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03회 아벨의 후예 Ch 21. 수치심의 극복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8.06 | 회차평점 ![]() |
Chapter 21. Intergalactic : 수치심의 극복
인터갤럭틱 호는 항성계에서 항성계로, 은하계에서 은하계로 넘나드는 여정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윤혁과 루디아는 온갖 행성들에 발을 내디뎠다. 가는 곳마다 험난한 시험이 기다렸다. 매번 에고와 같은 권세자가 직접 얼굴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핍박하고 괴롭히려는 의지가 행성 전반에 녹아있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윤혁은 크게 고생하고 회복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어느 정도의 경험이 쌓이자 루디아의 도움 없어도 몸 간수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루디아는 그의 치유를 돕고픈 마음에 종종 조급해졌지만, 이 또한 주께서는 아무 때에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적인 수단이 모두 차단된 이후에야 주께서 사랑하시는 이를 고치시는 일을 믿음의 눈으로 지켜보도록 훈련받았다.
때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이미 그들이 보유한 물리적 수단을 통해 치유의 기적을 맛보았다. 몹시 애는 타들어갈지언정 주님께 대한 신뢰와 윤혁을 동료로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예전보다 확연히 깊어졌다. 이렇게 그녀는 한 사람을 돕는 동반자로서 완성되어갔다.
한편 윤혁은 재물에 대해 청지기 정신을 확고히 다지는 법을 배웠다. 훈련 후에는 시험이 따랐다. 재혁은 동생에게 천문학적인 자본 포인트를 지급하였다. 더욱이 기하급수적으로 봉급이 증가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마도 예전부터 몹시 그렇게 하고 싶어 안달 난 모양이었다.
과거 같았으면 윤혁의 양심이 그 무리한 물질적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운 종류의 명령이 주님으로부터 내려졌다. 한 행성을 떠나기 전에 그 돈을 단 한 푼도 남기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재물이란 모름지기 가난하고 절박한 이에게 먼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천국의 질서였다. 윤혁은 천국 시민으로서 이에 순종해야만 했다. 이것은 강제적인 질서라기보다는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할 의무였다.
물론 현 인류는 물질이라는 차원에서는 부유했다. 절박하게 물질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아직 2등 시민권조차 받지 못한 저 외계행성의 신입 주민들조차도 말이다. 다만, 비시민들에게는 한 가지 절실히 필요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첨단 의료의 혜택이었다.
외계행성의 주민들에게는 피코머신이 주입되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죽을 듯 말 듯 한 환경 부적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간간히 버텨내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이상의 특수 의료가 전폭적으로 제공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부적합한 환경에 대한 적응력 획득이 그들의 임무였으니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을 면제하여 훈련의 의미를 퇴색시킬 이유도 마땅히 없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인류연합 측에서 그렇게 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카이젤의 2단계 우주 인류 프로젝트의 룰을 엄격히 준수했다. 애당초 사람들을 향한 순수한 사랑보다는 인류라는 종족 차원의 야망이 그들에게는 우선시되었던 것이다.
비시민들에게도 물론 자본 포인트 시스템은 적용되었으나, 아직은 시민권 부여가 안 되어 시스템이 완벽히 활성화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정 단계 이상의 특수 의료 혜택에 대해서는 경제권을 행사하는 데 제약이 따랐다.
다행히 우회로가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구제 차원에서 시민이 재산을 베푸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용이 워낙 많이 소모되기에 일반 시민으로서는 선뜻 감당하기 어려웠다. 특히 특수 의료에는 특수 유형의 포인트가 요구되었고 그 포인트의 공급량은 다른 종류의 포인트에 비해 적었다.
그런데 바로 그 특수 포인트가 윤혁의 수중에 다량 들어오게 되었다. 그의 봉급을 모두 다 털어 넣으면 생각보다 많은 수의 우주 인류 비시민들이 특수 치료를 받을 수는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 재산을 모두 특수 의료를 위한 자본으로 변환하여 네가 밟는 땅의 현지 주민들에게 주거라. 네 눈에 곧장 띄는 자들 위주로 베풀거라.]
