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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05회 화평케 하는 자 (1)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5.12 | 회차평점 0 0

 

 

 

플레먼의 소중한 친구들 중 단연 제일을 고르라면 어린 시절부터 묵묵히 곁에서 시간을 공유하였던 어니스트가 되겠다. 어니스트 본인은 죄책감의 흔적을 안고 있겠지만 그와 별개로 플레먼은 그를 진정으로 신뢰한다.

 

 

그 다음 순위를 고르라면 역시나 그들이 되겠다. 열 살 어린 동역자들, 말괄량이 같고 엉뚱하기 그지없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보다 더 어른스럽고 씩씩하기까지 한 아이들. 쥬오디아와 신티는 그런 동생들이었다. 혈육은 아니지만 가족과도 같은, 이전 지하 교회 공동체의 식구들.

 

 

지금이야 쥬오디아와 신티가 너무도 죽이 잘 맞다 못해 일심동체 일란성 쌍둥이로 느껴지는 착각까지 들지만 (둘은 혈연 상 아무런 접점이 없다), 두 사람이 항상 마음이 잘 연합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동체 내에서 둘은 종종 다투기도 했다. 대개 심각한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비본질적인 논제로 인한 의견갈등이었다.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잘했고 잘못했다기보다는, 서로가 오류와 오해를 안고 있는, 그런 류의 갈등이었다.

 

 

플레먼이 31세가 되던 해까지는 두 여인은 그런 식으로 여러 차례 갈등을 빚었다. 지금은 죽고 못 사는 죽마고우라지만, 하마터면 관계가 틀어질 뻔한 일도 자주 있었다. 이것은 공동체의 폐쇄적 특성과 맞물린다면 심각한 문제로 연결될 수도 있었다. 호주가 상대적으로 세계 정부의 입김이 약한 안전지대라고는 하지만, 플레먼과 그의 친구들과 그들의 인도를 받는 다음 세대 청소년들은 엄연히 국가에서 금지하는 종교를 믿는 자들이다. 똘똘 뭉쳐 마음을 하나로 모아도 언제 어디서 배신의 균열이 발생할지 모르는 마당이다.

 

 

플레먼으로서는 어린 동생들을 온전하게 연합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을 품도록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가뜩이나 그들이 전에 거주하던 지역 인근에는 낮은 인구 밀도 때문인지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적었으며 진정으로 거듭난 자의 숫자는 더욱 적어 플레먼, 어니스트, 쥬오디아, 신티를 제외하면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가끔 파올로 할아버지처럼 다른 지역에서 심방을 오는 분들이 있긴 했으나 터주대감인 넷이 그 지역의 복음적 명맥을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나는 위대한 신앙인이 아니야.’

 

 

의젓한 어른이긴 했으나 플레먼은 자신의 신앙적 실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로마의 압제 밑에서 승리하였던 초대 교회의 승리자들, 공산 치하에서 신음했던 성도들, 중세 교황청의 시련을 견뎌내었던 소수의 성경 신자들, 교회사는 분명 그러한 위대한 승리자들을 기록한다. 플레먼이 보기에 자신은 그러한 거룩한 승리자들에 의해 너무도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용기 없고 나약한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간과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최대의 장점인 온유한 성품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종종 간과하였다. 야성적으로 싸워 승리하는 단단한 심지와 용맹, 강력함도 덕목이라면 덕목일 것이다. 그러나 간과하기 쉽고 사소하게 여기기 쉬운 부분에서 올곧은 자들도 있다. 위대한 순교자가 되기도 간단치는 않으나,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신실한 성품을 끝까지 지키는 이가 되기도 여간 만만치는 않았다.

 

 

플레먼은 인간 관계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치우치지 않은 분별력과 객관성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쥬오디아와 신티가 다툴 때마다 둘 모두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여 경청할 수 있었다. 항상 그가 추구하는 지향점은 친분보다는 하나님께서 흐뭇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는 사소한 일상 문제에서도 그 지점이 대체 어디일까를 늘 고민하는 습관이 잡힌 사람이었다.

