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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98회 발레리안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3.01 | 회차평점 0 0

 

 

 

레비아탄의 머리들이 분쇄되는 순간, 베링 해협을 향한 자연의 지배력은 다시 회복되었다. 잠시 이계의 마력 아래 신음하던 ‘왜곡된 시공간’이 다시 올바른 배열을 되찾았다. 라이텔바흐의 일격을 맞고 부서진 괴물은 바다 아래로 침강하였다.

 

 

“역시 헬게이트는 저 몸속에 담겨 있었군.”

 

 

유달리 어비씨언 치고는 강한 상대였다. SS에 근접한 S+ 랭크의 헬게이트라면 확실히 라이텔바흐라도 함부로 ‘유희거리’로 삼지는 못한다. 그런 마당에 헬게이트가 발생시키는 에너지의 대부분이 한 마리의 유닛 안에 집중되었고 물리적인 공간의 이점까지 등에 업어 몸집을 불렸다. 다른 헌터였으면 아무리 SSS급의 헌터라도 단신으로 피해 없이 제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그 인간은 예외이겠지.’

 

 

어두컴컴한 암흑의 장막이 해제되고 폐허가 된 바다와 바깥쪽의 해안선이 다시 연결되었다. 다행히 쓰나미의 피해가 동료들에게 닿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에어크래프트들은 어둠이 걷힌 연기 자욱한 ‘물의 황무지’ 앞에 섰다. 빙산들은 모두 녹거나 부서진 상태였다. 레비아탄의 산산조각난 몸에서 나온 각종 찌꺼기가 수면 위에서 둥둥 떠다녔다. 그것들은 모두 어비쓰론이나 흑파가 응집되어 만들어진 물질로 헬게이트 권역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태양 앞의 드라이아이스처럼 연기가 되어 흐드러졌다.

 

 

“라이텔바흐.”

 

 

플레먼은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문득 시선을 탈취당하고 말았어.’

 

 

인간 영웅. 언제나 인간은 영웅을 선망해 왔다. 특별히 강한 힘으로 정치적인 구출을 베푸는 지도자들을. 고대의 유대 민족도 해방자인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나 혁명가 유다 마카베우스를 그렇게 열광적으로 선망했겠지.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동일한 열망에 흡수될 뻔하였다. 해방자란 것은 그저 허상일 터인데. 오로지 구주에게만 두어야 할 시선을 인간에게 순간적으로 빼앗길 뻔했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친구를 내 무의식적인 욕망 성취를 위한 도구로 소비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저주와 억압 아래서 해방되는 것, 그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만 거둬질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힘에 주목해서는 아니된다.

 

 

 

 

 

“굉장하네요.”

 

 

그에 반해 아퀼라의 시선은 조금 색채가 달랐다.

 

 

“결정적인 때가 이르렀을 때 우리 모두에게 큰 힘이 되어주겠어요.”

 

 

그도 처음에는 라이텔바흐의 정치적인 영민함과 치밀함에 약간의 두려움 내지는 거부감을 느끼긴 했었다. 하지만 이 헌터가 압도적인 능력을 증명해 내자 실리적인 성격의 아퀼라는 마음속의 평가를 호의 쪽으로 선회했다. 적어도 세계 정부처럼 글러 먹은 사람은 아니고, 성격도 나쁘지는 않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역시나 능력 아니겠는가. 두뇌로 보건 무력으로 보건, 라이텔바흐와의 동맹은 장차 있을 시험의 때를 위해 필수 불가결한 도움이다.

 

 

여기서부터 세상적인 가치관과 도의적인 의를 이루고자 하는 개혁가와 하나님께 성별되어 소속된 자의 온도 차는 선명하게 나뉘었다.

 

 

 

 

 

 

 

 

 

 

 

*

 

 

 

 

 

대륙 재앙에 준한다는 S+급 헬게이트의 ‘아무런 예고 없는’ 발원은 헌터 총회들의 입장에서도 가볍게 넘길 이슈는 아니었다. 경각심을 느낀 상위 헌터들은 각자 총회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그곳에 조사단을 파견할 채비를 긴급하게 하였다.

