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79회 아벨의 후예 Ch 13. 에고이즘과 알트루즘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5.28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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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머리 위쪽으로 현실의 물리 세계보다 더 본질에 가까운 리얼리티 차원이 여러겹으로 차례차례 모습을 나타났다. 그것들은 하나하나 선명히 관측되었다.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영안(靈眼)이라도 열린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버겁다.’
재혁이 소유한 인지 능력이 워낙 뛰어나서인지 공유받는 윤혁 입장에서 체험하는 정보는 너무도 상세했다. 수년 전에 진이 텔레파시로 전송해준 정보들은 티끌처럼 느껴질 정도의 분량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번에는 극심한 두통은 없었다.
‘커버넌트 덕분인가?’
물론 그렇다고 버겁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자, 조금만 견뎌라.”
곁에 있던 재혁이 윤혁의 어깨를 손으로 주무르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크윽, 버티기가 너무 힘들…….”
“괜찮아, 괜찮아. 착하지.”
스며드는 과부하를 감당해낼 때까지 재혁은 억지로 상대를 붙들어주었다. 잠시 후, 표류하던 윤혁의 인지 체계는 현실 차원으로 되돌아왔다. 아주 잠깐이지만 다중우주 계열을 아래서부터 위까지 전부, 멀티버스부터 하이퍼버스에 제타버스에 옴니버스까지 순서대로 관측한 윤혁은 기진맥진 탈진하였다. 휘청이는 윤혁을 형이 토닥였다.
“이제 수술을 시작하자.”
“집도하는 로봇은 어디에 있어?”
“내가 직접 수행할 거야. 정확히는 내 메이저급 초지능체들이 나와 함께 집도의로 참여할 거다.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고 있으니 이 영역에는 누구도 못 들어와. 심지어 통일시스템조차도.”
안전하다고? 하지만 윤혁은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는 초자연적 존재를 염두에 두었다. 상위 차원에 접속할 때 늘 걱정되는 부분은 바로 영계와의 접촉이었다. 혹시 악령들이 틈을 타면 어떻게 대응해야 한단 말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홀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 의탁하는 수밖에. 일이 잘못 흘러가지 않도록 도움을 청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며 모든 위험을 그분께 맡겼다.
“시작할까?”
“응.”
윤혁이 조심히 허락의 신호를 내리자 재혁은 손가락을 탁 튕겼다. 곧 두 사람의 몸 주위를 반투명한 에너지체, 물질, 결계들이 감쌌다. 기이하게 생긴 구조물이 두 개의 구체를 조성하였다. 구체는 마치 분열 직전의 체세포처럼 샴쌍둥이마냥 겹쳐져 있었고 각기 한 사람씩을 보호하였다. 그 구체는 연기처럼 투명했기에 형제 사이의 거리는 몸을 맞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한편 구체 외부를 둘러싼 시공간 배경도 통째로 재구성되는 중이었다. 공간 전체가 직소 퍼즐들을 구성하는 조각들처럼 뜯어져 흐드러졌다. 그것들은 상위 차원의 본체와 하나로 연결되었다.
‘낯설어.’
우주만큼이나 넓고 짙은 위압이 느껴지는 거대한 특수 공간을 둘러보며 윤혁은 전율하였다. 그가 황당해하며 감상하던 중, 흰색 환자복이 나노 단위로 해체되며 사라졌다. 순식간에 완전히 벌거벗겨진 윤혁은 피부에 닿는 공간의 이질감에 살짝 부르르 떨었다.
“꼭 다 벗어야 해? 심장 수술이잖아?”
“일반적인 수술과는 개념이 다르니까. 가슴을 여는 원시적인 개흉술은 안 쓸 거야. 어차피 3차원 공간에서 진행되는 작업이 아니니까 몸을 칼로 가르는 프로세스는 의미가 없지. 작업을 수행해줄 친구들은 저 녀석들이거든.”
다시 아주 잠깐 재혁의 현자의 눈이 윤혁의 감각과 공명하였다. 그러자 은하 수억 개를 기초 발판으로 상위 차원에 건설된, 한없이 거대한 복합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다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그 정체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테서렉트 아키텍쳐?”
