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79회 [2부] 100화. 아들과 어머니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8.18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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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태가 정리되었다. 조금 전까지 밀폐된 이 지하를 탁하게 채우던 악령들의 향기는 바람 앞의 연기처럼 희석되었다. 마지막 일격으로 인해 트라하의 뇌 속에 담긴 칩이 일부 파손되었고 덕분에 물리계와 초자연계를 잇던 매개 작용도 중지되었다.
아울러 차폐하던 초상물질들도 완전히 힘을 잃었다. 사상조작병기 내부의 모든 초상물질들이 봉인되었고 저장 탱크들 속의 대량의 초상물질들도 동결 작용에 완벽히 침식된 덕에 더는 마계와 물리계의 직접적 연접 링크가 지속될 수 없었다. 이것으로 저들의 음흉한 음모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겠지만 당분간은 숨을 돌릴 수 있으리라.
“와, 하마터면 죽는 줄 알았네.”
평소의 고귀한 황태자답지 않게 자유분방한 어투로 한탄하며 알렉시스는 털썩 주저앉았다. 쓰러질 뻔했다는 건 사실이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힘을 쥐어짜느라 그는 탈진 직전이었다.
“저기.”
세일린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칼에 살짝 스친 자국, 튀는 파편에 스친 찰과상 정도였고 뼈나 살이나 내장 상태는 멀쩡했다. 그녀는 몹시 어색해하는 표정으로 어려워하며 눈 마주침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미안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미안해요.”
“네?”
세일린의 진심 어린 사과에 알렉시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곳에 끌어들여서 위험에 빠트린 것, 진심으로 사죄할게요. 제가 너무 욕심을 냈어요.”
“아아.”
알렉시스는 멋쩍게 웃으며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아녜요. 저도 다 이해해요. 트라하를 완벽하게 속여야만 그에게서 중요 기밀의 자백을 받을 수 있었잖아요. 그랬던 것이죠?”
“그의 종말을 내 손으로 이뤄낼 의도였던 건 맞아요. 그 과정에서 황태자의 능력을 사용해야 확실한 결착을 낼 수 있음도 알았죠. 저는 하루 전까지만 해도 그가 준비한 마지막 한 수가 그 악랄한 병기들인 줄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 마당이기에 저 위험하고 교활한 책략가가 숨긴 비장의 술책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존재는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죠. 트라하가 당신을 함정에 빠트리자고 제안했을 때 일부러 받아준 것도 그 때문이었죠.”
“결과적으로는 잘 됐잖아요. 어머니 덕분에 피해 없이 적의 모든 것을 탈취하기도 했고요.”
아직 그 호칭에 세일린은 잘 적응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가 당신을 함부로 이용하려 했던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어요. 하긴 내가 살아온 지난 삶도 떳떳하지 못했죠. 가문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했고, 어두운 진실을 발견하고도 친구를 잃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는 당당히 맞서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옳은 길을 발견한 뒤로도 나 자신과 모두를 속이는 잘못된 방법으로 악과 맞섰죠.”
“더는 자책하지 마세요. 지나간 일은 우리 잊어버려요.”
알렉시스는 오늘의 아픔을 통해 전에 발견하지 못한 보물들을 새로이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마음을 넓게 열었을 텐데. 대화를 통해 서로의 속에 쌓인 아픔들을 공유하였더라면 이렇게 오랜 시간을 엇갈린 채 떠돌지는 않았겠지.
한편으로는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신실한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하마터면 자신의 동생들을 낳아준 분이 자신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대한 해소감까지. 하나님께서 좋은 선물들을 새로이 주셨다.
“저 생각보다 강하거든요.”
알렉시스가 일부러 그녀를 안심시키고자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니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더 이용하셔도 좋아요. 아니, 가족끼리 필요한 때에 함께하지 않으면 무엇하겠어요.”
“힘이 강하신 건 오늘 잘 구경했습니다.”
세일린은 귀부인답게 고고한 목소리로 여유로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황태자로서 몸을 함부로 위험에 내던지지는 마시길. 오늘 일을 마지막으로 살과 뼈를 부딪쳐 싸울 일이 없으셨으면 하군요.”
“아, 말씀드리는 걸 잊어버렸는데요.”
알렉시스는 팔을 가볍게 뻗었다.
