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82회 [2부] 103화. 용서받은 여인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8.25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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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스러웠는지 모르겠네.”
모든 이야기를 마친 세일린은 알렉시스의 눈치를 보았다. 깊은 우수에 잠긴 청년은 한참을 묵상하며 아무 대답 없이 마음을 정리하였다.
“미안해, 모든 것을 나누지 못해서.”
그녀는 양아들이 지금 얼마나 마음이 복잡할지 짐작이 되지 않아 염려하였다.
“황실 내부에 잠식한 그들의 영향력은 이미 몇십 년 간 내가 조심스럽게 제거해뒀어. 이본 뿐 아니라 황실 인물들 상당수가 그 음독의 영향을 받긴 했겠지만 아마 그 부분을 염려할 필요는 없을 거야. 트라하의 비술에 따르면 오직 한 번에 한 명의 유전자만을 그 화합물 속에 각인할 수 있다 하더라고. 각인되지 않은 인간의 몸에 그 물질이 주입되면 아무런 상호작용 없이 배출돼. 그것이 그들의 범죄가 들키지 않을 수 있던 비결이기도 하고.”
여전히 알렉시스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세일린은 그의 넓은 어깨 위에 다정히 손을 얹어 따스한 온기로 위로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언약의 효력이 더 강력하니 황실의 직계는 피해를 받지 않을거야.”
“알아요. 그 부분은 전혀 걱정되지 않아요.”
이미 철저히 망한 어둠의 무리들과 그 음모를 다시 생각해서 뭐하겠는가. 알렉시스의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그 슬픔 뿐이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홀로 앓아오셨을까. 솔직히 말해주셨다면 좋았을 터.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하여 이해는 되었다. 자칫 그들에게 꼬리를 밟혀 더욱 큰 곤경에 처했을 수도 있겠지. 결과론적으로 보면 차라리 밝히는 편이 나았겠지만, 그녀로서는 어떤 길이 나을지 가늠되지 않았으리라.
‘출신이 어떻건 어머니는 내 어머니일뿐인데.’
아마 자신에게 비밀을 말해준다고 한들 당시의 어렸던 자신으로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으리라. 아버지라면 더 지혜롭게 해결해주셨겠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만은 부끄러움을 숨기고 싶었겠지.
“아직 한 가지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단다.”
세일린의 조심스러운 한 마디에 축 가라앉아 있던 알렉시스는 귀를 기울였다.
“어떤 이야기인가요?”
“이본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겪었던 일이지. 너와 네 아버지는 아직 모르는 이야기야.”
“어서 들려주세요, 어머니.”
두근거리는 가슴을 잠재우며 알렉시스가 정중히 청하였다.
“그래.”
투병 중에도 이본은 가끔 한 번씩 친우인 세일린과의 조심스러운 만남을 가졌다. 이제 세일린 자신도 자신의 가문이 어떤 영향권 안에 있는지를 자각했기에 최대한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둘은 변장한 채로 몰래 밖으로 나가 자유로이 공기를 마셨다. 이본은 휠체어에 탄 채로, 세일린은 그녀의 의자를 밀어주었다. 가족의 품에서 위로와 치유를 받는 것도 유익했으나 때로는 잠깐의 일탈과 바깥 공기의 누림이 마음의 환기를 주는 법이다.
친우와 산책하며 세일린은 가슴 속의 고민들과 생각들을 자유로이 터놓고 공유하였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음을 알기에 이본과 세일린 모두 서로에 대한 감정과 생각을 남김없이 내놓았다. 그들은 처음 친구가 되었을 무렵의 추억들을 회상했다. 이본은 알폰스와 알렉시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그들에게서 얻은 축복들을 회고하였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세일린의 가슴은 깊은 죄책감과 아픔으로 미어졌다.
그러던 중 이본은 이렇게 고백했다.
“신께서 살아계신다면, 그분께서는 나를 징계하셔야 마땅하겠지.”
