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80회 [2부] 101화. 용서받은 여인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8.20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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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떤 한 여인의 회고록이다.
언제나 내게 있어서 경쟁이란 개념은 삶의 운동력이요, 인생의 온당한 작동 규칙이었다. 세상은 경쟁하는 존재들의 집합소이다. 누군가는 남을 위해 희생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마저도 대부분은 자신의 정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한 경쟁의 수단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은 경쟁을 통해서 진보해왔다. 치열한 다툼과 경주의 연속, 사람들은 그 가운데서 지쳐나가며 짐승들과 자연계의 생물들도 죽음의 상아탑을 쌓는다. 하지만 그 결실로 사람들의 실력은 성장하며, 기술과 지식은 축적되고 생물은 더욱 적합한 존재로 진화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균형 속에서 건강한 경쟁의 경기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리라. 이것이 내 신념이었으며 나는 그에 부합한 삶을 살아왔다.
학창 시절에도 나는 경쟁을 피하지 않았고 늘 승리를 쟁취했다. 각계 학문의 올림피아드에서 월계관을 정당히 얻어왔으며 내 보물 창고는 늘 자랑스러운 학위들과 트로피들로 진열되었다.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나는 누구에게든 패하지 않았다. 꾸준한 단련으로 흐트러짐 없는 최상의 건강과 미를 연단해왔고 모두에게 인정 받았다. 예법으로도, 교양과 학식에 있어서도, 타인과의 건전한 교류의 재능에 있어서도, 나는 흠결 없이 성취를 이루었고 이로써 부모님과 친척들에게 가장 빛나는 자랑거리가 되었다.
실력으로든, 노력으로든, 타고난 것들과 물려받은 것들에 있어서든, 나는 최정상에 속한 자였다. 학벌도, 직장에서도, 학위와 학문적인 명예, 저술 활동을 통한 인정, 그 외에 교양으로서 익힌 음악적, 미술적 자질에서도, 모두에게 객관적으로 으뜸으로서 인정되었다.
또한 나는 내가 받은 재능과 여건을 최대한 유용하게 활용하여 많은 업적과 유익들을 남기는 데 열정이 있었다. 나는 게으르고 타성에 젖은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배움의 열심도 식지 않았으며 언제나 어느 부분에서든 나보다 잘하는 이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워내어 그들을 넘어서는 일에 부지런했다.
이러한 나이기에 인생의 모든 영역, 그 가운데 평생의 짝을 만나는 일 역시 최상의 것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세계 방방곡곡의 유명한 남자들과 훌륭한 인물들이 내게 구혼하였다. 자수성가한 젊은 억만장자, 유서 깊은 위대한 가문의 후손들, 정치계의 거물들, 전무후무한 스포츠 스타들, 천재 음악가들과 세계 제일의 배우들까지, 나는 그들 모두에게 성이 차지 않았다.
언제나 내가 결혼 상대로 유념에 둔 상대는 황태자뿐이었다. 나는 과연 알폰스를 진정으로 사랑했을까. 그때의 감정이 올바르게 사랑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인지, 가치관이 많이 바뀌고 다듬어진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판단이 망설여진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분명히 나 스스로 알폰스를 연모하고 있노라고 믿었다. 어쩌면 그것은 황태자라는 가장 찬란한 보석을 개인적으로 소유하게 될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의 연장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본을 처음 만나게 된 것도 황태자와의 교류가 계기였다.
열아홉 살의 나는 처음으로 쌍둥이 황태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둘 모두 내게 호감을 보였으며 나는 지혜로운 처신과 온전한 언변, 그리고 탁월한 슬기를 어필하여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사실 세계 곳곳의 뛰어난 인재들 대부분이 그 두 형제와 친분을 맺긴 했다. 하지만 나와의 사이는 더 깊고 긴밀한 것이었다.
