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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75회 [2부] 96화. 사상조작병기 (4)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1.09 | 회차평점 0 0

 

 

 

말에는 누군가를 살리는 힘이 있는가 하면 죽이는 힘이 있다. 한 입에서 저주와 악독과 독사의 독이 흐르기도 하며, 반대로 생명의 능력과 건강이 솟기도 한다.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의 입술에서는 타인을 구원하고 축복하는 말이, 사탄에게 속한 자들의 입술에서는 파멸시키는 악독함이 샘솟는다. 트라하의 혀는 분명히 후자에 속했으며 그는 두려움으로 황태자를 죽이고자 하였다. 일부러 자기 자신의 계략을 노출시키면서까지 그는 상대의 용기와 기백을 꺾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은 그 순간에도 용맹하고 고귀한 젊은 왕자의 생각이 간악하고 비열한 입술에 꺾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도리어 곰곰이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적의 책략의 허점들을 깊이 탐구하였다.

 

 

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게 사악한 자의 집을 깊이 살피거니와 하나님은 사악한 자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그들을 뒤엎으시느니라 (잠언 21:12).

 

 

알렉시스는 이전의 기억들을 되짚어 보았다.

 

 

첫 번째 정보들은 그가 참전 용사였던 시절에 얻어낸 범 커뮤니스트 연방의 기밀 정보, 곧 사상조작병기의 기초 데이터들이었다. 그는 그 시절 첩보를 통해서, 연방 내의 전향자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직접 발로 뛰며 채취한 데이터를 통해서, 그리고 점령 이후에 확보한 잔해들을 재점검함을 통해서 그 퍼즐들을 얻었다. 그는 그중 어떤 것도 흘려 놓치거나 낭비하지 않고 지혜롭게 살폈다. 과연 의인은 사악한 자의 집을 지혜롭게 살피느니라.

 

 

두 번째로 그가 고려한 정보는 조금 전에 얻은 것들이었다. 트라하의 함정 속으로 발을 내밀기 전, 그는 동생 에드윈으로부터 선물을 얻었다. 바로 적들의 비기인 초상물질들, 곧 섭스턴스-α(substance-α)부터 섭스턴스-ζ로 명명된 그 기괴한 초자연적 물질들에 대한 연구 데이터였다. 동생은 그 데이터들이 현재 몇몇 과학자들의 손아귀에 있음을 실토했고 황태자는 국가 지도자 겸 기업 최고의 수장으로서 그 과학자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려 모든 연구 결과에 대한 반납을 요구했다. 실버피스트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그 긴박하고 엄중한 명령에 겁을 먹고 순순히 자료들을 내주었다.

 

 

알렉시스는 이 두 종류의 자료를 자기 머릿속에 담아 빠르게 암기하였고 급박하게 두뇌를 최고 효율로 가동하여 모든 퍼즐들을 머릿속에서 조합하였다. 그의 명석함은 이 위태로운 때에 실수 없이 최상의 결론들을 얻어 필요한 정보들을 얻어내는 일을 가능케 하였다.

 

 

‘그때 우리가 상대했던 사상조작병기, 그 메커니즘은 어느 정도 복원해냈지만 유일하게 미싱링크가 하나 있었다.’

 

 

바로 미지의 ‘소모 연료’의 존재였다. 그의 두뇌로 역산해본 결과 그 기계의 복원된 설계도는 애초에 어떤 미지의 연료가 소모되도록 설정한 흔적이 담겨 있었다. 즉, 당시에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어떤 정체 미상의 ‘케미컬-X’의 존재가 암시되었다. 이것의 존재야 알렉시스도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바로 그 미지의 물질이 어둠의 조직들이 소유했던 초상물질과 같은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문제는 현재 가동되는 사상조작병기의 기전 상의 차이점이리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초상물질은 다양한 화학식과 물리량 설정으로 조합하여 여러 용도의 특수 마력 구동진을 만들 수 있다. 사상조작병기 가동을 위한 핵심 연료도 그중 하나겠지.’

 

 

그런데 그 화합물들을 여러 메커니즘을 통해 힘을 발산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일반적인 화학 연료와 같은 연소 작용이다. 물질이 소멸되거나 분해됨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특수 작용을 활용하는 것이다. 범 커뮤니스트 연방은 사상조작병기를 가동하기 위해 이 방법을 택했다. 그랬기에 그들은 병기를 상시 가동하지 못했고 순간 순간 간헐적으로 폭탄을 투척하듯 발동하였다. 소모식의 경우 순간적인 효과는 강력하지만 지속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고 탄환의 수가 제한된다는 한계가 있다. 아마 이런 이유로 연방은 많은 재화와 자본을 두로의 후손들에게 갈취당했으리라. 저들이 전쟁 직후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불릴 수 있던 이유였겠지.

 

 

그러나 두 번째 메커니즘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 또한 알렉시스 휘하의 과학자들이 에드윈의 사주를 받고 주군 몰래 실험을 하면서 도출된 결론들에 기반한다. 공명 작용. 특이하게도 초상물질들을 조합해 만든 화합물들은 원거리에서 공명하는 기능을 지녔다.