“무슨 소리야, 그게.”
“그분께서 나 같은 비겁한 위선자를 용서하실 리가 없어.”
이본은 깊은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독백하였다.
“나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의 인생을 살아왔어. 가족들에게도 정직하지 못했었고 신을 믿는다고 공중 앞에서는 증언했지만 정작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채 살아왔지. 난 내 마음 속에 신의 형상을 만들어낸 채 내가 상상한 방식대로 그분을 섬겼는지도 몰라.”
그녀는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보수적이고 가문의 가치관과 명예를 소중히 수호하는 알폰스와는 이런 면에서 조금은 달랐다. 알폰스는 인류 전체를 수호하라는 브리튼 언약의 가치를 귀히 여겼다. 이본도 그 언약의 효력을 알았지만 그녀의 비전은 다른 방향을 향했다. 그녀는 언약을 온 인류가 공유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마치 희랍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모든 인간과 나누었듯, 그녀는 한 가문만이 소유한 그 보화를 인류 보편적으로 배분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러한 그녀만의 진취적인 비전은 ‘그들’의 방향과는 전혀 다른 생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마귀를 위해 주님의 선물을 파괴하길 원했으니까. 적어도 그들과 달리 이본은 언약의 주인인 신의 능력을 인정했고 긍정했으며 그것을 선하게 이용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본은 고백했다. 자신의 명석함은 실상 그분 앞에서 교만이었으리라고. 그녀는 인류가 보편적인 구원을 얻길 바랬으며 실제 사상도 만인구원론적인 성향에 가까웠다. 그녀는 신께서 소수의 민족 또는 가족을 택하여 그들에게 전적인 은혜를 베푸신다는 개념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그녀의 사상이 신의 마음과 일치하는 부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신께서도 모든 인류 안에 복음이 충만히 전해지길 원하셨고 또 명령하셨으니까. 하지만 이본은 신께서 추구하신 것과 다른 방법을 통해 그 야망을 이루길 원했다.
“내 어리석음에 대해 주님께서는 징벌을 내리신 거야.”
“그렇게 말하지 마!”
스스로를 힐난하는 이본에게 화가 난 세일린은 다그쳤다. 하지만 그녀의 자책을 막을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마음에서부터 부서져 서서히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기적은 작은 곳에서 찾아왔다. 걷느라 지친 두 사람은 어느 택시에 탔다. 목적지로 이동하던 중 기사가 친절히 말을 걸어왔다. 다행히 눈치가 좋지 않았던 그 늙은 택시 기사는 유명인이었던 이본이나 세일린을 알아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운전자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젊은 아가씨들, 내가 잠시 그대들과 어려운 이야기를 나눠도 좋겠소? 이 무례한 늙은이를 용서하시구려.”
택시 기사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이렇게 말하였다. 평소였더라면 단호하게 잘랐을 세일린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은 저항하고픈 욕구가 들지 않았다. 이본 또한 이상한 힘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그의 말을 경청하고자 하였다.
“고맙구려.”
운전자는 어느 이름 없는 복음 전도자로 평상시에 늘 자신의 손님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전하기를 거리끼지 않던 이였다. 그는 그날 성경의 여러 이야기 중에 하나를 택하여 화두를 시작하였다. 어느 간음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그녀를 함정에 빠트려 군중 앞에 세운 뒤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해 그녀를 그분 앞에 제시하였다. 이 여인을 율법에 따라 사형시키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까, 공의이십니까. 아마도 그들은 신의 아들을 이런 식으로 올무에 빠트려 정죄하려 하였으리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
이 말씀 앞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모두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분께서는 그녀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녀는 대답하였다.
“주여, 아무도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였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라난 두 사람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왜 그날은 그것이 그리도 색다르게 들렸던 것일까. 최면에 빠진 듯 두 사람은 저항하지 않고 택시 기사의 잠잠하고 온유한 말들을 경청하였다. 이어서 운전자는 여인을 구원하셨던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해주었다.
