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68회 아벨의 후예 Ch 11. 아브락사스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5.02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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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온은 아직 둘을 신뢰할 수 없었다.
“비난하려는, 혹은 비아냥거리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분명 인류연합이 건설해놓은 시스템 안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왔습니다. 또 남들보다 부유한 편이었고 두뇌와 실력 덕분에 제법 촉망받던 인재였죠. 지금처럼 생활한다면 찬란한 미래가 보장될 가능성이 큽니다.”
둘은 벙어리가 된 채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리온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제가 하려는 일은 세계와의 정면 대결이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다졌습니다. 당신들은 그러하신지요?”
쉬이 솔직한 대답이 나오지 못했다.
“물론 두 분을 영적으로 얕잡아보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저 역시도 처음에는 두려움과 부족함으로 시작했으니까요. 숱한 고난과 역경과 위협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지금과 같은 각오를 한점 부끄럼 없이 내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막상 위기에 봉착하면 제 마음을 온전히 지킬 수 있으리라 장담하기는 어렵겠죠.”
그러자 재현은 조금 처연해진 눈빛으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저는 제가 목사님께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했는데…….”
“도우려는 대상이 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그야 물론…….”
이번에도 자신 있는 대답이 나오지 못했다.
“재현씨는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을 온전하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환원시킬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습니까? 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도전입니다. 저나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만 섬김을 드릴 수 있습니까? 또 자신이 감히 하나님을 돕는 존재가 아닌, 그저 그분의 주권 아래 쓰임받을 수도, 쓰임받지 않을 수도 있는, 미약한 존재임을 인지하고 있습니까?”
재현도 이 촌철살인의 말들 앞에 부끄러움 없이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지만 자신이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온전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너무도 연약한 믿음의 실체가 하나님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 벗겨진듯 들춰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 말이 옳습니다, 목사님. 제가 고난을 겪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이번에는 지현이 바통을 넘겨 받아 변론을 시작했다.
“틀림없이 그것은 제가 받은 연단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겠죠. 하지만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더더욱 의를 위한 핍박을 감내하며 도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껏 저는 편안함 뒤에 숨어 지내느라 ‘주님을 위한 핍박’을 감당할 기회를 놓쳐왔어요. 만일 지금 여기서 물러난다면 앞으로 기회가 찾아와도 비겁하게 물러서기를 반복하겠죠. 그러면 저는 평생 겁쟁이로 머물러있게 될 겁니다.”
법학도답게 청산유수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리온은 그의 각오가 마냥 피상적인 것이 아님을 납득했다. 하지만 역시 말만으로 판단하기는 일렀다. 지현이 증명해야 할 것은 삶을 통한 행동이었다.
“편안함을 버릴 각오가 정말로 되어 있습니까?”
“지금으로써는……, 네, 그렇습니다. 이대로 변화도 없이 머물러있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늘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어요. 제가 너무도 나약한 탓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요.”
윤혁이 카이젤 라흐블뤼크, 강재혁이라는 거물을 상대로 당당하게 맞섰던 것과는 달리, 지현은 자신의 친형 성운을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당당히 복음을 전하지도, 그의 그릇된 행동을 꾸짖지도 못했다. 능력 부족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으리라. 윤혁은 지현보다 두뇌 면에서 모자라나 그럼에도 성운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재혁을 상대로 당당히 맞섰지 않은가.
“물론 막상 위기가 눈앞에 닥쳐올 때 흔들림 없이 견디는 것은 다른 문제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연약함을 잘 압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함도 잘 알아요. 하지만 최소한 그분께 의지를 맡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분도 저를 들어 쓰시지 않을 거예요.”
깊고 풍성한 생각으로 점철된 지현의 고백에 리온은 아주 조금 더 마음을 열었다. 괜찮을까? 저 사람의 변화하려는 몸부림을 좀 더 믿어줘 봐도 될까? 이에 리온은 다시금 조심스럽게 시험을 해보았다.