 

 

비록 숫기는 조금 없으나 부드럽고 온화한 플레먼은 쥬오디아와 신티가 갈등으로 괴로워할 때마다 양쪽 모두에 위로와 연결점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교만하게 굴지 않았다.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우월한 자리에서 판결 내리지 않았다. 그저 공동체에 덕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포기하지 않는 끈기의 남자였다. 강인한 남성들이 뽐내는 육체적이고 열정적인 끈기가 아닌, 드러나지 않는 묵묵한 인내. 인간이 지극히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임을 알기에 타인을 안타까이 여기고 공감하는, 그런 류의 참음이었다.

 

 

그래서 플레먼은 화평케하는 자로서 노력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쥬오디아와 신티도 종종 관계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가도, 상록수처럼 변함없고 잔잔한 아저씨의 곁에서 조언과 도움의 말을 들으며 해결점을 찾곤 했다. 세상의 거대한 세력들을 연합시키는 평화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작은 공동체 안에서부터 작은 평화의 씨앗이 재건되곤 했다.

 

 

그러한 작은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의 쥬오디아와 신티는 세상의 그 어떤 자매들보다도 서로를 강력하게 신뢰하는 연맹이 되었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 서로의 바람과 비전을 이해하는, 흡사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혼의 연결체, 두 여장부는 그런 모본이 되었다. 플레먼은 이 결과에서 자신의 공로를 아예 조금도 취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는 늘 감사하였다.

 

 

 

 

 

 

 

 

 

 

 

*

 

 

 

 

 

이렇듯 지금은 세상 앞에서 수그리고 있는 무력한 자라지만, 그 본 성정은 화평케하는 자인 플레먼은 이번에도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었다. 그가 보기에 아퀼라나 게오르그나 인간됨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이니 ‘선한 존재’라고 할 수야 없으나, 그래도 영적으로 지극히 어두운 이 암흑기에 그나마 남들보다는 가능성이 열린 존재라 보았다.

 

 

두 사람의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이념이리라. 그 밖에는 둘 다 어느 정도는 상식이 통하는 사람들이다.

 

 

아퀼라가 민족들의 자주적 독립을 추구하는 사상을 가진 것은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 시점에서는 반정부주의인 셈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방식은 상식이라는 선 안에 있다. 폭력적인 투쟁보다는 점진적인 개화와 민중 각성을 통한 승리를 추구하며, 도덕법과 보편 질서를 따르려는 가치관과 노선을 지녔다. 분명 비폭력 노선과 민중의 지지 확보를 추구할 터이고, 가장 극단적으로 가려 해도 정밀 타격 정도로 끝내겠지. 그런 사람이라면 비록 그 거사에 가담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도 응원해줄 수는, 적어도 세계 정부 측에 끝까지 잡히지 않기를 소원해줄 수는 있는 법이다.

 

 

게오르그 역시 그가 속한 배경의 사상적 색채를 고려할 때에는 의외라 싶을 정도로 온건한 편이다. 그는 소련의 이전 실패도 인정한다. 비록 사회주의적 방정식 풀이에 여전히 미련을 보이지만, 극단화된 공산주의를 따르지는 않는다.

 

 

더 놀라운 점은 대화를 해본 결과, 게오르그가 은연 중에 신의 존재성에 대해서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점이었다. 그의 고향이 이전에 어떤 무신론적 물결에 잠식되었는지를 감안할 때 장족의 변화이리라. 아마 인간의 본성 상 결연하게 완전한 무신론자가 되기란 쉽지 않았겠지. 더욱이 참호 아래에서는 무신론자로 남을 존재가 없다는 격언도 있지 않은가.

 

 

덕분에 플레먼은 이 둘이 비록 격하게 다투더라도 대화와 화평의 접점이 존재하지 않으리라고는 보지 않았다. 격정적인 형태로라도 토론을 이어나가며 대화의 끈을 놓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둘 모두에게 가변성이 있으니 설득의 여지도 있으리라고 보았다.