“오늘 몸 상태가 풀 컨디션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잠든 상태였잖아요. 한 달이나 누워있더니 근 손실이 좀 일어났더라고요. 원래라면 더 순식간에 정리할 수도 있었단 말씀이죠.”
“무모하신 건 여전하군요.”
세일린은 한숨을 푹 쉬었다. 대단하긴 대단하다. 근 손실된 몸으로 무리하게 정신 연결을 써서 행성 규모의 연산까지 하여 체력이 다 소진된 상태로 악령에 들린 인간과 물리력으로 싸워 물리적 퇴마를 한다니. 평소의 잘 단련된 풀 컨디션이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하지만 그건 그거고, 몸을 좀 아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몹시 들었다.
“전쟁 당시에도 그렇게 가족들을 걱정시키셨죠.”
세일린의 얼굴 위로 지워지기 힘든 깊은 속상함과 회한이 묻어 들었다.
“동생들이 그때 몹시 괴로워했답니다.”
“아아.”
멋 모르던 이십대 초반 시절이 떠오른 알렉시스는 무안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 보니 자신 입장에서는 용맹과 투지였지만 동생들과 가족들에게는 큰 불안이었겠지. 물론 그 전쟁에서 패하면 나라 자체가 망하는 것이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동생들은 내심 큰형이 해를 입을까 염려했을 것이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영구적인 해를 입기도 했고.
“어머니께서도 속상하셨나요, 그때?”
그 질문에 말없이 세일린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제가 불효자였네요. 아버지랑 할아버지에게도 염려를 끼치고.”
“아뇨, 그런 뜻이 아니에요. 우리는 당신의 긍지를 존중해요. 영웅으로서의 활약도 존경하고요. 다만, 가족으로서의 염려도 이해해 주셨으면 할 따름입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작은 생채기로 가득한 청년의 뺨을 어루만졌다.
“소중한 사람이 다치는 건 싫잖아요.”
왠지 모를 쑥스러운 감정에 알렉시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 일단 빨리 치료부터 합시다. 구조대가 오긴 하겠지만 그전까지 귀한 몸을 내버려둘 수는 없죠.”
세일린은 다시 엄한 목소리로 그를 재촉했다.
“저, 저요?”
“그럼 다친 분이 여기 누가 또 있습니까?”
“어머니께서 직접 봐주신다고요?”
“네.”
어색한 공기가 다시 감돌았다. 알렉시스는 멋쩍어하며 쭈뼛거렸다. 새어머니랑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한 것도 처음인데 치료라니.
“참고로 소독제랑 붕대는 제가 휴대하고 있답니다.”
“사고가 날 걸 미리 상정하고 계셨군요.”
“아무래도 트라하와 충돌하면 모두가 온전한 몸 상태로 나오진 못할 테니까요. 크게 도움은 안 되더라도 최소한의 준비는 해두자고 생각했죠. 마침 다행이네요.”
“하하, 그러네요.”
알렉시스는 아직도 좀 어색한지 낯을 붉혔다. 그러나 황후의 재촉에 못 이긴 그는 하는 수 없이 천천히 상의를 탈의했다. 강철의 벽처럼 단단하게 단련된 강력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등을 돌려 황후 쪽으로 향하게 했다.
“세상에나, 이런!”
황후는 어쩐지 화가 몹시 난 듯한 목소리였다.
“아파도 참으세요.”
“으윽, 네.”
그녀는 손수 손을 움직여 상처 주위를 살균제로 소독했다. 이후 무균 장갑을 직접 착용하고 봉합사를 꺼내 상처를 꿰맸다. 생각보다 깊게 베인 것인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마취제가 없었기에 불가피하게 통증을 견디며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알렉시스는 꾹 참고 견뎠다.
“으윽.”
“곧 끝나니 조금만 더 견뎌요.”
“고마워요.”
치료하는 몇십 분 동안 다시금 어색한 시간이 임했다. 알렉시스는 일부러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말을 걸었다.
“저한테는 왜 항상 존대를 하시는지요?”
“폐하와 동등한 격의 왕이니까요. 브라이틀란트 가문의 적장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정한 가문의 최고 수장, 단순히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존대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로서는 그 권위 앞에 존중을 표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동생들에게는 편하게 말씀하시잖아요. 입양된 동생들도.”