“나는 40년 전에 그분을 만나 구원을 받았다오. 그 이후 나를 십자가의 보혈로 죄에서 건지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비록 영원토록 다 갚지 못할 은혜이겠지만 그분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이 조금이라도 없고자 그분의 값진 사랑을 승객들에게 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오.”
그는 40년 간 그렇게 같은 일을 반복해왔다고 한다. 이미 어린 시절의 주일 학교나 일요일에 참석한 교회 에배 및 가정 예배에서 숱하게 듣고 들은 보편적인 교리들이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 그분께서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이유, 십자가의 의미, 인류의 죄와 그것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유일한 길, 사실 귀가 닳도록 익숙해진 말씀이었는데 그날은 이유를 모르게 그것이 영혼 속에 기이한 파문을 일으켰다.
“난 아가씨들이 어떤 곳에서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단 한 가지요. 하나님께서 아가씨들을 사랑하되, 아가씨들의 죄로부터 건져주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까지도 인간으로 보내주셔서 죽기까지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이오. 나도 그렇게 그분의 자녀가 되었소. 부디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그 기다림에 늦게 반응하지 마시구려.”
세일린은 그날 처음으로 복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그녀가 이후로 교회에 출석하여 믿음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양심에 찔리는 이중적인 삶을 살며 스스로에 대해 양심으로 찌르며 비통해하긴 했지만 한 번도 그날 들은 말씀의 기억을 잊지는 않았다.
이본은 어떠했을까.
“그날의 모습이 제가 마지막으로 본 이본의 모습이었어요.”
며칠 후 이본은 의식을 잃었고 병상에 누워 혼수 상태가 되었으며 몇 달 후에는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가족들 곁에서 세상을 떠났기에 세일린으로서는 그녀의 뒷일이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기억이 나요.”
알렉시스가 잠잠히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회상하였다.
“어머니는 의식을 잃으신 이후로 종종 잠꼬대를 하듯 의식이 잠시 돌아오는 일이 가끔씩 있으셨어요. 그때마다 중얼거리던 말씀이 있었던 것 같아요.”
미안해요. 죄송해요. 아프게 해드려서 정말로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이런 일련의 말들을 그녀는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당시의 알폰스와 알렉시스는 이것이 가족들에게 한 말인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어쩌면…….”
“이본은.”
세일린은 다시금 조심스럽게 회상하였다.
“그 운전자분의 말을 들었을 때 말 없이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지. 그때의 나는 아직 온전히 신앙의 마음이 다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그녀의 눈물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단다.”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세일린에게는 마지막 남은 증빙의 단서가 있었다. 이본에게서 받은 유물. 그녀의 목걸이.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죽기 전까지 그녀의 몸에 부착되어 있었다. 아마 깨어있을 적에 그녀가 그것을 몸에 쥐고 싶다고 남편에게 부탁했을지도 모르겠다. 세일린은 그 목걸이와 거기에 걸린 마지막 초상물질을 후일에야 넘겨 받았는데, 이는 이본의 유언장에 의거한 전달이었다. 다른 모든 유산은 알렉시스에게 넘겨졌으나 오로지 그것만은 세일린에게 전달되었다.
“단서라는 게 설마……, 그렇군요.”
알렉시스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과 박사들은 초상물질의 여러 기능 중 정신을 음성으로 기록하는 능력이 있음을 확인했다. 실제로 그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영격 통신을 모방한 해킹 장치를 에드윈이 발명하기도 했었고 그것을 통해 제로스가 악마숭배자들을 파멸시키기도 했었지.
“어쩌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혼수 상태에 있었을 때의 정신 활동도.”
“그래, 이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마지막 현상들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세일린은 부서진 유물의 잔해를 조심히 모아 알렉시스의 손에 고이 쥐여주었다. 그것을 받은 알렉시스는 연구 결과들을 잠잠히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였다. 다행히도 어머니가 일을 복잡하게 꼬아두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몇 번의 탐구 만에 알렉시스는 유물을 재조립하였고 그것 속에 내장된 정보들이 모두 방출되도록 모드를 바꾸었다.
