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81회 [2부] 103화. 용서받은 여인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8.22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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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벗인 이본의 인생에 기쁨의 즙이 부어졌던 시절이 있었으니 그녀가 남편을 얻은 날과 사랑하는 외아들을 얻은 날이었다. 언제나 쾌활하고 순수하고 부드러운 생명력이 가득하던 그녀였지만 그때만큼 기쁨을 깊이 묵상하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알폰스는 그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내게도 그는 연모하던 상대였고 잠시 약혼 이야기까지 나오긴 했으나 이본과 그의 연합은 흔히 세간에서 말하는 동화 같은 트루러브 그 자체였다. 그리고 알렉시스는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얻은 생명의 결실이었는데, 그녀는 마치 이 하나의 위대한 걸작품을 빚는 데 자신의 혼신을 다 소모한 것인지 이후로는 다른 아이를 갖지 않았다. 마치 내가 추후에 갖게 될 일곱 명의 걸출한 자녀를 만들 모든 여력을 그녀는 오로지 한 아이에 송두리째 투자한 것 같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아이를 처음 본 순간 크고 신선한 충격에 빠졌다. 세상에 이렇게 귀엽고 잘생기고 똘똘하게 생긴 꼬마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가 불과 서너살 정도였는데도 선명히 인상을 받을 정도였다.
종종 이본은 비밀리에 나와 만났는데 그때마다 항상 자기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쁨을 드러내었다. 나는 아이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고 그녀가 참으로 행복한 축복을 받았노라고 여겼다. 그리고 나 역시 친우와 아이에게 축복하는 말들로 위로하였다. 그녀가 비록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때에 이 무거운 자리의 짐을 짊어지긴 했지만 이 아이가 그녀의 봉양자가 되어 생기의 회복자가 되리라. 그 모습을 보고 그 옛날 성경책에 기록된 늙은 과부 나오미가 자신의 신실한 며느리에게서 생명의 열매가 된 손자를 얻었을 때 어떤 마음이이었을지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난 그이가 믿는 신을 따르기로 했어.”
친구는 결혼 이후에 자신의 신앙관의 변화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나는 아직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브리튼령 안에서 태어났으며 그 나라가 본질적으로 기독교 정신 위에 터를 세운 나라이기에 명목상으로 가끔 교회 출석을 하긴 했으며 공적인 자리에서는 기독교와 하나님을 긍정하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믿음 체계 안에 그분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가문의 일원과 그들과 연합된 자들이 비밀리에 주술적으로 믿었던 그 악신을 섬겼던 것도 아니었다. 내게는 종교랄 것이 없었고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해도 그를 인격적으로 알지는 않았다.
이본도 결혼 전에는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지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랬던 그녀도 결혼 이후에는 남편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정기적으로 교회 출석을 하였으며 나름의 신앙 고백도 하였다. 복음이라는 메시지에 대해서도 지적인 차원의 동의는 하였고 기독교 문화를 긍정하였다.
그녀가 당시에 정말로 그런 마음가짐을 올곧게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로서는 그렇게 신앙을 표방하는 것이 최선이라서 그랬는지도. 세계 제일의 유서 깊은 기독교 집안인 브라이틀란트 가문의 가장 중요한 며느리가 되었으니 마땅히 그 집안의 문화를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고 그것이 합리적이며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긍정해주었다.
“하긴 황태자 전하께서도 신께 대한 신앙심이 매우 독실하신 분이니까.”
“그래, 난 그이의 편에서 같은 방향을 보고 싶어.”
이본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시집 간 남편 집안의 가치관을 수용하려는 타협의 태도만이 전부는 아니었겠다. 아마도 이본은 브라이틀란트 가문의 일원이 된 과정에서 그들 가운데 실제로 작동하는 신의 손길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언약은 단순히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음이 나타났다. 이본은 무려 그 언약의 응결핵이었던 알폰스와 더불어 영혼과 몸의 연합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 열매이자 역대 최고의 능력인 알렉시스를 자기 몸에 직접 품었다. 그 체험은 이본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러나 나는 내가 외면했던 어두움의 증거들을 영원히 회피할 수 없었다. 그 고통의 그림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아닌 이본에게 잔흔을 남겼다. 그녀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슬픔을 억지로 감추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의 사정을 물었다. 몇 번 대답을 피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내게는 보였다. 이본은 결혼 이후 기쁨의 잔을 마신 것에 비례하여 더욱 쓴 탄식의 잔 또한 겸하여 마시는 중이었다.
그 고난의 정체가 바로 ‘양심의 정죄’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이본이 정직하게 자신의 신세와 아픔에 대해 내게 열어두는 데는 오랜 결단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에 빛이 짙게 드리워졌듯 그림자 역시 더욱 어둡고 탁하게 드리워졌다.
이본은 아무도 몰래, 그 누구도 보지 못하는 조심스러운 장소에서 내게 진실들을 하나둘 씩 공유하였다. 그 내용이 내가 접하였던 가문의 진실들과 일맥상통하였기에 나는 의심치 않을 수 있었다. 내 가문만이 아니었다. 세계의 여러 유력한 자들과, 그들이 모여 이룬 어두운 음모의 조직들, 그리고 그림자 정권. 온갖 세력들이 여기에 얽혀 지저분한 키메라의 몸통을 이루었다. 내 가문에 촉수를 뻗친 바로 그 세력의 또다른 한 부분이 여러 스페어카드들을 양육하고 있었는데, 이본은 그런 희생물 중 하나였다.