“그들과 당신은 격이 달라요.”
“다 한 아버지를 둔 자녀들인걸요.”
그러니 모두가 한 가족이며 한 부모를 둔 식구들이 아니겠는가.
“저만 우대받을 필요는 없죠.”
“저는…….”
세일린은 몹시 망설이며 마음속의 고민을 내비쳤다.
“당신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그럴 가치가 없음을 고백하는 태도인 동시에 미안함의 표시였다.
“부끄럽지만 한때나마 이본에게 경쟁에서 밀렸다는 생각으로 감정이 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늘 돌아보면 내게 베푼 건 그녀였어요. 나는 이기적이었고 그녀는 언제나 모두에게 친절했죠. 그리고 되려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간 건 저였어요.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되긴 했어도, 그녀의 것이어야 했던 이 자리도, 알폰스도, 나는 내가 맡기 합당치 않은 과분한 것들을 취한 자입니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어머니는, 그러니까 제 친어머니도 과연 그렇게 생각하셨을까요?”
“모르죠.”
“저는 어머니랑 어머니의 사정을 잘 모르지만, 친어머니는 당신을 신뢰했기 때문에 뒷일을 부탁한 것 같은데. 혹시 제 추측이 틀렸나요?”
알렉시스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세일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었기 때문에 마지막을 부탁할 수 있었던 아닐까요?”
“추리력이 확실히 대단하네요.”
알렉시스는 호쾌히 너털웃음을 머금었다.
“그나저나 안 보여서 그러는데, 저 심하게 다쳤나요?”
“꽤 깊은 자상이에요. 등 전체를 가로지르는 상처로 다섯 번을 베이셨어요. 훌륭한 몸에 이런 흠집을 남기는 건 큰 손실이랍니다.”
“어쩐지 좀 아프더라. 뭐, 영광의 상처로 생각하죠. 어머니를 구하다가 다친 것이니 누구한테든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겠죠.”
“결혼할 사람 말고는 아무한테나 보여주지 마세요.”
“하하, 하긴. 정숙하게 굴어야죠.”
황태자는 다시 한번 정중히 정식으로 부탁하였다.
“그러면 오늘부터라도 어때요. 전에는 아니었더라도 지금부터라면 괜찮겠죠. 제가 어머니라고 불러줘도 상관없으시죠.”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그러면 저한테도 편하게 불러주세요.”
그의 능청맞은 제안에 말려든 세일린은 한숨을 쉬었다.
“못 이기겠네요.”
자기 삶이 이본의 것을 빼앗는 행태라고 생각했기에 늘 죄책감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했다. 친구를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그 삶을 대신 살아야 하는 무게감. 한때나마 같은 남자를 사랑했고 그 남자를 얻고 싶은 마음에 우정보다 경쟁심에 눌렸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정말 지키고 싶은 상대는 남자가 아니라 친구였다는 사실을.
“세일린, 너에게 부탁해. 알폰스 그이를, 내 아들 알렉을, 그리고 우리나라의 다음 세대를.”
무력하게 생명의 촛불을 잃어가면서도 어리석은 그녀는 자신에게 미래를 맡겼다. 그런 주제에 염치도 없이 아들까지 빼앗아 간다고? 그것만은 미안한 마음에 도무지 감당하기에 어려웠다. 그래도 이제 모든 일들이 정리되었으니 잠시나마 소박한 욕심을 부려봐도 될까. 이런 나도 행복해질 자격이 있을까. 내적 갈등으로 괴로웠다.
“그렇게 할게요.”
세일린은 마지못해 웃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건장한 청년의 적갈색 머리를 고이 쓰다듬어주었다. 어색하고도 간질거리는 편안감에 가슴이 뭉클해진 알렉시스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 손길을 수용하였다.
*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마음의 빗장을 완벽하게 풀고 자기 생각들을 남김없이 고백하였다. 정식으로 어머니와 아들로서 다시 시작해서인지 막혔던 담이 훤히 뚫린 듯한 상쾌함이 심중에 가득 넘쳤다.
