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04회 아벨의 후예 Ch 21. 수치심의 극복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8.08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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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여정이 진행되던 중, 성령께서 새 임무를 윤혁에게 내리셨다. 그것은 상당한 시험이 요구되는 일이다. 세상에 대해서 온전히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만 사는 과정이 포함된 일이었다.
임무의 주제는 전도와 관련이 있었다. 어느 날, 윤혁은 외계행성 거주민들이 어떻게 하면 영혼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일회 방문 당 사흘이라는 기간은 현실적으로 전도에 투자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었다. 하늘도시 여행 때 숱한 영혼들이 회심하는 역사를 목격했던 윤혁인지라 이 같은 기회의 제한이 몹시 아쉬웠다.
그때 윤혁은 사도행전을 읽다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발견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그때 불현 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왜 그토록 놀라운 선교 여행과 중보 기도의 역사를 눈으로 보고 체험했으면서도 아직 자신이 형에게 변화의 영향력을 가져다주지 못했는지, 이유를 발견했다. 저도 모르게 순서를 건너뛰고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그 단계들을 거친 뒤에야 땅끝에 이를 수 있거늘!
그렇다. 지금까지 그는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는 복음 전한 적이 드물었다.
[이제야 조금 알겠느냐? 이번 모험에서는 행성들을 순회하는 동안에는 네가 일면식이 없던 사람들을 회심으로 이끌 기회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순서를 바르게 깨달았으니 먼저는 네 가장 가까운 이에게부터 내 말씀을 전하여라.]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가까운 사람 중에 불신자가 없습…….”
[왜, 곁에 이미 하나 있지 않더냐?]
할 말을 잃은 윤혁은 변명을 그만두고 입을 다물었다. 그 말대로 딱 한 명이 있었다. 이번 임무 기간에 윤혁이 전도할 기회가 있는 대상이 저 연구동에 있다. 그것도 지금 거의 매일 윤혁과 마주하는 중이다. 오래전부터 서로 친분을 맺고 가까이 대해온 소중한 친구이자 지인.
‘태헌이 형.’
성령님께서는 그 가까운 친구에게만 오롯이 집중하고 그 일이 다 이뤄지기 전까지는 다른 영혼들에 대한 염려는 내려놓을 것을 강권하셨다.
하지만 대체 무슨 수로 전도를 한단 말인가. 고민이 들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전하면 필연적으로 핍박이나 비난 내지는 최소한 외면이 돌아오는 게 어느 시대나 공통된 사항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욕먹어도 괜찮다. 하지만 친밀감과 신뢰감이 두둑한 끈끈한 관계의 친구라면?
참으로 심적으로 부담되는 시험이었다.
게다가 태헌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실험 기간뿐이라는 점이 마음에 거슬렸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대화할 기회라고는 실험이 끝나고 아주 잠깐, 몸을 추스르면서 옷을 환복하는 순간뿐이다. 하지만 그때는 보통 신체 상태에 대한 리포트를 들어야 했다. 의사 선생님께 진료 중 대놓고 말 걸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떡하지?’
슬프게도 이 임무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회수되지 않았다. 아니 반강제적으로 순종하게끔 만드는 상황까지 조성되었다. 하필이면 주님께 임무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기간의 실험 일정이 잡히고야 말았다. 윤혁은 우주선이 웜홀의 가장 깊은 심연을 통과하는 동안 열흘 이상 캡슐에 갇혀있어야만 했다. 고역스러웠다. 하필 또 연구팀은 윤혁의 정신적 붕괴를 우려하여 정서 관계가 돈독한 태헌을 내보내 실시간 감시를 하도록 지시했다.
‘태헌이형이랑 이런 상태로 마주하자니 부담스러운데.’
기회는 찾아왔지만, 막상 말을 걸어야 할 타이밍이 애매했다. 캡슐에서 잠깐잠깐 나올 시간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진지하게 긴 대화를 나누기 부족했다.