윤혁은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에 형이 주는 재산에 대해서 한 점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룰에 익숙해지자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다. 돈으로 인한 염려가 마음에 깃들 여지가 원천봉쇄된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그 돈이 없어도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데 불편할 게 없지 않은가.
그래도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있었다. 왜 굳이 눈에 닿는 자들에게만 구제를 베풀라고 명령하셨을까?
‘외계행성 개수가 얼마나 많은데……, 그것만으로 괜찮을까?’
그 속생각이 단번에 읽힌 것인지 기도 응답이 불현 듯 돌아왔다.
[너는 늘 불특정 다수를 향한 연민만을 품어왔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온전히 네것으로 소화된 연민이 아니다. 당장 네가 모든 어려운 이들을 빠짐없이 구제해줄 수 있느냐? 네 현실적인 여건으로.]
“아,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 시공간에 묶여있는 한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지.]
마음 같아서는 전 인류의 치유, 전 인류의 평화, 전 인류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다. 실제로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으로 그친다면 불특정 다수를 위한 관념상의 애정에 머무는 꼴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한 관념상의 사랑만을 품으면 자연스레 사랑은 실제적인 차원에서 떨어져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차원으로 전락한다. 그렇기에 얼굴 맞댈 수 있는 가까운 이웃, 특별히 시선에 닿는 이들에게 적극적인 사랑을 보여야 하는 것이 인간의 책무인 셈이다.
“주님께서 왜 굳이 똑같은 의미인데도, ‘다른 인간’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로 표현하시지 않고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단어를 택하셨는지, 이제 조금은 감이 잡힐 것 같습니다.”
윤혁의 깨달음은 이렇게 조금씩 더 깊어져갔다.
[실망하지 말거라. 나 역시 물질계에서 인간의 몸으로 살았을 적 내 시야에 닿는 이들을 위주로 치유를 베풀지 않았더냐.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신으로서 접근했더라면 한 순간에 세계의 모든 병을 동시에 고쳐주었을 수도 있었지. 하지만 나는 신이기 이전에 온전한 ‘사람의 아들’로서 너와 동일한 눈높이에서 이웃들을 만났고 그들과 온기와 시선을 직접 나누며 이웃으로서 도왔다.]
윤혁은 복음서의 기록들을 회상하였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당시에는 오로지 이스라엘 근방에서만 기적을 베푸셨다. 그분은 사람 대 사람으로 이웃과 얼굴을 맞대고 인간으로서 동정심을 손수 느끼기를 원하셨다. 아울러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제자들과 훗날 그를 따를 미래의 제자들에게도 본보기를 보이셨다. 윤혁에게까지도.
그제야 깊은 뜻을 헤아린 윤혁은 충실하게 명령을 수행했다. 그의 재산은 모조리 흩어져 그가 밟는 행성의 주민들을 치료하는 목적에 활용되었다. 혹자는 혹독한 의무라고 평할지도 모르겠지만, 윤혁은 주님의 또다른 의도를 이해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 구제 활동도 경제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형에게서 나온 재산을 사용해서 형으로 하여금 해당 지역 사람들을 치유하게끔 유도하는 셈이니까.’
실질적으로 윤혁에게 돌아오는 유익은 아무것도 없고 인류연합 내에서 물질적인 특혜가 재분배되는 결과만 남는 것이 이 구제 활동의 결과. 하지만 대신 이렇게 함으로써 카이젤은 윤혁의 발자취를 톡톡히 의식하게 되었다.
즉 그는 자신의 동생이 세상 사람은 감히 흉내내지 못하는 의로움을 가는 곳마다 흔적으로 남기는 광경을 의식하면서 양심의 꾸지람을 듣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진작 맡았어야 했을 일이 동생이 대신 하는 것을 보고 그 냉정한 계획에 회의감을 느끼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윤혁은 기꺼이 임무에 정진했다.