세일린은 지난 자기 삶의 비밀들을 모두 드러내었다. 해명하려는 차원이기도 했고 알렉시스의 궁금증을 풀어줄 필요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브라이틀란트 가문과 여섯 대조직의 끈질긴 숙명적 악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이미 어둠의 무리가 다 망해버린 마당에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싶지만, 뭐든 마지막 정리를 확실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세일린은 자신이 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각오였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그는 새어머니가 놓였던 여러 배경적 요인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했으며 그녀에게 어떤 법적 책임을 물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직접적으로 악행을 꾸민 건 트라하였다. 그녀가 단지 그를 진작에 고발하지 않았다고 해서 정죄할 근거가 있을까?
“어머니가 원하셨던 건 단순히 우리가 그들을 진압하고 승리하는 정도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해요. 아마 더 거국적이고 근본적인 승리를 원하셨겠죠. 사실 저 역시도 같은 바람이 있었거든요.”
“응, 이 모든 비극의 뿌리를 잘라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더 깊은 근원을 베어야 한다고 믿었어. 또 그것만이 잘못된 일들에 연루되었던 내 가문의 어리석음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했고.”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주님께서도 어머니께 더는 과오를 묻지 않으실 거예요.”
단순한 값싼 용서의 차원이 아니다. 새어머니는 책임감을 버리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최선을 다하셨다. 비록 그것이 실수에 대한 합리화의 근거가 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연합된다면 과거의 수치들은 모두 용서될 것이다.
“적어도 저는 트라하를 단죄하는 것 너머로 이전 일들을 더 들춰낼 생각은 없어요. 어머니는 자기 역할을 했던 것으로 간주할 생각입니다. 그게 모자라다면 이렇게 정하죠.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제가 어머니께 임무를 맡긴 겁니다. 그 임무로 인해서 국가를 위해 그들 편에 숨어든 것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렵니다.”
세일린은 어처구니가 없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게다가 어머니, 이미 더 과거를 팔 필요도 없게 되었어요. 그들 모두가 체포되었고 곧 모든 비밀은 만천하에 공개됩니다. 어머니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이미 힐렐 숭배자들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이 떠들썩해질 테니까요.”
“트라하가 살아있잖니. 법정에서 그가 할 말들이 남아있지.”
“어차피 악령 들린 일개 광인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파탄 난 정신 이상자의 말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을 겁니다.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제가 여차하면 타르타로스 같은 금기를 써서라도 놈에게서 모든 정보를 캐내겠어요. 굳이 법정에 세울 의미가 있을까 싶군요.”
세일린은 온순한 양아들에게 은근히 무서운 면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물론 회개의 가능성이 없는 악인들에 한정하여 보여주는 모습이겠지만.
“아, 참, 어머니, 질문이 있어요.”
“물어보렴.”
알렉시스는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가볍게 거론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찝찝하게 두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해소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트라하와의 대화 중 꺼림칙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이안에 대한 이야기지?”
곧바로 알아들은 세일린. 아마도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네, 맞아요.”
알렉시스는 괜히 불편한 이야기로 괴롭게 해드렸나 걱정이 들었다.
“솔직히 저는 그런 도발 믿지 않아요. 잠시나마 의심이 들어서 죄송하긴 했는데, 그래도 그가 어떤 문맥에서 그런 터무니없는 믿음을 가졌는지 알고 싶어요. 단순히 그의 망상이었던 건가요?”
이안은 황제에게서 난 아들로 알려졌음에도 눈동자의 색이 전혀 자색을 띠지 않았다. 물론 보편적인 유전 법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해명을 통해서 명쾌한 답을 듣길 원했다.
생각해 보니 이안이 수태되었을 때쯤에는 알폰스가 잠시 어떤 국가적 임무로 인해 멀리 파견을 나갔던 상태였고 세일린과 잠시 떨어져 지냈었다. 이런 일은 사실 흔했다. 당시 알폰스는 황태자였고 브리튼에서 황태자란 황제를 대신하여 중요한 일들을 감당하는 가장 바쁘고 유력한 인사니까. 돌이켜보니 이런 점들로 인해서 트라하도 자신이 나름의 합리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죠? 이안에 대해서 했던 트라하의 말들.”
“흐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지요.”
겨우 편하게 말을 놓았던 세일린이 일부러 다시 공손하게 말씨를 높였다.
“이성적인 근거라기보다는, 그저 확신이 들어요. 이안은 제 동생이 맞아요. 저와 동일한 피를 나눈 제 형제입니다. 제 본능적 감각이 그걸 증언해 주고 있어요.”