 

 

이 공명 현상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즉 보통의 물리계나 화학계에서는 법칙에 어긋난 현상들인 셈이다. 먼저, 이것들은 반드시 일정 이상의 공간을 두고 떨어진 상태에서만 상호 공명을 일으킨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모종의 양자 얽힘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공명이 무마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들의 공명은 ‘에너지 보존 법칙’에 위배된다. 보통 힘이 한 군데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에너지의 총량은 보존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마 그런 이유로 소모식 운용과 달리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지녔겠지.’

 

 

알렉시스의 추리는 이미 현재 트라하가 운용하는 병기가 연소(燃燒) 메커니즘을 버리고 공명 메커니즘을 취했을 것이라는 사실에 다다랐다.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만일 자신 같았으면 그런 유용한 기능을 연구하여 훨씬 더 건설적인 방법의 운용을 고려했을 것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을 무시하는 공명이라. 그야말로 영구 기관의 발명에 준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열쇠가 아니겠는가. 문명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도약할 혁신일터. 그런 좋은 도구를 테러와 악의를 위해 낭비하는 데 몰두하는 힐렐 숭배자들이 딱하고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냥 그들의 어리석음만을 탓할 수는 없으리라. 어쩌면 그 공명 작용에는 인간이 쉽게 제어하기 어려운 복잡성이 내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대로 공명을 일으킬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초상물질이란 것의 본질인지도 모르지. 인간의 이지를 벗어난 힘은 항상 위험한 초자연계의 악의가 섞이기 마련이고, 그런 힘은 사람의 뜻대로 이성적으로 제어되지 않는다.

 

 

‘공명을 원하는 방향으로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화학식과 마력진 구성도에 대해 심도 있는 이해와 고찰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지식이 정립되려면 현 인류의 수준보다 백 배 이상은 문명이 선진화되어야 하겠지. 나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라면 일개 트라하와 그 동료들로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유일한 활용, 거의 요행에 가깝게 밝혀낸 유일한 성취라고는 바로 이 사상조작병기에의 접목이었으리라.

 

 

알렉시스의 생각은 잠시 옛날 전쟁 시절 연방이 다루었던 다섯 기의 병기들에도 다다랐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병기들은 항상 발동 시 다섯 기 모두가 동시에 가동되었다. 이는 전략적으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사상조작병기 일부를 숨겨두고 나머지를 활용하는 편이 낫다. 그래야 제국의 폭격으로 일부가 제거된다고 해도 후일을 위한 스페어카드를 온존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단 한 번도 연방은 그런 식의 운용을 선보이지 못했다. 그들이라고 아주 멍청이는 아닐테니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던 필연적 이유가 있었으리라.

 

 

‘공명 현상 때문인가?’

 

 

이렇게 이해해보니 아귀가 맞았다. 비록 그때의 병기들은 소모식 메커니즘을 쓰긴 했지만 그들이 원하지 않는 자체적인 물질 내의 ‘공명 현상’의 존재 자체는 완전히 배제치 못했겠지. 통제되지 않는 현상이었으니 그것을 해결할 방도도 없었으리라.

 

 

한 병기에서 초상물질이 소모되기 시작하면 공명 현상으로 인해 다른 병기에서 초상물질이 활성화되고 그로 인해 소모가 시작될 테니, 한두 개씩만 병기를 운용하다보면 천문학적으로 비싼 초상물질을 낭비하는 극심한 경제적 출혈을 각오해야 한다. 전쟁 후반에는 경제 파탄으로 싸움을 지속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던 연방이니 더욱 그러했으리라.

 

 

 

 

 

‘문제는 공명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했느냐인데.’

 

 

여기서부터는 일정 부분 알렉시스의 폭넓은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했다. 그는 동생 제로스 이상으로 강력한 상상력을 가동했다.

 

 

소모식 연료로 초상물질 화합물을 태우는 일이라면 사상조작병기 내에 탑재된 연료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공명 식이라면 반드시 사상조작병기 바깥에 또다른 연료 탱크가 존재해야 한다. 그 공명 현상은 반드시 일정 이상의 원거리를 두고서만 작동하니까.

 

 

‘즉 마력을 공급해주는 샘물의 근원은 따로 있으며 그 공급을 받는 수혜자로서의 화합물은 사상조작병기 내에 설치되어 있다.’

 

 

육백 개의 사상조작병기가 단말기이며 그들 속에 담긴 화합물은 외부로부터 공명을 받아 힘을 방출하는 수신기가 된다. 그렇다면 뒤집어 말해서 이 육백 개와는 별개로 화합물을 저장하는 탱크들의 존재가 암시된다.

 

 

‘지금 와서 그것들을 수색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알렉시스는 일부러 정보를 떠보기 위해 트라하와 세일린에게 대화를 걸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 어머니에 대한 모욕, 국가에 대한 협박까지 들은 남자 치고는 너무도 침착하고 온유한 태도의 목소리였다.