 

 

그리고 반응을 보인 건 헌터들만이 아니었다.

 

 

라이텔바흐 일행을 태운 에어크래프트들이 베링 해협을 건너 시베리아에 상륙하는 와중에 북태평양에 주둔하던 세계 정부의 함선들이 움직였다. 그때 라이텔바흐는 정결례를 위해 일행과 떨어져 몸을 깨끗이 하는 중이었고 실질적으로 세 척의 이동 장치를 통솔하는 역할은 테무친이 맡았다.

 

 

바다를 모두 지나 구대륙에 도착했을 때, 이동기들은 비행 모드 대신에 육상 바퀴 모드로 전환했다. 바로 그때 일행은 해안선을 포위한 다섯 척의 크루저 함선과 조우하였다. 그들은 멈추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며 확성기로 엄포를 놓았다. 어쩔 수 없이 원정대는 발목이 묶였다.

 

 

“얌전히 조사를 받도록 하라.”

 

 

정부군도 헌터들이 애용하는 에어크래프트 모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안에 누가 탑승해 있을지도 어림짐작했으리라. 이번 기회를 빌미로 헌터들에게 시비를 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겠지. 더욱이 조금 전까지 초고밀도의 헬게이트 에너지가 넘쳐 흐르던 곳을 당당히 돌파하여 지나왔으니, 논리적으로 따져 봐도 안에 거물이 타고 있을 것은 자명했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군.”

 

 

테무친은 입술을 깨물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우리가 나설까요?”

 

 

재석이 질문했다. 라울이나 재석이나 헌터 직위를 떼더라도 꽤나 이름값이 높고 권력을 가진 유명 인사이니 대화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라이텔바흐 당회장의 지시 없이는 섣불리 움직이지 말자. 괜히 일을 더 꼬아놓을 수도 있으니.”

 

 

그 와중에도 함선 쪽의 엄포와 큰소리는 점점 거칠어지는 중이었다. 화력 면에서 헌터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네 헌터의 초월적인 전투력은 오로지 헬게이트 안에서만 유효하다. 이런 인간 대 인간의 전쟁에서는 그들의 가치라고는 남보다 비상한 두뇌, 딱 거기까지이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오는군.”

 

 

라이텔바흐는 그간 어찌나 자주 시달려왔는지 별로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정결례 중인 상태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기도, 옷을 입어주기도 귀찮았다. 그들이 조사하겠다고 억지로 안에 쳐들어오면 그냥 이 상태로 맞아줄까 하는 방만한 생각도 들었다. 인간이 아닌 짐승들 앞에서 옷을 잘 차려입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한바탕 많은 에너지를 쏟아낸 난 뒤여서 그런지, 평상시와 달리 책임감이 무뎌진 라이텔바흐였다.

 

 

얌전한 플레먼은 좌불안석이 되었고 아퀼라는 긴장하였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다섯 척의 함대 뒤편에서 또 한 척의 배가 나타났다. 정부 소속 함선이 아니었다. 모비딕 호. 헌터들이 보유한 사적 전략자산 중 하나로 헌터들과 그 동맹 민간 업체들의 자본력이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모비딕 호의 주인은 전파 간섭을 통해 다섯 정부군 함선의 진행을 막아 세웠다. 그리고 즉각 대화의 방향을 자신들 쪽으로 돌렸다.

 

 

어떤 종류의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협상이었는지 협박이었는지, 아니면 부드러운 타협이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대략 두 시간가량 실랑이가 오가는 것 같았다. 라이텔바흐는 그때까지도 꿈쩍하지 않고 목욕을 즐겼고, 전신의 근육이 개운하게 이완될 때쯤 되자 그 강대한 기골을 움직여 옷을 걸쳐 입었다.

 

 

“괜찮을까요?”

 

 

플레먼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퀼라에게 말했다.

 

 

“기다려봅시다.”