“영리한 황태자답지 않은 엉뚱한 답변이네요.”
세일린은 그의 유머에 작은 웃음으로 반응해 주었다.
“트라하가 정말로 이안을 사생아로 믿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당신 앞에서 마음을 흔들 목적으로 떠벌리긴 했지만 거짓말로서 그렇게 말한 건 아녜요.”
그녀는 아들을 안심시키는 부드러운 어투로 온화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가 믿고 있는 바는 사실이 아니랍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알렉시스는 호쾌하게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잖아요. 어머니와 트라하의 사생아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어요.”
“하긴 황태자 당신도 보았듯 나는 그를 극도로 혐오하죠. 젊은 시절 그의 실체를 처음 발견한 그날 이후로 나는 그를 인간이라고 인식한 적이 없습니다. 그 가면 너머의 모습은 순수한 악마 그 자체였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정죄하며 죽일 듯 다투던 둘이었다. 그런 둘이 정이 맞아서 간음을 한다고? 꾸며내는 이야기도 이성적인 범주 내에서 정도껏 해야 하는 법이다. 세일린으로서는 그런 가정법은 상상만 해도 몸서리치는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아니, 사실 꼭 그런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요.”
알렉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세일린이 저들을 배신했음을 알기 이전에도 솔직히 그는 트라하가 내뱉은 사생아 설을 별로 신빙성 있게 보지 않았다.
“그냥 뭐, 말이 안 되잖아요.”
“왜요?”
“우리 아버지가 남편인데 다른 지푸라기들이 남자로서 느껴질 리가 없거든요.”
“아, 인정합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당당함이지만 알렉시스의 주장은 굉장히 타당했다. 알폰스는 자기 세대 내에서 세계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성품, 외모, 건강함, 매력, 유능함, 다정함, 재능 등 모든 측면에서 비할 자가 없었지. 그나마 같은 유전자를 지닌 삼촌 정도라면 모를까. 그 근사함과 멋짐 앞에서는 하찮은 악마 숭배자들 따위는 연체동물만도 못한 추잡스러움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트라하가 이안을 자기 씨앗으로 믿은 이유는 그런 맥락이 아닙니다. 그는 나와 정을 통했던 것이 아니라 나와 거래를 시도했어요. 인공수정 실험을 시행할 것을 요구하였죠.”
“네?”
알렉시스는 매우 놀라 외쳤다.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려면 복잡해요. 그는 황태자비가 된 이후로도 나를 제어하기 위해 거듭 공갈을 했습니다. 내가 알폰스를 연모하는 줄을 알았기에 내 치부를 드러내겠노라고 협박했죠.”
“잠시만요. 그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고요?”
“여기서 그가 이해하는 사랑이란 동물적인 육욕을 의미합니다. 거국적인 뜻, 곧 영적인 방향성에 있어서는 사랑과 별개로 자신들과 한편이라고 확신했었죠.”
“가관이네요.”
“여하튼 그는 자신의 유전자가 담긴 생식 세포들을 인봉하여 내게 전달했습니다. 내게는 보는 눈이 많이 붙어있기에 외부에 난자를 제공하는 시술을 직접 시행하는 절차를 거치긴 어려웠죠. 그래서 나는 내 쪽에서 알아서 몰래 인공 수정을 완수하겠노라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속임수였군요. 하지만 그가 어떻게 그 말만 듣고 어머니를 믿었죠?”
“나름 그에게도 믿을 구석이 있었으니까요. 유전자가 담긴 세포들을 초상물질들을 녹인 용액 속에서 보관했거든요. 특수한 목적으로 설정값이 정해진 화합물이었습니다. 해당 정자가 난자와 결합하여 실제 인간으로 수정되었을 때만 특정 신호를 보내도록 설정되었죠. 트라하는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수단을 몸 안에 담고 있었고 자신이 상황을 모니터링할 수 있다고 믿었죠.”
“와, 하여간 치밀한 작자로군요.”
그렇다면 의문이 드는 부분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세일린은 들키지 않고 트라하의 눈을 속여넘길 수 있었는가.