“편안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선교 여행 때 저는 수차례 이상 위기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때마다 경이로운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대화하지도 못했겠죠. 순교자 행세를 하려는 것도, 자랑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두 분도 같은 일을 겪을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순교라는 막막한 대목이 언급되자 더욱 가슴이 갑갑해졌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재현보다도 지현 쪽이 더 걱정되었다. 최소한 재현은 전쟁터에서 싸워보기라도 했지, 지현은 평생 싸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으니까. 복음이 전쟁과 같은 차원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더 치열하고 두려운 도살장이 복음 전파의 현장이다.
‘게다가 천재현씨라고 딱히 나은 상황은 아니지.’
오히려 호재는커녕 그 반대일지도? 재현은 분명 인류연합의 표적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막강한 무력을 지녔으니 그만큼 더 주목을 많이 받으리라. 만약 정말로 초인들이나 인류연합 시스템이 그를 없애야겠다고 작정하고 개입한다면 초개처럼 목숨을 잃는 것은 무력한 리온이나, 강력한 재현이나 매한가지다. 재현이 제아무리 강해도 인류연합이나 시스템 앞에서는 새 발의 피일테니까.
“재현씨는 승산 없는 싸움터에 기꺼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확실히 지금까지 저는 저보다 약한 상대와만 싸워왔습니다. 제가 목숨을 바칠 용기가 있다고 감히 평가하기는 어렵겠네요.”
의외로 재현은 솔직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의 실태를 평가했다.
“그런 면에서……, 목사님은 대단하세요. 위험과 직접 맞부딪히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두려움의 감정을 주님의 권면만으로 이겨내신 거잖아요.”
재현의 정직하고 곧부러진 칭찬에 리온은 괜히 뜨끔하며 시선을 피했다. 과장이 없는 칭찬임은 분명하나 그렇기에 조금 낯이 달아올랐다. 쓸데없는 부분에서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사람이로군.
“솔직히 힘이 강한 건 그리 자랑할 게 못 돼요.”
재현은 계속해서 자아성찰을 하며 씁쓸히 중얼거렸다.
“아무리 인간이 강해져 봐야……, 설령 강윤혁씨네 형님쯤 되더라도 영적 세계의 존재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또 그 영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먼지만도 못하죠. 그리고 마냥 두려운 감정을 안 느끼는 건 용감한 게 아니라 그냥 고장 난 거예요. 정말로 대단한 건 힘도 약하고 두려움을 느끼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을 굳건히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이에요. 그게 진정 가치 있는 용기이겠죠.”
자신도 그런 용기를 얻게 될 날이 올까? 저 작은 체구의 용맹한 목사처럼? 힘을 사용하여 자신보다 강한 자를 이기는 승리가 아닌, 주님을 믿고 자신의 목에 들어온 칼을 받아들이는 용기. 그런 마음을 제대로 배워볼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승리한 삶이 아닐까 하는 기대가 들었다.
두 사람은 좀 더 숙고해볼 기회를 줄 것을 리온에게 간청했다. 마지못해 리온은 사흘 후에 다시 뵙겠노라고 말했다. 단, 숙려의 기간 동안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과 영혼을 올곧게 붙잡을 자신이 없거든 포기하라고 권면했다.
재현과 지현은 집으로 돌아간 뒤 많은 생각을 하며 고민했다. 그들은 자신이 주님을 위해 정말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지 냉철히 점검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로만 다짐해서는 증명할 방안이 없었다. 둘은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객관화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잃어버려야 할 것의 목록을 하나하나 수첩에 적어 되새김질하였다. 혹시라도 아직 버리지 못한 것이 있을까? 조바심을 가라앉히며 차근차근 되돌아보았다.
지현의 경우 달콤한 안락에 대한 유혹, 그리고 재현의 경우 기껏 되찾은 가족의 품에 대한 미련이 무거운 걸림돌로 찾아왔다. 그때마다 그냥 포기하고 임무는 더 나은 사람에게 맡길까 하는 고민도 해보았다.
