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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10회 합류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5.24 | 회차평점 0 0

 

 

 

녹아내리는 하늘 위의 암세포들. 마치 화학 항암제가 종양을 녹이듯, 순백의 번개 소용돌이가 대기를 수놓던 헬게이트들을 파쇄하였다. 위력 자체는 라이텔바흐의 헌터로서의 역량을 생각할 때 그리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은 아니다. 다만, 경이로운 부분은 범위였는데, 사실상 지구 이편부터 저편까지를 가로지르는 광역 공격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헌터라는 유닛은 일개 인간 개체이기에 제한이 분명하다. 아무리 강해도 한 번에 공격할 수 있는 범위는 하나의 던전에 국한된다. 그런데 편법을 썼다고는 해도 지금의 저 헌터는 원거리에서 여러 던전을 요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연히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이 기현상을 목격하였고 아퀼라와 게오르그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뭐지 저 인간?’

 

 

게오르그는 몇몇 동지가 죽거나 실종된 것도 개의치 않고 넋을 빼앗겼다. 더는 동무들과의 연대나 심오한 대의(大意)나 혁명적 투쟁 같은 평상시의 ‘삶의 의의’가 그리 매혹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완전히 옛 가치관을 버린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적어도 관심의 축은 옮겨졌다. 늘 그의 심령은 허전했고 자신이 헛된 메아리를 좇는 것은 아닌지 하는 회의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랬던 차에, 그의 공허함과 영혼의 가려움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흥밋거리가 나타났다.

 

 

‘저 사내인가?’

 

 

자신의 무의식이 오랫동안 찾던 변화의 풍차.

 

 

지금까지 게오르그의 삶은 각박하고 무료했으며 광야와 같이 삭막했다. 과거의 망령을 좇는 삶은 그에게 피로감만을 주었다. 얻는 열매라고는 전혀 없으며 생명력도 활기도 없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다시 건설하느니 하는 뜬구름 같은 망상, 신기루를 잡으려는 허황된 시간. 그래도 주위에는 의지할 사람도 가족도 없었기에 그것이라도 잡으려고 했었다. 방황 중 만났던 모든 동료들이 그것을 추구했기에 자신도 ‘불확실한 믿음’ 속에서 억지로라도 참고 그것을 따라갔다. 이 길을 따르다 보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으로.

 

 

그러나 이제는 그래야 할 이유가 싹 사라졌다.

 

 

“어차피 어떤 형태로든 세상을 바꿔야 한다면, 무익한 오합지졸끼리 노력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배로 갈아타는 편이 유익할지도.”

 

 

의외로 그의 마음은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주는 인위적인 유대감에는 그다지 애착이 없었던 모양이다. 조금 전 사태로 시베리아 전역에서 극단적 좌익 사상에 사로잡힌 패잔병들 수천 이상이 일시에 대학살을 당했는데도, 게오르그는 의외로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함을 느꼈으니, 아이러니였다.

 

 

 

 

 

그리고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감정을 느낀 사람은 아퀼라였다.

 

 

‘라이텔바흐는 인류의 재건을 위해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할 상대다.’

 

 

불확실했던 마음이 갈등 없이 고정되었다. 라이텔바흐의 진가는 헌터로서의 능력이 전부가 아니다. 단순히 재력과 권력과 영향력을 확보한 혁명 운동가도 아니다. 그의 지력과 그의 이능은 하나로 연결되어 조합되는 기묘한 한 쌍이다. 저 사람이라면 그간 불가능이라고 여겨졌던 그 대업을 능히 이뤄내고도 남을 것이다.

 

 

‘살려내야 해. 보존해야 한다.’

 

 

필시 세계 정부는 앞으로 더욱 극성이 되어 라이텔바흐를 처치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들이 얻지 못한다면 부수려고 애쓰겠지. 이제 저 헌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가 명확해졌다. 독립운동가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그가 세계 정부와의 경쟁에서 해를 입지 않도록 한다. 그리하여 그를 키워내고 강성하게 자라나게 한 뒤 세계정부의 모든 힘을 내부에서부터 소진한다. 세계 각지에서 민족들과 지역들이 자립하여 자치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

 

 

 

 

 

대부분의 헬게이트 군집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몇몇은 생명을 보존했다. 그것들은 원래 힘의 10% 미만의 능력만을 유지한 채 가까스로 형태만 남았다. 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중간관리자들로서는 악수(惡手)로 작용하였다. 살아남은 헬게이트 군집들은 죄다 ‘북쪽 바벨탑’과 가까운 거리 내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탑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힘의 보존율은 높았다.