 

 

연약한 소시민에게는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는 대치 시간이었다.

 

 

 

 

 

고된 기다림이 끝나자 다섯 척의 함선은 순순히 후퇴하였다. 보상을 받기로 한 것인지, 아니면 약점이 잡혀서 협박을 당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별처럼 등장한 모비딕 호의 주인이 상당한 수완가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었다.

 

 

“이런.”

 

 

라이텔바흐는 편안한 사복 차림으로 에어 크래프트 밖으로 나섰다. 워낙 강대한 몸이다 보니 얇은 옷차림으로도 시베리아의 추위를 거뜬히 견뎌내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모비딕 호를 봐서 반가운 것인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순수한 기쁨이라기보다는 날건달의 불량스러운 흥미를 연상케 하는 표정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양반은 못 되는군.”

 

 

라이텔바흐 뒤편으로 재석, 라울, 테무친도 따라왔다. 세 헌터 모두 라이텔바흐와는 달리 옅은 긴장감을 안면 근육 위로 띄웠다.

 

 

“괜찮을까요?”

 

 

“나도 몰라.”

 

 

“…….”

 

 

이윽고 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안에 상륙한 모비딕 호에서 다섯 명의 남자가 내려왔다. 그 뒤편에는 다른 선원들도 있었는데 복장이나 분위기로 보아 헌터는 앞에 있는 다섯뿐이었다.

 

 

“역시나 네가 부순 건가.”

 

 

모비딕 호의 헌터들 중 맨 앞에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가장 젊어 보이는 외모에 가장 키도 큰 사나이였다. 에어크래프트 안에 남은 플레먼은 창문을 통해 회담 장면을 지켜보았다. 상대편 남자는 갈색과 금색의 중간 색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청년으로 매우 화려하고 수려한 얼굴이 돋보였다. 자주 보지 못할 미남자였는데 플레먼이 봐온 사람들 중에서는 라이텔바흐만이 그에 필적할 외모였다.

 

 

“아, 네, 네.”

 

 

라이텔바흐는 건들거리는 태도로 양손을 들어 대답했다. 저항하지 않겠다는 표시였으나 상대의 눈에는 도리어 조롱의 태도로 비치기 쉬웠다.

 

 

“저분, 왠지 눈에 익네요.”

 

 

플레먼이 아퀼라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발레리안 쾨니히스베르크 중장. 헌터로서의 직위를 떠나서 권력과 영향력만으로는 헌터들 중에서 첫째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걸요.”

 

 

“아아.”

 

 

그제야 뉴스에서 종종 스치듯이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발레리안이라는 저 남자, 헌터로서의 재능도 굉장하다지만 그 이외의 요소로 더 유명하다. 워낙 수완이 좋고 명석해서인지 헌터들을 향해 적대적인 이 사회 속에서도 성공 가도를 달렸다고 했지. 어찌나 빠르게 권력과 재력을 집어삼켰는지 이제는 세계 정부 열 권역마저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거물이 되었다고 들었다.

 

 

“라이텔바흐와 비슷한 유형이네요.”

 

 

“그렇죠. 둘 다 헌터로서 최상급에, 돈과 권력과 인맥을 획득하는 데 도가 텄으니까요.”

 

 

플레먼은 멀리서 라이텔바흐와 발레리안이라는 청년이 대면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썩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적대적인 관계라 해석하기에는 다소 모호하다. 여러모로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대치였다.

 

 

“라이벌이겠죠.”

 

 

“제가 보기에도 그래 보이네요.”

 

 

직위로는 발레리안이 총회장으로 한 등급 더 높다. 세계 정부와 민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의 종합적 수준은 비등비등하다. 헌터로서의 재능은 라이텔바흐가 우위이다. 그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두뇌와 육체 역량은 대동소이하되 라이텔바흐가 조금 우세하다. 그리고 외모로 비교하면 각기 다른 분야의 매력을 지닌, 전혀 다른 유형의 미남들이다.

 

 

“저런 조합이라면 충분히 경쟁심이 붙을 만 해요.”