“그때는 마침 알폰스 그이가 먼 곳으로 출장을 떠난 때였죠. 나는 몰래 그에게 부탁하여 그가 아무도 모르는 틈에 잠시 하룻밤을 나와 보내도록 비밀리에 이동해 올 것을 부탁했습니다. 남편은 정확하게 영문을 알진 못했지만 나를 믿고 내 부탁대로 해주었죠. 그래서 그는 아들들이나 황실 고용인들은 물론이고 당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틈에 변장한 채 내 방에 들어왔고 다음 날 아무도 몰래 다시 복귀했죠.”
“아버지께서도 어머니가 이중스파이임을 아셨던가요?”
“아주 정확한 부분까지는 몰랐어도 어느 정도 뜻을 함께하긴 했습니다. 그가 나를 결혼 상대로 택한 것도 이본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진행된 일이었죠.”
“사랑하신 것도 사실이지만요.”
“맞아요. 그때의 어렸던 당신에게는 너무도 미안했지만, 나는 언제나 알폰스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내 결정은 이본 때문이었어요. 그녀를 대신하는 것이 고통스러웠고 당신 보기에도 부끄러웠지만, 난 그래도 이를 악물고 뻔뻔스럽게 해야만 했습니다.”
“원망하려는 게 아니에요. 저도 그땐 철이 덜 들어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정을 다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지금은 다 털어버려서 괜찮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그때는 조금 서운했던 건 사실이지만, 다 용서하였고 지금은 그 깊은 사정까지 이해하게 되었으니 더는 슬플 이유가 없다. 게다가 소중한 동생들을 선물로 주신 분이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앞으로 그때 서운하게 했던 몫까지 최선을 다해 갚을게요.”
“저도 그간 못다 했던 효도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제 세일린은 알렉시스의 의문에 대해 해답을 주었다.
“그때 트라하를 속일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가장 어려운 관건이었습니다. 결정적인 관문이었죠. 하나님께서 이런 죄 많은 여인의 어리석은 선택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신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부스러진 작은 알갱이들을 품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트라하와의 대결 때 부스러진 수정이었다. 그녀가 목걸이에 걸어 간직하고 있던 보물.
“그게 정체가 뭐죠?”
“당신의 친어머니가 내게 마지막 죽기 직전 넘겨준 유물이죠. 남편조차도 이것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초상물질인가요?”
“네, 하지만 악마들의 손이 닿지 않은 유일한 마지막 한 조각이죠. 악마들도, 악마숭배자들도, 이 마지막 한 조각만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제 친어머니가 수중에 넣게 되었단 말씀이죠?”
“어떻게 이본이 그것을 확보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신적 계시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죠. 섭리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요. 확실한 건 그녀가 그것을 그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 아무도 이 마지막 한 조각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으니까요.”
“어떤 기능이 있죠.”
“여러 잠재력이 있지만, 저는 그것을 다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본도 그저 간직만 했죠. 다만, 유일하게 알아낸 것이 있다면 이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보물’이 나머지 모든 초상물질에 일종의 억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차폐벽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군요.”
“그리고 초상물질 간 공명현상의 비특이적 분산, 그 현상도 내가 소유한 이 마지막 조각에 의해서 유발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분산 현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만, 내가 보물을 몰래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더 극심해졌죠. 3차 대전 당시 저는 그런 기능을 모른 채 실험적으로 사용하였는데, 그것이 나비 효과를 일으켜 연방의 사상조작병기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죠.”
“그랬었군요. 이제야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네요.”
이본은 이 보물을 통해 트라하가 제공한 정자 샘플에 담긴 초상물질도 몰래 조작하여 뒤틀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단 하루 알폰스와의 동침을 통해 아이를 가지는 데 성공해야 했고 그 아이가 알폰스를 닮은 모습이어서는 곤란했다.
그런데 참 특이하게도 하나님께서 이 가운데 섭리로 역사하신 것인지, 그분께서는 트라하가 자신의 꾀에 속아넘어가도록 능력을 베푸셨다. 신께서는 결코 스스로는 거짓말을 하시지는 않지만, 거짓말에 취한 자들이 스스로의 거짓말에 걸려 넘어지도록 함정에 가까운 섭리를 제공하시기도 한다. 아합왕이 거짓말 하는 영들에게 속아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죽은 것도, 하나님의 허락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놀랍게도 그 단 하루의 동침으로 이안이 태어났고 더 놀랍게도 그 아이는 알폰스와 별로 닮지 않은 외모에 황실 직계의 신체적 특징이 거의 보이지 않는 외모를 소유한 채로 자라났다. 그러면서도 황자들 중 알렉시스를 제외하면 가장 잘생긴 얼굴을 지녔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트라하를 속게 만드신 것이죠.”