 

 

이러한 거시적 패턴을 라이텔바흐가 순식간에 읽어내지 못할 리는 없다. 아니, 라이텔바흐 이전에 최상위 헌터들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이로써 한 순간에 북쪽 탑의 좌표가 절반 이상 노출된 셈이었다. 그곳을 추적하던 헌터들은 이제 비효율적인 방황을 멈춘 채 운신의 폭을 좁혀 빠르게 추격 작업의 진도를 앞으로 당겼다.

 

 

발레리안도 그 무리 중 선두에 서 있었다.

 

 

 

 

 

촤아아아악.

 

 

 

 

 

금갈색 머리의 미남자는 채찍처럼 생긴 커다란 황금의 사슬을 확장하였다. 서재석의 창처럼 이것 또한 실체를 가진 질량 무기가 아닌, 헬게이트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충돌함으로써 생성되는 ‘빛의 현상’의 일종이다. 다만, 실력 면에서 월등한 발레리안은 이 무기를 심지어 헬게이트 던전 바깥에서도 실체화할 수 있었다. 던전의 바깥에서도 희미하게나마 흑파와 다크포스로 인한 오염이 존재하는데, 발레리안의 무기는 그 옅은 흔적마저도 파고들 수 있었다.

 

 

“잡았다.”

 

 

황금의 빛 사슬은 수천 가닥으로 나뉘더니 던전 내부로 침투하였다. 그 내부에 들어가자, 빛의 세기는 몇천 배로 증폭되었다. 가속된 그 무시무시한 가상 정보체 병기는 아광속으로 질주하여 헬게이트 군집의 본체를 포획하였다. 엄청난 압력으로 사냥감을 옥죈 뒤 사슬들은 섬광의 홍수를 전달하는 광섬유가 되어 천벌을 주었다. 이미 라이텔바흐의 뇌전 세례로 한바탕 약화된 그 군집체는 허무하게 녹아내려 소멸하였다.

 

 

“아직인가.”

 

 

발레리안은 자조적으로 쓴 감정을 삼켰다.

 

 

“그 녀석에 도달하려면 아직 한참인가. 발끝에도 닿지 못했다.”

 

 

자신은 10km 이내의 근거리에서, 그것도 약화된 헬게이트를 요격했을 뿐이다. 반면, 그 재수 없는 자식은 대륙 이끝에서 저 끝을 순식간에 태웠다. 물론 그 인간이 모든 안티-게이팅 에너지의 원천이자 시조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것을 보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역량 차는 분명하다. 만일 동일한 양의 안티-게이팅 에너지를 소유했다고 해도 발레리안은 그자만큼 해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열등감에 젖을 시간이 없다. 덕분에 임무 수행에 들어갈 노력이 절약되었다. 위치상으로는 발레리안 일행이 라이텔바흐 쪽보다 북쪽 탑으로 추정되는 좌표에 훨씬 더 가깝다. 경쟁자의 도움을 받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지만, 굴러온 기회를 발로 찰 필요는 없으리라.

 

 

 

 

 

 

 

 

*

 

 

 

 

 

일이 수습된 다음 날, 헌터 일행은 곧장 북쪽 탑의 추정 좌표로 진격하기로 일정을 수정했다. 라이텔바흐는 플레먼에게 질문했다.

 

 

“따라가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선택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는 만일 플레먼이 모험을 더 원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 그를 남겨두되 재석을 곁에 호위 역으로 붙여놓아 안전히 상황을 관망하도록 허락하겠노라고 제안했다. 사실 평범한 소시민인 플레먼 입장에서는 이쪽이 부담이 덜하다. 그가 특별히 용맹스러운 모험가인 것도 아니니 굳이 만용을 부릴 필요는 없으리라.