 

 

 

 

 

그 시각, 라이텔바흐는 휘파람을 불며 여유롭게 맞대응을 하고 있었고, 발레리안은 약간 저기압이 된 상태로 까칠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느긋하게 휴식하는 흑재규어와 이빨을 내세우며 으르렁거리는 설표범의 실랑이를 보는 듯했다.

 

 

“많이들 데려오셨군요.”

 

 

라이텔바흐가 가볍게 도발하듯 툭 던졌다.

 

 

“모비딕 호에, 용병들에, 심지어 최강급 길드장들까지.”

 

 

그는 발레리안 뒤편에 선 네 명의 헌터를 쭉 훑어보았다. 그 매섭고 두려운 적안이 스치고 지나가자, 넷 모두 위압감에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들 넷은 길드장 직위를 지닌 헌터 중에서는 1위부터 5위를 다투는 자들로 모두 SSS급이었다. 나머지 한 명의 최강급 길드장이 지금 라이텔바흐의 일행인 테무친이다.

 

 

“모양으로 보아 북쪽 탑을 수색하실 계획인가 보죠.”

 

 

“그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만, 아무래도 심연 쪽에서 방해 프로그램이 나타난 듯해서. 아버지께서 추가로 파견하셨다.”

 

 

“과연 감마 수장님,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라이텔바흐는 가까이 다가가더니 패기롭게 악수를 건넸다. 마지못해 밀색 머리의 젊은이는 상대의 손을 받아주었다. 아주 억센 악력이 양쪽에서 오갔다. 터질 듯한 힘줄이 두 청년의 두 팔에 억세게 맺혔다. 헬게이트 바깥이라 딱히 이능의 충돌이 발생할 이유가 없음에도 양쪽 진영의 헌터들은 긴장하였다.

 

 

“혹시 제가 도울 일은 없을지요.”

 

 

승자의 여유를 머금은 듯한 웃음이 라이텔바흐의 입에 맺혔다. 그는 친한 친구를 대하듯 발레리안의 어깨 위에 부드러이 손을 얹어 두드렸다. 불쾌해하면서도 발레리안은 그 손을 쳐내지 않았다.

 

 

“딱히.”

 

 

“하긴 당신이라면 뭐든 홀로 잘 해내겠죠.”

 

 

라이텔바흐가 이렇게 칭찬하는 상대는 드물다. 아니 없다고 봐야겠지. 그는 심지어 헌터 수장들조차도 믿지 않으니까. 양아버지 격인 델타 수장을 향해서도 과대평가를 결코 하지 않는 냉철한 사람이 라이텔바흐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인정해 주는 헌터가 눈앞의 청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발레리안은 자신이 이기지 못한 라이텔바흐를 향해 맹렬한 질투심을 불태우고 있다는 게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이다.

 

 

“잠시 일행과 함께 들어와라. 추운 데 몸이라도 녹이고 가지.”

 

 

발레리안은 호의인지 도발인지 모를 제안과 함께 일행을 초대했다. 아무래도 긴 대화가 이어질 기세였다. 라이텔바흐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었다. 긴장감에 질식하던 세 헌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른 일행이 있었군.”

 

 

문득 네 명의 헌터를 뒤따라 쭈뼛거리며 이동하던 두 민간인 일행을 향해 시선이 이동한 발레리안. 사나워 보이는 미남자의 호박색 눈동자가 왜소한 사내의 연약한 눈과 마주쳤다. 플레먼은 10m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발레리안의 위세에 주춤하였다.

 

 

‘한 명은 면역자, 한 명은 독립운동가인가?’

 

 

정보력이라면 발레리안도 라이텔바흐 못지않게 상당한 편이다. 더욱이 그는 헌터 협회들이 벌이는 일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요새 라이텔바흐가 벌이는 일들을 그도 잘 알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많은 것을 추리하는 것은 영리한 그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이것이 플레먼과 발레리안, 두 전혀 다른 남자의 기이한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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