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80회 아벨의 후예 Ch 13. 에고이즘과 알트루즘 (6)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5.30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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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공간 내부에서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재혁과 윤혁은 잠들고 깨어나기를 교대로 무수히 반복했다. 한번 잠들 때마다 정신세계에서 억겁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탈진할 법도 했지만, 몸과 정신 모두 의외로 멀쩡했다.
윤혁은 서서히 자신의 몸이 달라짐을 느꼈다. 정신이나 영혼은 멀쩡하다 못하여 처음과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신체 리듬은 확연히 달라졌다. 배고픔이나 졸림, 배변욕 등의 생리적인 욕구에 대해서 확연히 자유로워 진 것이 느껴졌다.
물론 생리적 리듬이나 욕구 자체는 정상이었고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비충족으로 인해 생기는 불편함이나 제약은 없었다. 예를 들어 구태여 먹지 않아도 에너지를 생성해낼 수 있음을 알리는 생체 신호가 온몸의 세포에서 생생히 전달되었다. 그렇다고 식욕이나 소화 기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즉 기존의 모든 생체 기전은 그대로 유지하되, 그 어떤 환경적 제약이나 변화에도 구태여 종속되지 않는, 그야말로 어디서든 생존이 가능한 몸이 되어버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슬프네.’
어쩐지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한꺼풀 탈피한 것 같아 마음이 몹시 씁쓸했다. 그래도 최소한 생리적 욕구 자체는 남아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마저도 없어졌다면 인간이 아니게 된 것 같아 자괴감이 컸으리라. 친구들과는 달리 늙지 않게 되어버린 사실은 안타깝지만.
아니지. 다시금 생각해보니 어차피 이제는 조만간 모든 인간이 피코머신을 의무적으로 투여받거나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노화를 극복한 몸이 될 테니 결국은 모든 사람이 피장파장인 입장이 될 것 같다.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자연적으로 노화되는 편을 택하게 되겠지.’
만일 피코머신이란 것이 강제 접종 제도로 제공되지 않으리라는 가정 하에서는 그럴 것이다. 리온도 루디아도 메시아닉 유대인들도 엄마도, 굳이 찝찝하고 자연적이지 않은 길은 택하지 않겠지. 물론 장차 피코머신이 원치 않아도 모든 인간에게 저절로 스며드는 식으로 유통된다면 이런 가정도 무의미하겠지.
과연 자신처럼 불로의 운명에 처해진 자들은 지인 중에 누가 있을까? 천재현이나 크로스솔져들이나 스테판은 이미 강제적으로 피코머신이 주입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경우 몸뿐이나마 초인의 속성을 띠었으니 꽤 오래 장수를 누릴 것이고 그만큼 오랜 시간을 공유할 수 있겠지. 나머지 사람들은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에 심란해졌다.
“윤혁아.”
숙고에 잠긴 도중 재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윤혁은 잠에서 깨어났다. 마침내 긴 수술이 끝났다. 기괴한 수술용 시공간이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원래의 실험실로 돌아왔다. 형제는 긴 시간 생체 실험으로 진이 빨려 탈진했는지 옷을 갖춰입는 것도 잊은 채 맨몸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두 번 다시는 못 할 짓이네.”
“고생했다. 자, 그래. 불사신이 된 기분은 어떻지?”
“꽤 부담스러워. 내가 원해도 이제 되돌이킬 수는 없는 거지?”
“당연히 불가능해. 너와 나는 죽더라도 동시에 죽을 수밖에 없다고 봐도 돼.”
“거참 무서운 말이네.”
이번 실험을 통해서 이터널바이탈의 두 부분 중 알트루즘 파트는 강윤혁이라는 존재의 일부로 완벽하게 재설정되었다. 하필 테서렉트 아키텍쳐, 현자의 눈, 메이저급 초지능체까지 동원해가면서 무리하게 복잡한 실험을 수행한 이유는 바로 이런 ‘한 객체의 존재를 규정하는 경계선’을 다시금 규정하기 위함이었다.
재혁은 이 부분을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주었다.
“너의 몸은 너의 일부이지?”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 그건 왜?”
“하지만 네 옷은 너의 일부분이 아니겠지.”