 

 

“나도 조금 궁금하군.”

 

 

“무슨 의도이신지?”

 

 

“트라하, 표정을 보아하니 저기 계신 황후 전하께서는 아무래도 네가 만든 사상조작병기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신 것 같군.”

 

 

그때 세일린은 아주 잠시 미간이 움직이는 듯했으나 다시금 무표정한 침착함으로 회귀하였다. 트라하는 알렉시스의 의중이 의심되어 불안감이 들었다.

 

 

“즉 저분이 오래전부터 우리를 배신하고 네게 협력했다고는 해도 네가 어떤 용도로 어떤 계략을 꾸미는 지 낱낱이 알지는 못하셨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네가 어떤 일을 위하여 저분을 이용했을지 궁금하단 말이지.”

 

 

“제가 그것을 당신께 말씀드릴 이유가…….”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쪽에서 한 번 수수께끼를 맞춰보지.”

 

 

알렉시스는 트라하의 표정에서 아주 작은 동요가 발생해도 놓치지 않을 심산으로 집중력을 극대화하였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매의 눈으로 미묘한 변화까지도 살필 각오였다.

 

 

“너희만의 전유물이었던 섭스턴스-α, β, γ, δ, ε, ζ, 그것들을 원산지에서 채굴하고 유통하여 네가 필요로 하는 장소로 이동시키는 일, 아마도 그 작업을 뒤에서 도와주셨겠지. 내 말이 틀린가.”

 

 

트라하는 무응답으로 응수했으나 그의 안면근육의 작은 뒤틀림을 알렉시스는 정확히 포착하였다.

 

 

“사상조작병기를 건설하기 시작한 건 아마도 전쟁 이전부터였겠지. 연방과 제국 모두가 전쟁으로 정신이 팔린 틈에 미리 기초를 파고 그 주변에 토굴들을 연결해뒀을거야. 그 이후 그것들을 발각당하지 않고 잘 운용한 지혜는 칭찬해주겠지만, 역시 뒤를 봐주신 황후 전하의 덕택도 있었겠지. 그런 자신의 뒷배마저도 속이고서 그곳에 인류를 위협할 위험한 병기들을 만든 건 그만큼 네 양심이 진하게 화인을 맞았다는 증거일테고.”

 

 

“계속해보시죠.”

 

 

“즉, 황후 전하께서는 너와 네 비련한 동료 장로들이 초상물질들을 유통시킨 그 기나긴 역사의 장부를 어느 정도 알고 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역시나 탐심이 드신 겁니까? 자신이라면 파멸적인 우리와 달리 그 보물들을 인류의 건설적 미래를 위해 올바르게 쓸 수 있다고 자신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무리 유용한 보물이라고 해도 이미 한 번 사탄의 손에 오염된 물건, 그런 건 필요 없어. 다만, 너희와 사탄의 연결, 아니 인류에 대한 그자의 꼭두각시 제어줄이 그 속에 녹아있다면, 그것들을 잘 연구해서 파괴할 방도를 찾아야겠지.”

 

 

마치 사악한 힘이 담긴 유일반지를 반드시 파괴해야 하듯이. 어쩌면 이 보물들의 존재야말로 사탄의 영향력을 지구 내에서 크게 약화할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적들에게는 이것이 큰 유익이었지만 동시에 큰 리스크이기도 했으리라.

 

 

“트라하, 너는 지금의 이 가동을 일으키기 전에, 즉 내가 잠든 시절에 이미 사상조작병기의 가동을 여섯 번이나 시도했었다.”

 

 

알렉시스는 비블로스에게서 받은 내란 관련 데이터들을 떠올렸다.

 

 

“원리는 이번과는 조금 달랐다. 사상조작병기의 위치를 그때는 전혀 추적하지 못했다. 어제 내가 그 위치들을 특정한 건 순전히 내 아우 에쉬튼과 워쳐들의 도움 덕분이었어. 다시 말해서 그때는 사상조작병기 내부에 있는 화합물들이 직접 사념파를 발원한 것이 아니었다.”

 

 

사상조작병기 속의 화합물이 ‘연료’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샘물의 원천이자 공명 작용에서의 ‘송신자’로서 작용했다. 그렇다면 수신자 노릇을 한 초상물질들은 무엇이었는가. 해답은 바로 어둠의 여섯 조직이 자기 졸개들의 뇌와 육체 속에 이식한 온갖 ‘인공물’들에 있다. 그것들이 사상조작병기 속의 물질과 공명함으로써 사상조작병기의 특수 작용을 전달받았으리라. 말하자면 육백 개의 시설은 원천, 걸어다니는 인공물 이식자들은 단말기가 되어 직접적으로 사념파를 발원하는 근원이 되었겠지.

 

 

“아주 나쁜 발상은 아니야. 사상조작병기를 소형화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뇌와 육체를 기반으로 하여 초상물질을 입힌 칩들을 결합하면 얼추 사상조작병기의 아바타 식 단말기 노릇을 할 수 있겠지. 본래 사상조작병기라는 것도 인간의 뇌를 기반으로 모방한 생체 모방 기기니까.”

