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08회 보호막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5.12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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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먼은 겁이 많은 일반인답게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워하지 마시게, 친구.”
라이텔바흐가 평소보다 더 격식 없고 편한 말투로 안심시켰다.
“저 정도 위력의 헬게이트라면 권역을 내 10미터 반경 안으로 뻗지 못해.”
보통 아무리 강력한 최상위 헌터라고 해도 자신을 향해 확산하는 헬게이트 침식 권역 그 자체를 차단하지는 못한다. 그게 가능하다면 안티-게이팅 파워가 헬게이트 권역 바깥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는 뜻인데, 보통 헬게이트 영향권 안에 들어가야 제대로 된 활성도를 보이는 그 힘의 특성상 수학적으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상식을 벗어난 유닛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긴 하다만.
“어째서?”
플레먼이 눈을 들었을 때 이미 건물부터 마당까지, 아니 최소 근방 10km 이내의 땅은 모조리 시커먼 암흑 물질 공간에 집어삼켜진 상태였다. 하지만 라이텔바흐와 자신이 선 근방에는 빛이 여전히 보였으며 흑색파동도, 어비쓰론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아홉째 재앙을 맞이한 이집트 한복판의 멀쩡한 고센 땅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내 힘으로 놈들의 권역을 강제로 밀어내는 중입니다.”
“아퀼라 씨와 다른 사람들은요?”
그제야 중요한 게 생각난 플레먼은 재빨리 시선을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빛이 존재하는 라이텔바흐 주변과 달리 헬게이트에 침식된 곳은 온통 어두컴컴하여 사람의 실루엣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혼미해진 정신을 바르게 붙잡자 비로소 차분한 마음이 돌아오며 두뇌가 상황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플레먼의 시야에 어둠 한가운데 황금빛 섬광을 발하는 한 구획이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 불빛 한 가운데는 아퀼라가 있었다. 그는 긴장한 자세로 몸을 움츠리고 있었는데 그의 몸을 에워두르는 섬광은 마치 불꽃의 형태로 춤을 추며 어둠의 기운을 밀어내는 중이었다.
지켜보던 서재석 길드장 중얼거렸다.
“그 힘은 역시나.”
라이텔바흐의 손바닥 위에 매우 작은 크기의 압축된 빛의 점이 있었다.
“섬멸물질 페이즈 2, 저런 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군.”
솔직히 이것은 예상 밖이었다. 라이텔바흐의 안티-게이팅 파워가 매우 강하다고는 하지만 헬게이트 권역 자체를 밀어내는 수준까지 가려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힘을 응축해야만 한다. 하지만 아퀼라에게 전이시킨 그 에너지는 그 정도의 농도를 지니지 않았음에도 헬게이트의 모든 침식 효력을 밀어내는 중이다. 힘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속성 자체가 기존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퀼라 씨는 안전할 겁니다.”
“그렇다면…….”
“나머지의 안전은 100% 보장하긴 어렵지만.”
라이텔바흐의 마지막 말에 플레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헬게이트를 부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까요?”
“길어야 10~20분은 넘지 않을 겁니다. 테무친은 매우 강한 친구입니다. 하지만 전투에는 절차란 게 있고 나처럼 마술에 가까운 경지를 보일 수는 없으니 그 시간을 생략하기란 어렵겠죠.”
“10분 정도라면?”
“지금 막 상공에서 융합한 헬게이트들의 랭크는 중급 정도입니다. 다행히 상급도 아니고 미리 제가 예측한 데이터대로 발현해서 치명적인 수준까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라도 융합형 헬게이트들의 흑파에 노출되면 몸이 온전하지는 않겠죠.”
“어떻게 됩니까?”
“최소 경상 이상, 심하면 몇 시간 이내 사망할 확률도 있겠죠. 엘릭서를 가져오긴 했지만 모든 피해자에게 나눠줄 분량은 아닙니다. 전략상 앞으로 우리가 사용해야 할 것도 남겨둬야 하니까.”
비록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라지만, 이곳에서 만난 주민들이 생각나 걱정이 밀려왔다. 그들은 괜찮을까? 이대로 놔둬도 될까? 그저 헌터들이 신속히 일을 해결해 주기를 기다려야만 할까?
“라이텔바흐, 당신은 토벌에 참여하지 않나요?”
“동료들을 보호해야 해서 말이죠. 이렇게 고농도로 안티-게이팅 에너지를 응축하는 동안에는 기동력이나 전투에 쓸 여력이 별로 없습니다. 뭐, 당신을 위험 속에 내버려둔다면 곧장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뭘 말하려는 지는 알겠지만. 이쪽에서 거절입니다. 나로서는 더 중요한 요소를 철저히 보호해야 하니까.”