 

 

하지만 내면에서 솟구치는 원인 모를 이끌림이 플레먼으로 하여금 다른 선택지를 택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는 헬게이트들이 발생하는 ‘근원지’에 도사리는 불법스러운 비밀을 알기를 원했다. 그저 덮어두기에는 너무 많이 얽히고 말았다. 자신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헬게이트에 대한 ‘면역자’로서의 속성을 지님을 알게 되었고, 여기에 자신은 그중에서도 더 기이한 ‘특이 속성’을 지녔음이 밝혀졌다. 이런 마당에 알기를 거부한 채 덮어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 헬게이트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몰라도 주님께서 이 비참한 땅에 재림하셔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는 이 악한 수수께끼가 풀려야만 하리라.

 

 

“저는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이번처럼 당신을 곁에서 지켜주기에는 역량이 부족할 수도 있어서 그럽니다.”

 

 

맨 처음 여행 시작 당시에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던 것과 말이 조금 달라졌다. 라이텔바흐도 전능함이나 무적과는 거리가 먼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격이다. 그는 사태 격변과 예상치 못한 변수의 개입으로 인해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도 모든 상황에 대처하기는 힘들 수 있음을 인정했다.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선택이니 존중하죠.”

 

 

라이텔바흐는 친구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리며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그의 눈은 아퀼라를 향하였다.

 

 

“같은 대답입니다.”

 

 

아퀼라 역시 두려움 없이 응답했다. 확실히 보통의 어중이떠중이 독립운동가 호소인들과는 다르다는 감상이 들었다. 진짜 위태로운 때에 앞장서서 활동할 수 있는 자격 만점의 위인이라는 뜻이겠지. 라이텔바흐는 저런 유형이라면 믿고 등 뒤의 싸움을 맡길 수 있겠노라고 여겼다. 물론 헬게이트와의 전쟁 말고, 더 궁극적인 원수와의 대결을 말이다.

 

 

“나도 따르겠다.”

 

 

게오르그가 동료들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이 싸움에 어떤 쓸모가 있길래 동행하려 합니까?”

 

 

라이텔바흐가 다소 냉철하게 되받아쳤다.

 

 

“민간인인 당신이 이 여정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저 두 사람의 경우처럼 내가 납득 가능한 적절한 명분이 있어야 할 텐데요.”

 

 

그러자 게오르그가 대답했다.

 

 

“당신이 그때 사용한 그 이상한 보호의 힘, 그게 왜 내게 먼저 이양되었는지 아직 당신 스스로도 다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닌가?”

 

 

그 지적에 라이텔바흐는 흠칫 놀랐다.

 

 

‘이 인간 봐라. 범부는 아니었군.’

 

 

처음에는 다른 소련 잔당의 후손들과 달리 합리적이고 유연하여 대화가 통한다는 점에서 주목했다. 그런데 의외로 진취적이고 당돌하기까지 하다. 아직은 다루기 힘들겠지만, 대화를 통해서 접점을 찾는다면 훗날 이용 가치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이런 판단이 헌터의 머릿속에서 섰다.

 

 

“터놓고 이야기하지.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는 입장인 마당에, 나를 이용하려 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좋다. 이미 그럴 생각이 아니던가.”

 

 

그 말에 한편으로는 기가 막혔다. 본인에게 이용당할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건가. 겉보기에는 분수도 모르는 과대망상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설득력이 느껴졌다. 일단 정답부터 말하자면, 게오르그에게는 잠정적인 가치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라이텔바흐뿐이다. 게오르그 본인도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단지 깡이 있는 사람이라서?

 

 

“뭐, 한 명쯤은 허락할 수 있겠군요.”

 

 

라이텔바흐는 그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켜보는 재미도 있으려나.’

 

 

아마도 게오르그와 아퀼라는 사상 면에서 극명히 다르니 같이 다니다 보면 충돌이 잦아질 것이다. 강제로 함구시킬 수는 있으나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 둘이 대표하는 집단을 모두 이용해야 하는 라이텔바흐 입장에서는 둘 다 잘 이해하는 편이 나으니 토론의 장을 열어두는 게 낫겠다.

 

 

‘플레먼까지 함께한다면 조금은 달라지려나.’

 

 

자신이 두 사람, 아니 두 사상적 집단 모두를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두 분열된 집단 사이에서 화평을 건설할 열쇠는 오히려 플레먼에게 있다. 그 사실은 이미 지난 며칠간 증명되었다. 이런 점까지 고려하여 계산하니 앞으로의 일이 더욱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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