 

 

“그렇습니다만, 이미 다 드러난 그 사실을 지금 지목해서 뭘 하시겠다는 건지?”

 

 

“왜 그 작전이 실패했는지 너는 이유를 찾느라 몹시 고민했었지. 무려 여섯 번이나 기기를 껐다가 켜기를 반복하면서 오류를 해결해보려고 이런 저런 시도를 했겠지. 그렇지 않은가?”

 

 

트라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무슨 생각인가, 황태자?’

 

 

알렉시스의 입가에 서서히 여유로움의 미소가 걸렸다.

 

 

“사상조작병기를 제작한 당사자는 아니지만, 공학도로서 내가 네게 좀 조언을 주었으면 하는데? 왠지 나는 네가 실패한 이유가 짐작된다.”

 

 

이것은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트라하의 눈썹이 불쾌감으로 꿈틀거렸다.

 

 

“첫째, 인간의 뇌의 단순성과 한계다. 기본적으로 인간 여럿의 뇌를 인위적으로 합쳐놓은 구조를 띤 사상조작병기는 크기 제한 없이 그 양적 용량을 증폭할 수 있지. 일종의 ‘하이브 마인드’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연산력이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뛰어나도 뇌의 용량이 크지 않다. 그렇기에 인간 하나하나가 단말기 노릇을 할 때 사념파의 방출 압력은 제한이 따른다. 사상조작병기 본체가 직접 방출할 때처럼 대지를 매개로 전 지구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는 없다. 기껏해야 단말기 본인만 영향을 받을 뿐이고.

 

 

설령 사념파를 방출한다고 해도 그 세기가 워낙 약하여 내가 설계해둔 백신 프로세스의 효력에 상쇄되었다. 이것이 첫 번째 결점이었다.”

 

 

“두 번째는?”

 

 

“공명 작용의 특성 탓이지.”

 

 

이 부분에까지 정확하게 이른 것을 발견한 트라하는 속으로 경악했다.

 

 

‘역시나 황태자는 이미 초상물질의 일부를 손에 넣어 연구를 시작했다.’

 

 

조금 두렵긴 했으나 트라하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황태자는 결코 이 보물의 모든 비밀에 다가가지 못하리라.

 

 

“잠깐 연구한 나도 금방 깨달았는데, 수백 년 이상 조상 대대로 소유해온 너희가 그것을 몰랐을 리는 없지. 트라하, 너희는 초상물질 화합물의 공명 패턴을 이론으로 정립하지 못했다. 다 깨닫지도 못했을뿐더러 제어하지도 못하지.”

 

 

알렉시스는 옅은 웃음과 함께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상대를 농락했다.

 

 

“비특이적인 분산 작용. 초상물질의 공명은 처음에는 일정 목적으로 설정된 특정 화합물과 그에 상응하는 마력진으로 짜여진 물질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고도의 작용 특이성이 처음에는 보존되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점차 질서가 어그러진다. 관련된 마력진을 탑재하지 않은 다른 초상물질, 비특이적인 화합물들에까지 공명이 확산된다.”

 

 

쉽게 예시를 들어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A라는 초상물질 화합물을 미리 연성해두었다고 하자. 그리고 B라는 또다른 초상물질 화합물을 A에 상응하는 질서를 갖도록 다시 만들어두었다고 하자. 이 경우 처음에는 A에서부터 B로 힘이 공명되는 방식의 작용이 일어난다. 이때 에너지 보존 법칙이 무시되므로 어느 쪽도 소모되지 않는, 사실상의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에너지 작용이 일어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A가 B를 향해 펌프질 하는 마력 공명이 이상한 방향으로 분산되기 시작한다. 전혀 무관한 술식을 가졌거나, 혹은 아예 가공되지도 않은 원료 상태의 초상 물질을 향해서 A의 마력이 이동되는 것이다.

 

 

물론 에너지 보존 법칙을 따르지 않는 공명이니 A의 제한된 에너지가 B에게서 박탈되어 흩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엔트로피의 증가에 있다. A에서 B로 흐르는 마력의 펌프질이 질서를 잃어버리게 된다. 원래의 목적성에 딱 맞는 작용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 패턴이 어그러지는 것이다. 사상조작병기로 예를 들자면 사념파를 만들어내는 작용이 공명으로 펌프질되는데, 어느 순간에 이르면 사념파를 만들지 못하는 비특이적인 공명 작용만 남게 되는 셈이다.

 

 

“아마 그 문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한 탓에 네가 리셋을 여섯 번이나 해야 했던게로지. 실제로 네 졸개들의 정신 폭주가 하루 내내 반복적으로 이뤄진 건 아니었어. 정신 폭주의 폭발적 증가가 집중적으로 나타난 특정 ‘사념파 피크 시점’들이 존재했다. 나머지 기간에는 그저 후유증으로 인해서 날뛰었을뿐이었고.”

 

 

이건 데이터로 기록된 객관적 증거이니 트라하 입장에서는 오리발을 내밀지 못했다.