“확실히 천재는 다른가보네. 사용법을 순식간에 밝혀내다니.”
“부하들과 동생이 모아둔 연구 덕택이죠. 조금 전 사상조작병기와 초상물질들을 공략하면서 새로이 지식들을 습득하게 되었고요.”
감사하게도 사탄에게 오염된 다른 초상물질과 달리, 유일하게 남은 이 ‘순수한 원형’의 초상물질은 본래 주인의 뜻대로 재활용하는 것이 그리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았다. 세일린이 이것을 어렵지 않게 활용했던 것도 같은 이유이었으리라.
알렉시스가 조립을 마치자 수정 속에 박제되었던 마지막 녹음 데이터가 바깥으로 스며나왔다. 그 데이터는 마치 육성의 형태로 들렸다.
“사랑하는 내 아들, 알렉에게. 끝까지 곁에서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우리 아들은 강하고 지혜로우니 엄마가 없어도 잘 해낼 수 있을거야. 이런 이기적인 나를 용서해주렴. 네가 나의 본래의 모습을 알게 된다면, 가면 밑의 내 못난 모습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실망하겠지. 정직하게 고백할 기회가 수없이 있었는데,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낭비하게 되었구나.”
세일린과 알렉시스는 귀를 기울여 녹화된 마지막 유언을 들었다. 이본이 사망하기 얼마 전에 뇌파를 통해서 기록된 그녀의 전언. 그가 슬픔으로 흔들릴 것을 염려한 세일린은 잠잠히 양아들의 큼직한 몸을 품에 안고 지탱해주었다.
“하지만 난 말야.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은 마음이 홀가분하단다. 너와 네 아빠한테는 내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못했지. 하지만 이런 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모두 보고 듣고 계시던 또 다른 분이 계심을 알게 되었단다. 난 처음에는 그분께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낙담했단다. 하지만 정작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그분의 마음은 달랐어. 왜 그 동안 그토록 듣고도 깨닫지 못했을까. 그분은 이미 오래 전에 내 죄들을 모두 알고 계셨단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어리석게 넘어지기 전부터, 내 모든 죄들을 알고 계셨음에도, 그럼에도 그런 나를 향해 눈물을 흘려주셨지.”
알렉시스는 깊은 침묵 속에 정지된 채 숨을 죽였다. 이후 몸에서 아주 작게 떨림이 일어났다.
“네 아버지가 내가 자랑하였던 바로 그 신, 그분의 참된 이름이 무엇인지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단다. 지금껏 언약을 주신 신으로만 알았고 브리튼의 신으로만 알았단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도 그분의 이름을 가르쳐주셨어. 난 우리 가문의 언약이 숨겨진 보물인줄로 알았지. 하지만 그분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더 값진 보물을 주셨지. 바로 그분 자신을.
나는 바로 눈앞에 훨씬 더 큰 보물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몰라본 장님이었단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 모두와 언약을 맺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거늘. 브리튼의 언약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더 존귀한 생명의 언약을 맺어 모든 인간에게 용서의 기회를 이미 허락하셨거늘. 나는 내게도 그 새 언약의 손길을 내미셨음을 이제껏 알지 못했단다.”
눈시울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고마워, 내 아들. 그리고 네 아빠한테도. 너와 아빠는 엄마가 그분에게서 받은 귀한 선물이었어. 하지만 이제는 더 큰 선물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단다. 이런 못난 나 같은 여인을 위해서도 기꺼이 생명을 주신 분,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되었단다. 고마워, 아들, 엄마에게 참되신 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될 기회를 줘서. 그러니 너를 태에서부터 지키시고 생명을 주신 그분의 이름을 언제나 버리지 말고 네 마음 속에 굳게 품으렴.”