라이텔바흐의 선택은 매우 냉정하고 굳건해 보였다.
“아퀼라 씨 말고 다른 분들에게 그 보호의 권능을 전달해 주실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 ‘응축체’는 내 몸에서 분리되는 순간 페이즈 2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원래의 본질로 흐드러집니다. 일종의 전투용 화약 같은 건데 응축되지 않은 페이즈 1 상태에서는 헬게이트 권역의 파괴만을 유발할 뿐이죠.”
“아퀼라 씨에게는 왜 전이될 수 있습니까?”
“나와 감정적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으니까요.”
페이즈 2의 섬멸물질. 위력은 물론이고 용도의 범주도 페이즈 1에 비해 비약적으로 상승하였다. 극미량으로도 일반인을 안전히 보호하는 우산을 만들 수 있으며 반대로 훨씬 더 근본적인 삭제 능력을 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변경된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려면 라이텔바흐 본인, 혹은 그와 정서적인 유대를 맺은 인간과 접촉된 상태여야만 한다. 순간적인 파괴를 유발하기 위한 목적으로는 얼마든 발사하는 방식으로 써먹을 수 있으나 지속적인 보호용 우산으로 쓰려면 오로지 제한된 대상에게만 허락된다.
“나머지 사람들까지 돌볼 여유는 없습니다. 다만, 최악의 상황이라도 어비씨언들은 접근하지 못할 겁니다.”
라이텔바흐의 말대로 이곳을 수비하는 자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S급 창술사 헌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략자들을 대비하여 망을 보고 있으며 언제라도 외계의 존재들을 격퇴할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위이이잉.
그때 라이텔바흐는 자신의 손 위에 있는 작은 불씨가 거세게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시선을 플레먼에게서 그쪽으로서 옮겼다. 의구심과 호기심이 눈빛에 번졌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현상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라이텔바흐?”
“이건 대체 무슨 일일까나?”
흑회색 머리의 미청년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페이즈 2 섬멸물질이 내가 의도하지 않은 대상에게까지?”
고개를 돌리니 아퀼라가 서 있는 좌표 외에 다른 한 곳에서도 동일한 류의 황금빛 섬광의 불꽃이 보호막을 형성하며 넘실거렸다. 라이텔바흐가 의도하지 않은 현상임을 볼 때 아무래도 아퀼라에 투사한 응축체의 일부가 옮겨진 것으로 보였다. 그 이동의 경로가 보이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순간이동에 가까운 좌표 전이로 추측되었다.
“제길! 이건 또 뭐냐?”
그 속에서 보호받는 대상은 게오르그였다.
“망할 헬게이트 침공에 이어서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
라이텔바흐도 놀랐는지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 당신과 감정적 유대가 있는 대상을 지닌 인격체에게만 장기간 전이가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플레먼도 이해가 되지 않는지 되물었다.
“그랬죠. 그리고 게오르그 옐친 씨는 그 대상이 아니고요.”
“라이텔바흐 당신이 저분까지 보호하려고 의도하셨나요?”
“물론 아닙니다.”
이제 헌터의 민첩한 두뇌는 재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라이텔바흐의 비상한 두뇌는 이상 현상의 원인 후보를 빠르게 좁혀내었다. 그는 잠시 플레먼과 접촉한 손을 떼어내었다. 그러자 게오르그를 둘러싼 페이즈 2 섬멸물질 응축체가 빠르게 흐드러지며 대량의 검붉은 에너지체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랬군.”
다시금 플레먼의 어깨를 세게 쥔 라이텔바흐. 다시 게오르그를 둘러싼 보호막이 옅은 황금빛 불꽃 막으로 전환되었다.
“이거 재미있군, 크큭.”
라이텔바흐는 작게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나머지 신사다운 평소 태도를 거두었다.
‘면역자인 것도 모자라, 에이티피아까지 지녔고, 이제는 또 예상 밖의 현상인가.’
이래서 플레먼 에이비슨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 없다. 이런 흥미로운 친구를 경쟁자인 발레리안이 넘보도록 놔두어서는 안 될 노릇이지. 당연히 날파리같은 세계정부 휘하 머저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
라이텔바흐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어버린 사람이지만, 사회적 현상에 둔감한 자가 아니다. 근 며칠간 그는 플레먼과 아퀼라, 게오르그가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했는지를 면밀히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그것은 단순한 토론이 아니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두 상이한 이념의 인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격벽 같은 게 존재했거늘, 그 경계선이 플레먼을 통해서 허물어지는 것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완전히 두 사람을 화해시키거나 토론을 통해 타협점을 찾았다는 뜻은 아니다. 애초에 이념의 평행선은 간격은 너무 넓어 그런 일은 한 쪽이 정신적으로 거꾸러져 존재 자체가 바뀌기 전에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플레먼은 분명 어떤 변화를 만들어냈다. 너무도 미세해서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감지하기 어려운 변화를 말이다.