 

 

“지금 네가 사상조작병기 가동 방식을 바꿔서 다시 폭주시켰다고는 하지만, 메커니즘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야. 그럴 시간도 없었을 테고. 즉 동일한 공명 작용을 이용하되 이번에는 마중물의 역할과 단말기의 역할이 바뀐 셈이지.”

 

 

내란 때에는 마중물이 사상조작병기 본체였고 단말기는 뇌에 칩을 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단말기가 사상조작병기 본체와 그 속의 화합물들이다. 그렇다면 마중물 노릇을 하는 ‘초상물질 저장 탱크’는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아마 그것들이 마침내 활성화되었으며, 그 여파로 공명을 받은 병기 속 화합물들은 직접 사념파를 발원하여 대지를 통해 세계에 사상 오염을 전달하고 있다. 이 경우 위력은 이전 시도 당시보다 수천만 배 이상 상향되겠지만, 사상조작병기 좌표는 그대로 노출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첫 번째 한계는 극복했다고 해도, 두 번째 한계는 어떻게 할 셈이지?”

 

 

알렉시스가 핵심을 하나 지적했다.

 

 

“단말기의 위력은 확실히 완벽하다. 하지만 공명 작용의 ‘비특이적 분산’의 문제는 여전해. 지난 번에는 사상조작병기에서 나온 마력이 사람들의 뇌 속 칩에만 흘러들어간 것이 아니라 너희가 저장해둔 다른 곳의 초상물질들로도 분산되었다. 이번에는 어떨까?”

 

 

설령 그 문제를 파악한 트라하가 황급히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공된 초상물질 기반 물자들을 저장 탱크로 옮겨뒀다고 하자. 알렉시스는 사실상 트라하가 그렇게 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모은 연구 자료에 따르면 그 초상물질들의 공명 작용은 땅 속에서 더 강력하게 이뤄진다. 대지에 깊이 묻힌 초상물질일수록 공명의 폭이 넓어진다는 뜻이다. 사상조작병기도 나름 지하에 위치하긴 하겠지만, 자폭을 통한 테러를 상정하여 설계되었기에 그 깊이가 극도로 깊지는 않으리라. 그래야 주변 도시에 최대의 피해를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얕은 깊이에서 활성화된 초상물질은 공명 가능한 영역의 폭이 좁다. 기껏해야 지면 위에 있는 초상물질들, 즉 두로의 후손들이 기존에 채굴하거나 가공한 물질들에만 영향이 닿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마중물 노릇을 하는 저장 탱크 속 대량의 초상물질들은 다르다. 그것들은 안전한 보호를 위해 최대한 깊은 지하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는 말은 공명의 폭도 더 크다는 것.

 

 

“아마도 채굴되지 않은 보물들에까지 비특이적 상호작용의 연쇄가 번지겠지. 너희가 캐내지 않은 원석들에까지.”

 

 

이 가설이 옳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사념파 발생 작용은 쇄약해지거나 최소한 그 효율성이 감소하게 된다. 어쩌면 트라하가 기획한 명령어와 상관없는 비특이적 교란으로 설정값이 달라지게 될 수도 있다.

 

 

“공명의 세기가 최저점으로 내려앉았을 때, 우리에게는 공략 기회의 문이 열리게 된다. 아마 네가 말한 ‘지진 발생’이란 것도 사념파 발생과는 또 다른 술식의 공명을 통해 이뤄지도록 설정되었겠지.”

 

 

조금 전 트라하는 자신 있게 말했었다. 브리튼의 최첨단 해킹 장치를 이용하더라도 사상조작병기들끼리의 자폭 연쇄를 막을 수 없노라고. 그 말인즉 그것들끼리 연결된 기전은 컴퓨터 방식의 전자 신호 연결이 아니라는 뜻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초상물질끼리의 공명이겠지. 바로 그 공명을 통한 ‘지진형 진동’의 발생이 기폭제가 되어 병기의 자폭도, 또 거대한 지진 발원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리라.

 

 

“공명 최저점에 이르면 내 비서가 너희의 장치의 내부를 정밀 타격할 거다. 자폭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훼손으로 기계의 통제 시스템을 무너뜨릴 거다.”

 

 

“크큭, 무슨 말을 떠벌리나 했더니.”

 

 

트라하는 비웃음으로 대꾸했다.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겠습니까, 알렉시스님?”

 

 

“못 버틸 이유도 없지.”

 

 

“나의 사상조작병기도, 당신의 상쇄 병기들도, 모두 자연적인 에너지원 역시 소모합니다. 내 장치는 주변에 연결된 대형 벙커들에 내장된 연료들로부터 공급을 받습니다. 반면, 당신의 장치들은 이동형 단말기입니다. 연료 공급에 제한이 있죠. 힘겨루기에 오래 버틸 수 없죠.”

 

 

그러자 이번에는 알렉시스 쪽에서 피식 웃었다.

 

 

“너희가 그 반칙 같은 초상물질을 고작 그런 무익한 방향으로 낭비한 동안, 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질서 내에 존재하는 에너지원으로 이미 인류 문명의 근원적 제약인 에너지 문제를 해결했다.”

