐는 게오르그에 대해 신속히 파악하였다. 그는 혁명을 꾀한다는 점에서는 그와 약간의 공통 분모가 있다. 동시에 자신의 행동이 의롭다는 신념 아래서 움직인다는 점에서 아퀼라와도 유사하다고 여겨졌다.
다만, 이루려는 뜻의 방향성 면에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없었다. 일단 그는 성향부터가 확실히 옛 소련의 색채에 젖어있었다. 과거의 연방처럼 극단적이거나 폭력적인 것은 아니나 계급 체계에 대한 강한 분노나 파시즘 기반의 세계 정부 질서에 대한 반발심은 뚜렷했다. 그가 구축하려는 이상향의 모양은 분명 사회주의적 성향을 짙게 띨 것이다.
사실 세계정부를 단죄하려는 의지만 강할 뿐, 구체적인 정치적 재설계에 생각보다 관심이 크지 않던 라이텔바흐 입장에서는 게오르그도 이용 가능한 여러 가지의 도구 중 하나로 보였다.
그러나 아퀼라의 경우는 다르다. 그가 붙잡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향수였다. 그는 자유라는 가치 아래서 민족들과 국가들이 독립하는 최종 결말을 꿈꾸었다. 그걸 위한 중간 단계로서 라이텔바흐를 세계 지도자로 세우는 것도 고려 가능한 선택지다만, 어쨌건 궁극적인 목표는 조국과 그 찬란한 정치적 유산을 되찾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있기에 게오르그와 그의 사상적 동료들은 아퀼라와 그 동료들과 더불어 섞이기란 불가능한 대척점에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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