그렇게 고심하던 중, 전날 성경책에서 읽었던 이사야서 20장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나님께서는 고매한 선지자더러 예언적 메시지를 전하도록 벗은 몸으로 삼 년간 예루살렘 거리를 다닐 것을 지시하셨다. 읽을 때는 선지자가 참 당혹스러웠겠니 하는 생각도 내심 들었다. 그런데 이제 이 말씀이 자신을 향해 도전해왔다.
[말씀을 들었다면 이제 나도 네게 시험을 내리노라.]
사실 윤혁도 내심 알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태헌에게 말할 기회는 얼마든지 더 낼 수 있었다. 사실 대화는 실험을 시작하기 직전이나 끝난 직후에만 가능한 게 아니다. 실험 중에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의사와 대화할 수 있다.
더욱이 대화의 매체는 소리만이 아니었다. 연구진은 실시간으로 실험체의 피드백과 반응을 듣기 위해 뇌파 통신 채널까지 열어주었다. 윤혁이 마음만 먹으면 캡슐 안에서도 태헌과 대화가 가능했다.
그리고 태헌은 어차피 감시 역이니 바쁘지도 않고 말을 들어줄 여유는 있다.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하니 듣기 싫어도 끝까지 윤혁의 말을 듣고만 있어야 한다. 사실 강제로 전도를 떠먹이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겠는가. 허나.
‘하, 하지만……, 이건 도저히 못 하겠어.’
수치심이 걸림돌이었다. 부담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실험 도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없이 알몸 상태로 있어야 했다. 캡슐에서 나오면 그래도 수치심을 덜어주기 위해 수건으로 가려주기라도 하지만, 캡슐 안에서는 몸의 모든 세포들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감시해야 하니 털끝만큼도 감시자의 시야에서 가리지 못한다. 고스란히 감시의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맨정신으로는 도무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지금껏 그렇게 해부 당하는 실험용 쥐 신세가 된 처지가 너무 부끄러웠기에 실험 도중에는 의식이 돌아왔어도 일부러 잠든 척하곤 했던 윤혁이었다.
‘차라리 재혁이형이 낫겠어.’
이복형과는 이상하게도 허물이 없었기에 서로의 부끄러움을 터놓기가 버겁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피를 나눈 가족이고 서로의 약점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문가 앞에서 실험체로써 벗겨지는 것, 그것도 지인 앞에서 부끄러움 당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여담으로 남들에게 털어놓긴 부끄러운 이유가 있었다. 윤혁에게도 재혁처럼 동일하게 보이기 힘든 치부가 있었다. 물론 이유는 재혁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감탄과 함께 부러움 섞인 놀림을 들어왔던 윤혁은 시달리다 못해 노이로제가 생길 지경이었다. 그런 고로 그에게 남 앞에서 벗겨진 상태는 견디기 힘든 하나의 장벽이었다.
[타인의 시선이 수치스럽느냐.]
“그야 물론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면 어째서 네 속에 세상을 의식하는 마음이 남았느냐.]
변명할 구석이 없었다. 아니 윤혁의 변명을 아무리 죄다 끌어모아도 실험실에서 태헌에게 대화하지 못할 합당한 구실은 되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윤혁은 태헌이 고등학교 시절에 자신을 도와준 은인이라 멀어지기가 부담스럽다고 주님께 대꾸해보았다. 아무래도 상대가 은인이고 더 웃어른이라면 설교자의 입장이 되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역시도 한 영혼을 구하는 시급한 문제에 있어서는 감히 끼워넣을 수 있는 변명거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사실을 납득시키는 데는 하나님의 꾸중조차도 필요 없었다. 곧바로 윤혁의 뇌리에 유대인들이 손수 그들의 은인인 레우벤을 회심시켰다는 루디아의 간증이 떠오르고야 말았다. 변명은 기각되었다.