 

 

대외적으로는 밝히지 않았지만 최근 저온 핵융합 기술이 완성되었다. 수소를 헬륨으로 연성하는 단계를 넘어 이제는 임의의 원자핵을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반입자 생성과 쌍소멸을 통한 에너지 생성도 불완전하게나마 얼추 성사시켰다. 나아가 그 에너지를 양자 얽힘을 통해 전달하는 기전도 반쯤 확립했다.

 

 

즉 대-사상조작병기 대적 기기들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트라하의 사상조작병기들이 무식하게 화학 연료들을 양적으로 쌓아 버틴다면, 알렉시스는 훨씬 적은 질량의 에너지원으로 그를 상회하는 공급 및 전달 체계를 갖추었다. 이것이 격의 차이였다.

 

 

“통상 에너지 싸움으로는 양쪽 모두 골든타임까지 소모되지 않아. 즉, 싸움의 결정타는 초상물질의 공명 작용이 언제 어떻게 분산되느냐에 달려 있지.”

 

 

그때가 언제 오건, 알렉시스는 일 년이고 십 년이고 백 년이고 끝까지 버틸 자신이 있었다.

 

 

“크, 크큭, 크크크큭, 크흐하하하!”

 

 

트라하는 이제 참지 못하고 경박하게 폭소를 터뜨렸다.

 

 

“크크큭, 그게 당신이 이 상황에서도 믿을 구석이 있던 이유였군요.”

 

 

알렉시스는 좋지 않은 조짐을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과연 영리하십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밀들을 설마 몇 가지 단서들과 추리력만으로 모두 파헤칠 줄이야. 일단 당신에게 만점을 드리겠습니다. 두뇌로는 도저히 승부가 되지 않겠군요.”

 

 

하지만 영적 대결은 두뇌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집념과 광기 같은 정신적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트라하는 적어도 이 면에서는 황태자에게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어쩌죠? 당신이 딱 한 가지 몰랐던 사실이 있습니다.”

 

 

알렉시스는 긴장감에 두 주먹을 세게 쥐었다.

 

 

“맞습니다. 공명 작용의 비특이적 분산, 이것이 아직 내가 해결하지 못한 최대의 걸림돌입니다. 심지어 이곳에 들어와 승부수를 던지기 직전까지도 그것을 완전하게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트라하는 악의의 한 수를 두었다. 지혜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면 그것을 초월한 광기를 사용하라. 이것은 그가 힐렐에게서 배운 계시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모든 것?”

 

 

알렉시스의 눈빛이 당혹으로 물들었고 그와 동시에 세일린의 눈에도 이채가 돌았다.

 

 

“말 그대로입니다. 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초상물질, 그것을 단 1g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채굴하였습니다. 땅에 있는 것은 물론 해저에 있는 것들까지도. 모조리 소모할 각오로 남김 없이 긁어모아 내 유통 체계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알렉시스는 어처구니 없는 이 말에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이미 시대의 뒤로 물러난 석유조차도 아직 인류는 다 채굴해내지 못했다. 그토록 쓰고 쓰고 써대도 닳지 않던 자원이었다. 소모된다, 소모된다, 말로는 다들 염려를 떠들어댔지만 실제로는 이미 석유의 쓰임새가 지나가고 있는 현 5차 산업혁명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땅 속에는 많은 기름이 남아 있다.

 

 

그런 마당이거늘, 석유 따위와는 격이 다른 무한한 가치의 초상물질 자원들을 그렇게 소모적으로, 집착적으로 캐냈다고? 고작 이런 낭비에 가까운 한 번의 도박을 위해서? 그 집착적인 노력이 참으로 가상하다는 감탄을 하기 이전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합리적이고 절약에 능한 알렉시스의 사고 체계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기였다.

 

 

“설마.”

 

 

“최근에 채굴을 완료했죠. 이 날을 위해 만약을 대비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신이 말한 그 문제를 나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게 실제로 문제가 된다는 것은 내란 당시 여섯 번의 병기 가동으로 확인하긴 했지만.”

 

 

“채굴도 채굴이지만, 운반은?”

 

 

“뭐, 많은 출혈을 흘렸습니다만.”

 

 

트라하가 그 모든 자원을 단 며칠 사이에, 그것도 대부분을 내란 당시의 하루만에 이동시키느라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을까? 아마 그는 자신에게 뒤가 없을 것을 알고 부나방처럼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소각했으리라.

 

 

“관련된 사람들도 모조리 죽였죠. 채굴이나 유통에 관계된 자들도, 도와준 모든 이들도. 초상물질은 워낙 용도가 다양합니다. 저주로 사람을 즉사시키는 매질로도 쓰일 수 있답니다.”

 

 

사람들을 죽여 증거를 인멸한 뒤에는 인공지능 기계들의 도움을 받아 운송을 완료했다. 그 뒤에는 그 기계들마저 자폭시켰다. 트라하가 거느린 기계들은 전부 초상물질로 된 부품을 내장하였기에 즉각적인 자폭 유도도 가능했다.