이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황태자와 많은 접촉점을 가졌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종종 황태자를 매개로 충돌점을 갖게 되었다. 여러 국가 행사 및 사적인 모임의 자리에서 황태자는 나를 이본에게, 이본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내게는 엄밀한 의미에서 친구라는 개념이 없었다. 모든 이를 공평하게 공손히 대하긴 했으나 나의 마음을 열어놓고 가장 긴밀한 부분을 공유하는 사적인 상대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사람들은 내게 유익한지 아닌지, 나와 경쟁을 치룰 상대인지 아닌지에 따라 분류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본이란 상대는 내게 매우 낯설고 어색했다. 내 본성은 처음부터 그녀를 잠정적인 경쟁의 대상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도대체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깊은 마음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보다 불과 한 살 아래였던 이본은 모든 사람에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귀족의 본성이 뿌리 깊이 박혔던 내가 잔잔하면서도 고고한 얼음의 달이었다면, 그녀는 햇살처럼 따스한 사람이었다. 이방인 출신에 브리튼의 주류가 되지 못한 여러 이교도 민족들의 혼혈이었던 그녀. 그럼에도 그녀는 마치 이 나라의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던 것처럼 모두의 품에 유유이 어우러졌다.
처음에 나는 이본에게 일부러 날을 세웠다. 거리를 두었고 경쟁자로서의 위치를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고의로 나쁘게 굴지는 않았으나 늘 사무적으로, 냉정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이본은 그런 내게 남들에게와 동일한 따스함으로 다가왔다.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여러 일화들을 모두 요약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대부분 소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이다. 때로는 다툼이 포함되었고 때로는 우리의 의견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 작은 허들들을 넘는 와중에 나는 내 안에 내게도 몹시 낯설게 느껴지는 소소한 파동들이 이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어려움을 맞닥트렸을 때, 욕심을 내려놓고 의견을 모으는 과정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무심코 꺼낸 대화를 계기로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족적을 터놓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익하게도 불필요한 동정과 공감을 품고야 말았다. 서로의 연약함을 발견하였고 서로의 좋은 점을 알아차려 그것을 급기야 인정하고야 말았다.
몇 년이 지난 사이에, 나와 이본은 우리도 모르는 새 비밀스럽게 친구가 되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이본에게 평상시처럼 고고하게 대했기에 사람들은 내가 어떤 우정을 품게 되었는지를 몰랐다. 이본이 내게 주는 친절함 역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베풀어지는 이본 고유의 넉살과 달라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본이 그저 나를 인맥으로서 두루 원만히 지내고자 친절히 대하는 줄로 여겼고 나 역시 그렇게 믿었다.
늘 마음 한구석에서 외로웠던 나는 그녀에게 어느 순간 의지하는 마음과 친애하는 감정을 갖게 되어 그것을 몰래 부끄러이 여겨 숨겼다. 나약해져서는 안 돼. 그러나 감정을 제거하기란 어려웠고 어느 순간 나는 내 진심을 긍정하였다. 아쉬움이라면 자신에게 이본이 유일한 친구인 것과 달리, 이본에게는 자신이 그저 여러 친구 관계 중 하나일뿐이라고 생각되었기에 쓰라림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난 계속해서 그녀를 신뢰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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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자리에 책봉된 건 내가 아닌 이본이었다. 내가 생애 처음 겪는 경쟁에서의 좌절이었다. 패배감과 부끄러움이 없었냐고? 만약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난 분명 황태자를 개인적으로 연모하고 있었으며 야심과 같은 속물적인 감정에 의거해서도 그를 향해 은근한 야망을 품었었다. 이 사실은 부정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역설적인 안도감도 스쳤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본에게 그를 내어주게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슬프고 씁쓸하기는 하지만 그녀라면 순순이 인정하고 승복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이본은 모든 면에서 나와 필적하는 뛰어남을 소유한 훌륭한 위인이었고 황태자의 짝이 되기에 충분한 격과 넘치는 재능과 창조성을 소유하였다. 더불어 알폰스는 진심으로 이본을 뜨겁게 사랑했다. 곁에서 지켜본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알폰스는 이본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어줄 수 있는 사나이였다.