그녀가 왜 나를 택했는지는 모른다. 다른 친구에게 도무지 나눌 수 없는 수치스러운 부분이어서? 적어도 내 생각과 달리 이본이 나를 단순한 친구 한 명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의지할 단 한 명으로 여겼던 것은 분명히 그때 드러났다.
물론 그녀가 가장 사랑한 대상은 단연코 알폰스와 알렉시스였고 그녀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그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만은 차마 진실을 폭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 이유는 두려움과 죄책감 때문이었다. 자신의 실체가 그들 앞에만은 드러나지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처음부터 순전치 못한 계획들에 이끌려 그들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심, 떳떳치 못함, 그것이 그녀를 괴롭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게 되었기에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순수하지 못한 손길에 이끌려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한다 한들, 적어도 시작점에 있어서는 스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자각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괴로워했으리라. 어느 순간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알폰스를 진정으로 남편으로 사랑했고, 알렉시스를 세상 그 어떤 보물보다 아꼈으며, 심지어 그 둘이 속한 브라이틀란트 가문을 자신의 터로 여기게 되었다. 시작은 악마들에 의해 심어졌거늘, 어느 순간에는 신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게 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이유로 그녀는 오도 가도 못할 처지가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게 큰 아쉬움이 임한다. 차라리 그녀가 굳게 용기를 내어 남편과 시아버지, 그리고 어린 아들에게 진실을 고백했더라면 어땠을까. 당장은 고통과 수치가 임했으리라. 하지만 난 언약의 수호자들이 그녀를 이해하고 품어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필시 그들은 그녀를 용서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이런 가정법은 무의미하겠지. 결국, 지극히 사랑하는 이들에게 실망을 끼치길 무서워했던 그녀는 혼자 양쪽 진영에 끼인 채 끙끙 앓았다. 그나마 내가 그녀의 숨을 트이게 할 해방의 창구가 되어주었다. 나 역시도 비슷하게 이용당할 위치에 처해있으니까. 우리는 서로를 동병상련하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일인데, 이본은 아들을 키우던 그 짧은 몇 년 사이에 보이지 않는 손길의 위협과 협박을 숱하게 겪었다. 그녀가 변질되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쉴새없이 음지에서 그녀에게 겁박의 메시지를 주었다. 그 내용을 다 고백하진 않아서 모르지만, 아마 그녀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드러내겠다는 협박과 연관이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그녀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맘 착했던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로 딜레마의 삶의 짓눌렸던 셈이다.
남편을 배신하고 그들의 뜻대로 움직일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신의 강력한 능력과 임재를 그녀의 남편과 아들에게서 발견했다. 그런 낡고 구세대적인 악마숭배자들의 옛 아젠다에 놀아날 뜻은 그녀에게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렇다고 용기가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나 역시 친우가 비극을 맞이하기 전에는 내 목숨과 모든 것을 걸고 그들에 맞설 각오를 세우지 못했으니 이해한다.
그리고 비극은 마침내 엄습해왔다. 이본은 어느 날, 이유를 모를 병으로 쓰러졌다.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육신을 지녔던 그녀이기에 이 현상은 의학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실제 신체 검진 과정에서도 특이 사항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날 이후로 빠른 속도로 혼의 생명을 소진해가며 죽음으로 나아갔다.
참고로 나는 당시에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사후에 알폰스는 나와 재혼하였는데 그때 그는 이본의 죽음의 원인을 모종의 음모, 곧 미지의 세력인 ‘그들’에게서 찾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런 의심을 음모론 치부했겠지만 나는 곧장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훗날에야 나는 이본이 당한 ‘독살’의 본질적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는 트라하와의 비밀리 교류 과정에서 그의 여러 술책과 술법들의 정보를 파악함으로써 가능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본에게는 오랜 시간에 걸친 지속적인 음독이 이뤄졌다.
주입된 물질은 인간계의 물질이 아닌 초상물질이었고 그 배합 공식이 어찌나 정교한지 통상의 방법으로는 검출할 길이 없었다. 겉보기에는 무색무취의 물과 같은 액체 형태였으며 일절의 화학 작용도 없는, 그야말로 보통 사람에게 주입되었을 때는 흡수 후 아무 영향도 주지 않고 완벽히 배출되는, 완전 범죄의 물건이었다.
트라하에게서 캐낸 정보에 따르면 당시 음지의 마술사들에게는 그 특이한 초상물질 기반 화합물을 ‘저주’의 용도로 사용하는 기술이 있었다. 그들은 그 물질 안에 이본의 유전자를 섞어 넣은 뒤 모종의 각인술을 시행하였다. 물리계의 화합물로는 불가능한 일로, 가히 마법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능력이다. 이본의 경우에는 그들의 손에 양육되었으니 그 유전자를 얻기도 어렵지 않았으리라. 이것이 황실 내에 많은 이들이 동일한 독에 의해 음독되었음에도 오로지 이본만 영향을 받은 이유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황실 근처에도 많은 이들이 그들의 영향력 아래 매수되어 있음을 증빙하기도 한다. 부끄럽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아직 그들의 영향력이 강대했던 시절이었고 많은 이들이 첩자 노릇을 하거나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들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알렉시스가 장성한 이후로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그 이전에는 황실도 그 영향권 내부였던 것이다.
이본은 그렇게 쇠하여 갔다. 아름다운 꽃이 땅으로부터 분리된 이후로 서서히 시들 듯, 그녀의 마지막 불꽃은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고 그녀는 비극의 시간을 받아들이고자 담담히 마지막 준비를 하였다.
황태자는 황태자비를 살리고자 백방의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몸 속에 차곡차곡 정착된 초상물질의 초월적 효력은 당시의 의술로는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끝내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과 아들을 두고 세상과 작별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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