 

 

“다시 말해서 지구 위에 현존하는 모든 초상물질은 이미 이번 승부수 때 사용되는 중입니다.”

 

 

대략 0.01%만큼의 분량은 사상조작병기들 속에 내장되었다. 나머지 99.99%는 하나도 빠짐 없이 또다른 저장 탱크들 속에 담겼다. 그것들은 이미 특정한 마력진으로 재합성되어 특수한 목적값이 입력되었다. 다른 모든 목적과 용도는 배제한 채 오로지 사상조작병기의 사념파를 생성하는 용도 하나만으로 고정하여 모든 잠재력을 집중시켰다. 이런 광기의 도박은 오롯이 힐렐에 사로잡힌 악인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알렉시스님, 당신의 가정은 어긋났습니다.”

 

 

의기양양한 광인은 으스대며 조롱을 쏟아내었다.

 

 

“사상조작병기의 공명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공명 작용이 분산될 다른 물질은 지구 상에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초상물질의 힘이 하나의 목적으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명은 거듭 뚜렷해지고 강력해질 것입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무한한 마력이 공급될 것입니다.”

 

 

즉 이 치킨 게임에서 알렉시스와 브리튼 제국은 승자가 될 수 없다. 사상조작병기는 기어코 인류를 무너뜨릴 때까지 힘을 계속 쏟을 것이며 그때까지 사람의 희생 없이 브리튼이 승리를 쟁취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승리입니다. 저승 가는 길에 당신에게 절망을 안겨주겠습니다.”

 

 

알렉시스의 얼굴은 분노로, 트라하의 얼굴은 교만함으로 충만해졌다. 알렉시스는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해답을 찾아라. 그의 계략을 우회할 전략을. 그러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든 것을 내버리는 적의 광기를 동일한 각오 없이 꺾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죠?’

 

 

그는 잠시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며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주님의 도움을 구하기보다 자신의 지략을 의지했던 모습이 분명 있었다. 모든 상황에 자기 능력으로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자만심. 트라하를 통해 주님께서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지적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

 

 

‘제 지혜만으로는 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여기서 무너지는 동굴에 묻혀 죽는 건 그리 두렵지 않다. 하지만 사상조작병기를 공략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시민이 죽는다면? 혹은 자신과 아버지를 믿고 파견된 충성스러운 군인들이 영혼이나 생명을 잃어야 한다면? 그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저를 도와주세요.’

 

 

트라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은 알렉시스를 보며 견디기 힘든 쾌감으로 가득해졌다. 그토록 증오스러웠던 저 브라이틀란트 가문의 적장자가 마침내 당황하는 기색을 보니 말초신경의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것으로 승부는…….”

 

 

“그렇구나.”

 

 

트라하의 말을 다른 한 음성이 끊으며 끼어들었다. 침묵하던 그 목소리가 발언을 시작하자 기도하던 알렉시스도, 쾌재를 부르던 트라하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의 진원지는 트라하로부터 약 10m 정도 떨어진 곳에 선 다른 인물이었다.

 

 

“마침내 모든 ‘숨겨진 보물’들을 네 보물창고에 옮겨주었어. 수고가 많았군.”

 

 

“세일린?”

 

 

황후가 무언가 실마리를 얻었다는 듯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인가, 세일린.”

 

 

“그대가 마침내 내 목적을 완수해 줬다는 뜻이지, 트라하 폰 바이스하우프트.”

 

 

그녀는 이제 숨김없이 경멸 가득한 냉담한 눈빛으로 중년의 신사를 쏘아보았다. 그 낯선 기색에 트라하는 의문에 잠겨 당황하였다. 세일린에게서 평소 보지 못했던 모습이 보였다.

 

 

‘저건 누구지?’

 

 

그녀가 꿍꿍이가 많은 인물임은 알았다. 가문끼리도 친밀했고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알며 친밀했었다. 그녀가 알폰스와 결혼한 이후로도 동료로서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서로 많은 비밀을 숨기긴 했으나 그만큼 많은 기밀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녀는 항상 강력한 지원군이었으며 숨은 협력자였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세일린에게서 자신을 멸망시키기 위해 예비된 암살자 같은 모습이 보이는 것은.

 

 

“트라하, 네가 자백해 주었듯 정말로 모든 초상물질이 채굴된 것이라면, 그 모두를 단번에 파괴할 절호의 기회도 열린 셈이겠지. 더는 땅속에 남은 분량도 없으니, 너희의 신 힐렐로서도 미래를 기약할 기회가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알렉시스는 결정적인 단서를 깨달았다. 그의 머리는 당황스러운 이 반전의 상황에서도 팽팽히 회전하였다.

 

 

‘설마?’

 

 

반면에 트라하는 부들부들 떨며 격분하였다.

 

 

“설마 네 ㄴ이, 우리를 배신한 것인가?”

 

 

“배신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네.”