한편, 원래 예약되었던 약혼이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부모님과 친척들에게 책망을 들을 줄 알았다. 의외로 그들은 자존심을 구기면서도 그 상황을 묵묵히 수용하였다. 나는 영문을 잘 몰랐다. 그들의 진짜 속셈과 그 배후의 여러 어지러운 상황들을 깨닫게 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와 이본의 우정은 금이 가지 않았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둘의 우정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우린 비밀스럽게 만나 종종 대화하였고 편지나 메시지를 주고 받을 때도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법을 취했다. 이본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와 비밀을 터놓았고 나 역시 그렇게 하였다.
나는 기뻤다. 내가 살아온 방식인 경쟁의 삶이 적어도 이 영역 하나에서는 부정될 수 있어서. 내가 견지해온 인생의 진리가 적어도 한 부분에서는 틀렸음이 증명되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안도하였다.
알폰스와의 화려한 결혼식을 마치고 이본이 황태자비가 된 이후, 나는 이제 그녀의 삶이 꽃길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고아 출신이었던 그녀가 더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녀는 당당하고 우아하고 지혜로운 여인이니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리라. 알폰스 역시 자신의 짝을 자기 몸보다 아끼는 책임감 있는 남자이니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리라.
이것은 어느 정도 타당한 희망사항이긴 했으나 아주 잘 들어맞지는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차라리 알지 못했으면 했던 탁한 진실들을 직면하였다. 당시의 브리튼 제국은 물론이고 유일의 적대국인 커뮤니스트 연방 내부에까지 촉수를 뻗은 거대한 암부 세력의 실체. 수많은 유력한 가문과 부유한 자들, 그리고 정재계와 학계의 인사들이 그들과 한몸뚱아리로 엮여있음을 발견했다. 더 충격적인 부분은 귀족과 같았던 내 가문 안에도 그들과 연루된 자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훗날 이들의 실체가 명백히 벌거벗겨져 자세한 사안이 드러날 테니 여기서는 같은 이야기는 생략하고자 한다.
허나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알고도 일부러 외면하였다. 그들은 가장 추악한 비밀마저도 일부러 음모론으로 치부하고 알지 않으려 했다. 설령 그중 몇 가지 소문이 맞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무시하고자 했다. 만약 내가 그들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기 위해 적당히 양심의 소리를 조금만 닫아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의향도 있었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가 나오지 않는 자가 있던가.
이것이 내 인생 최대의 실책이었다.
더불어 나는 또 한 가지의 고통스럽고 불편한 진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본에 대한 이야기였다. 천애 고아였던 이본을 길러주고 후원해주었던 조직. 그들 배후에는 ‘그들’이 맞닿이 있었고 그 가운데는 우리 가문의 일원 및 다른 친밀한 가문과 조직들의 관계자들도 엮여 있었다.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이본을 키워 뛰어난 학식과 재주의 실력자로 완성해준 이유, 필시 알폰스에게로 접촉시키기 위함이었으리라.
먼 훗날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교활한 ‘그들’은 자신의 하수인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사람의 몸에 무언가를 심는 금기 또한 예사로 범했다. 특히 그들은 스파이들을 심을 때 이 의식을 반드시 거쳤다. 하지만 나나 이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황태자와 같은 가장 중요한 타겟에게 접촉시킬 때에는 함부로 그 금기를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으리라. 아마도 아이를 낳기 위해 부부 관계를 맺을 때 그들의 금기가 발각될 가능성이 있었겠지.
하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이본에 대한 이 진실 또한 헛소문으로 여기며 덮어두었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이것에 대해 훗날 크게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이본의 얼굴에서 정체 모를 깊은 수심의 흔적을 거듭 발견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남편도 있고 그 사이에서 얻은 멋지고 훌륭한 아들까지 받은 성공한 여인.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설명하기 힘든 복잡함이 옅게 어려 있었다. 죄책감? 고통? 근심? 두려움? 혼란스러움? 늘 고귀하고 용맹하며 진취적이었던 이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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