기록된 데이터는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어머니…….”
알렉시스는 가슴에서 용솟음치는 깊은 감정을 다스리고자 애썼다. 약해져서는 안 돼. 그는 아이 때부터 늘 이렇게 강인해지고자 노력했다. 수많은 사람의 삶을 보호해야 하는 차기 황제로서, 그는 의젓해야 했고 일찍 철이 들어야 했으며 철벽처럼 완전한 철인이어야만 했다.
“알렉.”
세일린이 그의 등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마음을 억지로 억누를 필요는 없단다. 가끔은 네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렴.”
그 허락이 신호탄이 되어 커다란 감정의 댐에 흠집을 내었다. 인내하고 참아왔던 깊은 감정들, 슬픔과 기쁨,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긍휼의 풍성함까지도. 이 순간만큼은 철인이 아닌, 위대한 신 앞의 그저 나약한 피조물로서 작아지는 기분이 되었다. 그 경외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감정에 대한 순전한 인정과 그에 대한 감사의 누림으로 나타나야 마땅했다.
“크윽.”
참아왔던 눈물들이 조금씩 터져나왔다.
“저, 저는…….”
친어머니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해주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 후회되었다. 그분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고 안타까움이 들었고 더 보지 못하게 된 지금이 아쉬웠다. 하지만 동시에 깊은 안도감이 가슴을 홍수처럼 적셨다.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악마의 속삭임을 씻어내고 하나님께서 고요하게 그분의 목소리로 진실을 드려주시니 그제야 두려움이 사라지고 치유가 임했다. 감사함으로 인해 눈물이 용솟음쳤다.
“다행이에요, 정말.”
한참을 잘 참아왔던 것을 터뜨려낸 그는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쏟아냈다. 세일린은 듬직한 양아들의 몸을 고이 안아주어 위로의 품에 담았다. 언제나 강인했던 이 멋진 청년이 어린아이처럼 여려지는 모습을 보니 아련하기도 했고 감사의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 늘 강한 모습으로 억지로 서 있을 필요는 없지. 때로는 이 아이도 자신의 연약함을 정직히 인정해야 하리라. 그저 이 순간, 아들에게 작은 위로의 지지대라도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는 편히 보내주자.”
“크윽, 흐윽.”
오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두웠던 모든 진실이 밝은 빛 아래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더 깊은 은혜 또한 드러났다. 알렉시스로서는 어머니를 진정으로 떠나 보낸 날이 되었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녀를 얻은 날이 되었으며, 또 한 명의 어머니를 품 안에 안게 된 날이었다.
황후에게도 이 날은 결자해지의 날이요, 용서의 날이었다. 기나긴 위선과 위장의 시간을 마침내 종결하였고, 용서의 참된 의미를 눈으로 보았으며, 아들에게 귀한 것을 선물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녀는 마침내 그날 이본과 함께 들었던 복된 소식의 깊은 능력을 몸과 마음으로 음미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주님 당신이 참된 신임은 줄곧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능력도 믿었습니다. 모두를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당신의 마음도요. 하지만 나는 두려웠습니다. 다른 이들을 용서하시는 당신은 알았지만, 이런 나마저 용서하실 수 있을까. 나는 망설이는 마음에 선뜻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알렉시스의 따스한 품에서 느껴지는 위로가 그녀에게 신의 용서에 대해 다시금 상기시켰다. 예수님께서는 이본의 상처를 위로하셨고 그녀의 과거의 수치를 씻어주셨으며 그녀를 당신의 품에 안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렇다면 이런 나에게도 그분은 손을 내밀어주실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이제, 머리로만이 아니라 내 발로서 직접 한 걸음을 내딛고 싶습니다. 당신에 대해 줄곧 귀로 들어 알았지만, 이제는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내민 손을 내 손으로 직접 잡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흐느끼며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는 아들의 넓고 단단한 등을 토닥이며 마음 깊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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