 

 

그녀는 옷 속에 감춰두었던 어떤 목걸이를 꺼내 착용하였다. 목걸이의 중심에는 커다란 수정형 물질이 달려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너희의 편이었던 적이 없었어.”

 

 

“그렇다면!”

 

 

“복수를 위해서 너와 너희에게 이 모습을 연기해 주었을 뿐이야.”

 

 

알렉시스는 동생 이안의 재능이 누구에게서 기원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분명 자신에게는 없던 이질적 재능이었으니까. 이 순간 그는 그 재능이 누구에게서 물려졌는지 기원을 이해하였다.

 

 

“복수라고? 정신 나간 ㄴ. 너를 그 자리에까지 세워준 건 우리였다.”

 

 

“그래. 이본의 대용품으로서 말이지.”

 

 

이본의 이름을 언급하는 세일린의 눈은 매우 차갑고 매서웠다.

 

 

“너희가 죽게 만든 이본 히아신스 크롬벨. 내 한때의 경쟁자.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제된 분노가 서려 있었는데, 그 분노는 불의를 향한 의로운 분노였다.

 

 

“항상 외톨이였던 내게 참된 친구가 되어준 유일한 한 사람. 내 가장 소중한 유일한 친구.”

 

 

알렉시스는 당혹감에 멈칫하였다.

 

 

“내 친구를 불행하게 만든 너희를 설마 내 손으로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는가?”

 

 

“빌어먹을!”

 

 

“그리고 착각도 참 심각하구나. 내가 이본의 아이를 대신하여 내 아이들을 지배자의 권좌에 올리기를 원한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나?”

 

 

여인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태연하게 악마를 꾸짖었다.

 

 

“내 아이들이 황태자를 우상처럼 섬긴다고 하였는가? 어리석구나, 트라하여. 그 아이들은 황태자를 한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마음으로 복종할 뿐이야.”

 

 

황실 내부에 겉으로 드러나는바 이상의 병적인 병목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음모론은 세간에 이미 여러 형태로 돌곤 했었다. 갈등이 존재한다는 설, 사생아 출신이 있다는 설, 형제간 차별 대우와 부모님의 편애가 존재한다는 설 등등. 대부분이 허황되고 거짓된 루머였지만 세일린은 일부러 그것들을 해명해 주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 원하는 대로 믿을 수 있도록 긍정도 부정도 해주지 않았다.

 

 

이유는 이로써 어둠의 세력의 눈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그 예시로 그들은 에쉬튼이 황제와 황태자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늦게 눈치챘다. 펠렌드로크와 다른 형제들 사이에 내분이 있다고 믿은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트라하마저도 황실의 내부에 자신이 뿌린 불화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는 기대를 은연중 하였다.

 

 

이 모든 게 전적으로 착각이었다. 황가의 영적 기류는 각종 흑색 루머 유포자의 기대와는 다르게 너무도 건전했다. 알렉시스를 시기하는 이도 없고, 높아지려는 야망을 품은 황자도 없었다. 도리어 황태자와 황자들의 사이는 돈독하다 못해 보통의 집안보다도 우애가 깊었다. 혈육끼리도 시기하고 질투하며 돈과 권력을 위해 서로를 잡아 죽이는 것을 당연시하는 어둠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고 상상하기도 어려웠으리라. 하기야 세계 제일을 권력과 명예를 소유한 집안에서 내분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되겠는가. 보통의 평범한 집안도 부모 유산 다툼으로 내분이 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내 아들들은 황태자를 보필하고 지켜주는 것을 인생 목표 중 하나로 삼은 아이들이지. 왜 그렇게 된 줄 아는가? 물론 황태자의 인품과 신실함에 반한 이유가 가장 크겠지. 하지만 내가 그렇게 교육했다.”

 

 

“뭐?”

 

 

“내가 어릴 적부터 내 아이들 모두를 그렇게 가르쳤거든. 그 어떤 어려운 상황이 임하더라도 황태자의 편에 남아서 그에게 힘을 보태주도록.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여 항상 그 곁을 충성스럽게 지켜달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이제 악인은 분노와 배신감에 격분을 제어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일린은 준비된 다음 스텝으로 행동에 옮겼다. 그녀는 목걸이에 매달린 정체불명의 수정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이내 강렬한 발광체처럼 빛을 발하더니 수정은 부스러져 흐드러졌다. 동시에 이변이 벌어졌다. 알렉시스와 트라하 모두 이변을 감지하고 크게 당황하였다.

 

 

“설마 네 ㄴ이 그 마지막 보물을!”

 

 

“결계의 차폐 작용이 사라졌다고?”

 

 

알렉시스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세일린이 어떤 물질을 사용하여 이 벙커 공간 전체를 에워두른 초상 물질들에 일시적인 영향을 가했다. 그 영향인지 전자 신호를 차단하던 사방의 벽이 효력을 잃었다.

 

 

“무엇합니까?”

 

 

세일린이 다급하게 호통치듯 알렉시스에게 외쳤다.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서두르세요.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알렉시스. 그는 그녀의 뜻을 이해하고는 고갯짓으로 동의의 응답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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