“그러고 보니 주님께서 그자를 자기 속임수에 넘어지게 하신 그때만이 아니었군요.”
알렉시스는 곰곰이 이안에 대해 그자가 했던 말들을 떠올려보았다. 이안이 가짜 적그리스도 연극을 하였을 때 트라하는 분명 이안의 정신세계 속에 어떤 초자연적 존재가 임했었노라고 증언했다.
“의도적인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그자가 악령들에게 속은 것 같네요. 어쩌면 악령들도 그자와 한편이었으니 속이고 싶어서 속인 것은 아니겠죠. 다만, 자기들끼리 엇박자가 나면서 서로 착각이 쌓여 오판이 점점 증폭되었겠죠.”
어쩌면 트라하는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오려던 적그리스도의 영에 속아 이안이 적그리스도의 영을 불렀노라고 오판했으리라.
“사실 저는요. 이안이 설령 아버지의 생물학적 아들이 아니었다고 해도, 심지어 악마 숭배자들의 혈통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변함없이 제 동생이라고 여길 생각이었어요.”
그 말에 감동하였는지 세일린은 몹시 큰 미안함을 느꼈다. 자신에 얽힌 잘못된 소식으로 인하여 저 건실한 청년이 큰 상처를 받을뻔 했구나.
“그래도 오해가 풀리니 기분이 좋네요. 돌아가면 좀 많이 안아줘야겠어요.”
“그렇게 해주세요.”
제 배로 직접 낳은 아들들이 친구가 남긴 유일한 아이를 친형처럼 여기며 의지하고 사랑해 주는 모습은 깊은 위안이 되었다. 저 아이도 동일한 마음이겠지.
“저한테도 아들처럼 편하게 대해주시고요. 아니지, 아들이 맞지.”
“미안.”
대견하고 듬직하게 자란 이본의 아들, 그녀를 닮아 용맹하고 진취적이며 알폰스의 기개와 훌륭함까지 잘 섞인 멋진 결실. 이런 과분한 보물을 자신이 품에 안아도 될까 하는 마음에 머뭇거림이 들었으나 잠시 은혜를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자, 이제 다 됐구나.”
힘들고 고역스러웠던 응급 치료가 대충 마무리되었다. 압박 붕대로 상처를 완전히 감은 알렉시스. 등에서는 아직 통증이 얼얼했으나 전보다는 꽤 불편감이 가라앉았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대전쟁 때에 자원봉사를 나서곤 했어서.”
“어머니 덕분에 한결 개운해졌어요.”
“잘 견뎌줘서 고맙네. 그래도 항상 몸조심해 주었으면 해.”
“노력할게요.”
커다란 대형견처럼 온순하게 말을 잘 듣는 기특한 청년이 예쁘게 보였는지 귀부인은 다시금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어요.”
알렉시스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했다.
“어머니에 대해서, 그러니까 저를 낳아주신 친어머니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세일린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마음 깊숙한 곳이 묵직하게 눌렸다.
“힘들겠지만, 정중히 부탁드려요. 트라하의 오염된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일한 친구였던 당신의 증언을 통해 진실을 알고 싶어요. 저 역시 이제 각오는 되어 있어요. 어떤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감내하고 수용할게요. 그러니 그 어떤 위로를 위한 진실의 가감도 없이,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만 저에게 가르쳐주세요.”
마음은 이미 단단히 부여잡았다. 친어머니가 어쩌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진실로부터 도망치며 자기 위로를 하지는 않으리라. 어떤 진실을 보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 위로가 임하건 고통이 임하건.
“괜찮겠니?”
세일린은 아들이 느낄 슬픔과 그리움이 눈에 선해 마음이 미어졌다.
“네.”
그녀는 한참의 고민 후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위장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러니 그 약속을 이 자리에서부터 실천하리라. 이본에 대해서, 그녀의 친아들인 아 아이는 모두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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