[그렇게까지 고마운 사람이면 오히려 더더욱 은혜를 갚아야만 하지 않더냐?]
‘크윽, 이런.’
[나는 네 생각을 다 들을 수 있다. 속이려 하지 말거라.]
믿음의 여정이란 참 험난했다. 자신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큰 위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큰 도전이자 버거움이기도 했다. 이제 한 번의 충고가 더 쐐기를 박았다.
[얘야, 너는 내게 매일 아침 기도했지.]
“네? 어떤 기도를 말씀하시는지요?”
윤혁은 긴장감에 되물었다.
[네 형이 적그리스도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더냐?]
아주 직설적인 표현이 주님의 음성을 통해 전달되었다.
“네, 그렇습니다.”
너무도 현실을 찌르는 고통의 직설이다보니 윤혁은 심장이 얼얼했다. 굳이 그렇게 표현해주시지 않아도 좋을 텐데.
[넌 그가 겪은 아픔을 다 이해하지도 못하거늘 어떻게 그의 마음을 다스려보겠노라고 나설 수 있겠느냐.]
자꾸 쉬운 길로만 도망가려는 윤혁의 생각을 도끼로 내리찍는, 뼈아픈 훈육이었다. 윤혁도 알트루즘을 이식받는 과정에서 형의 기억의 파편을 받아들였기에 알고 있었다. 과거 그 고문의 순간에 형을 무너뜨렸던 거대한 절망과 고통과 굴욕을. 그 강한 형마저 산산이 부서지도록 할 정도였으니 일반인이 같은 수모를 당했더면 시작하자마자 죽었겠지. 헬리웃에게 납치당했을 때 아주 잠시 그 맛보기를 보았지만, 형의 기억 흔적에 비춰보건대 그 수준으로는 택도 없이 못 미쳤다.
‘내가 형의 수치심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군말 없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주님께서는 꾸짖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위로도 함께 해주셨다. 십자가에서 그분도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수치와 고통을 같이 당하시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그분은 자신을 해친 인류를 자기 목숨보다도 사랑해주셨다. 하잘 것 없는 죄인들을 신의 목숨을 희생해도 좋을 존재들로 일부러 여겨주신 것이다. 그 사실을 묵상하니 윤혁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자신의 임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졌다.
순종을 결심한 윤혁은 장기 실험 코스에 진입했을 때 용기를 내어 태헌에게 조심스레 대화의 초대장을 건넸다. 뇌파를 인식한 태헌은 혹시나 윤혁이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구조를 요청한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부터 덜컥 들었다.
“무슨 일이야 윤혁아? 괜찮은거지?”
“저, 저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려니 괜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뇨, 몸은 괜찮아요. 그런데 실험을 열흘이나 하려면 너무 갑갑하잖아요. 그래서 형이 옆에서 감시하는 동안, 같이 대화나 하면서 말동무라도 되어드리면 어떨까 해서요. 아니면 형이 저를 좀 챙겨주신다고 생각해도 좋고요.”
흰 가운을 입은 전문가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낱낱이 꿰뚫어보며 내려다보는 가운데 그 해부의 시선을 감당하기란 참으로 고역이었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용기를 낸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 그렇겠네. 그러면 네 말대로 하자꾸나.”
“고마워요.”
“아픈 데 있으면 곧바로 말하고. 위험하면 실험을 중단해야 하니까.”
그렇게 윤혁은 오랜 친구와 대화의 기회을 얻었다. 둘은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허심탄회한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그 와중에 윤혁은 차근차근 원하던 주제를 대화의 장 속에 놓으며 태헌을 신앙의 길로 초대할 채비를 했다. 한 영혼의 회심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악인이 아닌 보통의 선량한 시민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믿음이 생겨나는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대단히 긴 여정이 예상되었다. 이번 우주여행 내내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 사람의 영혼에만 진중하게 집중해보기로 결심하니 내심 심적으로는 후련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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