바로 그것이 이유가 된 것일까.
‘솔직히 페이즈 2는 나도 사용해 본 일이 거의 없어서 작동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다. 내가 모르는 비밀들이 담겨 있을 수 있겠지.’
플레먼과 접촉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직접 유대를 형성한 아퀼라를 넘어서 아퀼라와 정신적 격벽이 약간이나마 허물어진 상대에게도 페이즈 2의 섬멸물질을 옮길 수 있다. 그 원리를 설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실험을 통해 밝혀놓을 필요는 있으리라.
“이왕 당신이 부탁했으니 조금 더 노력해 보죠.”
플레먼의 어깨를 쥔 손에 더욱 억센 악력이 들어갔다. 아픔을 느낀 플레먼은 움찔하였다. 라이텔바흐는 조심스레 반대쪽 손을 뻗었다.
‘외계의 침공자에게 너무 많이 정보를 노출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도리어 미끼를 던져 유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불씨처럼 작게 타오르던 황금빛 섬광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부피와 밀도를 키워갔다. 이제는 작은 태양이 손 위에서 생성되었다.
“어디까지 가능하려나 궁금하군요.”
그는 그 태양을 손으로 꽉 쥐었다. 잠시 후, 게오르그의 몸을 둘러싼 황금 섬광 위로 더 방대한 양의 무언가가 덧입혀졌다. 이윽고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 거하던 침식당한 사람들 중 몇몇의 몸 위에도 황금빛 불꽃이 씌워졌다. 그러나 모두에게 간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더.”
라이텔바흐는 한 가지 가설을 머릿속에 세웠다. 이 전이는 어쩌면 거리와 무관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재빨리 분석안과 감찰안의 사정거리를 최대로 증폭하였다. 두 눈은 에어크래프트 내 시설과 연동되었고 곧 초광역 관측 장비의 도움으로 시베리아 전역이 라이텔바흐의 연산 사정권에 들어왔다.
‘역시나 드넓은 동토 전체가 드문드문 침식당했군.’
헬게이트 복합체가 상공에서부터 권역을 뻗어 지상을 집어삼키는 현상, 이곳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주요 인간 거주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이번 일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헬게이트들의 배후인 그 존재들이 직접 개입했음을 확증해 주는 증거다.
“최대치로 해보지.”
라이텔바흐의 꽉 쥔 손아귀 안에서 빛의 잔흔이 새어 나왔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먼 거리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황금빛 불꽃의 전이가 일어났다. 그 확산의 연쇄는 점차 멀리 뻗더니 끝내 경도 자체가 완전히 다른 대륙 반대편으로까지 닿았다. 그렇다고 섬광의 이동 경로가 보이는 건 아니었다. 전이는 그야말로 공간을 건너뛰어 이뤄졌다.
“생각보다 잠재력이 높은 능력이었군. 확인하게 되어 다행이야.”
하지만 그보다 더 호기심이 끌리는 건 플레먼 저 친구이다. 다크포스의 침식이 닿지 않는 면역성에 헬게이트들의 행동 패턴을 변경하는 특이점이며,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이능이 전혀 예상치 못한 잠재력을 끌어내게 하였다. 대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나저나, 모두가 다 보호받을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군.”
라이텔바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근방은 가장 거리가 가까운 만큼 그가 방금 방출한 권능의 양을 고려하건대 모두가 보호받고도 충분히 남는 조건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에게는 페이즈 2 섬멸물질이 전이되었고 어떤 이에게는 조금도 전이되지 않았다. 힘의 방출량을 늘려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게오르그 씨처럼 대화가 정상적으로 가능한 자들에게만?’
그러면 나머지 극단적인 부류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분리된 자들에게는 아무런 보호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건가. 이것 또한 흥미로움의 극치였다. 라이텔바흐는 재미를 참지 못한 나머지 크게 폭소하였다.
“크큭, 푸하하하.”
그 웃음이 끝나기 무섭게 시베리아를 침식한 공중의 헬게이트들이 뱃속에서 자신의 흉측한 자녀들을 토사물처럼 토해내었다. 침식된 권역들로 상공에서부터 수만 마리 이상의 괴이한 어비씨언들이 강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은 일제히 흑파와 어비쓰론으로 된 어둠의 불꽃을 뿜으며 지옥도를 자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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