*
윤혁은 외계행성에 서식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생각하여 검소한 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신기하게도 이 부분에서 루디아와 마음이 통한 모양이었다. 윤혁이 이런 생각을 넌지시 비쳤을 때, 루디아도 마침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비록 인터갤럭틱 호의 환경이 너무 호사스럽고 풍요로워 금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측면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는 꼭 필요한 수준의 의식주 이상의 쾌락은 자제하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난 네가 고생하는 마당에 당당히 뭔가를 즐길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랬구나.”
루디아의 동정심 어린 고백에 괜한 부담과 미안함이 들었다.
둘은 그날부터 겸손하게 금식을 통해 이전보다 영적 상태를 더욱 풍성하게 가꿔나갔다. 비록 몸은 더 피곤하고 고될지언정 마음에는 새로운 은혜가 샘솟았다.
두 사람이 안락을 자제하자 제일 먼저 걱정을 내비친 사람은 겔다였다. 누군가를 돌보고 보살피는 일이 천성이었던 그녀는 그 둘을 아픈 손가락처럼 느꼈다. 그래서인지 더욱더 정성껏 보살피고 대접하려 애썼다.
그런 겔다의 친절을 사양하는 것은 참으로 고된 일이었다. 상대의 친절을 잘 알기에 거절하려니 마음이 몹시 쓰였다. 하지만 이미 결심한 훈련을 무산시켜서는 안 되었다.
“마음만은 정말 고마워요.”
두 사람의 단호함에 겔다는 아쉬워하면서도 이해해주었다.
“나중에라도 필요한 게 있거든 언제든 말해줘요, 도련님, 아가씨.”
겔다는 종종 둘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로 혼돈의 시대와 관련된 내용이 많았고 카이젤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화도 있었다. 추억이 깊긴 깊었나 보다. 어린 천재를 유모 힘으로 키우기가 만만치는 않았을 텐데.
“두 살 이후로는 제가 특별히 손댈 일이 없었답니다.”
문득 세 살도 안 된 아기가 우주의 모든 진리를 탐구하며 사색하는 모습을 상상하려니 심각한 괴리감이 들었다. 같은 종족이 맞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마 두세 살 때부터였을까요? 멜 할머님이 어린 카이 도련님과 에녹 도련님에게 수학을 비롯해 여러 학문을 가르쳐주셨어요. 할머니는 제가 메이드가 되기 이전부터 저를 도와주셨던 은인이셨는데 지혜로운 분이세요. 하나님을 경외하시고 올곧은 인류애를 지닌 분이셨죠.”
겔다가 언급한 멜이라는 노부인, 그녀가 언급되자 윤혁은 무언가 퍼즐이 맞춰질 듯 말 듯한 애매한 기분이 휩싸였다. 한참을 기억을 더듬어본 뒤에야 한 가지 단서가 떠올랐다.
지난 선교 여행 때 하늘도시 속에서 뿌리 원정 함대에 합류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원정 막바지에 이르러 인류연합 부대표인 에녹 아담즈, 이치죠우지 카가미씨를 만났다. 그에게서도 언뜻 과거에 수리학을 가르쳐준 노부인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윤혁은 겔다에게 확인차 물어보았다. 과연 동일임이 확실졌다. 그녀의 본명은 멜리안 테일란드로 유명한 환상 소설에서 따온 인물명으로 지어진 이름이었는데, 무려 에드레이의 수양딸이었다.
‘어르신의 자취가 여러 군데에 남아있구나.’
그러고 보니 카이젤이나 에녹 근처에는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지나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레이 씨, 멜리안 여사님, 겔러트 양, 루디아, 그리고 심지어는 윤혁 자신의 가족까지도.
좋은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필요성이 절박하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미연에나마 적그리스도의 존재가 세상에 발생하는 일을 억누하기 위해 나름 친절한 안배를 인류에게 남겨두셨다.
다시금 억제자로서의 임무의 막중함이 깊이 실감났다. 그 일을 감당하려면 걸음아부터 제대로 배워야 하리라. 한 영혼을 편견 없이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죄에 얽매인 자라도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온전히 품어낼 사랑. 인간의 역량으로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으리라. 주님의 힘을 덧입지 않는 이상.
‘주님께 매일 성실히 배우자.’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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