 

 

물론 라이텔바흐라는 또 한 명의 중재자가 있다. 하지만 그는 다소 냉정한 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게오르그의 진영이나 아퀼라의 동류들이나 손익에 따라 이용할 존재에 불과하다.

 

 

“그대들이 각자 자신의 가치관을 고수하며 겨루고 있습니다만, 현실이라는 냉정한 잣대를 대어 평가하건대 그 아집은 사치스러운 여유로 보이는군요. 와신상담으로 고개를 숙이고 힘을 연합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말이죠.”

 

 

문자 그대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나 대략 이런 뉘양스의 암시를 말함으로써 그는 토론자들의 입술을 봉하였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에게 불만을 토로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라이텔바흐가 조곤조곤 현실과 진실을 바탕으로 수치스럽게 뼈를 때렸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입으로 나불대는 것이 아니야. 실제적인 성과로 증명되는 능력이다. 그대들은 자기 이념을 떠들어댈 뿐 그것을 정작 현실화할 능력은 없다. 유창하기는 하나 현실 감각도 없고 대의를 위해서 잠시 뼈를 깎을 용기도 없지.”

 

 

이것 역시 입술에서 나온 말 그대로가 아니라 의역한 표현이다. 여하튼 그의 말은 사실이었고 아퀼라와 게오르그도 분하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더욱이 라이텔바흐는 단기간에 세력을 구축한 실력가이며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 분명한만큼 그의 조력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이것이 힘을 가진 자의 여유요, 갑의 위치에서 책망할 수 있는 자격이었다.

 

 

“그대들의 이상향은 솔직히 별로 공감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각각의 그림에서 부분적으로 취할 유익은 있겠지. 하지만 모든 걸 잃는 대신 원하는 바를 조금이라도 건지길 원한다면? 포기할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타협하는 편이 좋을 걸세.”

 

 

그가 암시하는 바는 분명했다. 나에게 건다면 부분적인 몫이라도 배당받을 수 있으며 승리의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이념을 투사하여 나의 목표점을 조종할 의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찌감찌 단념하는 편이 유익하리라. 내가 너희를 이용하는 입장이지, 너희가 나를 이용하는 입장은 아니다.

 

 

고집스런 자존심을 매우 확실히 짓밟는 수법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현실주의적 성향인 아퀼라와 게오르그를 분명히 각성시키는 처방이기도 했다. 철저한 능력주의적 태도의 진압법. 오만하면서도 현명한 라이텔바흐가 낼 수 있는 해결책다웠다.

 

 

 

 

 

하지만 플레먼은 다르게 접근했다. 그에게는 자랑하거나 내세울 것이 없다. 라이텔바흐처럼 현실 실력으로 입증할 처지도 아니다. 어쩌면 궤변처럼 들릴 수 있겠으나 그는 정복보다는 화평에 집중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들의 논리를 꺾고 정복할 수 있을까? 이러한 욕망을 따르는 성품은 확실히 성령님에게서 맺힌 것은 아니리라.

 

 

물론 그도 정치적인 의견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다. 극도의 치우친 생각들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왕국에 위해가 되며 유죄의 판결을 받기에 합당하다. 특히나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이 예전에 추구했던 유물론적 세계관과 무신론적 사상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플레먼도 이를 인정하는 바이긴 했으나 상식인의 잠재력을 갖고 있는 아퀼라와 게오르그에게는 심판보다는 온유의 공식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을 하지 말라. 그는 이 가르침을 확신하였다. 분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상대를 심판하기 시작하면, 그 보응은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돌아오리라. 그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지배당하기를 두려워했다.

 

 

또한 플레먼은 설령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까지 진흙탕에 끌려 들어가 육신의 생각과 교만한 입술에 점령당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비겁자라고 평가를 들어도 좋다. 승리하는 토론자가 되어 영광을 취하느니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에 조금이라도 더 순종하고자 도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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