하지만 자기들이 적합한 인재가 아니므로 포기해도 된다는 식의 어설픈 변명은 스스로 돌이켜봐도 합당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충분히 리온을 도울 능력이 있었다. 만약 그 달란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닌 본인들의 나태함 탓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나서지 못하도록 금하는 명령은 하지 않으셨다. 남은 건 단지 그들이 파도 저편에서 부르시는 주님의 명령에 기꺼이 몸을 맡길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
임시용 생활시설에 구금되어 있던 111명의 이레귤러들은 돌연 허공에서 출현한 메시지에 화들짝 놀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것은 외부 장치에 의한 통신이 아닌,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듯한 간섭이었다. 통일시스템이 모든 통신 회로를 우회하여 그들의 뇌리에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심어 넣는 중이었다.
그들의 뇌가 저절로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주고 받는 정보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하게끔 하는 제약이 그들의 뇌리에 걸렸다. 거역하지 못할 강력한 명령어였고 자유의지마저도 억누르는 힘이었다. 심상치 않았다. 이레귤러들은 과연 메시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두려워 다음 내용에 주의를 기울였다.
{WARNING : 해당 내용은 A등급 보안이 걸려있습니다.}
{정신간섭 개시, 최상위 등급 마인드 컨트롤 가동.}
비밀 봉쇄.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미리 누구와 상의할 수도 없고 대처할 수도 없게 강제하는 막강한 제약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심겨졌다. 스테판은 그 불쾌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프로젝트 : Irregular Survival Contest 111}
통일시스템으로 추측되는 어떤 존재가 해설을 시작했다.
{여러분은 내년 1월부터 펼쳐질 서바이벌에 참여하게 됩니다. 응시하지 않는 이들은 불법자로 간주할 예정입니다. 경합에 참여하는 이에게는 공정한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1월부터 4월까지는 준비 기간, 그 후에는 총 세 차례의 경합이 열 달 간격으로 펼쳐집니다. 최종적으로는 단 한 명만 남게 됩니다.
1차 탈락자들에게는 현재와 동일한 수준의 처우가 주어지되 별도의 추가 혜택은 없습니다. 2차 탈락자들에게는 제한된 자유와 함께 소정의 시민권 혜택이 주어집니다. 3차 탈락자들에게는 1등 시민권과 함께 반영구적인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최종 우승자에게는…….}
듣기만 해도 몹시 파격적인 제의였다. 대체 어떤 주제를 종목으로 서바이벌 경기를 하겠다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어쨌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수용소로 가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치 못하는 상황에 처하느니, 차라리 밑져야 본전이라 계산하고 과감히 도전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 처음부터 이 게임은 인류연합의 의도대로 놀아날 수 밖에 없는 늪이었다.
이레귤러들은 각자 마지막 문장에 귀를 기울였다. 탈락한 자들에게도 뭔가를 베푼다면 대체 승리자에게는 무엇을 주겠다는 말인가? 무려 상대가 통일시스템, 정확히는 그 배후의 왕인만큼 가벼운 품목이 제시될 것 같지는 않았다.
{현 인류연합 대표께서 계약을 공증하신 뒤 직접 소원을 들어주실 계획입니다. 단, 이 소원은 우승자 개인의 신념과 완벽히 합치되는 소원이어야 합니다. 타인에 의해 강요된 소원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또한 신중하게 생각하고 임하십시오. 경합 과정 및 우승자의 소원 선택 과정은 그분의 판단 여하에 따라 인류에게 공개적으로 선포될 수도 있습니다.}
현재 모인 이레귤러들은 일단 인류연합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기독교 신자들이긴 했다. 아울러 그 신앙의 힘을 빌려 나름 정신적 자유를 위한 토대의 일부도 얻었다. 즉 신앙의 아이콘으로서 대표된 여건은 충분했다.
그런데 그랬던 이들이 이제는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그 모습은 세상 앞에 공개될 것이며 냉정하게 평가받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경쟁 과정, 의견 대립을 조율하는 모습, 최종적으로 어떤 소원을 선택할지까지, 이 모든 과정에서 드러날 개인의 신념과 본색과 민낯을 전 인류가 판단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개인들에 대한 평가를 넘어 기독교 그 자체를 시험하는 중대하고 위험한 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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