“물론이지?”
윤혁은 재혁의 당연스러운 질문에 고갯짓으로 응답했다. 그 순간 이해와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어쩐지 왜 굳이 두 사람 다 나신으로 실험에 참여해야만 했는지 얼추 감이 잡혔다. 수술의 메커니즘이 ‘존재의 재설정’인 탓에 그랬으리라. 애초에 존재의 경계를 올바르게 설정하려면 옷 같이 자기 자신이 아닌 부분은 배제해고 오로지 자신이라는 경계선 안에 담을 것들만 포함시켜야 하니까.
“이제 알트루즘은 네 일부분으로 완벽히 인정을 받아 자리매김했다.”
“그런 원리였구나.”
윤혁은 몸의 관절들을 움직여보며 이상이 없는지 차분히 확인해보았다. 기력이야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딱히 고장난 부분은 없는 듯했다. 피부는 기미나 여드름이나 흠집도 하나 없이 백옥처럼 깨끗했고 골격의 대칭성도 잘 맞는 듯했다. 자잘한 흉터도 전부 사라졌다. 단순히 생리적 욕구의 비충족이나 질병 같은 내적 불균형만 해소시켜주는 것은 아닌듯했다. 외형적으로도 온전한 조형 질서를 회복시켜주는 것으로 보였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형.”
“뭐가?”
“그, 상처 주려는 건 아닌데……, 왜 아직 형의 흉터의 치료가 안 되는 거야?”
이터널바이탈이나 피코머신이 있는데도 왜 재혁의 몸에 남은 흉터는 낫지 않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애당초 이상하긴 했다. 남성 초인들은 극도로 우수한 생식 기능을 보유했다고 들었다. 왜 유독 재혁만 저런 상태인가. 분명 최강의 신체를 가졌으면서 말이다. 혹 이터널바이탈도 그 흉터가 남아있는 편이 그에게 더 적격이라고 판단을 내린 걸까?
“미안해. 또 쓸데없는 질문으로 곤란하게 했지?”
“아니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는 괜찮아.”
구태여 수치를 은폐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동생은 편안한 상대니까. 굳이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도 고쳐주고 치료해주고픈 마음이 앞서서 그런 것이겠지. 그 점만으로도 기특하게 봐줄만 했다.
“피곤하다.”
“편히 쉬어라.”
윤혁이 졸음과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풀썩 쓰러지자 재혁은 동생의 머리를 자신의 몸에 기대도록 허락했다. 그는 염동력으로 물을 움직여 자신과 동생의 몸에 묻은 약품들을 씻어낸 뒤 나노슈트로 대강 옷을 형성한 다음 동생의 몸 위에는 부드러운 모포를 덮어주었다. 그는 그렇게 주저앉은 상태로 잠시 숨을 고르며 기력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데미안 룩스!”
“네, 대표님.”
어느 정도 쉰 카이젤은 앉은 채로 비서를 불렀다. 마침내 입장 허가가 떨어지자 비서관이 실험실에 들어왔다. 딱히 실험이 잘못될 것을 걱정하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맹수 같은 자태로 웅크리고 있는 주인의 발치에 한 일반인 청년이 세상 모르고 누워있는 모습에 순간 당황했다.
“그렇군요. 저분이 아우분이십니까?”
“그래, 이 순간부터 강윤혁은 인류연합의 특별 보호 대상이다. 네 아바타를 그의 곁에 붙여둬라. 조만간 강윤혁을 외계행성으로 파견할 예정이다. 그의 순회 임무를 네가 보좌하도록.”
붉은 머리의 데미안은 현재 우주 인류 프로젝트 2단계가 전개되는 그곳들을 떠올렸다. 대부분은 대강 순조롭게 진행 중이지만 1% 정도의 지역은 악명높은 서바이벌 전쟁으로 점철되었다는데. 보스는 애지중지 아끼는 동생을 어째서 그런 사지로 보내는 것인가?
“이분의 설마 중요한 인자를…….”
“정답. 이 아이의 심장은 이제 나의 일부로 교체되었다.”
“설마 다섯 번째 초지능체를?”
“그래.”
데미안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면 아우분께서도 이제는 불사신이겠군요.”