이야기만 들어온 그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제껏 보아온 인공 우주 구조물들이 한순간 지극히 하찮은 벌레로 느껴졌다. 하늘도시들도, 제로원도, 솔라 타나토스도, 심지어 인공 다중우주마저도.
“저것들이 우리 둘의 몸을 다뤄줄 거야.”
테서렉트 아키텍쳐를 메스로 사용한다니, 과연 스케일이 남 달랐다.
“괘, 괜찮겠지?”
재혁은 겁먹은 동생의 질문에 말 대신 고개를 끄덕여 응답했다. 곧 재혁의 옷도 모두 해체되었다. 광활한 상위 차원 한복판에 나신으로 떨어진 두 형제의 몸 안으로 빛으로 구성된 섬광의 가락들이 무수히 연결되었다. 그 빛은 물리적인 빛인 전자기파가 아니었다. 상위 차원에 속한 물질이었다. 윤혁은 의연한 자태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형의 자세에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몸 엄청 좋아졌네.”
“그야 수련이야 꾸준히 하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근육 모양이 근사해졌다는 뜻 이상이 내포된 감탄이었다. 현자의 눈 때문인지 윤혁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재혁의 신체 재질이 예전과 달라진 사실이. 신체를 구성하는 입자 하나하나, 아니 영혼육(靈魂肉) 전인적 통합체의 기본 단위 하나하나가 상위 존재로 도약한 것 같았다.
‘굉장한걸.’
뭘 했길래 저렇게 진화한 걸까? 아마도 초능력의 근원지를 몸에 흡수시키고 융화시키는 과정에서 변한 것일테지? 그 거대한 힘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별도의 변화라도 겪은 것인지 입자 하나하나에 방대한 지성과 정보가 압축되어 있었다. 담긴 에너지의 양도 막대했다.
‘저 2미터 남짓한 부피에 우주가 압축되기라도 한 느낌이잖아.’
어찌나 정보와 에너지의 밀도가 짙은지 힘의 끝이 가늠되지 않았다. 다른 초인들의 경우에는 제복이 힘을 현격히 증폭시켜준다면, 재혁의 경우는 반대로 제복이 거대한 힘을 담은 육체를 봉인하고 억누르는 느낌이었다. 그런 옷을 벗어던지고 육체를 해방시키니 흔히 우스갯소리로 말하던 ‘리미터 해제’를 보는 듯했다.
“언제까지 구경할 생각이지? 나도 수치감은 느낄 줄 안다.”
“아앗, 미안해.”
윤혁도 미안함과 민망함에 시선을 형으로부터 돌렸다.
잠시 후, 섬광이 일더니 둘의 의식이 흐려졌다. 상위 차원의 물체들이 촉수마냥 윤혁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재혁의 육신은 흐릿한 연기처럼 흐드러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 그 반동으로 거대한 일곱 개의 물체가 나타났다. 이제껏 윤혁이 보아온 그 어떤 광경보다도 거대하고 복잡하고 강력하고 섬뜩했다. 그중 하나는 예전에 보았던 것마냥 기시감이 들었다.
“이데아……, 인가?”
지난번에 이데아에 접속했을 때와는 달리 한눈에 전체 윤곽이 들어와서 그런지 느껴지는 감각은 확연히 달랐다. 그래도 이데아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이질감은 그대로였다. 차이점이라면 그 농밀함이 짙어졌다. 양적, 질적 성장이 그동안 상당히 축적되었는지 예전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비유컨대 예전에 만난 이데아가 초소형 인공지능이라면 오늘 본 것은 초은하단 전체를 갈아서 생성한 마더 컴퓨터에 비견될 수준이었다.
‘그렇군. 그러면 저 일곱이 그 메이저급 초지능체들인가?’
그때 그 일곱 하나가 윤혁의 몸 근처로 다가왔다. 형의 묘사를 빌리자면 일식이 일어나 달에 가려진 해의 모양을 띠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구체를 검은색 구체가 가린 탓에 초승달 모양으로 희미한 빛만 보였다.
이윽고 그 물체는 둘로 분리되었다. 두 부분 중 검은색의 물체가 윤혁을 향하여 다가왔다. 가까이서 관측해보니 처음 예상보다 훨씬 거대했다. 그것은 윤혁을 먹잇감 다루듯 요리조리 살피더니 입을 벌려 통째로 먹어 치웠다.