카이젤과 윤혁. 두뇌와 심장. 에고이즘과 알트루즘.
이제 두 사람은 위버멘쉬와 억제자라는 영적 관계와 커버넌트를 통해서 이뤄진 혼의 연접, 태생적인 유전자 교류에 더하여 추가적으로 새로운 관계의 연결고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서로를 다중 결합으로 칭칭 옭아맨 격이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둘의 인생은 멍에를 같이 공유할 수 없는 두 마리의 소처럼 정반대의 행로를 보이는 중이다. 둘은 서로 상대의 주도권을 쥐고자 극렬히 줄다리기를 하게 되리라.
“그나저나 외계행성이라.”
붉은 머리 비서관은 최근 전해진 소식들을 되새겨보았다.
“대표님께서 개발한 QUASAR-II의 통제력이 외계행성들에 닿은 뒤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확실하게 일어났습니다. 인류가 몇 년간 힘겹게 테라포밍에 힘써온 노력이 무색해질 지경입니다. 행성과 항성의 환경을 손쉽게 뒤바꾸는 혁신……. 과연 두렵군요.”
데미안도 그 기술의 파급력이 이리도 클 줄은 몰랐다.
테라포밍이라는 작업이 원래는 얼마나 복잡하였던가. 낮은 차원의 테라포밍은 물론 이전 시대에도 있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테라포밍’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으로 현 시대에 와서야 확립되었고 그마저도 손이 많이 가는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일단 항성의 물리 조건을 일일이 조정하여 지구의 태양에 근접한 수준으로 맞춰야 한다. 행성의 운동 궤도는 물론 이웃 행성들의 궤도도 재조정해야 한다. 게다가 행성 크기와 자전축은 물론이고 대지와 대기의 재질과 배치 형태도 일일이 맞춰야 한다.
이런 미세조정을 아무렇지 않게 이뤄낸 우주의 창조주에 대해 저절로 경외감이 들 지경이었다.
다만, 이것도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항성혼과 행성혼을 조율할 힘을 얻은 뒤로는 대단한 반전이 벌어졌다. 한 인간이 마치 대지의 신, 태양의 신이라도 된 양 항성계의 물리 조건을 쉽게 제어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일을 가능케 한 매개체인 QUASAR-II가 상식을 부수는 정신나간 발명품임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어쨌건 인간의 손에 그 권력이 들어온 건 현실이다. 사실 진정 무서운 것은 발명품 자체가 아닌, 그 힘을 통해 테라포밍의 패러다임을 개혁하는 법을 알아낸 카이젤의 통찰력과 창의력이었다.
앞으로 강윤혁이 내던져질 실험실들은 바로 그 QUASAR-II에 의해 테라포밍 당할, 카이젤의 창조성에 대한 열매로서 거둬들여질, 각계의 외계행성들이다.
“잊진 않으셨겠죠.”
데미안이 이와 관련해 주의점을 상기시켰다.
“라&가이아 프로젝트에는 당신의 조수들도 동원되었잖습니까. 아크삼형제의 분신들이 곳곳의 외계행성들에 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
“그리고 피코머신 프로젝트는 라&가이아 프로젝트와 직접적으로 연동되는 쌍둥이 프로젝트입니다. 그러므로 강윤혁님이 맡은 알트루즘은 그녀들의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이식한 인간이 우주를 배회하는 것을 감지하는 즉시 그녀들이 움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따라가야지. 내 권위를 대신 행사하기 위해 말야.”
카이젤은 새근거리며 조용히 잠든 동생의 뺨을 살살 쓰다듬으며 비서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니, 그답지 않게 명령투가 아니라 부탁 조로 요청하였다.
“내 동생을 잘 부탁한다, 룩스.”
“알겠습니다.”
주인에게서 독특한 면모를 발견한 데미안은 속에서 의구심이 솟구쳤다. 그가 내내 섬겨왔던 아브락사스가 이제 또 다른 방향으로 존재적인 변혁을 일으키려 한다. 그것이 껍질을 깨트리는 방향일지 아니면 기반부터 송두리째 붕괴하는 방향일지는 모르겠지만, 주목해볼 가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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