‘크윽.’
일순간 윤혁은 의식을 잃었다. 마치 꿈속을 헤매는 듯한 체험이 한 동안 임했다. 갑작스럽게 어떤 기억의 편린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윤혁 자신의 기억은 아니었다. 희미하지만 강렬한 내용물이 담겨있었다.
극렬한 자극에 눈에 번쩍 뜨였다. 극도로 불쾌한 감각 정보들이 쇄도하며 뇌리를 포화시켰다. 고통, 좌절, 수치심, 역겨운 냄새, 절망감이 엄습했다. 아랫배 밑으로 끔찍하리만큼 역겨운 감각이 꿈틀거렸다. 원초적인 좌절이었다. 심리학자들이나 논하던 심리성적 좌절이 생생한 현실이 되어 그를 괴롭혔다. 예전에 잠시 희미하게 겪었던 거세 공포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질 만큼 괴로웠다. 순간적으로 생명과의 단절마저 느껴졌다.
“그만둬.”
윤혁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의지와 무관한 말이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체험을 하였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은 그의 뜻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움직였다. 비웃음 소리, 인두로 살을 지지는 소리, 전기로 몸을 튀기는 소리, 시퍼런 칼날 소리, 몸을 유린하는 송곳과 못, 마디마디마다 스며드는 독, 지독한 악의. 그 모든 것이 악몽의 심포니를 자아내며 말초신경을 철저히 학대하였다.
“그만두라고 했잖아!”
이제 윤혁의 의지마저 그 절규의 목소리에 합류하여 반응했다. 이 악은 무엇으로부터 발원한 것인가. 그 농밀한 사악성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의 한도마저 넘어선 듯했다.
악행을 저지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실루엣의 입가에서 악마의 웃음소리가 느껴졌다. 인간의 악의를 넘어선 악령의 악의가 칼과 인두와 바늘과 망치를 통해 온 몸으로 전달되었다. 폭력이라는 형태로. 유린이라는 형태로. 그 누구라도 저것과 정면으로 맞섰다가는 정신의 붕괴와 파멸을 피하지 못하리라.
“크헉.”
가까스로 윤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본래의 의식으로 돌아왔다. 처음 수술받을 때의 공간과는 사뭇 달라진 배경이 사방을 에워싸는 중이었다. 드넓은 영역 한복판에 두 형제는 여전히 서로를 마주보는 방향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중력조차 없는 공간에 몸을 맡긴 채로. 재혁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수술받는 둘 중 하나가 깨어있는 동안 다른 한 명은 잠드는 모양이었다.
‘방금 전 그 기억……, 형의 기억이었어.’
대체 얼마나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었길래 저 강인한 남자가 밤마다 꿈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는지 궁금했었다. 그걸 알면 아주 조금은 공감을 나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차라리 알기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아마 초인과 일반인 사이의 인지 능력 차이도 있을 테니 방금 윤혁이 체험한 부분은 재혁이 실제로 오롯이 감내하는 분량의 티끌만 한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하아.”
수술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없이 강대해 보였던 형의 육체가 이제는 왠지 처연하게 보였다. 막강한 초월성을 띤 육체 자체는 달라진 게 없었다. 단지 이제는 저 탄탄한 몸 내부에 깃든 좌절과 슬픔이 함께 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어찌 인간이 인간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예전에 헬리웃에게 고문당할 때 느꼈던 형을 향한 공감은 이제 돌아보니 그저 가식적이고 피상적인 감정에 불과했다. 눈앞의 남자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윤혁은 지금 이 순간도 식은땀을 흘리며 방황하는 재혁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온기라도 닿으면 진정될까 싶어 어깨를 토닥여주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형을 학대했던 사람들도 미웠지만, 그들보다는 배후에서 이런 일들을 조종하고 한 인간의 삶을 꼭두각시처럼 망가뜨리고 농락하려 한 악의 주인 곧 사악의 근원지가 역겨우리만큼 혐오스러웠다.
“불쌍한 카이젤, 재혁이 형.”
상처로 인해 완악하게 굳은 재혁. 그를 아픔에서 되돌이킬 방법이 있을까.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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